[일본사]일본인의 독서역사
일본의 출판산업
일본에 처음으로 금속활자가 들어온 시기는 15세기 말경에 포루투갈 선교사들에게 교육받던 일본인 유학생 덴쇼소년 사절단 4명이 로마 교황청에서 3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유럽의 금속활자를 가지고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그 뒤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금속활자는 시대적으로 출판문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기는 하지만 상용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의 출판산업이 대중화 된것은 전부터 사용되던 목판인쇄의 역할이 더 컸다. 목판활자는 금속활자보다 비용이나 생산을 위한 기술적인 문제들이 훨씬 쉬웠고 판이 닳아서 없어질때 까지 책을 인쇄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기존의 목판인쇄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가다듬어서 책의 대량생산과 보급체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1682년 당시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 에도와 상업의 중심지 오사카에서는 이하라 사이가쿠가 쓴 호색일대남이라는 오락소설이 발간되서 빅히트를 친다.
이 책은 요노스케라는 남자주인공의 7세부터 60세 까지의 호색기를 다룬 소설인데 소설의 주인공인 요노스케는 7세에 첫 경험을 한후 전국을 유랑하면서 육체적인 로맨스에 탐닉하기 시작하는데 상대는 친척 여동생, 남의 아내, 유곽의 여인, 미소년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의 단편인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8권에는 한 일본인 남성의 일생에 걸친 호색 판타지 어드벤처 로망이 담겨있다.
책에 따르면 요노스케가 관계를 맺은 여성은 3742명이고 남자는 725명 이라고 한다. 참고로 일본은 에도중기까지 남색을 하는것이 흔한 일이였고 현대의 국가들처럼 성을 억압하기 보다는 열린 개방된 사회였다. 이 책은 관음증적인 요소들이 있지만 현대의 학자들도 극찬할 정도의 관능미와 묘사, 은유가 절묘하게 당시 각지역의 풍경과 정서,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생활상을 당대의 언어로 생생하게 담아낸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완성도 있는 작품이였다. 또 작가 자신이 스스로 책에 삽화를 그려넣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 책은 일본 에도시대 여가문화로서 소비되던 독서의 대표적인 예가 되는 작품이다.
이 호색일대남이라는 작품의 성공으로 일본에서는 구사조시라는 장르가 유행하는데, 이 장르는 그림과 텍스트를 같은 목판에 새겨서 인쇄함으로써 가볍게 읽을수 있는 읽을거리로서 현대 만화의 기원으로 알려져있다. 이런 에도시대의 출판 붐으로 일본에서는 백만권이 넓게 팔린 초베스트셀러들이 등장한다.
특히 1814년부터 1842년까지 연재된 장편소설인 남총리견팔견적이라는 장편소설은 이 책의 저자인 교쿠테이 바킨이 28년동안 총 106권에 걸쳐 집필한 집념의 생애작으로 유명하다. 책의 내용은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주제로 한 판타지 창작물이다.
이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현대에도 영화나 만화등으로 수차례 만들어졌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아서 일본대중문학의 틀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을정도이다. 이렇게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개념이 전환되고 일본의 대중들의 수요가 급증하자 그동안 꾸준히 발달되어온 일본의 상업자본과 유통망이 출판업에 가세하게 되고 일본의 상업출판 시장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에도시대 말인 18세기 말 우리로 치자면 조선 정조 임금때가 되면 인구 100만의 에도에 전국 각지의 출판업자들이 모여들어 연간 수백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출산 시대의 꽃이 피게된다.
이 시기에 에도는 일본문화의 중심지인 교토를 제치고 제 1의 출판시장으로 도약한다.
에도, 즉 현재의 도쿄에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백과사전 여행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출판사들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위해 스스로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들을 고용하게 된다.
이미 200년도 더 전에 그리고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50년 , 반세기도 더 전에 일본에는 현대적인 형태의 도서 출판시장이 자리를 잡게된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 출판 시장의 규모를 좀더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서양사정의 초판 발행부수가 15만 부를 밑돌지 않았다고 할정도였다.
이런 읽을거리가 많아지자 글을 배우려는 사람들의 의욕이 매우 높아질수 밖에 없었고 일본 전역에는 사설교육기관인 데라코야라는것이 생겨났는데 현대의 학원이나 교습소같은 개념인 이곳에는 글을 배우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교습을 받는 평민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데라코야는 당시 번교라는 오직 귀족 계급들에게만 지식을 가르치던 교육기관과 달리 돈을 지불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읽기, 쓰기를 비롯해서 기초적인 산수와 주판, 실용기술등을 배울수 있었다.
당시 에도시대 일본을 방문했던 서양인 선교사는 일본 백성들의 높은 문자해독률에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또 유교지식에 있어서도 출판업이 발달한 일본은 조선을 압도하게 되는데 경전여사라는 일본의 떠돌이 유학자가 저술한 책이 19세기 초 일본에서 당대 최고의 베스트 셀러에 오르게 된다.
사서오경같은 유교경전을 일본식 히라가나로 해석해 출판한 책인데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 유교경전이 베스트 셀러로 올라섰다는것은 동시대 오직 양반만이 유교지식을 교육받을수 있었던 조선보다 평균적인 백성들의 유교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일본은 우리가 흔히 알듯이 사무라이 중심의 계급사회였지만 각번과 성주들이 경쟁하면서 우수한 인재들을 발탁하려고 했고, 천민까지는 아니지만 평민계층에게도 관리로 진출할수 있는 열린 사회였기 때문에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관리로 나아가려는 평민들이 많았다.
이렇듯 18세기 말이 되면 일본은 유교에 대한 지식이나 연구에서 조선을 압도하게 되고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은 일본 대중들에게 필수교양으로 자리잡는다.
또 책을 살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상업적인 목적의 도서관들도 생겨나서 가난한 사람들은 책을 사는대신 빌려볼수 있었다.(19세기 초 일본의 에도(도쿄)에는 600여개, 오사카에는 300개의 도서관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놀랍게도 서점이 없었다.
중국은 송나라때 이미 민간 출판사와 서점이 존재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에도막부 시절에 출판사와 서점들이 급증한것과는 너무나도 반대의 모습이였다.
조선의 경우 지방의 사림세력들이 우리도 중국처럼 서점을 만들어 책을 쉽게 구입해 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건의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서점이 없었다는 것은 조선에는 출판시장이 없었다는것을 의미하는데, 책을 구하는 일도, 펴내는 일도, 모두 돈이 많이 들었고 돈을 내거나 댈 용의가 있어도 여의치 않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들은 어떻게 그당시에 책을 구했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책을 왕으로부터 하사받기도 하고, 없는 책은 빌려서 베끼고, 지방 고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의 목판으로 책을 찍어 달라 하거나,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북경에서 책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책을 마련했다.
기존에 나온 고전도 새로 찍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어.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책한권을 구하기 위해 80kg의 쌀 두가마를 가져가서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요즘 쌀 한 가마 시세를 17만원이라고 하고 이 시세를 조선시대에 적용하면 책 한 권 가격이 무려 34만원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도대체 왜 출판시장을 만들생각도 없었고 이렇게 모든 선비들이 책을 직접 필사하던가 고가에 구입하는 짓을 왜 오랜 세월동안 한걸까?
조선은 조정이 출판을 독점했는데 그 이유는 체제를 유지하고 통치이념을 일방적으로 전파하기 위함이였다.
조선은 나라가 책을 출판해 보급하는 업무를 주관했는데 조정은 어떤 책을 간행할지 어디서 출판할지를 결정해서 중앙관청이나 지방 감영에게 쿼터를 줘서 그 일을 부과했다. 충성과 효도같은 유교 윤리를 따르는것을 주제로 하는 책들은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간행 배포하였는데, 중종때의 "삼강행실도"라는 전국적으로 배포가 됬다. 이는 삼강행실도가 조선의 유교이념과 딱 맞아 떨어져서였지. 반면에 유교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논란이 되는 책이 발견되면 책을 그 즉시 거둬들이고 유통을 금지시켰으며, 압수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난학과 비교되는 조선의 실학이나 실학자들이 지은 책들 역시 출간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오늘날 전해지는것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실학자들 사이에서만 필사본으로 전해질 뿐이다.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등 거물급의 대표적인 실학자들의 저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저 필사본으로 알음알음 전해지다가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쇄됐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따라서 실학은 후세 역사가들이 당대에 갖지 못했던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실은 확산되고 축적되지 않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연구에 불과했다.
막부체제를 무너뜨려 일본을 근대화에 성공시키게한 일본의 난학과는 냉정한 의미로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개인적인 견해
출판시장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에도시대 일본대중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짐 18세기 중후반이 되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실용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그동안 조선에게 뒤쳐져있던 유교적인 지식에서도 조선을 크게 앞서게 된다.
에도시대 이후 서양근대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 사회전체가 개조되고 변화되는 큰 도전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국민들이 이를 수행할수 있었던데는 에도시대 250년 동안 독서를 통해서 축적된 교양과 지식이 상당부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조선은 서적 인쇄를 국가가 독점한 것이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서적공급량을 확대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었다.
사농공상의 순서에 의해서 상업을 가장 천하게 여겼던 조선에서 도서가 활발히 유통되고 출판시장이 켜졌을것은 상당히 의문이었고, 서점조차 없었기에 조선 사회는 지식의 확산과 숨통이 막힌 답답한 시대였을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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