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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2가지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하나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그라나다(Granada)에 웅거하던

유럽 대륙 최후의 이슬람 세력 나스르(Nasr) 왕조가 멸망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콜럼버스(Columbus)가 이끄는 에스파냐인들이

훗날 '아메리카'라고 불릴 새로운 대륙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은 사건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 또한

경쟁적으로 해외 개척에 참여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니,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유럽의 흥기(The rise of the West)'로 이어졌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힘찬 출항을 했을 당시만 해도

그러한 움직임이 '서유럽의 흥기'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유럽은 항해의 기술, 지리적 지식, 경제적 발전 등 어떤 면에 있어서도

비유럽의 다른 지역들보다 그다지 월등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결코 '서유럽의 흥기'를 평가절하하거나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감상주의적인 주장의 발로가 아니라는 점은

명나라 영락제 연간에 행해졌던 '정화의 남해 대원정'이 웅변한다.

 

 

당시 원정에 동원된 함선 1척의 배수량이 1만 7천 톤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이는 중화주의적인 사고관을 가진 어리석은 자들의 억측일 뿐이다.

 

이 원정에서 동원된 정확한 규모는

249척의 함선, 2만 8천여 명의 승조원, 총배수량 3만 7천 408톤일 뿐이며,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전근대에는 보기 드문 대함대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모의 해상 대원정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물론 1차적으로 기술력과 경제력의 문제가 존재하겠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몽골 제국 시대에 확립되었던 '해양 장악력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실제로 해외 무역에 대해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던 몽골 제국의 지배층들은

인도양을 통한 해상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고,

그런 점에서 볼 때 몽골 제국 시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그 너머의 시대를 살았던 영락제나 정화에게 있어,

중국의 배가 남중국해 서쪽의 바다로 나아간다는 발상은 경천동지할 일만큼은 아니었던 셈이다.

 

 

1274년에는 2만 7천여 명의 병력과 900척의 함선이 투입된 1차 일본 원정이,

그로부터 7년 뒤인 1281년에는 10만 명의 병력과 3천 500척의 함대가 동원된 2차 일본 원정이 감행되었다.

 

물론 이 두 차례의 원정은 태풍─동양의 섬나라에서는 '가미카제'라고 불리는─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정도 규모의 해상 작전은 당시 지구상의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실행된 적이 없었고,

바로 그와 같은 해상 동원 능력이 있었기에 훗날 정화의 대원정 또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영향력을 기준으로 삼자면,

콜럼버스의 항해는 이후의 유럽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지만,

정화의 원정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중국 사회를 바꾸어놓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먼저 정화의 남해 원정은 1433년의 항해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 명나라 조정은 대양으로의 진출을 두번 다시 추진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엔 경제적인 측면이 작용했다.

1405~1415년 정화 함대에 소요된 비용은 총 600만 냥에 달하여

임진왜란 당시 조선 출병 비용 780만 냥에 약간 못 미치나,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실제로는 조선 출병 비용을 대략 50% 초과하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매년 소요 비용 60만 냥은 2008년 가치로 2억 1600만 달러이며,

당시 중국인 10만 가구의 연간 소득에 달했다.

1411년 명나라 재정 수입 1468만 냥의 4%가 정화 함대를 위해 매년 지출된 셈이다.

미국 연방 정부가 이라크전에 지출했던 예산 비중이 4%인 것에 비교된다(2조 8천 억 달러 중 1200억 달러).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북방으로부터 야기되는 안보 문제였다.

잔인하고 흉폭한 초원 세력─오이라트부와 타타르부와 같은 몽골계 세력─의 위협이 다시 가중되면서

국가의 관심이 해양보다는 내륙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15세기 중반경이 되면 오이라트(Oirat)라고 불리던 서몽골 세력이 몽골리아 초원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1449년에는 급기야 명나라 황제 영종이 오이라트의 수장 에센 타이시(Esen Taish)에게 생포되는

'토목보의 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토목보의 변은 명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신경을 써야 할 곳은

해양이 아니라 내륙이라는 판단을 '기정사실화'하는 유력한 경험적 증거로 작용했고,

자연히 정화의 남해 원정과 같은 대규모 원양 항해 프로젝트는

조정에서 거론되거나 추진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문제의 본질은 오히려 내륙과 해양에 대한 서유럽과 중국의 관점이 너무나도 달랐다는 데 있었다.

 

15세기 이후의 유럽인들에게 해양으로의 진출은 엄청난 재정 수입을 보증했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사업이었지만,

 

동시기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더 절박한 것은

내륙으로부터 새롭게 가해지고 있던 유목 세력의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화의 대원정은 국가의 존망이나 부의 축적과 직결되는 항구적인 정책은 아니었고,

따라서 상황이 변화하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의 명나라는 정화 함대의 위대한 성취를 뒤로 한 채,

대양에 대한 관심을 접고 초원의 유목 세력이 가하는 군사적인 위협을 어떻게 봉쇄할 것인지를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여 만든 만리장성으로 구체화되었다.

 

몽골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유럽이

바다로 나아가 새로운 부의 원천을 탐구할 수 있었던 반면,

중국은 그 이상의 노력을 몽골 제국의 후예들이 자리하고 있던 내륙아시아와의

지루한 싸움에 소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또한 비유럽권 국가들이 결과적으로 해양으로부터 후퇴했던 것이

단순히 기술이나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몽골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목민 출신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들은

기마 전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노바 로마(Nova Roma), 곧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is)를 함락시킨 이후부터는

점차 해군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술레이만 1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벌인 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지중해 동부 연안으로부터 에게 해에 이르는 해역의 패권을 장악했고,

16세기 중반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Karl Ⅴ)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왕국과 이탈리아 각국의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

 

비록 레판토 해전에서 최초의 패배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오스만 제국의 해양 장악력 붕괴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 해군은 레판토 해전 이후에도 키프로스 섬을 정복하고 북아프리카 연안을 장악했으며,

심지어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대서양으로 나아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스웨덴의 해안까지 진출하기도 했던 것이다.

 

마침내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크레타 섬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현저하게 위축되고 지중해에 대한 장악력 또한 크게 상실하게 된다.

어째서 이러한 현상이 초래된 것인가?

그것은 명나라가 해양 진출을 포기하고 내륙 방어로 국력을 집중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오스만 제국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는 유럽의 해상 세력인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에스파냐 왕국이 아니라,

동쪽의 내륙 세력인 이란의 사파비(Safavi) 왕조였다.

 

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 ·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장악한 사파비 왕조는 시아 파를 믿었고,

수니 파를 믿는 오스만 제국과 이라크 · 아제르바이잔 등지를 놓고 치열한 군사적 대결을 벌였다.

 

 

이렇게 볼 때, 한때 해양을 내해(內海)처럼 주무르던 중국과 오스만이 훗날 대양에 대한 헤게모니(Hegemonie)를

유지할 수 없었던 까닭은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와 더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내륙과 해양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멘탈리티의 문제에서,

비유럽 세계는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몽골 제국의 세계 지배가 종료된 이후, 유라시아 대륙은 몇 개의 큰 세력권으로 분할되었다.

동아시아에는 명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 세력이 세운 청나라가 이를 대체했다.

중앙아시아에는 티무르 제국의 뒤를 이어 우즈벡 인들의 국가가 들어섰으며,

인도에는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후예인 바부르에 의해 무굴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란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튀르크계 유목 집단을 핵심으로 한 사파비 왕조가 세워졌고,

소아시아에도 마찬가지로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건설한 오스만 왕조가 건설되었다.

 

 

이들 제국을 건설한 집단은 모두 유목적 습속과 기마 군단의 힘을 배경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그만큼 제국의 지배층들은 해양 지향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모방하거나 계승하려 했던 까닭에

서로 비슷한 멘탈리티를 갖고 경쟁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육상 제국(Continenetal Empire)'을 지향했고,

설령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유럽과 비유럽 세계가 각자 걸어간 길의 근본적인 차이,

포메란츠(Kenneth Pomeranz)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자 사이의 '거대한 분기(the great divergence)'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서유럽 세계의 국가들은 해양 지향적이었던 반면

비유럽 세계의 국가들은 내륙 지향적이었으니,

그것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을 기회와 위협이 어디에 있었는가?'가 각자가 처한 객관적 조건에 있어서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식 주체의 입장에 있어서나 상이했기 때문에 생겨난 양상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의 해양 진출은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표를 갖고 추진되었던 반면,

명 · 청 제국이나 오스만 · 무굴 제국 등 비유럽권 제국들의 내륙으로의 군사력 집중은

정치적인 안전의 확보와 내륙에서의 헤게모니 달성이라는 목표를 갖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명 · 청 제국은 건국 이래 몽골리아 초원에 있던 유목민들과 사생결단의 대결을 계속해야 했고,

결국 18세기 중반 만주인들의 청나라가 최후의 유목 제국 준가르(Jungar)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목 세계와 중원 세계의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움직여 온 두 개의 거대한 축 가운데 하나인

초원의 유목 제국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지만,

대양을 장악하고 '거대한 변이(the great transmutaiton)'를 완료한 서유럽 국가들은

몽골 제국의 계승자─동양의 육상 제국─들을 압도할 준비를 이미 마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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