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격통제'로 보는 전쟁사

필자가 해군에서 기관병으로 복무했었을 때가 생각난다.
서해 경비 구역으로 힘찬 항해를 나갔을 때,
필자는 '안전 당직'이라는 항해 당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안전 당직'은 함내 전반을 순찰하며 취약 개소가 있는지 확인하는 당직 근무이다.
그런데 '사통(사격 통제)' 부사관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오면서 대화를 걸었는데,
그분은 자신의 직별에 자부심을 느꼈는지 직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과 직별이 달라서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별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평소 조선 전쟁사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전쟁사를 정리하면서 '사격 통제(Fire Control)'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한번 정리해보았다.
사실 해군에서 근무했었던 일화와 상관 관계는 없지만,
그냥 이런 주제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준비해보았다.
조선 전쟁사에서 사격 통제가 성공한 사례와,
그렇지 않은 사례를 간단한 사례들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병자호란 때 조선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1만 3천여 명의 군병과 외로운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임금을 구하기 위해 조선 8도에서 근왕병이 출전했지만,
산성에 들려오는 소식은 근왕병이 궤멸되었다는 소식뿐이었다.

조선군 근왕병의 이동 경로
그러나 그 와중에 전라도 병마사 김준룡은 전라도 각 고을에서 병력 6천여 명을 모았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였던 벽암 각성이 이끌던 승병 2천여 명도 합류하여
총 8천여 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경기도 방면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사위였던 양구리도
전라도 근왕병의 진군 소식을 듣고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곧 양군이 충돌하게 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조선 시대 목책의 설치 과정> 손영식, 한국 성곽의 연구, 1987.
김준룡은 고지에 나무 기둥을 촘촘히 세워 목책을 세웠다.
조선 시대 야전에서는 목책을 세울 때 위와 같이 나무로 틀을 만들고
흙을 채우는 방식의 목책도 있다.
김준룡은 이런 목책을 진영 주변에 세워 방어력을 강화하였고,
또한 화약과 군량 등 군수 물자를 진영 중앙에 비축하였다.

1선 |
포수(조총) |
2선 |
사수(활) |
3선 |
살수(칼과 창) |
목책 주변 조선군 배치도

곧 전령에 의해 청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준룡은
좌우의 군사들에게 자신의 신호가 없이는 절대로 총을 발포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 김준룡의 부대는 급하게 출발한 나머지
화약을 비롯한 군수 물자가 부족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람같이 달려오는 청군 철기의 위세에 겁먹은 군사들이 총을 함부로 발포하는 순간,
이에 영향을 받은 주변의 군사들도 마구잡이로 발포할 것이 뻔했고
그러면 지휘관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군은 화포(火砲)를 쏘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청군이 목전까지 다가오고 있음에도 김준룡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청군이 유효 사거리 안에까지 도달하자 일제 사격 명령을 내렸고,
조선군이 뿜는 조총에 의해 청군은 고지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묘사한 조선군 포수(조총병)
조선군은 김준룡의 지휘 아래 침착하게 대오를 유지하며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날 오후 2시경 청군 일부가 산 북쪽으로부터 우회하여 조선군 후면을 압박하였다.
그리하여 그곳 방면을 수비하던 광양현감 최택의 진지가 돌파되었는데,
김준룡이 급히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해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이 난전의 상황에서 청 황제 사위였던 양구리가 조선군에게 저격당해 전사하였다.
또한 청나라 장수 2명이 사살되었고 2천여 명이 넘는 청군이 전사하여 동쪽으로 패주하였다.

한편 김화 전투에서도 조선군의 적절한 사격 통제는 승전의 한 요인이 되었다.
홍명구와 유림이 이끈 조선의 관서군(關西軍 : 평안도 병마)은 김화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었는데,
김화에서 약탈을 일삼고 있던 청군을 공격해 수백여 명을 죽이고 가축 300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때 청군은 이 방면의 조선군에 보복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서 출동하였다.
당시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홍명구의 군대는 바로 전멸하였고,
언덕에 진을 친 유림과 청군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유림은 언덕에 참호와 목책을 설치하고 목책 주위에 포수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화살과 탄환이 많지 않으니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오랑캐가 우리 진영을 향해 수십 보 이내로 접근하면
내가 반드시 깃발을 휘두를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깃발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일제히 발사하라.
이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참형에 처할 것이다."

조선 중기 전쟁에서 활용된 조선의 화약 무기
(행주 대첩에서 3만여 명의 왜군이 조선의 화약 무기에 의해 격퇴당함,
총사령관 우키타가 중상을 입을 정도였고,
1만여 명이 넘는 왜군이 전사하고 수백여 명의 지휘관급이 전사함.)
유림의 적절한 사격 통제와 함께, 청군이 10보 이내로 접근하자
유림이 휘두르는 깃발과 함께 조선군 포수가 일제히 발사하였다.

어떤 기록에는 1만 5천여 명의 청군이 전사했다고 나오지만,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최소 3천여 명 이상은 전사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군 포수의 장비 고증
이렇듯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는 참호와 목책의 활용,
그리고 지휘관의 적절한 사격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사격 통제는 당시 화약을 비롯한 군수 물자의 부족에 기인한 탓도 있지만,
군대의 사기와도 직결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청나라는 조선 출병을 마치고 1637년에 상기하기를,
조선 전역에서 300여 명의 장교와 7천여 명의 갑병(甲兵)을 잃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아마 이때의 전투에서 받은 피해가 아닐까 추측한다.

목책 주변에서 청군에게 조총을 쏘는 조선군(광교산 전투 묘사)
한편 쌍령 전투에서는 조선군의 사격 통제 실패가 전투의 패배를 일으켰다.
당시 경상도 근왕병 4만여 명은 대부분 조총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청군 선봉대 300여 기의 교란으로 혼란에 빠진 조선군은 조총을 마구잡이로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들이닥친 수천여 명의 청군 기병은 조선군을 도륙하였다.
흔히 300 vs 40,000으로 잘못 와전되었는데,
실제 출병한 조선군은 4만이 맞다.
그러나 교전에 참여한 조선군은 8천여 명이고,
청군은 선봉대가 300명이지, 3천에서 6천여 명의 군사가 조선군 8천여 명과 교전했다.
학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반박이 있었고,
일베에도 쌍령 전투의 잘못된 와전에 대해 반박 자료가 있으니 참고 바람.

삼군문에 있는 조선군 장비의 수효
(확실히 화약 무기의 비중이 높다.)
한편 인조 초에 있었던 '이괄의 난'에서도 사격 통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괄은 1만 3천여 명의 북방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괄군의 기동력에 관군은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괄의 난 전개
이괄과 정충신 휘하의 관군이 황주 신교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
이괄은 충격력이 강한 편곤 기병과 항왜를 앞세워 전면적인 돌파 작전을 시행했다.

이에 놀란 관군은 반란군이 유효 사거리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조총과 활을 마구잡이로 쏘아댔고,
재장전하는 그 순간에 이괄군 기병이 들이닥쳐 관군을 살육하였다.

관군측 선봉장 박영서는 전사하였고, 관군 대형에서 좌익이 붕괴되었다.
이날 전투에서 관군 2천여 명이 전사하였고,
이괄군은 첫 전투에서 승전의 깃발을 휘날리게 되었다.

반란군의 군사적 성공에는 잘 훈련된 '700여 인의 편곤 기병'이 있었다
한편 평산 마탄 전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재현되었다.

평소 조총술에 능했던 인조 반정의 3등 공신인 이중로는 조총을 애지중지했다.
이때 이중로가 동원한 관군 3천여 명은 급조한 군사라 군사력이 보잘 것 없었는데,
이중로는 자신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사격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괄군의 편곤 기병과 항왜가 교란 작전을 펴며 달려오자,
이중로 휘하의 관군은 겁에 질려 조총과 포를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당연히 겁에 질린 관군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이괄군은 강을 도하하여 관군을 좌익으로 몰아넣었다.

이중로 휘하의 조선군 장교는 대부분에 물에 빠져 익사하였고,
이중로도 조총으로 이괄군 장교 7명을 사살하였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이괄군의 서슬퍼런 칼날에 관군은 강으로 점점 밀려 대부분이 익사하거나 이괄군 창칼에 도륙되었다.
이날 8명의 조선군 장교가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넘는 관군이 전사하였다.

쏘지 마라고 제발 <영화, 남한산성의 조선군>
2번의 전투에서 5천여 명의 관군이 사상당했고,
이괄군은 조선 왕조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로 한양이 반란군의 손에 떨어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관군도 1만여 명의 대군을 형성하여 지구전을 전개하였고,
관군은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안현 고지'를 점거하고 이괄군을 기다렸다.

이때 고지에 진을 쳤던 관군 장수 이희건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적병이 멀리 있거든 활을 쏘고, 10보 가까이 오거든 그때 조총을 쏴라!"
이때 한 병사가 이괄군이 10보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 조총을 발포해버렸다.
이희건은 즉각 자신의 칼을 뽑아 그 포수의 목을 베었고 군심을 안정시켰다.
이괄군은 계속 밀려들어 10보 가까지 이르렀고,
이희건이 즉각 발포 명령을 내렸다.
이희건의 조총 부대가 1열씩 돌아가며 쉬지 않고 계속 발포하니,
그 천하무적의 이괄군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괄군은 패주하였고 관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이 참고한 사격 교범
(1번째 줄 사격, 2번째 줄 대기, 3번째 줄 장전)
이상 조선 시대 전쟁의 역사를 통해서 사격 통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실 이 하나의 글에 '조선 시대 사격 통제'와 관련한 모든 내용을 다룰 수 없어 아쉽지만,
대충 이 정도만 정리하도록 하겠다.

조선 시대 화약 무기 및 재료와 관련한 군수 물자의 가격 차이
지휘관의 적절한 사격 통제는 전투의 승기를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전한 전투, 그리고 이괄의 난 때 관군의 적절한 사격 통제는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이었다.
물론 다른 요인도 고려할 수 있지만,
본문의 주제와 위배되니 언급하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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