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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때 소빙기와 맞물려 발생한 경신 대기근은, 조선에 엄청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가축이 폐사당하고 심지어 사대부까지 굶어 죽는 지경에 달했다.

조선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골몰했다.

조선 후기에 널리 통용된 화폐: 상평통보

경신 대기근 당시 조선은 1년치 예산의 789만 냥 중 거의 전액에 가까운 780만 냥을 구휼을 위해 사용했고, 이로 인해 국가 운영에 들어가는 재정이 턱없이 부족해 행정 마비가 초래되었다.

조선 후기 화폐로 일부 사용한 은

이에 현종 때 조선 중앙 정부가 비축한 은 400만 냥 중 긴급히 100만 냥을 행정 자금으로 사용했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화폐도 무분별하게 찍어댔고, 인플레이션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청나라에서는 무상으로 조선에 쌀을 공급할 정도였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이다보니,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흉흉했다.

경신 대기근 때 무분별한 화폐 찍기로 인한 조선의 인플레이션 현상

<17세기 현종 기준 조선의 예산>

재정 수입: 약 700~800만 냥

중앙 정부 은 보유량: 400만 냥(당시 조선의 5년치 예산)

이러한 상황에서 '준익'이라는 양반이 미쳐버렸는지 민가에 있던 시체를 겁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준익에게 돈을 대가로 시체를 겁탈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즉각 조선 조정에 전해졌고, 현종과 신하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철저한 유교 국가 조선은 예의와 법도에 크게 민감했다.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유교 국가 조선의 책무였고, 이런 것들을 방치하면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에게 있어서 큰 문제였다.

조정에서 즉각 처벌을 둘러싸고 논의가 벌어졌다.

성상(현종)께서 정승과 6조 판서, 비변사 재상들과 접견해 준익의 형량에 대해 논의하였다.

참고로 당시 대기근으로 조정 회의도 잘 열리지 않았고, 병에 앓는 공무원들도 있었기에 조정 회의의 결시율이 높았다.

성상(현종)께서 이르기를,

"근래 재변으로 나라의 가난한 물력을 모두 퍼부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있지만, 사대부가 죽어나가고 백성들에게 은혜가 미치지 못하니 안타깝다. (중략) 이번에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준익은 양반인가?"

조선 시대 6조 중 형법과 옥사를 담당한 형조

이에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형조 판서(정2품 고위 공무원) 허적이 대답했다.

참고로 허적은 나중에 숙종 때 경신환국에서 서인의 공격을 받아 처형당한다.

형조 판서(정2품 고위 공무원, 오늘날 법무부 장관) 허적이 아뢰기를,

"나라의 윤리가 무너진 마당에 양반이 백성의 시체를 겁탈했으니, 더욱이 좌시할 수 없습니다. 죽은 백성은 역병으로 죽었음에도 양반의 참람한 짓으로 온전히 가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성상(현종)께서 이르기를,

"양반에게 겁탈당한 백성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처자에게 곡식을 주어 나라에서 보살펴주도록 하라."

형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여인은 한성부 사람으로 평민입니다. 형조에서 관원을 보내 곡식과 비단을 주고자 이미 조치했습니다. (중략) 근래 준익에 대한 처벌 논의가 일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조선) 법전에 그런 해괴한 짓을 처벌할 조항이 없습니다."

조선의 성문법: 경국대전(성종 때 완성)

당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이를 처벌할 조항이 없었다.

성상(현종)께서 이르기를,

"대전에 법 조항이 없다면 관습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흉악무도한 자를 어찌 나라 안에 놔둘 수 있겠는가? 양반 준익을 처형하고 법 조항에 새로 규정하면 어떻겠는가?"

형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법전에 규정이 없다면 자의적으로 처리해서도 곤란합니다. 하지만 성상의 뜻이 그러하고 조정의 공론이 그러하다면 즉각 처형해서 윤리를 밝히고 법전을 수정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현종의 명령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양반 출신 준익은 바로 붙잡혀 참수되었고, 그 목은 세종 때 개척한 변방 군사 요새인 6진에 조리돌림당했다.

또한 준익에게 돈을 주어 시체를 겁탈하게 매수한 자는 변방에 유배당하였다.

형조의 판결 이후 성상(현종)께서 이르기를,

"양반가 준익은 여인의 시체에 음행을 한 자이다. 그리고 형조(사법부)는 이 사건의 판결을 수교 중에 기록하여 법률로 영구히 남기게 하라."

그리하여 현종 때 기점으로 시체에 겁탈을 한 자는 새로 처벌하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추가되었다.

경신 대기근 때 사회적 혼란과 맞물려 이처럼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만연하였다.

인육 사건은 기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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