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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m.blog.naver.com/mnd9090/221783094945(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August 기고문'

 

영국 해군의 고민

영국은 16세기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바다의 패권을 잡은 후 400여 년간 그 누구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았다. 강력한 해군을 발판으로 해외 진출에 나서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지구의 1/4이 넘는 지역을 확보하며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구축했다. 하지만 달도차면 기우는 것처럼 19세기 말이 되자 강력한 도전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독일과 영국의 해군력 경쟁을 묘사한 신문 삽화

특히 1871년이 돼서야 뒤늦게 통일을 이루었으나 급격히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대외 팽창을 적극적으로 노리던 독일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다. 독일이 대대적으로 해군력 확충에 나서자 위협을 느낀 영국도 대응해야 했다. 그렇게 양국은 제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벌인 치열한 해군력 경쟁은 국가 재정에 주름살을 지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해군력 2위국과 3위국의 합보다 많은 전력을 보유하는 것이 정책 기조이기는 했어도 함정의 수를 무한정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04년 영국 해군의 수장에 오른 피셔(John Fisher) 제독은 화력, 방어력, 속도에서 이전의 전함과 차원이 다른 새로운 전함을 확보해 질적으로 우위를 담보하기로 결심했다.​

제1차 대전 발발 직전 취역한 영국 해군의 초노급 전함 오리온. 하지만 최신 전함은 건조비가 비싸 원하는 만큼 보유하기 어려웠다.

​이런 기조에 따라 탄생한 전함 드레드노트(HMS Dreadnought)는 세계 해군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등장한 전함들이 드레드노트의 기준을 따르게 되면서 이른바 노급 전함 시대를 개막했다. 하지만 건조비가 비싸서 원하는 만큼 획득하기 힘들 자 피셔는 함대의 주력을 노급 전함만으로 구성하기 어렵다고 보고 또 다른 주력함을 구상했다.

당대 최대의 거함

그렇게 탄생한 것이 순양전함(Battlecruiser)이다. 선체의 크기나 공격력은 동일하지만 이곳저곳을 신속히 옮겨 다닐 수 있도록 방어력을 줄인 대신 속도를 높여 작전 가능 범위를 향상시킨 것이 전함과 다른 점이다. 아무리 세계 최강이라고 해도 한정된 전력으로 전 세계 바다에서 작전을 펼쳐야하는 당시 영국 해군의 고민이 담겨 있는 결과물이었다.

1909년 취역한 최초의 순양전함 인빈시블. 방어력을 포기한 대신 속도를 중시했다.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한 후에도 상대의 강력함을 잘 아는 영국과 독일은 주력 함대 간의 정면충돌을 자제하고 전초에서 순양전함들이 제한적인 교전을 벌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간보기가 끝난 후 1916년 5월 31일, 유틀란트 해역에서 거함거포 시대 최대 규모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때도 순양전함들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아무리 고속으로 항해해도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포탄보다 순양전함이 빠를 수는 없다. 결국 빈약한 방어력 때문에 쉽게 포탄에 관통당하면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런 결과는 9월부터 건조에 들어간 순양전함 후드(HMS Hood)에 영향을 끼쳤다. 대대적인 설계 변경이 이루어지면서 함교, 측면에 약 300mm 두께의 장갑판을 둘렀다.

제1차 대전 종전 후 취역한 순양전함 후드는 제2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최대의 전투함 타이틀을 보유했다.

덕분에 후드는 만재 배수량이 47,430톤으로 늘어나 취역과 동시에 세계 최대의 전투함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며 영국 해군의 자부심이 되었다. 원래 동급 함 획득은 4척으로 예정되었으나 제1차 대전의 종전과 순양전함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으로 후드 한 척만 건조되어 배치될 수 있었다. 때문에 후드는 최후의 순양전함이기도 하다.

허무한 거함의 최후

제1차 대전 종전 후 다자간 해군력 감축이 실시되면서 수많은 거함들이 폐선 되거나 건조가 중단되었다. 1940년 독일의 전함 비스마르크(Bismarck)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대의 타이틀을 보유한 후드는 조약의 범위를 넘었지만 신조함인데다 ‘무적의 후드’로 불리며 국민의 사랑을 받았기에 영국은 여타함정을 감축하는 조건으로 보유를 용인 받았다.

비스마르크를 잡기 위해 함께 출동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서 촬영된 후드

​이후 영국 해군의 주력인 대서양 함대의 기함을 맡아 전간기 동안 위용을 자랑했다. 그런데 여전히 순양전함 사상을 따라 속도를 중시했기에 후드는 갑판 등의 상부 구조가 여전히 취약한 상태였다. 때문에 영국 해군은 후드를 전함 수준으로 방어력을 향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대공황의 여파 등으로 개장 순서가 미뤄졌다.
그러던 1939년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후드는 전선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최초의 실전은 엊그제까지 나치에 대항해 함께 싸웠던 프랑스 함대였다. 항복한 프랑스가 연합국에서 이탈하자 함정들이 독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후드가 이끄는 영국 H기동부대가 1940년 7월 3일 알제리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격멸했다. 하지만 이것이 후드의 유일한 전과였다.

후드의 비극적인 최후를 묘사한 그림. 순양전함의 역사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941년 5월 21일,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독일 함대를 잡기 위해 후드는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HMS Prince of Wales)와 함께 출동했다. 그러나 5월 24일, 해전에서 비스마르크가 발사한 포탄에 공교롭게도 취약한 탄약고 상부가 직격 당해 대폭발이 벌어지면서 불과 3분 만에 격침되었다. 당대 최강 전투함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렇게 해군사의 한 장이 마감되었다.

참고글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206(독일의 초중전함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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