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제갈량의 북벌을 막은 학소의 우주방어, 진창성 전투
진창성 전투는 제갈량의 2차 북벌 중에 일어난 전투로 다수의 적에 맞서 싸워, 소수가 이긴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진창성은 현 중국 산시성에 있다.(시안은 현 장안이며, 그 옆에 바오지(보계)시가 진창성이 있던 위치였다.)
한중과 장안 사이에 있어서 전략적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2차 북벌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1차 북벌에서 승리한 위나라 명제(조예)가 대오전선 사령관이었던 양주 도독 조휴에게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가 대패하자,(석정전투) 제갈량은 그 틈을 타 2차 북벌을 감행하여 약 10만의 대군이 진창성으로 진격한다.
당시 진창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학소였는데, 학소는 삼국지에 따로 전기가 없는 인물로 명제기와 조진전에 이름이 나온다.
학소는 위진남북조 시대, 즉 삼국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백도(伯道)이며 병주 태원군 출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학소를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잡호장군(3품관)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아 사서에 기록될 뚜렷한 전공(진창성 전투 이전)은 없었지만 능력은 있었던 장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창성 전투의 전황을 요약해서 보면, 촉군의 전력은 제갈량의 지휘하에 10만 병력, 제갈량이 만든 각종 공성병기(운제, 충차, 정란)을 모두 동원하였으며, 위군은 학소의 지휘하에 전력은 약 천여 명이었다.
약 100:1의 절망적인 병력 차이가 발생했지만, 막상 전투에 돌입하니 묘하게 전황이 전개되었다.
학소는 10만 촉군을 마주하고도 동요없이 담담하게 병력을 지휘했으며, 제갈량이 동원한 공성병기인 운제를 불화살로 태워버리고 충차는 돌절구로 부셔버렸다.
정란에 올라 화살을 쏘고 토산을 쌓아 성벽을 넘을려고 했지만 학소는 성벽에다 담을 쌓아 저지하였으며, 땅굴을 파던 제갈량의 전략마저 간파해 막아냈다.
제갈량은 20여일 밤낮으로 진창성을 포위하고 두들겼지만 학소와 위군 천여명은 제갈량의 공세를 전부 막아냈으며 대장군 조진은 비요와 왕쌍을 파견해 진창을 구원하도록 하였고, 군량이 떨어지고 지원군이 도착하자 제갈량은 진창성을 뒤로하고 퇴각할수 밖에 없었다.
진창성의 승리에 명제는 매우 기뻐하여 학소를 열후에 봉했다.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 학소는 얼마안가 병사하여 이후 더 활약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용은 위서 명제기 조진전, 위략에 바탕한 내용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조진이 아닌 사마의가 진창성의 파견한 인물로 진서장군(2품관)이라고 나오며, 여기서 학소는 위연의 공격을 수비해내며 진창성을 지켜낸걸로 묘사되지만 다시 쳐들어온 제갈량 때문에 놀라서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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