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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이다.

국기가 샘오취리의 고국인 가나 국기와 매우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세네갈 국기는 녹색별이고 가나 국기는 검은별이다.

세네갈 국기
가나 국기

세네갈은 대다수 서아프리카 국가들처럼 프랑스 식민지였으며, 다수의 국민들은 이슬람교를 믿지만 중산층은 주로 기독교를 믿는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어업인데, 땅콩이 이 나라를 먹여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앞바다에서 유전이 발견되었으며, 세네갈 어민들이 가진 표가 만만치 않아서 정부가 유전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다.

후진국에서 유전 개발된다고 해도 석유를 수출한 수익이 경제발전에 그대로 쓰인다는 보장도 없어, 예전처럼 물고기 잡고 땅콩 수출해서 사는 게 혼란이 적을지도 모른다.

세네갈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장기집권이 이어졌다.

1대 대통령 레오폴드 생고(Leopold Senghor)는 20년을 집권했으며,

2대 대통령 압둘 디우프는 19년을 집권했다.

세네갈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경제의 막대한 부분을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었고, 프랑스도 서아프리카에서의 믿을 수 있는 동맹을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에 생고 정권을 적극 후원했다.

1980년이 되자 프랑스 정부는 생고에게 퇴진을 권했고 생고는 자신의 충복 디우프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디우프는 섕고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퇴임 후, 섕고는 프랑스 노르망디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으며, 2001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네갈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프랑스라는 강대국이 감독하고 후원하는 독재 체제로 거의 40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디우프 대통령은 두가지 큰 업적을 세웠다.

하나는 에이즈에서 세네갈을 구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최초로 평화로운 정권이양을 했다는 점이다.

세네갈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에이즈의 위험성을 교육시켰다.

그래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세네갈의 에이즈 발병율은 2% 이하를 유지했다.

에이즈를 억누른 공적이 있기 때문에 세네갈은 지금도 보수적이며 종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40년이나 계속 되는 장기집권에 염증을 낸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90년대 접어들며 프랑스에만 의존하던 경제가 약화되자 디우프 대통령은 야권 정치인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디우프에게 도전한 인물이 압둘라예 웨이드라는 인물이었다.

2000년 대선에서 웨이드는 근소한 차이로 디우프에게 승리했다.

그러자 디우프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권력을 웨이드에게 넘겼다.

평화로운 정권이양을 해낸 디우프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찬사를 받았고, 그의 정적이었던 웨이드조차도 "아프리카의 정치 문화를 바꾼 디우프는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웨이드를 축복하는 디우프. 디우프는 키가 엄청나게 큰데 2m라고 한다.

웨이드 대통령은 냉전시대 이후 새롭게 편성되는 BRIC(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세력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으로 외교를 확장해나갔다.

특히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파정권이든 좌파정권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21세기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리더가 되고 싶었다.

당시 웨이드 대통령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북한하고도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에게는 이념 관계없이 이익관계에 중점을 둔 그냥 파트너였고, 북한은 중국산보다도 싼 값에 무기 등을 제공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북한과 대한민국하고 동시에 교류하는 국가가 되었다.

당시 세네갈에 지하자원이 별로 없었던 탓에 국내언론의 주목을 못 받았지만 사실 세네갈은 한국에 많이 관심을 가져준 나라였다.

서아프리카의 맹주가 되고 싶었던 웨이드는 국가의 위신, 그리고 자신의 위엄을 드러낼 대규모 건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웨이드는 북한의 기술에 집중했다.

북한에서는 김씨 왕조의 우상화를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으며 이러한 미술품들은 1호 미술이라 불린다.

그리고 1호 미술의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는 국영기업체도 있다. 만수대 창작사라고 불린다.

참고로 만수대 창작사가 해외에서 주문받아 만드는 작품들은 1호 미술보다 약간 퀄리티가 떨어지게 만든다. 최고의 기술은 오로지 김씨 3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웅장함을 강조하는 북한 미술이 권력자들 취향에 맞는 것도 있지만 인건비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북한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엄청나게 낮은 값을 부른다. 이것도 장점이었다. 웨이드는 2006년, 만수대 창작사에 아프리카 민족의 기상을 담은 동상을 의뢰한다.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우뚝 선 49m의 이 웅장한 동상의 이름은 아프리카 르네상스 상(African Renaissance Monument. 불어로는 Le Monument de la Renaissance Africaine)이다.

2006년에 발주했을 때, 웨이드의 주문은 2010년까지 완성해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2010년은 세네갈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지 50주년에 해당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처럼 일하는 것으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북한인들은 2009년에 완공을 해버렸다. 깜짝 놀란 웨이드는 2010년 4월4일까지 완공을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일부러 완공을 늦추기 위해 제작을 중단한 상태의 아프리카 르네상스 상

2010년 4월4일. 아프리카 르네상스 상은 그 화려한 면모를 공개했다.

하지만 세네갈 국내에서는 엄청난 비판이 잇따랐다.

첫째, 아무리 상대적으로 싼 비용이라 해도 미화 2,500만불은 세네갈 경제로 볼 때 어마어마한 비용이었다.

둘째, 조각상의 남녀가 옷을 벗고 있다는 점이 세네갈의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을 분노케 했다.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비판이다.

셋째, 가운데 있는 남성상의 외모가 웨이드를 모델로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웨이드가 북한 같은 개인숭배를 시도한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비행기에서 촬영한 아프리카 르네상스 상의 두부.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르네상스 상은 웨이드의 인기를 심각하게 하락시켰다.

당황한 웨이드는 자신은 개인숭배를 강요할 생각이 없으며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에게 사죄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자신의 신앙심을 강조하기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으나 이미 늦었다.

게다가 북한이에 2,500만불이나 주었다는 사실이 국제무대에서 그의 입지를 좁아지게 만들었다.

인기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웨이드는 그럼에도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2012년 대선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가 믿었던 BRIC 국가들은 2010년부터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세네갈도 덩달아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세네갈은 전통적으로 친불국가였는데 웨이드는 프랑스와의 관계에 냉담했다. 

반면 그의 경쟁자 맥키 살(Macky Sall)은 친불세력의 대표였다. 살 후보는 경제발전을 약속하며 빠르게 인기를 모았다. 살이 후보 신분으로 사르코지와 담소하는 모습은 세네갈 유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2012년 대선에서 살이 웨이드를 누르고 승리했다.

세네갈은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끊었고 다시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관계에 주력했다.

마크롱이 미국에서는 애송이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세네갈에서는 강대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살 대통령은 한국에도 방한한 적이 있다.

세네갈이 전통적으로 한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나라이므로, 여러번 방한 이력이 있다.

웨이드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 생명를 맞바꾸어 만든 아프리카 르네상스 상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만 평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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