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지술, 종이를 전해 유럽 문명을 꽃피운 고구려 출신 장수, 고선지
고선지(?~755) 장군은 멸망한 고구려의 후손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렸다.
여기서 멸망한 나라의 민족들을 데리고 와 자신들의 영토에(특히 불모지나 사람이 잘 살지 않는 곳)에 흩뿌려놨다.
그 이유는 점령지의 민족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란의 씨앗을 남겨두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모지에 새로운 원동력을 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로 하서지방 일대(무위, 돈황, 고창, 쿠차 등) 위에 언급했었던 사막같은 불모지, 지도 참조)를 이동하면서 성장했다.
고선지는 쿠차지방에서 군인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유격장군으로 승격하게 되고, 나중에는 드넓은 서역정벌로 절도사(도독의 개념)라는 높은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이렇게 고선지장군은 군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그 능력을 발판삼아 총 5번의 원정을 나가게 되는데, 먼저 길기트원정(747년)은,
토번(지금의 티벳)은 생각보다 강대국이었다. 때문에 당나라는 골치가 아팠는데, 토번왕국이 계속 당나라에 집적거리기도 하고, 추가로 서역이라 부르는 지방에서 사라센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당나라는 외침으로부터 위태롭게 된다.
때문에 당나라 현종은 고선지에게 토번을 제압하라는 칙서를 내리고 고선지는 토번을 정벌하기 위해 출발하게 된다.
티벳(토번)은 평균 해발고도가 아주 높다.(일반인이 티벳여행을 떠날때마다 항상 달고 다니는게 고산병이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고선지 장군은 토번을 제압하기 위해 꼭 건너야하는 파미르 고원의 다르코트 고개(해발 4574m)를 넘어야 했고, 실제로 그 곳을 횡단해 서역지방에 산재해 있던 72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면서, 사라센의 동쪽 진출을 좌절시키게 만든다.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의가 있는데, 정벌을 위해 험준한 산맥을 넘은 명장들은 예전부터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알프스 산맥을 횡단한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넘었던 알프스 산맥은 고작 해발 2500m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산맥을 공격할 때만 지나갔고, 회군할 때는 지중해의 연안을 통해 이동했으나 고선지장군은 왕복했다는 것이 대단한 점이다.
험준하고 높은 산맥으로 감히 정벌을 못할것이라 생각했던 토번, 고선지 장군에게 토벌당하다.
고선지의 토번정벌 성공은 서역 72개국이 당에 조공을 바치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정확히 말해 서역의 헤게모니와 실크로드의 열쇠를 당나라가 쥐게 되었다. 이 때 당나라에 조공한 72개국 가운데 아랍은 물론이고 "동로마 제국"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고선지의 토번 정벌은 당으로서 서북방에 대한 불안감을 잠식시키게 된다.
탈라스 전투(751)는 고선지의 첫 패배이기도 하며 동시에 인류사적, 세계사적으로 큰 획을 긋게 된 사건이다.
탈라스 전투는 아까 언급했던 총 5번의 원정 중 마지막 원정이기도 하다.
750년, 당나라는 석국(오늘날 우즈벡의 수도 타슈켄트)이 당에 대한 조공을 태만하게 하는 죄를 물어 공격하기로 했다(이건 4차 원정). 이때 볼모로 잡아온 석국의 왕을 당나라의 정치가들이 죽여버리게 된다. 이로 인해 아랍권의 분노가 터져나오게 되었고, 아랍인들이 당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당군에서 선제공격을 계기로 시작하게 된 5차원정이 탈라스 전투이다.
고선지장군은 탈라스라고 하는 지역에서 석국-이슬람연합군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당나라 7만 군대 vs 연합군 30만 대군의 수적으로 열세였기도 했고, 문제는 정벌하면서 귀속시켰던 군대의 휘하 유목부족(케르룩)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유목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도 승리를 얻으면 자신들의 힘을 영영 잃어버릴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고선지의 군대는 5만명이 죽고 2만명이 포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생기는데, 포로 중에 제지술, 화약, 나침반 기술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포로가 되면서 제지술과 화약, 나침반의 기술이 서역으로 전해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근처에 사마르칸드라는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있었는데, 제지술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그 곳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사마르칸트지>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사마르칸트지는 서양으로 계속 전파되고, 결국 유럽까지 전달되게 된다.
제지술이 유럽에 전파된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중세유럽은 암흑시대라고도 하는데, 종교의 부패와 성직자들의 부패는 절정에 달했었다. 그들이 보는 성서는 종이가 보급되어있지 않았기에 일반인들에게 보급되어지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유럽은 제지술이 없었기 때문에 "양피지"를 사용했었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을 얇게 저며 종이처럼 사용한 나름의 종이의 대체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튼튼하고 문자를 기록할 수 있지만, 무겁고 매우 비싼게 흠이었다.
여기서 제지술이 전달된다.
종이의 보급으로 인해 당시 중세유럽시대의 부패한 종교와 성직자들의 기만이 일반인들에게 들통나버린 것이다.
일반 백성들이 어려워서 볼 수 없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쳐놨던 성경은 생각보다 내용이 쉬웠다.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걸 토대삼아 산업혁명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제국의 출현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 모든건 바로 "제지술"의 보급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로 인해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어 유럽문명의 새로운 태동을 낳게 된 장본인이 아이러니하게도 고선지 장군인 것이었다.
실제 권위있는 중앙아시아 관련 학자인 르네 크루세 등도 고선지를 매우 획기적인 인물로 본다고 하니 유럽 문물의 아버지라 칭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고선지 장군의 삶은 억울한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고선지 장군은 뚜렷하게 관직에서 활약을 못하고 한직에 물러나 있었는데,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고선지 장군을 불러 진압을 명령하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 외모를 보면 알겠지만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이다.(안록산은 중국의 경극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당나라의 현종은 섬주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했지만,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사수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동관"을 지키는 전략을 택했다.
동관은 소규모 병력으로도 대규모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난공불락 요새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고선지는 외부에 있던 보급기지에 있는 물자가 안록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빼낼 것은 빼내고 모두 불태워버리게 된다. 이게 결국 죽음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선지의 동관사수는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매우 탁월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전진기지인 섬주를 지키지 않고 동관을 지키면서 창고를 불태운 것은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이라는 죄를 받게 된다.
당시 당에서는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떤 이민족 출신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킨 데 자극을 받아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가 반란을 진압한 후 그의 강력한 세력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종의 뜻을 받든 환관으 모함으로 당을 위해 공을 세우고도 고선지는 처형받게 되었다.
이 때 고선지는 자신이 살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부하의 도움으로 충분히 죄를 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동관과 장안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이는 당나라의 급격한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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