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 '포클랜드 전쟁'
1980년대 초, 아르헨티나는 경제, 국내정세 등 모든것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지난 1978년도에 개최했던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위한 경기장 건설뿐만 아니라, 도시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70년대 내내 경기부양을 하려 부단히 애썼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노력이 80년대가 되자마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경상수지는 적자로 돌아섰고,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갈수록 경제가 악화일로로 치닫게되자 아르헨티나 국내엔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지속되는 군사정권의 독재하에서 민중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던차에 경제까지 시원하게 말아먹었으니, 나라 꼴이 어찌 돌아가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1981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드디어 아르헨티나에서 대규모 군부비판시위가 벌어지기에 이른다.
경제까지 말아먹는 무능한 군부의 장기독재로 불만이 폭발한 시위대는 당국이 치안유지명목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하여 행방불명된 수천명의 명단을 들이밀며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일이 일어난다고해서 바로 사죄하고 진상규명을 하는 착한 군부따위가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이 당시 아르헨티나의 지도자는 군사정권 대통령인 '레오폴도 갈티에리'였다.
세계의 군사정권 독재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갈티에리또한 이러한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 강경진압한다.
일단은 힘으로 한차례 억눌렀지만, 갈티에리의 고심은 점점 깊어져간다.
날이 갈수록 국민들의 군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거세졌고, 신뢰도가 추락함에 따라 국내정세가 개판 5분전이 되었기때문이다.
이젠 국민들 뿐만 아니라 군부내에서도 비판, 도전해오는 세력들의 조짐까지 보이면서 갈티에리는 수세에 몰린다.
이제 경제가 되었든 다른 무언가가 되었든,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를 하나로 묶을수있는 솔루션을 제안하지 않으면 안되는 궁지에 몰리게된 것이었다.
이때 갈티에리는 역사상 수많은 지도자들이 선택했던 길에서 해답을 찾는다.
"전쟁! 타국과의 전쟁이 해답이다! 국내의 불만을 다른나라로 향하게 하면된다!"
실로 간단명료한 해답이었다. 현실적으로 경제부양을 통해 국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갈티에리는 국민들에게 공공의적을 내세움으로써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그 희생양으로 영국을 선택한다.
마침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코앞에 위치하고있는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를 점거중이었고, 아르헨티나는 오랜기간동안 말비나스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곳을 점령하는것이 오랜 숙원이었다.
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아르헨티나에 너무도 가까운 땅이었고, 포클랜드 제도는 중요한 전략거점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군의 주둔병력, 보유장비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라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땅이었다.
말비나스 제도 점령은 그 위대했던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짓밞고, 국민들의 지지율을 대폭 상승시킬수있는 최고의 수단인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갈티에리는 말비나스 제도 점령작전에 대한 계획을 바로 구체화 준비에 들어가고, "우리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하면 말비나스 제도는 1~2일안에 완벽히 점령이 가능하다." 라는 의견을 군으로 부터 전달받게 된다.
게다가 영국의 입장에선 멀고먼, 무려 13,000km나 떨어져있는 남아메리카 남동단의 가치없는 포클랜드 제도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병력과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면서 수복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다고 평가했고, 속전속결로 빠르게 점령해버리면 영국도 손쓸 수 없을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갈티에리에게 있어서 이만큼 구미가 당기는 작전을 하지않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하지않는게 더 이상할 정도로 완벽한 상황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의 영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영국은 이 당시 보수당 출신 수상인, '철의여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마가렛 대처'가 집권중이었다.
오늘날에는 위대한 여성 지도자중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는 대처이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평가가 높았던것은 아니었다.
대처가 취임한 직후의 영국의 상황또한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최악이었다.
한때 세계의 패권을 놓고 싸우던, 세계를 이끌어가던 일등 국가 대영제국의 영광은 온데간데 없었다.
경제는 침체되었고, 군사력에서도 더이상 미국과 소련에 경쟁조차 되지않는 3류국가로 전락한것이 당시의 영국의 현실이었다. 보수-노동 양당의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인해 복지병에 빠지면서 국가재무상태 또한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날이 산업경쟁력은 약화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계속해서 일자리를 잃는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영국인들에겐 성장동력도, 일등국 가라는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독한 인플레이션과 노동운동으로 소란스러운 국내정세, 만연한 패배주의만 남아있는 영국의 작태는 대처에게 큰 시련이었다.
대처는 취임하자마자 이러한 복지와 노동운동으로 대표되는 '영국병'에 과감히 메스를 댄다.
예산낭비를 막고 인플레이션을 잡아내기위해 대처는 '긴축재정'을 시작하지만 긴축재정으로 인해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면서, 얼마안가 실업자의 숫자가 무려 3백만명을 돌파하기에 이른다.
일자리를 잃고 다같이 거리에 나앉게된 수백만 실업가장과 그 가족들은 분노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날마다 반정부시위를 일삼았고, 대처는 그럼에도 양보할 수 없었다. 이러한 큰 반발이 일어날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화가난 시위대와 강경진압하는 경찰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이 소란스러운 광경이 유쾌할 영국인은 단 한명도 없었고,
이러한 국민들의 여론은 언론에도 반영되면서, 타임지에서는 대처가 임기 3년차였던 1982년도에 대처를 [사상 최악의 수상]으로 발표하면서, 2차대전 당시 히틀러에게 유화정책을 사용해 매국노라고 까지 불리웠던 네빌 체임벌린 수상과 더불어 가장 무능한 수상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이 모든것을 반전시키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1982년 4월 1일 아르헨티나군이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포클랜드 제도에 공격을 시작, 다음날인 4월 2일에 모든 섬을 점령하고 주둔중이던 영국군 해병대 100명을 손쉽게 제압한 것이었다.
1차 상륙작전이 아무런 피해없이 성공적으로 치뤄지자 한껏 고무된 아르헨티나군은 2차 상륙작전으로 무려 1만 8,000명의 병력을 추가 투입하며 굳히기에 들어간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은 발칵 뒤집혔다. 영국 입장에서는 남미의 일개 국가에게 영국령을 무력으로 일방적으로 빼앗겨버린 대사건으로 전국민이 큰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하지만 영국군이 그렇게 무능했던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은 이러한 포클랜드 제도로의 아르헨티나군의 침공가능성을 미리 캐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포클랜드가 점령되기 이전의 시기, 아르헨티나군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계획을 들은 대처는 격노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한 영토분쟁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국에 대한 도전' 그 자체였다.
대처는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도전을 묵과할수없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굳혔고, 긴급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확고하게 전쟁의사를 밝히며 내각과 국방성을 크게 놀라게한다.
대처가 전쟁의사를 표명하자 영국국방성은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우리가 반격에 나설쯤 포클랜드 제도는 이미 점령되있을겁니다. 포클랜드 제도가 이미 제압된 이후에는 다시 수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곳은 지구 반대편인, 본국으로부터 13000km나 떨어져있는 곳이고, 가까운 지리적이점으로 육해공 삼군의 연계가 원활히 이뤄지는 아르헨티나군을 제압하기위해선 대규모 원정을 위한 기동함대의 동원이 필요합니다."
이때 영국국방부가 내놓은 견해는 타당했다.
포클랜드는 남극을 향하기 위한 전진기지, 소량의 석유자원매장 가능성과 같은 소소한 이점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전략가치가 없는 있으나 마나한 땅이었다.
야당의원들 중에는,
"여자이신 총리께서 전쟁이 지속될 경우 그것을 감당해낼 스태미너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라는식의 성차별적인 조롱까지 일삼았을정도로, 대처의 전쟁의사를 곱게 바라보는 자는 영국내에 많지않았다.
하지만 철의여인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녀는 이 안건에서 한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침략과 부정에 무르게 대하면 더 한층의 침략과 부정을 부를 뿐 입니다."
대처는 영국으로의 도전에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이미 굳힌 상태였고, 그 어떤 비판적 견해나 회유도 대처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제서야 내각과 국방성은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대처의 너무 확실하고 단호한 태도로 전쟁을 반대하던 여,야를 막론한 많은 의원들은 점점 전쟁을 지지하는쪽으로 의견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즉시 해군에게 포클랜드 수복을 위한 기동함대에 동원할 함선의 리스트업을 명령했고, 그를 위해 해군참모총장에게 48시간내로 모든종류의 선박을 함대에 편성할수있는 전권을 부여했다.
해군참모총장 또한 대처의 확고한 전쟁의사에서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라는것을 직감했는지, 아르헨티나군을 확실하게 압도하기위한 어마어마한 전력의 기동함대를 편성해서 리스트를 내놓게된다.
그렇게해서 작성된 기동함대의 리스트는 이미 조그마한 섬하나를 점령하러 가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사실상 영국이 타국과의 전면전을 치르러가는 수준의 대함대였다.
그만큼 포클랜드에 관해서 대처의 분노와 각오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것이다.
영국군의 반격에 아르헨티나군이 포기하지않고 거세게 반항할 경우,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히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이 막강한 기동함대의 명단을 본 대처는 그제서야 확신을 느끼며 안심했다.
전쟁내각을 구성하고, 함대편성등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대처는 상쾌한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 국회의사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대처는 회의가 열리자마자 기동함대 파견을 발표한다.
"우리 영국은 포클랜드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동함대를 파견할 것이고, 반드시 되찾을 것입니다."
초기에 부정적이었던 여론은 대처가 그동안 전쟁을 준비하면서 보여줬던 단호한 태도로 인해 반전되었다.
하원의원들은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대처의 과감한 결단에 갈채를 보냈다.
사실 의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영국인들은 내심 자신들의 권위와 자존심에 도전하는것을 불쾌해하고 있었고, 대처의 신속한 대처는 영국에게 만연해있던 패배주의를 한순간에 불식시켰다.
경기침체와 심각한 실업문제등 여러가지 이유로 분열되어 소란스러웠던 영국인들은 아르헨티나의 도전으로 한순간에 단결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스스로의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오히려 영국인들을 통합시켜버린 것이었다.
영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또한 전쟁이 시작되자 파업과 시위를 자제하는등, 전 영국민이 아르헨티나의 도전에 철저한 응징을 원하고 있었다.
대처라는 변수로인해 당초 갈티에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았고, 이 사자는 늙고 노쇠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흉폭한 맹수였다.
드디어 제국의 반격이 시작된것이다.
우선 신속하게 기동함대를 구성, 파견시킨 대처였지만, 단호하고 강경적인 대응을 했다곤하나 대처 본인이 전쟁자체와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원하고있던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성명을 발표해서 아르헨티나의 침략행위를 국제사회를 통해 맹비난하고, UN과 미국측에 중재를 요청하는등 뒤쪽에서의 외교싸움도 전개하면서 조기종결을 이끌어내려 했던 것이다.
대처가 대규모 원정함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던것은 압도적인 영국해군의 전투력을 과시함으로써 일찌감치 협상테이블로 아르헨티나를 끌어내 굴복시키려는 협상카드이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포클랜드를 점령당한지 바로 하루뒤인 4월3일, 유엔안보리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는 제502호 결의사항이 채택되었고, 아르헨티나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무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집행하는 강제성이 없었고, 허울뿐인 국제연합의 경고를 아르헨티나는 무시해버린다.
이때 유엔은 이처럼 회원국이 결의안을 무시해버리는 경우엔 사실상 허수아비기구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정도로 신뢰도가 하락하게된다.
하지만 대처는 유엔말고도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자유진영의 수장이자 오랜 우방인 '미국'이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맹주이기도 했던 미국이 직접 중재에 나서준다면 사태는 상당히 빠르게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 영국내부의 예상이었다.
이 당시 미국은 제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중이었는데,
레이건과 대처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레이건은 공산진영의 맹주인 소련을 '악의 제국' 으로 표현하며 맹렬히 비판하는등, 미국의 군사력팽창을 통해 공산진영을 붕괴시키려고 작정한 초강경파 대통령이었다.
마침 소련에서 '철의여인' 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을정도로 공산권과의 대결을 확실시하던 대처와 레이건은 코드가 맞을수밖에 없었다.
물론 외교판에선 그런 부분만으로 모든 것이 잘 풀릴리가 없지만, 적어도 레이건이 영국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되는 상황이었다.
"우리 또한 포클랜드로 인해 무익한 전쟁과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침략행위에 대해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줄 필요가 있습니다."
요컨대 대처는 일단 대규모 기동함대를 파견하긴 했지만, 전면전으로 번지기전에 미국이 아르헨티나군에게 철수를 요구하면서 사태의 중재자로 나서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처는 기대했던것과 다르게 레이건으로부터 전혀 엉뚱한 답변을 듣게된다.
"아르헨티나가 현재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위해 작정하고 나서고있다, 군의 전면철수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어보이니 일단은 싸우지말고 절충안을 제시하며 협상을 시도해보는것이 어떤가?"
그렇다. 대처의 생각과 달리 레이건은 영국이 남아메리카까지 오는것을 전혀 원하지 않고 있었다.
내심 기대했던 레이건으로부터 이런 답변을 받은 대처는 큰 배신감을 느낀다.
이러한 레이건의 회유적인 태도가 포클랜드 전쟁기간 내내 지속되면서 잔뜩 화가난 대처는 레이건과 대화 중 이런말도 남기게 되는데,
"소련이 알래스카를 침공해도 그렇게 대응할 수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
대처는 포클랜드 제도의 가치자체는 별볼일 없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영국의 영토를 침략당했다는 그 사실에 분노하고있었기 때문에 레이건의 계속되는 회유책을 딱 잘라서 거절한다.
어쨌든 포클랜드 전쟁기간 내내 핫라인으로는 대처를 회유, 설득하려던 레이건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영국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기묘한 행보를 보인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행위는 국가가 아닌 테러단체 수준의 만행"
이러한 강도높은 표현을 사용하며 공개적으로 아르헨티나를 비난하는데, 정작 사태의 해결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미의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역효과를 불러온다.
이 시기 레이건 정부의 외교는, 뒤로는 영국에게 전쟁하지 말라고 설득하다 핀잔만 듣고, 앞으로는 노골적으로 영국편만 들면서 아르헨티나를 비난하다가 남미의 반미감정만 고조시킨 셈이었다.
유엔과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이때 중재자로써 제 역할을 못함에 따라 분쟁 당사자 양쪽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신뢰도가 하락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에게 포클랜드 전쟁은 강건너 불구경이었고, 남의 일이었다.
국제사회는 영국과 아르헨티나간의 영토분쟁을 사실상 방관한거나 마찬가지였고, 대처가 대규모 기동함대 파견이라는 군사적 압박 카드와 제 3자의 중재를 통한 외교적 해결을 이용해 큰 피해없이 포클랜드를 되찾으려했던 당초의 구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여담이지만, 영국연방에 속한 회원국들은 모두 영국에 지지를 표명해주는데 그래봐야 그들은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이 안됬다.
대규모 기동함대가 얼굴만 잠시 비춰주고 돌아오려고 했던 것이 진짜 전면전이 되버린 것이다.
이제 영국은 자존심을 걸고아르헨티나 군을 철저하게 밞는 수 밖에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동함대를 편성했던 것이 결과적으론 잘한게된 셈이었다.
소규모 상륙부대를 보냈다가 패전이라도 했다면 영국은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당하고 대처는 실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본국에서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것에 실패, 허송세월 하는동안 영국 해군 기동함대는 벌써 포클랜드 제도의 코 앞까지 도착하게 된다.
4월 26일, 포클랜드 제도로부터 1400km 떨어진 동쪽에 위치한 사우스 조지아섬에 최초로 영국군의 상륙작전이 개시된다.
아르헨티나군과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지만, 워낙 포클랜드 제도로부터 동떨어진 곳이기도 했던지라 아르헨티나측은 사우스 조지아에는 크게 욕심을 내지않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막강한 기동함대의 백업으로 손쉽게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제 사우스 조지아섬에 교두보를 마련한 영국군은 본격적인 포클랜드 제도 본토 공략에 나서기에 앞서 한가지 큰 문제점을 발견한다.
바로 포트스탠리섬 내륙쪽에 위치한 포트스탠리 공항이었다.
영국과 달리 노후 항모 1개 만을 보유중인 아르헨티나였지만, 포트스탠리 공항에서 전투기를 발진시킨다면 그것 또한 영국군 기동함대에 적지않은 위험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이 공항은 방공레이더를 보유중이었기 때문에 기동함대의 항공전력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파괴해야만 했다.
게다가 포트스탠리공항은 공항으로써의 기능뿐만아니라 C-130 허큘리스 수송기를 통해 각종물자를 보급하면서 포클랜드 제도에 주둔중인 육상병력의 병참기지로도 기능하고 있는 아르헨군의 최중요 거점이었다.
위와같은 이유로 상륙하기에 앞서 영국의 항공전력을 동원해서 이곳부터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곳을 타격할 수단이 기동함대엔 없었다는것이다.
HMS 인빈시블, HMS 허미즈, MV.아틀란틱에 탑재되어 있던 함재기인 AV-8 해리어기는 경공격기, 함대 방공전투기 용도로 사용가능한 기체였고, 해리어를 통해서 적 공군기지를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미군의 경우엔 항모 함재기중에 그런 임무를 수행가능한 기체가 있었지만 영국군에는 없었다.
오랜시간의 궁리끝에 영국군은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상하기에 이르는데,
본국에 있는 Avro Vulcan , 발칸 폭격기를 포클랜드제도까지 불러와서 포트스탠리 공항에 폭격을 가하는 초장거리 폭격작전을 계획한 것이었다.
무려 13,000k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 목표지점을 타격하는 영국공군의 역사상 전례가없는 작전계획은 결국 승인되었고, 4월 30일,폭격기 역사에 길이남을 블랙벅(Black Buck) 작전이 시작되었다.
본국에서 출발한 발칸폭격기 2기는 가장 포클랜드에 근접한 남대서양에 어센션섬으로 이동, 이곳에서 보급후 다시 이륙하지만 그럼에도 포클랜드 제도는 터무니없이 먼 곳이었다.
따라서 2기의 발칸폭격기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급유기가 같이 동행하는데, 이를 위해 빅터급유기가 무려 11기나 동원되는등 작전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투입된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급유기가 동원된 배경에는 발칸기로의 급유뿐만 아니라, 급유기또한 어마어마한 작전거리를 수행하기엔 기름이 모자랐기 때문에 급유기간 급유까지 해야한다는 계산하에서 비롯된 진풍경이었다.
호위기도 없이 폭격기와 급유기만으로 단독작전을 수행해야했던만큼, 아르헨티나 공군기에 요격당하지 않기 위해 야심한 시간을 틈타 3만 5천피트의 고도에서 드디어 포트스탠리에 야간폭격이 이뤄지게된다.
하지만 이 초장거리 폭격작전은 투입된 막대한 비용과 노력과 달리 처참한 전과를 기록한다.
도중에 발칸폭격기1기가 기압장치에 이상이 발생하면서 이탈하게 되었고, 투하된 21발의 폭탄중에 '단 1발만이 활주로에 명중, 경미한 손상을 입힘.' 으로써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된 작전이었음에도 대실패를 기록한것이다.
하지만 포트스탠리 공항에 큰 타격을 입히지못한 이 초장거리 폭격작전은 영국공군의 본래 의도와 달리 아르헨티나 전역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다.
"이 미친 영국놈들이 고작 이 작은 공항에 구멍 하나 낼려고 13,000km를 날아왔는데 다음에는 더 가까운거리인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있는가!"
이렇듯 영국공군이 포트스탠리에 대한 전략폭격을 하기위해 실행한 본 작전이 아르헨티나 전역에 폭격공포를 휘몰아치게하면서 엄청난 전략적효과를 얻은것이었다.
급기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아르헨공군은 포클랜드 항공전에 투입하려고 했던 주력 전투기인 미라지3 전투기중 적지않은 숫자를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로 긴급배치, 로테이션으로 방공임무에 투입하는등 비상이 걸리게 된다.
설마 영국이 이렇게까지 무지막지한 작전을 펼치리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포클랜드 점령 직후에 하늘을 치솟던 국민들의 지지와 함성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국민들은 언제 머리위에 폭탄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전쟁에 대한 공포감만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모두가 즐겁고 신나게 즐기던 카니발은 단 한번의 폭격으로 산산조각이 난것이다.
포트스탠리에 이뤄진 초장거리 폭격과 영국군의 동향으로 미뤄볼때, 영국군의 포클랜드 제도 상륙이 임박했음을 아르헨티나군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르헨티나군은 상륙작전이 개시되기전에 영국군 기동함대에 타격을 입히지 못하면 재해권에서 밀리면서 전황이 크게 불리해질 것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는지, 영국군 못지않게 과감한 작전을 펼치며 단기결전에 나선다.
5월 1일 , 아르헨티나 공군은 보유중인 이스라엘제 대거 전폭기를 무려 36기나 출격시킨다.
[미라지3와 대거는 외양적으로 굉장히 흡사한데, 이는 대거가 미라지의 카피버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거는 장거리 항법장비가 매우 열악한 기체였고 , 아르헨티나 공군이 공중급유기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대거에 공중 급유장치가 탑재되어 있지않아 포클랜드에 도착시 작전가능시간이 겨우 5분도채 되지않는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중간에 영국측 해리어기들과 조우해 교전에 들어간다면 영국군 기동함대를 타격하는 것은 사실상 포기해야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거기의 이러한 열악한사항에도 불구하고 이때 아르헨티나 공군은 상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이 당시 영국군 기동함대 항공모함에 탑재되어 있던 함재기인 AV-8 해리어[및 씨해리어]는 아직 실전을 치뤄본 경험이없어 검증되지않은 기체였었고, 수직이착륙기라는 장점이 있는 기체이나 최대속력이 1마하에 불과해 거의 아음속기에 해당했다.
반면 이때 제공기로 아르헨티나 공군이 투입한 프랑스제 '미라지3'의 경우엔 해리어의 최대속력의 2배인 마하2로 비행이 가능한 초음속 전투기였고, 고고도 작전능력또한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해리어와의 제공권 싸움시 우위를 점할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것은 아르헨티나 공군의 자만 혹은 터무니없는 착각이 아니었다.
"해리어기만으로 편성된 항공전력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미라지와 맞붙을 경우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다."
이런식으로 실제로 영국군 내부에서도 전쟁 준비중에 나오고있던 얘기였다.
그리하야 수십기의 아르헨티나 주력항공전력은 일제히 기동함대를 향해 날아가고있었다.
이때 작전해역에 도착한 항모 HMS 인빈시블에서 씨해리어기들이 이륙, 공중초계 임무를 실시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해군또한 영국군에 맞불로 영국군 함대로부터 북쪽 200마일 거리에 항공모함 'De Mayo'를 전개하고있었다.
패기 넘치게 등장한 아르헨티나 항모는 공군의 총력전을 지원하기위해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이륙시키려고 했지만, 노후화된 항모의 캐터펄트가 작전 당일날 고장이 나면서 함재기를 이륙시킬 수 없는 작전불능상태에 빠진다.
결국 이날 항모랍시고 나온 아르헨측의 항모는 아무런 도움도 못주고 관전만하게 된다.
한편 초계비행을 하고있던 해리어기들은 머리위 구름사이로 아르헨공군의 미라지편대를 포착한다.
물론 씨해리어가 상대를 봤듯이, 미라지 또한 자신의 턱밑에 씨해리어가 노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미라지의 경우, 고고도에서는 공대공 전투능력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해리어가 있는 저고도로 내려가서 도그파이팅을 펼칠시 그러한 이점은 사라져 승부의 결과가 어찌될지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반면 해리어 또한 미라지가 있는 고도로 올라가서 싸우기엔 불리했기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고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체간 스펙차이를 따지는것을 떠나서, 무엇보다도 아르헨티나 공군이 비행훈련시간이 항상 부족했던 것과 달리,
영국군 파일럿들은 아주 잘 훈련된, 실전경험을 가진 경우도 많은 백전노장의 베테랑들이었다.
때문에 아르헨티나 공군 파일럿들은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도 본토로부터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가능시간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고,
결국 기름이 떨어지기전에 싸우고 돌아가야했던 아르헨티나 공군의 미라지 편대가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미라지의 선제공격을 해리어 편대는 피해없이 회피하는데 성공,
곧바로 영국해군의 바튼 대위가 구름속으로 재빨리 숨으려던 미라주1기를 향해 사이드와인더를 발사, 미라지3에 명중한다.
계속해서 해리어기와의 저고도 도그파이팅에서 아르헨티나 공군의 미라지가 밀리기 시작하자 본래 기동함대 타격임무를 위해 출격했던 대거 중 2기까지 제공권 싸움에 합류, 샤르피르 열추적 미사일을 해리어기를 향해 발사하지만,
목표물이었던 해리어기와의 거리가 너무멀어 명중에 실패한다.
오히려 미사일을 발사했던 대거 1기까지 해리어가 추가로 격추시켜 버리면서 제공권 제압에 실패, 대거기는 목표물인 기동함대를 코 앞에 두고도 해리어가 계속해서 쫓아오는탓에 시간을 뺏기게 되자, 당초 목적이었던 기동함대 타격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차단되었고, 아르헨티나 공군은 작전가능시간이 한계에 달해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아르헨티나 공군의 대거기들 중 일부는 떠나기직전 황급히 함대를 향해 폭탄을 투하, 기관포발사를 시도하지만 단 한발도 명중하지 않고 전탄 헛방으로 끝난다.
그렇게 많은 격추숫자가 발생한 전투는 아니었지만, 초음속 전투기인 미라지3와 미라지의 카피판인 대거기를 상대로 느릿느릿한 해리어가 단 한기도 격추당하지않고 예상외의 선전을 펼친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공군이 저고도로 내려와서 싸워준 이점과 훈련이 부족해서 운용능력이 떨어진탓도 있긴했어도, 전문가들의 미라지3가 우세할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해리어가 제공권을 장악, 함대방공에 성공한것은 상당히 의의가 큰 일이었고 영국군은 첫 실전에 투입된 해리어의 성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날 전투가 끝난후 황당한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최초로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에 피격되었던 아르헨티나 공군의 미라지3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것이다.
하지만 손상정도가 심각했기때문에 본토로 복귀하는것은 불가능했고,
파일럿은 포클랜드 제도의 포트스탠리 공항에 긴급불시착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에 감행되었던 영국군의 초장거리 폭격사건 이후로 공항쪽에 주둔된 병력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관제탑과 방공망과의 연계가 원활하지 않았던 탓에 대공포병들이 공항에 나타난 미라지3를 영국군이 또 다시 공항에 폭격하러온 것으로 착각, 일제히 대공포를 발사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서 오던 아군기를 격추시켜버리는 황당무계한 일이 발생한다.
전쟁시작후 최초의 항공기 격추기록을 팀킬로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이날 단기결전으로 승부를 보려고했던 공군은 이래저래 죽만쑤다가 끝났고, 이제 기동함대를 막기위해서 해군이 나설 차례였다.
위의 리스트가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의 전력이다.
아무래도 1편에서 영국군의 막강한 기동함대전력을 본 뒤라서 너무 빈약해보이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데, 사실 남미에선 이정도 해군전력이면 전혀 약한편이 아니었다.
다만 영국군의 기동함대 전력이 너무도 막강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해군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고,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인 5월 2일, 초전부터 경악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영국의 핵추진 잠수함인 HMS 컨쿼러가 어뢰를 시간차로 3발 발사,
전탄명중하게 되는데 초전부터 아르헨티나 해군의 기함인 제너럴 벨그라노호가 피격당한 것이었다.
이때 7초간격으로 발사됬던 어뢰들중 첫번째 어뢰가 벨그라노호의 함수부를 파손시키고, 이어지는 두번째 어뢰가 후속타로 명중, 기관실에 피격되면서 일어난 연쇄폭발로 탄약고까지 유폭이 발생하면서 벨그라노호에 결정타를 입혔다.
교전이 개시되자마자 기함이 전투불능상태가 된 아르헨티나 해군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세번째 어뢰는 벨그라노호와 동행중이던 구축함에 명중하지만 신관이 작동하지않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결국 이 최초의 해전에서 일격에 기함을 잃은 아르헨티나 해군은 이후에 바다로 나올 엄두조차 못내게 되었으며, 이 전투 이후로 포클랜드 제도 근해의 제해권을 전쟁이 끝날때까지 쭉 영국군이 장악하게 된다.
덧붙여서 아르헨티나가 보유중이던 유일한 항공모함인 Veinticinco De Mayo는 벨그라노호 격침사건 이후로 전쟁내내 출항도 못해보고 장식용 배로 전락하는 굴욕을 당한다.
초전부터 기함인 벨그라노호가 박살나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아르헨티나 해군은 이미 제해권 싸움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괜히 내보냈다가 금쪽같은 해군전력을 헛되게 날려먹느니 도크에 박혀있길 선택한 것이었다.
[실제로 영국의 핵잠들은 De Mayo가 나오는 즉시 격침시키려고 벼르고 있었다.]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한지 1주일째, 내내 승전보만 들려오고 있었다.
적 해군의 기함까지 격침시키면서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큰 피해없이 제공권과 제해권또한 영국군에게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마치 피크닉같은 전쟁이다."라고 말하는 병사들이 있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실제로 영국군은 사상자나 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이대로 포클랜드 또한 손쉽게 점령하고 끝날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티타임을 가지는 동안 아르헨티나는 제대로 독이 올라있었다.
안 그래도 원치않던 전면전이 벌어지면서 속이 타들어가던 갈티에리는 어떻게든 영국에게 한방을 먹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해군은 기함인 벨그라노호가 초전부터 박살이 나버렸고, 영국핵잠의 위협으로 인해 자랑스런 항모는 봉인되버렸다.
자국의 무능하고 한심한 해군력에 갈티에리는 깊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일이 이렇게되자 아르헨티나가 유일하게 믿을 구석은 '공군' 뿐이었다.
"이 전쟁은 절대로 져서는 안된다. 어떤 수단을 동원하든간에 영국군 기동함대에 타격을 입혀라."
수세에 몰린 갈티에리는 그나마 믿을만한 존재인 공군을 미친듯이 쪼기 시작한다.
사실 실제로도 아르헨티나 공군의 경우에는 영국 기동함대에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존재했었고, 군부독재 대통령이라 그런지, 갈구면 뭐가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 듯하다.
히스테릭해진 대통령의 쉴새없는 갈굼속에 마침내 아르헨티나 공군은 비장한 작전을 준비한다.
최후까지 아껴두려했던 명품무기, '엑조세 공대함미사일'를 창고에서 꺼내온 것이었다.
이웃국가 프랑스가 이런 흉악한 흉기를 아르헨티나에 공짜로 증정하는 짓을 했으리라곤 영국은 아직 상상도 하지못하고있었다.
수십기의 전투기를 투입했던 대규모 1차 공격이 실패했었지만 실제로 격추당한 숫자는 많지 않았고, 아르헨티나 공군의 첫공격이 실패했던 원인에는 결정적으로 '영국군 기동함대의 항공모함'의 존재가 너무도 컸었다.
영국보다 가깝다곤 하나, 아르헨티나 공군기들 또한 포클랜드와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에 공중급유기를 통해 급유를 받고도 작전가능시간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반면, 항모에서 이륙한 해리어기들은 바로 함대근처에서 방공임무를 수행하면 됬기에 아르헨공군보다 여유있게 작전에 임할 수 있었던것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었다.
게다가 영국의 항모들은 막강한 호위전단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해리어기들은 돌아가야할 집이 근처에 안전하게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기동함대의 백업까지 받으면서 싸울 수 있었던덕에 아르헨티나 공군에 비해 너무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아르헨티나군은 고심끝에 해답에 도달하게 되는데, "해리어기와 적극적으로 싸워줄 필요가 없다. 그들의 모함인 항모만 격침시켜 버리면 영국군 항공전력이 통째로 증발하게 된다."
실제로 영국군 기동함대는 항모가 사라질 경우 포클랜드로 항공전력을 투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머나먼 어센션섬에서부터 출발한 발칸폭격기를 통해 초장거리 폭격까지 감행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영국군 기동함대의 전력이 막강하다고해도 항공전력이 무력화되면 아르헨티나 공군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게될 것이 자명했다.
요컨대 이 시기의 아르헨티나군이 영국군 항모를 격침시킬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달려있었던 중요한 분기점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르헨티나군은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기동함대에 대한 공격을 실시'였던 1차 공격 계획과 달리 '항모를 최우선 목표로 공격' 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충격과 공포의 벨그라노호 침몰사건으로부터 이틀만인 5월 4일, 아르헨티나 해군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을 탑재한채 영국군 기동함대를 향해 돌격하게 된다. 기묘한점은 이 기체 또한 프랑스제 무기였다는 것이다.
레이더로 포착한 영국군 항모에서 해리어기들이 긴급발진, 요격에 나서는데 1차공격 때와 달리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해리어기들의 존재를 모조리 무시한채 항모로 돌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기동함대를 향해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돌격하자 1차공격 때와 180도 달라진 아르헨티나군의 전술에 해리어기들은 크게 당황한다.
이미 아르헨티나 파일럿들은 살아서 돌아가는걸 포기하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뒤쪽에 쫓아오는 해리어기들을 달고 전속력으로 적 기동함대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수가 없는 자살행위였다.
아르헨해군의 쉬페르 에탕다르는 해리어의 추격과 기동함대의 방공망을 뚫고 기적적으로 기동함대 항공전력의 주축, HMS 인빈시블 항공모함의 코 앞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고지를 앞두고 쉬페르 에탕다르를 가로막는이가 등장하는데,
당시 영국해군이 자랑하는 최신예 42형 쉐필드급 방공구축함이었던 'HMS 쉐필드'가 버티고 있었다.
쉬페르 에탕다르는 쉐필드의 대공포화까지 무시하고서 인빈시블로 향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꿩대신 닭이라고 생각했는지, 망설이지않고 바로 쉐필드를 향해서 엑조세 공대함미사일을 발사한다.
항모의 최종방어선이었던 쉐필드에 그대로 엑조세미사일이 명중, 일격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쉐필드는 침몰하게 된다.
세계의 최상위권을 다투는 정예 영국해군이 자랑하던 최신예 방공구축함이 단 한발의 대함미사일을 맞고 수장당하면서 전세계 군사전문가, 국방부가 충격에 휩싸이는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날 영국해군은 아르헨티나의 매서운 일격에 상당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었고, 전세계 언론에서 '엑조세 쇼크' , '엑조세 스톰' 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각국의 해군들에게도 비상이 걸리게 된다.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후 당하기만하던 아르헨티나군이 드디어 영국에 한 방 먹이는 순간이었다.
영국의 최신예 구축함을 격침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갈티에리는 뛸듯이 기뻐했다.
벨그라노호의 원수를 이틀만에 갚은 너무도 통쾌한 사건이었고, 이 소식을 들은 아르헨티나군 병사들의 사기 또한 상승했다.
반면 이 소식을 들은 대처는 격노한다.
프랑스제 공격기가 프랑스제 대함미사일을 발사해 영국해군 최신예 구축함을 격침시켰다는 소식은 영국수상으로써든 영국인으로써든 굉장히 분노할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이때 아르헨티나 해군의 쉬페르 에탕다르가 거침없이 항모전단에 돌격하는 것에 성공했던 원인중에는,
언론에서 포클랜드 전쟁을 수행중인 기동함대의 배치, 작전계획과 같은 주요 군사정보를 계속해서 보도하면서 이것이 아르헨티나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었다.
이를 계기로 대처는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를 크게 꾸짖으며 자제할것을 요청하고,
"이 시간이후로 아르헨티나에 엑조세 미사일을 추가로 공급할 경우에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프랑스에 직접적으로 외교압박을 가하게된다.
이때 집권중이었던 프랑스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에게도 저러한 대처의 분노가 잘 전달되었는지, "프랑스는 이후 전쟁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추가적인 엑조세 미사일의 공급을 원천차단하는 것에 성공한다.
[만약 이때 프랑스가 엑조세 미사일의 공급을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포클랜드 전쟁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산진영과 소련의 위협이 진행중이던 냉전시대였던만큼, 영국을 죽일수는 없었던 셈이었다.]
일단은 영국에 협조해준 프랑스였지만, 프랑스는 이 사건을 내심 즐기고 고소해하고 있었다.
앙숙사이인 영국에게 자국산 무기가 큰 타격을 입히면서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프랑스산 군수품의 품질이 선전되는 광고효과까지 누린 호재였기 때문이다.
이때 미테랑과 프랑스국민들의 속마음은 "ㅋㅋㅋㅋ영국ㅋㅋㅋㅋ" 이런 느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였던만큼, 프랑스 언론도 대놓고 저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비웃었다고 한다.
다시 포클랜드쪽으로 돌아와, HMS 쉐필드가 격침당한 영국군 또한 제대로 독이올라서 5월 4일 당일날 바로 씨해리어기로 포클랜드 제도에 공습을 가하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스탠리섬 아래에 위치한 구스그린섬의 소규모 야전비행장을 해리어로 공습해서 물자공급을 차단시키고 보관중인 기체를 파괴함으로써, 쉐필드의 복수를 바로 갚아주겠다는 것이 영국군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HMS 허미즈에서 테일러 대위의 씨해리어 1기가 이륙해 단독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쉐필드의 복수에 급급하여 눈이 멀었던 탓인지, 자신들이 왜 포트스탠리 공항을 폭격하기위해 13,000km나 떨어진 본국에서 발칸폭격기를 불러와야 했는지에 대해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육상공격용이 아닌, 해상용 함재기인 씨해리어를 투입하는 미스를 범하면서,
구스그린의 아르헨티나군 대공포병들은 느릿느릿한 씨해리어를 포착하자마자 발포, 전혀 피해를 입지않고 매우 손쉽게 씨해리어를 격추시켜 버린다.
이때 닉 테일러 대위는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뭐? 이번엔 해리어를 격추시켰다고? ㅋㅋㅋㅋ"
이날 갈티에리는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쉐필드를 격침시킨뒤에 보너스 게임으로 자진해서 등장한 해리어까지 격추시키는 소소한 전과까지 올리자 아르헨티나군은 한껏 고무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로부터 이틀뒤인 5월 6일 날에는 HMS 인빈시블에서 이륙해 초계비행에 나섰던 씨해리어 2기가 악천후에 휘말려 추락, 잔해를 끝내 찾지 못하고 실종되면서 영국군은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영국군이 언제 상륙할지를 검토하는 동안,
일단 쉐필드를 격침시켰지만 영국군 기동함대와 항모는 건재했고,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든 항모를 격침시키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수 없다는 것을 갈티에리와 아르헨티나군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위 사진에 보이듯이, 'HMS 인빈시블'을 노리며 폭탄에 글자를 써놓을 정도로 아르헨티나군은 항모를 격침시키기 위해서 칼을 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5월 12일, 이번에는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들까지 대거투입한 3차 공격이 실시되었다.
해군항공대의 쉬페르 에탕다르가 보여줬던 기적의 돌격을 재현하기위해 아르헨티나 공군의 스카이호크 편대는 저공비행으로 기동함대에 돌격하지만,
쉐필드의 침몰로 인해 제대로 군기가 잡혀있던 영국해군의 22형 구축함 'HMS 브릴리언트'와 조우,
브릴리언트에서 발사한 시울프 함대공 미사일이 돌격해오던 스카이호크 3기를 격추시켜 버린다.
3차 공격을 맞이한 영국군은 인빈시블, 허미즈와 같은 주력항모들로 향하는 길을 완벽하게 차단하면서, 아르헨티나 공군은 대공화망과 해리어기들의 집요한 추격으로 인해 기동함대에 타격을 입히는데 실패한다.
영국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해있는 이 상황에서 3차공격이 기동함대에 아무런 피해도 못 입힌 것은 아르헨티나군에게 있어서 상당히 절망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군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영국의 최정예 특수부대, SAS까지 포클랜드에 투입된 것이었다.
웨스트 포클랜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작은 페블섬에는 포클랜드제도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군의 야전비행장이 위치하고 있었고,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손쉽게 무력화할 수 있는 거점이었지만 이곳에 주민들이 거주하고있다는 것이 작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피하기위해 영국군은 SAS를 투입하여 정밀타격유도를 통해서 야전비행장만을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5월 16일, SAS 제22연대 D대대 소속 8명의 대원들은 C-130 허큘리스 수송기에서 강하해 포클랜드 제도에 속해있는 작은 섬인 페블섬의 야전비행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페블섬 근처의 해수면에 착수했고,
해수면에 강하한 SAS대원들은 카누를 이용해 야간을 틈타 페블섬에 상륙한다.
과연 영국이 자랑하는 최정예 특수부대답게 이들은 신속하게 야전비행장까지 들키지않고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SAS대원들은 척후를 통해 이곳의 레이더, 탄약고, 유류저장소의 위치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악한뒤, 공습을 유도하여 모조리 파괴한다.
이 날 SAS의 파괴공작으로 페블섬에 배치되어있던 아르헨티나 공군소속 IA-58 푸카라 공격기 6기가 모두 파괴되었으며,
아르헨티나 해군항공대소속 T-34C 터보멘터 4기 또한 모두 파괴되었다.
10명도 안되는 특전병력에게 휘둘려 무려 10대의 아까운 항공기들을 잃게된 아르헨티나군은 그저 눈물만 나는 순간이었다.
이 날 이후 아르헨티나군과 영국군은 서로 눈치싸움만 하던 끝에 어느덧 5월 21일이 되었고, 드디어 포클랜드 전쟁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5월 21일, 영국군 기동함대는 드디어 눈치싸움을 끝내고 산 카를로스만을 향한 상륙작전인 작전명 '로사리오'를 발동한다.
반격을 시작한지 근 한달째가 되어갈 무렵에 포클랜드 제도 본토상륙이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총 4천명의 영국군 정규병들이 해안에 들이닥쳤지만,
아르헨티나군은 영국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해 해안진지를 구축하고있었고, 상륙하고 있는 영국군 병력을 향해 M2기관총 세례를 퍼부으면서 적지않은 피해를 입힌다.
또한 이 날 아르헨티나군은 영국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공군, 해군항공대 할 것 없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전력을 모조리 투입시키며 결사항전에 나선다.
특히나 이 날에는 3차 공격때 죽을쒔던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들이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A-4 스카이호크편대가 손상을 입고 도망치고있던 영국군 구축함 HMS 아덴트에 1천 파운드에 달하는 폭탄세례를 퍼부어 침몰시키면서 아덴트의 승무원 중 22명이 사망하였고,
3차 공격때 스카이호크를 3기나 격추시켰던 브릴리언트까지 피탄, 다행히 브릴리언트는 경미한 손상을 입고 끝나지만,
아르헨공군의 푸카라 공격기가 HMS Argonaut에 공습을 시도하여 상당한 손상을 입히는데 성공, 파손정도가 상당하여 전력에서 이탈하게 한다.
비록 훈련상황도, 각종 장비류까지 열악했던 아르헨티나군 파일럿들이었지만 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항전했고,막강한 기동함대의 대공화망과 해리어의 추격속에서 자국 해군의 지원도 없이 항공전력만으로 여러척의 기동함대 선박에 타격을 가하는 눈부신 전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제공권, 제해권 양쪽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이 날 출격했던 아르헨티나 파일럿들은 함대공, 지대공, 공대공 3종류 모든 미사일에 집중포화를 맞고 추락, 대부분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고 전사한다.
이러한 아르헨티나 공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산 카를로스을 장악하는 것에 성공, 산 카를로스 인근의 아르헨티나군의 해안진지까지 모두 무력화시키면서 포클랜드 제도 본토에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사실 포클랜드 제도에 주둔중이던 아르헨티나군 병사들은 모두 징집병인 사병들이었다.
그들은 총탄이 오고가는 잔혹한 전장에 강제로 끌려오다시피했고, 세계적인 강군인 영국군, 그것도 전문직업의 정규군들과 맞서 싸워야한다는 중압감속에서 싸웠던 것이다.
이들에겐 더이상 자신들을 지원해줄 해군도, 공군도 남아있지않은 상황이었고,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서 들이닥칠 영국군에 대한 공포심이 만연해있었다.
로사리오 작전이 실시된 후, 제공권과 제해권이 완전히 영국군에게 넘어가면서 포클랜드에 주둔중인 아르헨티나군 육상병력들은 보급까지 끊기기 시작, 부족한 치료시설과 물자로 인해 심리적, 육체적으로도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한계에 달한 병사들이 대규모 탈영, 자살까지하는 등 최악의 상황에 다다른다.
영국군이 상륙한지 이틀뒤인 5월 23일, 아르헨티나 공군은 또다시 영국군 기동함대를 향해 마지막 남은 A-4 스카이호크 4기를 모두 출격시킨다.
스카이호크 편대는 산 카를로스 근처에서 초계중이던 구축함 'HMS 앤티롭'에 2발의 폭탄을 투하, 명중하면서 일격에 격침시켜 버린다.
게다가 승무원들이 명중탄 중 한발이 불발탄일줄 착각하고 있었는데, 지연신관으로 뒤늦게 폭발하면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등 큰 피해가 발생한다.
손상을 입은 함선들을 제외하고도 기동함대에서 쉐필드, 아덴트, 앤티롭까지 연이어 침몰하게 되자 아르헨티나군 항공전력의 저력에 영국군은 크게 놀라게 된다.
압도적인 전력차에 초전부터 꼬리를 말고 도망쳤던 아르헨티나 해군 함장들과 달리 아르헨티나 해,공군의 파일럿들은 죽음을 각오한 무모한 돌격을 계속해서 감행하면서 영국군 기동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날 스카이호크 편대는 단 한기도 격추되지않고 무사히 본토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틀후인 5월 25일, 이 날은 아르헨티나 독립 192주년이라는 의미깊은 날이었다.
당연히 영국군 기동함대사령관 '존 우드워드' 제독은 이것을 캐치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공군이 이 날 무언가 일을 저지를 것이 틀림없다." 라고 확신하면서 기동함대 전체에 경계령을 발령한다.
역시나 5월 25일 당일날에 아르헨티나 공군은 역전의 용사들인 A-4 스카이호크 편대를 또 다시 전원 출격시키면서 기동함대를 향한 공격명령을 내린다.
스카이호크 편대는 첫 공격 대상으로 'HMS 브로드소드' 를 향해 세 발의 폭탄을 투하하지만 두 발이 빗나가고 한 발은 선수쪽에 살짝 손상을 입히고 바다에 떨어지면서 경미한 손상만을 입혔다.
따라서 스카이호크는 새로운 먹잇감을 물색했고,
가장 먼저 침몰당했던 쉐필드급과 동급 구축함인 'HMS 코벤트리'를 발견, 코벤트리 역시 스카이호크 편대를 포착후 씨 다트 함대공 미사일을 발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스카이호크 편대가 모조리 회피, 투하한 폭탄 3발이 모두 명중하면서 격침시킨다.
게다가 이날 아르헨티나 공군은 A-4 스카이호크 이외에 몰래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2기에 엑조세 미사일을 각기 1발씩 장착시켜서 출격시켰다.
A-4 스카이호크 편대가 기동함대 호위전력들을 교란하는 동안 쉬페르 에탕다르가 엑조세를 발사해 HMS 인빈시블, HMS 허미즈 두 항모를 격침시키는 최후의 역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공격만 성공한다면 전세가 한번에 뒤집혀 아르헨티나군으로 승기가 넘어오게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HMS 허미즈에서 이미 쉬페르 에탕다르의 위치를 먼저 포착했고,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하지 않기위해 긴급변침과 동시에 대량의 채프를 흩날려 놓으며 엑조세 미사일 회피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한 발은 완전히 인빈시블과 허미즈로부터 빗나가버리지만 나머지 한발이 계속해서 허미즈를 향해 날아오면서 함대 전체에 비상이 걸리게된다.
기동함대는 가지고있는 모든 화기를 동원해 엑조세 미사일의 요격을 시도하지만 요격에 실패한다.
함교에선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고, 엑조세 미사일이 허미즈의 코앞까지 도달한 순간, 엑조세가 그대로 허미즈의 상공을 통과해 계속해서 날아가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된다.
이유는 바로 민간용 콘테이너선을 개조해서 개장항모로 사용하고있던 개장항모 'MV. 아틀란틱 컨베이어' 때문이었다.
파일럿이 레이더에 잡힌 3개의 거대한 물체 중, 하필이면 아틀란틱 컨베이어를 목표물로 잘못 인식해서 발사해준 덕에 항모 허미즈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송능력만을 갖춘 개장항모 아틀란틱 컨베이어는 아무런 대공방어 무기체계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고, 탑승인원이 30명에 불과했던 열악한 상황속에 엑조세 미사일이 명중, 데미지 컨트롤에 실패하면서 화재는 계속 번져나갔고, 끝내 아틀란틱 컨베이어는 침몰하게 된다.
하지만 이 침몰은 매우 값진 침몰이었다.
허미즈 대신에 엑조세를 얻어맞음으로써 정규항모를 살려낸 것이었다.
반면 아르헨티나군은 3발밖에 남아있지 않던 귀중한 엑조세 미사일을 무려 2발이나 투입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되는 작전전'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최악의 국면을 맞이한다.
이제 아르헨티나군은 나머지 1발의 엑조세 미사일로 "인빈시블, 허미즈 둘 중 하나만큼은 반드시 격침시켜 버리겠다."라고 독기를 품고 있었다.
이젠 전쟁에 지더라도 곱게 져주진 않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5월30일, 아르헨티나 공군은 최후의 엑조세미사일 1기를 쉬페르 에탕다르에 장착, 교란을 위해 쉬페르 에탕다르는 총 2기를 출격시킨다.
또한 그 동안 영국군 기동함대에 막대한 타격을 입혀온 A-4 스카이호크 편대 총 4기 또한 같이 호위로 동행했다.
아르헨티나의 파일럿들은 그 동안 계속해서 사지로 내모는 상부의 명령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용감히 싸워왔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겨진건 비극적 결말뿐이었다.
레이더에서 항모 인빈시블을 포착한 쉬페르 에탕다르는 최후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지만,
레이더에서 인빈시블인 줄 알았던 거대한 함선은 항모가 아닌 구축함 HMS 엑스터였다.
심지어 잘못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이 엑스터를 격침하기는 커녕 빗나가버렸고,
호위를 위해 따라왔던 A-4 스카이호크 편대는 구축함에 공격을 시도하다 씨다트 대공미사일에 2기가 격추되고 투하한 폭탄은 모조리 불발하면서 아무런 전과도 내지 못한채 동료들의 개죽음을 뒤로하고 도주해야만 했다.
한편 육지에서는 5월 28일에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이 구스그린에서 대격돌, 영국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본토에서도 이미 사실상 영국군에게 승기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병제의 정규군이었던 영국군과달리 징집제의 사병들로 구성된 아르헨티나군은 이미 개인전투력에서 부터 영국군에게 크게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영국군은 제해권, 제공권 장악을 통해 압도적인 화력지원이 이뤄지고 있었고, 아르헨티나군은 화력지원은커녕 당장 보급까지 끊기면서 최악의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5월 31일, 영국군은 이미 포트 스탠리를 포위하고 나머지 포클랜드 제도의 크고 작은 섬들을 점령, 점점 내륙쪽으로 도망치는 아르헨티나군의 목을 조여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6월 초에 벌어진 롱던산 전투에서 영국군을 깜짝 놀래키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6월 초, 롱던산 전투에서 단 1명의 아르헨티나군 저격수 혼자서 영국군 1개 중대를 저지한 것이었다.
내륙으로 갈수록 산악지대였던 지형적 이점을 살린 아르헨티나군은 저격수를 투입, 계속해서 수십명의 영국군 보병들을 정확하게 저격해내자 중대 전원이 4시간동안 같은장소에 발을 묶이게된다.
이에 영국군 지휘관은 무제한 공습요청과 저격수가 있을것으로 의심되는 지점을 대전차 미사일, 소총을 일제히 사격하면서 간신히 롱던산고지에 도착하는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영국군 1개 중대가 단 한명의 저격수에게 농락당하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굉장히 치욕적인 사건이었고,이 사건을 계기로 저격수의 중요성이 다시금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이상 질질 끌지않고 빠르게 포클랜드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던 영국군은 심리전까지 동원하는데,
악명높은 구르카 용병이 곧 포클랜드에 온다는것을 대대적으로 광고에 나선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르헨티나군의 사병들의 사기는 심각하게 저하되었고,
안그래도 문제가 되고있던 탈영병의 숫자는 한두 명을 넘어서서 대규모 집단탈영으로 이어졌다.
영국군의 심리전전술은 엄청난 효과를 본 것이었다.
이렇게 육지전도 사실상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을때, 아르헨티나 공군은 영국군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최후의 작전을 개시한다.
6월 7일, 아르헨티나군은 작전이 가능한 대거, 스카이호크, 미라지를 모두 긁어모아서 출격시킨다.
이젠 항모고 나발이고 눈에 보이는 영국군 기동함대를 한 척이라도 더 격침시키고 패전하겠다는 아르헨티나군 최후의 발악이었다.
대거기 편대는 제일먼저 눈에띈 'HMS 플리머스'를 일제히 공격, 네발의 폭탄이 명중한 뒤 아쉽게도 불발하면서 격침시키는 것은 실패하지만 심각한 손상을 입혀 전력에서 이탈시킨다.
뒤이어 스카이호크 편대가 마지막 공격으로 상륙함인 '트리스트람'에 폭탄을 투하, 명중하면서 탑승중이던 영국군 50명이 그대로 폭사하고 나머지 57명은 중상을 입는 등, 총 107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포클랜드 전쟁기간내 단일폭격으로는 최대의 인명피해를 입힌 전과를 올리고 이탈한다.
결국 전쟁을 패전을 향해가고 있었지만, 아르헨티나군 파일럿들은 전쟁기간 동안 영국군 기동함대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에 손상을 입히며 엄청난 전과를 기록하면서 향후 국민들에게 말비나스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한편 영국 본토에서는 이런 소식이 들려오는게 달가울리가 없었다.
당초 예상보다 아르헨티나군의 항공전력이 거세게 항전하면서 기동함대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게되자 대처는 계속해서 주변남미 국가들에게 영공을 개방, 통과를 허용해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마침 당시에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안 좋았고, 전쟁이 이미 영국군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됨에 따라 6월 11일, 이웃국가 칠레가 영국군에게 영공을 개방한다.
칠레의 영공을 자유롭게 드나들수있게 되자 영국군의 해리어는 아르헨티나 본토의 비행장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이제 아르헨티나 군부는 완벽히 패전했음을 인지, 항복을 준비하게 된다.
칠레가 영공을 개방한지 사흘만인 6월 14일, 드디어 포트스탠리에서 항전중이던 아르헨티나군까지 항복을 선언하면서 포클랜드 전쟁이 종결된다.
아르헨티나와 영국, 양쪽 모두가 져서는 안되는 전쟁이었지만 역사에 승자가 두 명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1만명이 넘는 아르헨티나군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향후 종전협상을 거쳐서 무사히 본토로 돌려보내졌다.
반면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자국의 단결을 이끌어내고 지지기반을 다지려했던 갈티에리는 패전의 책임으로 실각, 이후에 법정에서 독재, 인권에 관한 죄목이 아닌, '신성한 말비나스를 지키지 못한 죄'로 10년동안 가택에 연금까지 당하게된다.
[아르헨국민들이 군부독재로 행했던 인권탄압보다도 말비나스전의 패전책임에 더 분노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군부가 주도했던 말비나스 전쟁이 처참한 패전과 막대한 군비지출이라는 참촉한 결과만을 낳음으로써, 민중들의 분노는 드디어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고, 이 패전을 계기로 아르헨티나 전국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갈티에리의 뒤를 이었던 군부정권 또한 패전의 책임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게 된다.
반면 아르헨티나의 도전에 영국의 자존심을 걸고 단호하게 대응, 포클랜드전을 승리로 이끈 마가렛 대처에게 있어서 이번 전쟁은 전쟁전 바닥을 치고 있던 평가와 지지율을 급반전시켰고, 전 영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수상직을 3번이나 연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포클랜드 전쟁으로인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여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된 영국이었지만, 포클랜드 전쟁을 계기로 영국인들은 그동안 만연해있던 패배주의를 불식시키고, 80년대에 들어 여러가지 사정으로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은 아직도 '자랑스런 영국인'이라는 자신감을 재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잃은것 이외에 얻은것 또한 많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은 일단 이기고봐야하는 법이고, 포클랜드 전쟁은 단순한 영토분쟁의 한 케이스를 넘어서서 국가의 위기상황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배울수 있는 좋은 교과서가 아닐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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