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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은 구교와 신교의 다툼으로 벌어진 싸움으로, 물론 시작은 종교 분쟁이었지만 그 내막은 기존 패권국에 대한 신흥강국들의 도전이었음을 알 수있다.

 

1. 가톨릭의 부패와 신교의 부흥 그리고 전쟁의 시작

<유럽의 종교 분포 : 파란색: 로마 가톨릭 (구교) 보라색: 프로테스탄트(신교) 빨간색: 동방정교회 초록색: 이슬람>

당시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는 떨어져가고 로마 가톨릭의 수도승의 부패는 심각해져만 갔다.

이에 북부 유럽에서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서서히 신교가 자리잡아갔다.

신성로마제국의 맹주를 위시한 스페인 제국등은 구교,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등 독립한 국가나 중소 규모의 국가들은 신교를 믿는걸 볼 수 있다.

<요리조리 갈아타는 잉글랜드는 제외>

<마르틴 루터, 파문 당하다>

처음부터 신성로마제국이나 다른 강국들이 신교를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157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루돌프 2세는 강력히 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쓰러진 뒤 새로운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도 같은 정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황제 페르니난트 2세>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1619년 페르니난트 2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신교도들은 급격히 반발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급진적 사상이 심한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보헤미아 국민들이 프라하 왕궁을 습격하여 참사관을 내던져버리는 투척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페르디난트 2세는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30년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참사관을 던지는 포헤미아 군중>

 

2. 30년 전쟁의 시작과 명장 틸리 백작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을 시도했고, 바이에른의 대공 막시밀리안 1세도 가톨릭 동맹군에 참여했다.

이 때 동맹군을 이끄는 장군은 틸리 백작인데, 발렌슈타인 공작과 더불어 명장으로 불리는 장수이다.

<틸리 백작>
<가톨릭 동맹군의 진격>

도합 2만 5천의 가톨릭 동맹군은 프라하로 진격을 했고, 신교 동맹군도 2만 2천의 병력으로 방어에 나섰다.

이렇게 두 군대는 빌라호라 언덕에서 전투를 시작한다.

<빌라호라 전투>

첫 전투는 가톨릭 동맹군의 승리로 끝났다.

프리드리히 5세는 국왕자리에 1년도 있지 못하고 도망을 쳤으며,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속령이 되고 만다.

이후 프리드리히 5세를 추격한 틸리 백작 이하 가톨릭 동맹군은 독일 북부지역으로 진군을 계속하였고, 신교 연합을 물리쳐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해버렸아.

프리드리히 5세는 결국 네덜란드로 망명을 했다.

 

3. 덴마크의 참전과 커지는 전쟁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

1596년 즉위 한 덴마크 국왕은 야심만만한 크리스티안 4세였다.

당시 덴마크는 스웨덴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분쟁을 계속 하고 있던 때였다.

<덴마크 남부 홀슈타인 영지>

당시 덴마크 국왕은 신성로마제국의 영지인 홀슈타인 공작의 직위도 겸하고 있었는데, 스웨덴과의 전쟁도 지지부진하고 자신의 위세를 올리기 위해선 보헤미아 측에 참여하는 것이 좋았다.

거기다가 이번 기회로 신성로마제국 내에 세력을 확장시킬려고 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가톨릭이지만 합스부르크와 경쟁 관계인 프랑스의 지원을 확인 받고 전쟁에 참전을 했다.

독일 내의 분쟁은 결국엔 국제 전쟁으로 바뀌어버린다.

<덴마크 참전하다>

덴마크의 참전에 고심하던 페르디난트 2세에게 보헤미아의 용병대장이 찾아온다.

알프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이라는 공작의 직위를 가진 용병대장은 점령지에서 세금만 자유로히 걷게 해주면 무보상으로 참전하겠다고 하고, 페르디난트 2세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가톨릭 동맹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남부의 독수리라 불리는 명장 발렌슈타인 공작이 등장했다.

 

4. 남부의 독수리 발렌슈타인 공작

<남부의 독수리, 발렌슈타인>

발렌슈타인은 신교를 믿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606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다.

그 후 정략 결혼과 보헤미아 반란을 통해 서서히 자신의 영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보헤미아 반란에서 큰 이득을 본 발렌슈타인은 덴마크의 참전으로 전쟁이 확대되자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고 보고 참전을 결정한다.

참전을 한 발렌슈타인 공작은 일단 틸리 백작에게 덴마크군을 맡기고, 자신은 브라운슈바크와 만스펠트군을 격파한다.

<남부의 독수리 비상하다>

그리고 곧장 군을 이끌고 덴마크의 후방을 공격했다.

틸리백작과 합류한 발렌슈타인 공작은 루터 전투에서 덴마크군을 궤멸시키고, 곧장 홀슈타인 영지와 슈레츠비히 영지 등 덴마크의 영역을 점령해 나갔다.

발렌슈타인 공작의 승전비결은 충분한 보급을 통한 전투력을 최상으로 유지시키는 데에 있었다.

<루터 전투와 발렌슈타인 공작>

덴마크는 급격히 몰락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발렌슈타인 공작은 메들렌부르크와 슐레지엔의 자간 공국을 영지로 하사받게 된다.

바야흐로 발렌슈타인 공작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에게 충성하기 보단 자신이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길 원했고, 이때부터 페르디난트 2세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입지가 줄어들어 있었던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라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을 황제로 선출하겠다는 조건으로

발렌슈타인 공작을 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5.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2세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 2세>

한편 덴마크의 속국이였다가 독립하게 된 스웨덴에서는 카를 9세의 아들 구스타프 아돌프가 구스타프 2세로 즉위하였다.

구스타프 2세는 뛰어난 군전략가였으며, 그는 스웨덴에 군제개혁을 실시하였고 막 독립한 스웨덴은 서서히 군사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스웨덴은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덴마크가 30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고 스웨덴에 오히려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철저한 신교도였던 구스타프 2세는 폴란드, 러시아 전선이 소강 상태를 보이기 시작하자 군을 이끌고 독일 북부지역인 메를렌부르크에 상륙한다.

<북방의 사자 기지개를 펴다>

메를린부르크에 상륙한 구스타프 2세를 기다리고 있던 장수는 전쟁의 영웅 틸리 백작이었다.

발렌슈타인 공작이 해임되고 난 후 가톨릭군은 틸리 백작이 이끌고 있었다.

노련한 노장이였던 틸리 백작은 브라이텐벨트에서 적을 맞이했다.

<브라이텐벨트 전투 청색: 스웨덴 적색: 제국군> - 보병, 기병, 포병의 3병 합동전술이 근대전의 시초로 평가 받았다.

이 전투는 스웨덴군의 승리로 돌아가고 틸리 백작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이 패배로 신성로마제국군은 사망자 2만에 포로로 6천에 달하는 대패를 당했는데, 이에반해, 스웨덴군 피해는 5천에 불과했다. 

이후 틸리 백작은 구스타프 2세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기습작전을 펼쳤지만 중상을 입고 그만 얼마 후 죽고 만다.

틸리 백작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페르디난트 2세는 명장 발렌슈타인 공작을 복귀시고 4만의 군사를 주어 구스타프 2세를 막게했다.

6. 북방의 사자와 남부의 독수리

<구스타프 아돌프 2세>
<발렌슈타인 공작>

틸리 백작이 죽은 후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된 발렌슈타인 공작은 우선 전면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소모전 중심의 전략을 폈다.

한편 서서히 보급품의 한계가 들어나기 시작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는 뉘른베르크에 총공격을 하였으나, 발렌슈타인 공작은 무리없이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구스타프 2세의 진군>

전쟁은 점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고 스웨덴군의 식량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편 발렌슈타인 공작은 신교 지원국 중 하나인 작센을 병합하고, 겨울을 나기위해 군을 나누어 뤼첸으로 이동했다.

제국군이 둘로 나누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프 2세는 스웨덴 전군을 이끌고 뤼첸으로 진격한다.

이 사실에 놀란 발렌슈타인 공작이 나누어진 군을 다시 불러들였지만 그보다 구스타프 2세가 먼저 도착했고, 뤼첸에서 대전투가 시작되었다.

<구스타프 2세와 발렌슈타인 공작의 진군로>
<뤼첸 전투>

구스타프 2세는 자신만의 전통적인 3병 합동 전략을 펼쳤으나 제국의 명장이였던 발렌슈타인 공작은 스웨덴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나갔다.

이에 구스타프 2세는 자신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제국군 포병 부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면서 구스타프 2세와 기병대는 고립되었고, 이 난전 중에 구스타프 2세는 그만 전사하고 만다.

<북방의 사자 쓰러지다>

하지만 너무 극심한 혼전 중이라 스웨덴군은 그의 전사 사실을 몰랐다.

양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낸 끝에 스웨덴군은 제국군의 중앙 포병기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고, 결국 발렌슈타인 공작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스웨덴군은 구스타프 2세의 전사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결국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구스타프 2세의 시신은 갑옷, 무기, 코트 등이 전부 벗겨져 있었는데, 제국군이 페르디난트 2세에게 바친다고 벗겨버렸다.

이 구스타프 2세의 유품들은 훗날 세계 1차대전 이후에 스웨덴으로 반납된다.

구스타프 2세의 죽음에 스웨덴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명재상 옥셴세르나가 빠르게 수습해나갔다.

스웨덴의 왕좌는 구스타프 2세의 외동딸 크리스티나에게 돌아갔다.

한편 전투에선 패배하였지만, 구스타프 2세의 죽음에 입지가 올라간 발렌슈타인 공작은 귀국 후 페르디난트 2세와 대립을 하였다.

하지만 황제에게 충성을 받치는 그 휘하의 장군들이 그를 암살하고 만다.

이렇게 제국의 명장 발렌슈타인 공작도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발렌슈타인 공작의 죽음>

이후 제국군은 작센을 공격하고자 뇌르딩겐으로 진군하였고, 이에 스웨덴군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제국군에 의해 격파되고 말았다.

<뇌르딩겐전투>

 

7. 프랑스와 스페인의 참전

<루이 13세>
<명재상이자 추기경인 리슐리외>

한편 프랑스에서는 부흥왕 앙리 4세가 죽고,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였다.

이에 그의 모후인 마리 메디시스 여왕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녀의 폭정에 루이 13세는 귀족들을 규합하여 그녀를 몰아내고 그 때 모후의 측근이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리슐리외를 중용하게 된다.

참고로, 프랑스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라는 소설의  주인공 달타냥과 삼총사의 적인 추기경이 바로 이 리슐리외 추기경이다.

<드라마 삼총사>
<고전영화 삼총사>

루이 13세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추기경이자 재상에 오른 리슐리외는 루이 13세에 반대하는 귀족세력들을 축출하고, 30년 전쟁에서 신교측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였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프랑스가 안정이 되어가자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이 기회에 누르기위해 신교측에 붙어 참전을 했다.

로마 가톨릭이 국교인 프랑스가 신교측에 참여하는건 정말 아이러니 했는데, 이것만 봐도 30년 전쟁에 종교는 명분일뿐이었다.

프랑스의 참전에 스페인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즉각 참전을 선언했다.

 

8. 전쟁의 종결과 베스트팔렌 조약

<30년 전쟁의 주축 쿼러시어>

초기에는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주둔군이 파리까지 진격해오면서 한 때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 기회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수복하기 위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참전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편 독일 중부 지역에서는 구스타프 2세의 죽음으로 주춤하던 스웨덴이 프라하에서 제국군을 격파하면서 다시 주도권을 찾게 되었다.

<프라하 전투>

1637년 전쟁의 시초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페르디난트 3세로 즉위했다.

한편 프랑스-스페인 전선에서는 스페인이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직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엇는데, 스페인의 학정에 결국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참고글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236

 

[유럽사]유럽 세계의 패권국 스페인의 흥망성쇠

1. 대항해시대 동쪽의 오스만 제국 통해 막혀있던 무역로를 변방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국이었던,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찾으면서 대항해시대의 막이 오른다. 이에 뒤질세라 옆에 있던 스페인도 해상 무..

peacefulbreak.tistory.com

포르투갈의 독립운동에 후방이 위협받게 된 스페인군은 결국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도 지속적으로 밀릴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프랑스의 명장이 되는 그랑 콩테(루이 2세) 장군의 활약으로 프랑스 지역의 스페인 원정군은 궤멸되고 만다.

<프랑스의 명장 그랑 콩테>

이후 루이 2세 장군은 훗날 위대한 콩테라는 뜻인 그랑 콩테로 불리게 된다.

스웨덴과 제국의 중부 전선도 서서히 마무리되어 갔다.

스웨덴군은 우선 덴마크를 정벌하고 노르웨이의 지배권을 확립한다.

제국군과의  얀카우 전투에서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이끄는 제국군 2만을 격파함으로써 확실히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스웨덴 최고의 명장 토르슨텐손>

패배한 페르디난트 3세는 다시 군을 모아 바이에른 공국으로 침공하였으나,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에 대패를 당하면서 결국 협상을 제안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1618~1648년까지 진행된 30년 전쟁이 끝을 맺는다.

이번 30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스웨덴,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스페인, 잉글랜드와 66개의 제후들이 참전하였기에 이들이 모여 역사상 첫 국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 조약의 내용은 우선 신교의 자유와 지위 격상이고, 두 번째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지위들이 격상되고 독자적인 외교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걸로 신성로마제국은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한다.

세 번째로는 승전국인 스웨덴과 프랑스의 영토 확장이며, 네 번째로는 네덜란드, 스위스, 밀라노 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벗어나 자주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프랑스와 스웨덴 등 신흥 강국들의 패권시대가 다가오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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