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사]이집트 영웅 나세르와 그의 친구 사다트의 관점으로 본 중동 전쟁
흔히 20세기의 4대 전쟁으로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중동전쟁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중동전쟁이라고 하면 아랍진영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지대, 그리고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1948년부터 1973년까지 4번에 걸친 전쟁을 뜻한다. 물론 일부 역사가들은 이스라엘군과 PLO, 시리아가 레바논에서 싸운 레바논 분쟁을 5차 중동전이라고 하기고 하는 대 지금까지 통상 4차 중동전까지를 뜻하는 의미이다.
중동전쟁은 기본적으로 아랍의 맹주를 자처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싸움이었고 이집트에 동조하거나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전쟁에 말려든 시리아와 요르단이 이집트의 동맹군이었다. 몰론 이라크군, 사우디아라비아나 기타 아랍동맹국의 일부가 지원병력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규모도 작고 실제 전장에 나선 적도 별로 없어서 논외로 쳐도 될 정도이다.
1915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난한 우체국직원의 아들로 나세르가 태어난다.
무척 영민한 아들을 아꼈던 아버지는 아들은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교육을 시키고 싶었지만 형편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카이로에 살고 있던 형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아들을 카이로에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닌 나세르는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지만 정치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정치모임에 자주 나갔다고 전해진다.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나세르는 카이로의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고, 여기서 자기의 혁명동지이자 일생의 친구의 안와르 사다트 생도를 만나게 되는데, 이 2사람은 훗날 현대 중동질서를 만들게 된다.
1939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나세르는 당시 영국과 공동으로 식민통치 중이던 수단 국경지역에서 초임장교시절을 보내게 되는 데 당시 영국의 반식민지였던 이집트의 상황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많은 동료 장교들과 교감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인연이 훗날 자유장교단이라는 혁명결사조직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쾌하고 외향적인 나세르 소위와는 달리, 사다트 소위는 상당히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사다트는 칼을 뽑아야할 시점이 되면 훨씬 과감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1941년부터 이집트의 영토는 영국군과 전설적인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의 전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은 절대적은 숫적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을 몰아붙이고 있었고, 많은 신화를 만들고 있었지.
당시 영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집트 파쿠르 왕정에 실망한 사다트중위는 독일군에 가담하여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미국의 엄청난 물량지원을 받은 영국군에서 북아프리카군단이 철수를 시작하면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사다트는 영국군에 채포되었고,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 증거불충분으로 사형을 면하였지만 투옥되고 만다.
결국 살기위해 탈옥을 하여서 한동안 은둔생황을 하여야 하였지만 친구 나세르의 도움의 장교직으로 받고 자유장교단의 일원이 되어서 훗날 혁명을 이끌게 된다.
나세르는 2차 대전 당시 무기력하게 국토를 독일군과 영국군에게 유린당하면서도 무기력하였던 왕정에 분노하면서 와신상담하였다. 당시 이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일들이 유럽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의 그 시작이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은 상당히 강한 군대였다. 독일군은 전쟁기간 동안 단 한번도 연합군보다 숫적으로 우세한 적이 없었지만 연전연승을 하였고 숫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대하여 영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있었다.
극도로 짧은 기간에 독일이 유럽을 석권한 것은 유럽에 사는 유태인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독일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아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한 가족의 사례에서 그 정도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안네의 일기라는 책을 한번 쯤은 읽어보았을 것이다.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계 독일인 소녀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은신처에서 적었던 일기를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은신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서 이웃주민 미프 히스가 보관하던 것을 편집하여 출간한 것이었다. 물론 이 일기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비극적이지만 우리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이다.
사실 오토 프랑크는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독일제국 육군의 장교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인물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15년에 포병으로 입대하여서 소속부대장의 추천을 받아 1916는 독일제국육군 보병소위로 임관을 하고 1918년에는 중위로 승진하였다. 당시 독일군대는 프로이센과 프러시아 군대의 전통을 이어 받아서 소속 부대의 훌륭한 병사 가운데 지휘관들이 선발을 하여서 장교임관을 추천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오토 프랑크 중위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1차 대전 종전후 전역을 한 오토는 은행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태인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도피하였고 여기서도 도매상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독일군이 전격전으로 네덜란드를 순식간에 점령하면서 재산을 정리하고 현금을 만들어서 은거에 들어간 것이었다. 도매상을 운영하던 시절 네덜란드인 직원들이 오토 일가의 은둔생활을 비밀리에 지원하였고 나치에게 발각되었을 때 함께 강제수용소를 끌려가기도 하였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은 오토 프랑크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가족의 유품을 이웃들에게 돌려받던 중에 딸의 일기를 발견하고 이를 1952년 책으로 출판하고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후에 스위스 바젤에 정착을 하였고 재혼하여 자녀를 가졌고 91세인 1980년 별세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는 당시 최고의 인텔리에 독일제국 육군의 예비역 장교인 오토 프랑크조차 나치의 관리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면 당시 유럽에 있던 유태인들은 필사적으로 미국이나 영국 혹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으로 가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1933년, 나치 집권이후 많은 유태인들이 야금야금 팔레스타인땅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강력한 영국의 통제아래, 토착 유태인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었고 같이 거주중인 아랍인들과 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의 박해로 이 작은 동네에 유태인들이 밀려들면서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영국군은 강한 치안력을 이용하여 진압을 하여야만 했다.
당시 영국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절대 권력이었지만, 1941년 이탈리아군이 침공이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주둔군 21만명을 이집트로 출병하였지만, 3만의 이집트주둔 영국군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리스 침공작전까지 쓴맛을 본 상황이라, 그라치아니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이탈리아군 수뇌부는 무솔리니의 이집트 침공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무솔리니의 아집으로 침공이 시작되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쓴맛을 보게 된다.
6,000명 전사에 30만 포로라는 어마어마한 참패를 당하였고, 그라치아니장군 사령부 주변 병력을 재외한 모든 병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최초 공격선에서 더 퇴각하여 리비아까지 밀렸고 비슷한 시기 남수단을 침공한 이탈리아군도 영국군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상태였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순식간에 상실하게 된다.
이 추태를 본 이집트인들은 물론, 자기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이집트군 청년장교들은 영국군의 강력함에 독립의지가 상실되기 직전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헛짓거리에 정말 신경을 끄고 싶었고, 더 꼬이고 싶지 않았지만 대소련 침공작전에 배후에 위협될 수 있는 일이어서 예르빈 오이겐 요한네스 롬멜 장군과 약간의 병력을 북아프리카로 지원보내게 되는데, 이는 훗날 전쟁사에 한 획을 그은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의 시초였다.
롬멜은 원래 북아프리카전역의 추축군 지휘권을 전부 가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군이 워낙 전의가 없어서 곧 모든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바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독일군이지만 워낙 병력이 적고 ,장비도 구식이어서 이집트인들은 별로 신경을 안썼지만 문제는 지휘관이 롬멜이라는 것이었다.
롬멜은 사실 나치가 집권전까지는 비루한 계급의 평민장교에 불과했다.
프로이센 시대부터 독일군대의 수뇌부는 귀족출신 장교단이 중심이었고, 평민 출신 장교가 높은 위치까지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롬멜은 사회적 배경조차 보잘 것 없었다.
1차 세계대전에 중위로 이탈리아전역에서 산악부대 '게르뷕스야거' 중대를 지휘한 롬멜은 9,000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으면서 일약 스타로 재정 독일 육군내에서 부각되기 사작하였다.
하지만 귀족장군들은 평민장교인 롬멜에게 최고훈장인 '블루드메르'를 수여하는 것에 탐탁치 않았고, 수여가 미뤄지자 자신의 명예를 위해 보수적인 독일 귀족 장교단과 외로운 투쟁끝에 훈장을 찾기도 하는 등 청년 장교 시절부터 순탄치만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에 끝난 후, 독일군은 10만명으로 감소하였고 많은 장교들이 강제전역을 하여야 하였다.
하지만, 롬멜은 군대에 남을 수 있었는데, 만약 나치가 정권을 잡지 못하였다면 롬멜은 평범한 영관 장교로 퇴역을 하였을 것이다. 1934년 흰덴부르크가 오스트리아 출신 하사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단숨에 총통이 된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계급적 차별을 없애면서 바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게 된다.
평민 장교이면서도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롬멜은 대부분 비천한 사회 계급출신이었던 나치당원들에게 부담감이 없었고 곧바로 출세길을 걷기 시작한다. 즉 나치의 훌륭한 선전수단이었던 것이다.
롬멜은 보병장교(산악보병) 출신이었지만 기갑전에도 능해, 1940년 프랑스전당시 유령사단으로 불린 7기갑사단을 지휘하여 영불 연합군을 밀어버림으로써 히틀러의 무한한 신뢰를 받게 된다.
나치 독일의 불세출 영웅 롬멜이 북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독일-이탈리아 연합부대는 북아프리카 군단으로 변모하면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면서 영국군을 밀어붙히기 시작한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절대불멸의 요새로 불린 토부룩이 결국 함락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주인공은 더 이상 영국이 아니었다. 토부룩 함락은 처칠 총리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유일한 참패였다. 히틀러 역시 놀라서 바로 원수로 승진시키고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이집트 청년장교들 역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영국이 결국 독일에 힘도 못쓰고 연전연패를 당한 것과, 아시아에서 일본의 야마시타가 이끄는 일본군 14방면군 7만명에게 14만명의 영국군이 졸전을 거듭한 끝에 싱가포르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것이었다.
당시 말레이 반도 주둔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 해군의 자랑이자 최신형 거대전함 HMS 프린스 어브 웨일즈를 보냈으나 일본 육군 항공대의 1식 공격기의 산소어뢰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격침되면서 아시아에서의 재해권과 재공권을 일본 해군에게 완전히 빼앗기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집트인들도 바보가 아니고 세상의 소식에 둔감하지 않았고, 토부룩과 싱가포르에서의 끝없는 영국군 포로 행렬을 보면서 영국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며, 독립이 멀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많은 이집트군 장교들은 독일군에 가담하거나 반영 투쟁이나 비밀결사에 가담하는 등 독립활동이 이 시기에 격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와르 사다트 중위는 직접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으로 찾아가서 독일군에 가담하였고, 1942년 유명한 엘알라메인 전투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영국에 어마어마한 물량 지원을 시작하면서 수적 우위에서 도저히 롬멜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패한 후 낙동강 오리알이 된 사다트는 카이로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고, 총살될 뻔하였지만 증거 부족으로 사형은 면하였다. 하지만, 기약없는 수감생활을 시작했고, 이내 탈옥에 성공한 후 기약없는 은거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곧 친구의 부름을 받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점차 끝나가면서 많은 유태인들이 젓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잠잠한 중동에 긴장이 시작되는데 원래 이 지역에는 토착 유태인과 아랍인들이 그냥저냥 잘 살고 있었다. 문제는 유럽에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온 유태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면서 아랍인들과 갈등이 하루가 다르게 격화되기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더 이상 영국이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유엔에 이 문제를 넘기고는 영국은 손을 털어버렸고, 이스라엘 땅에서 유태인들과 아랍인들의 일전의 시기가 다가오게 된다.
당시 미국은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당연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도 거의 없었다. 골다메이어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미국에서 유태인 모금활동으로 무기를 좀 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전쟁 후에나 들여올 수 있었을 정도였다.
나세르 소령은 독립의 단꿈을 꾸고 밝은 미래를 기대하였고, 전혀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너무 멀었고 신이 버린 땅인 시나이 사막을 넘어야 하는 딴 동네 이야기였다.
이 청년장교들의 운명은 이집트 파쿠르왕의 아둔한 지시로 엉망진창이 되는데, 영국이 손을 털어버린 사이 중동의 절대 강자가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요르단의 후세인 압둘라 1세 국왕이 먼저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군 수뇌부와의 상의없이 조급하게 침공을 지시한 것이다.
영국의 반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해도 제국주의 국가에 비하면 형편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또 아무런 전쟁 준비도 되지않은 상황에 무리한 출병을 하다보니 야전장교와 병사들은 정말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다. 이스라엘도 영국이 버리고 간 무기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밀리에 구매 중이던 독일군의 중고무기로 겨우 무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이집트도 별반 다를바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 영국이 남긴 중고 무기와 사막에 지천으로 방치된 영국제, 미국제, 독일제, 이탈리아제 무기를 주워 수리해서 장만한 것으로 홍해를 건너 시나이 사막을 거쳐 이스라엘로 진군하는 것은 사실 제정신이 아닌 짓이었지만, 아무도 파쿠루 왕을 말릴 수 없었고 오아시스조차 거의 없는 죽음의 시나이 사막을 행군해서 이스라엘 전선에 도착할 때는 이미 초죽음이 된 상태였다.
장교들은 야전정보과에서 전장의 지도조차 보급받지 못해, 그 지역 시장에서 자기 호주머니의 푼돈을 꺼내서 지도를 사서 지휘를 하여야 할 정도로 시작부터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랍 동맹군과의 협력작전도 엉망이었는데 시리아군은 이집트군 이상으로 오합지졸이었고, 아랍 진영에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가장 정예부대였던 요르단군은 영내의 예루살렘에서만 전투를 할 뿐, 확전은 절대 자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실 요르단 압둘라1세 국왕은 서구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이 전쟁에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그는 아랍 형제국들 몰래 이스라엘과 비밀교섭을 하였고 예루살렘에서만 제한적인 전투를 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다.
나세르 소령이 지휘하는 보병 대대는 악조건속에서 나름 분투를 하였지만 미국, 영국, 소련군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베테랑들이 속속 합류중이었던 이스라엘군에게 속속 격파되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UN중재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고 포위된 상황속에서 나세르는 비밀리에 이스라엘군 장교들과 접촉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휴전협상이 발효되어 해어져야 할 시간이 되자, 이집트의 암울한 상황과 군인으로써의 고민도 털어놓았고, 이를 들은 한 이스라엘군 장교가 구약성서를 주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이 시기에 엄청난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PLO의 일원으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있지 않치만 약 90만에 가까운 아랍국가에서 살던 토착 유태인들이 집단 추방을 당하기 시작하였지만, 이스라엘측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서 난민이 되지는 않았다. 말 뿐인 아랍 형제들보다는 이스라엘의 단결력은 역시 한 수위였다.
천신만고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전쟁터에서 다시 죽음의 시나이 사막과 홍해를 건너 돌아온 이집트군인들은 국왕에게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고, 많은 전우와 부하를 사막에 두고한 나세르 소령도 마찬가지였다.
은둔생활을 하던 자신의 친구 사다트를 다시 불러 비밀리에 자유장교단 조직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수단 국경 경비대 시절과 1차 중동전 종전 후 왕립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 막역하였던 동료와 부하장교들은 자연스럽게 나세르의 비밀결사에 속속 가담하였다.
도저희 지금의 왕정으로는 반식민지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극심한 빈곤도 피할 수 없었던 절대절명의 상황에 무리한 전쟁으로 이집트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파쿠르왕의 사치와 퇴폐행각도 국민들이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고 군심과 민심 모두 국왕에게서 멀어진 상황에 올 것이 온 것이다.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의 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라디오 방송국과 군사령부, 정부청사, 경찰서가 혁명군에 의해 손쉽게 제압당하였고, 사타트는 직접 병력을 이끌로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여 바로 혁명성공을 국민들에게 방송하여서 게임이 끝났음을 알렸다.
국왕은 고립무원에 상황에서 영국에 도움을 청하지만, 이미 이집트를 장악한 혁명군이 이집트내에 영국의 자산과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나서자 바로 영국은 국왕에게서 등을 돌렸고, 국왕과 가족의 목숨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사다트를 비롯한 동료 장교들은 국왕의 처단을 나세르에게 요구하였지만, 나세르는 단호히 반대하고 국왕을 보호하고 나섰다. 더 이상의 피를 봐서는 안된다는 것과 미국와 서방세계와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여 국왕 일가의 망명을 허용하였다. 이로써 서방측은 나세르가 합리적이고 교섭이 가능한 존재로 인식이 되면서 자유장교단의 혁명은 사실상 완벽한 성공으로 마무리 되었다.
당시 나세르는 깊은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정치적인 식견도 상당하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30대 영관 장교들이 주축이 된 혁명군으로는 이집트군 수뇌부는 물론 국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1차 중동전의 영웅이면서 국민들로부터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군원로 니기브 장군을 혁명평의회의장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으며, 동시에 오랜 정치인이었던 알리 마히르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정부권력을 이양하는 형태를 취하는 등 아주 세련된 혁명 후 정국 정리를 하였다.
나세르는 실질적인 이집트의 통치자였고, 곧 니기브를 최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무리없이 사임시켰다. 나세르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기 직전 이슬람 형제단은 나세르가 서구적인 세속주의를 지향한다느 이유로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이 시도는 실패하고 역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나세르와 군부에 제압을 당하게 된다.
이후에 이집트는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키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경계를 오늘날까지도 늦추지 않고 있다.
나세르는 니기브가 물러난 이후 대중의 전면에 서면서 뛰어난 연설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는데, 기존의 무식하고 거친 아랍국가지도자들과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가장 현대적이고 서구합리주의적인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문학적 감수성도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후에 항상 많은 정치적, 외교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국민들을 감동시키는 명연설로 극복하여 왔다.
전후 이집트는 엉망진창인 상황이었고 강대국의 원조가 절실한 시기였다. 당장 식량자급조차 어려운 상황이어서 아스완댐을 건설하기로 하였는데 나세르가 소련과 좀 친하게 지내고 고분고분 하지 않다는 것으로 느낀 미국과 서방은 댐 건설을 못하게 차관 제공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는 나세르를 만만하게 보고 길들여 보겠다는 수작이었다.
미국, 영국,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나세르는 이에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후르시초프는 당연히 이집트로 달려가서 나세르를 띄어주기 시작한다. 막대한 소련제 군수물자는 덤으로 퍼주기 시작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니세르의 행보를 아주 못마땅히 여겼고, 프랑스의 경우 알제리 전쟁에서 독립군을 지원하는 나세르를 제거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시기에 나세르는 역사에 길이남을 명연설을 남기는데, 바로 1956년 7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만쉬야 광장에서 수에즈운하와 이집트의 진정한 독립에 대한 유명한 연설을 한다.
"1854년 11월 7일, 르셉스가 이집트에 와서 사이드 왕을 면담하고는 자신이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운하가 사이드 왕은 물론이고 이집트 전체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르셉스는 1854년 11월 30일 운하의 건설권을 따냈으며, 1856년에는 운하 건설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집트는 44%의 주식을 보유하는 대신 이 운하 회사에 몇 가지 의무 사항을 이행해야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공사기간 중 우리 이집트 노동자는 무려 12만 명이나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운하가 이집트에 이득을 준 것이 무엇입니까? 이집트에 봉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집트가 운하에 예속되었습니다.
1866년 2월 22일의 협정서 제16조는 '수에즈 국제 운하 회사는 이집트의 것이므로 이집트의 법과 관습에 따른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회사는 우리 나라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나라로 자신을 간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굶어 죽는 동안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세했던 그 제국주의 회사가 우리에게서 강탈해 간 모든 것을 우리는 되찾을 것입니다. …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수에즈운하회사를 국유화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집트의 이름으로 공화국 대통령은 수에즈운하회사가 이집트 기업이 됐음을 선포합니다."
이 연설이 있기 며칠전 이집트 정부는 아스완 댐의 차관 제공에 대하여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로부터 치욕적인 거절을 당하였다. 당시 반식민주의과 미소 냉전과는 별개로 제3의 길을 주장하여 국제적으로 큰 지지를 받았던 나세르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개적인 경고조치였다.
서방역사가들은 이 연설에 대하여 상당히 선동적이라고 비판을 많이 하였지만 이집트국민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린 명연설이었고 뛰어난 연설가였던 나세르는 적절한 유머를 썩어가면서 세계은행 총재 유진 블랙을 “모기지 대출 식민주의mortgage colonialism” 장사꾼에 비유하며 청중을 웃게 했다. 그는 유진 블랙을 19세기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회사의 사장이었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비유한 것이다.
광장의 수많은 청중들이 웃고 울면서 나세르의 연설에 빠져드는 동안, 이집트 국내에서 치외법권지역이나 다름없었던 수에즈운하 운영 회사는 이집트 특공대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당시 수에즈 운하의 공동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분노했지만, 이미 2차 대전 기간동안 국가 재정이 파탄난 상황이었고 이 후에도 알량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밑도 끝도 없는 식민전쟁을 하면서 국부를 탕진한 후라서 대규모 출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설상가상으로 배트남 디엔비앤푸 전투에서 4만의 요새 수비군이 보구엔지압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항복을 하는 굴욕을 격은지 2년 밖에 안 지난 상황이라 출병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은 자신이 원조한 무기가 식민지 전쟁에 사용되는 것에 대해 계속 경고를 주고 있는 판국이었다.
이 때,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에게 막대한 군사원조를 약속하면서 시나이 사막에 주둔한 이집트군을 수에즈 운하가 있는 홍해까지 밀어붙혀주면 자신들이 책임지겠다고 열심히 이스라엘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무관심과 분쟁을 원치않은 서방 세계로부터 무기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반대로 이집트는 소련으로부터 막대만 군수물자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작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무기를 도입하고 지원을 받은 것을 요르단이었다. 조부 압둘라 1세가 동이스라엘에서 이슬람원리주의자에게 암살당하는 것을 보고, 또 본인이 현장에서 암살범을 제압하여 검거하였던 후세인 왕자는 부친이 정신병으로 국정으로 못 다스리자 17세 나이로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철저한 친서방세속주의 정책을 펼쳤고, 무슬림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중동평화의 곡예사로 불린 후세인 국왕은 현대적이고 국제 감각을 받은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어려서부터 영국의 센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등, 무식하고 아랍식 코란 교육을 받은 다른 아랍 왕조의 왕자들과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었다.
본인이 뛰어난 군인이었고 항공기 조종사였던 국왕은 수많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로부터 암살시도를 겼었으나, 끝내 살아남은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조부를 저격한 암살범을 제압할 당시 암살범이 쏜 총탄이 가슴팍에 명중되었으나 훈장이 막아주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음모는 1956년 초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구식 미국제 전차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동안 공급한 막대한 군수물자가 있었지만 미국이 식민지 전쟁에 이걸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여 창고에 쟁여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프랑스는 먼저 미국 첩보원들을 최대한 따돌리고, 몰래 창고에서 막대한 양의 M4 셔먼전차를 빼내 항구로 가져간 후 선적 서류를 조작, 선박을 출항시키고 프랑스 정보당국 직원들이 함께 승선해서 이스라엘로 향하였다. 이 때 약 150대의 구식 M4 셔먼전차가 공급되었다. 이 중에는 일부는 이스라엘에서 프랑스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서 M4 셔먼에 프랑스제 신형 75MM포로 개조한 M50 슈퍼셔먼이 되었다.
거기에 프랑스제 신형 AMX-13 경전차까지 비밀리에 선적하여 이스라엘에 공급하였는데, 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에는 정말 마른 사막에 단비였다.
당시 이스라엘군의 주력은 보병 부대였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기갑부대가 이스라엘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1차 중동전의 영웅이었던 모세다얀 장군이 총참모장으로 취임하면서 이스라엘군은 더욱 호전적인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계속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을 독촉했고, 결국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 보병과 전차부대가 시나이 사막에 주둔한 이집트군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2차 중동전, 수에즈 동란이 시작되었다. 처음 약속은 이스라엘이 개전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항공모함을 급파, 해병대와 공수부대로 이집트를 침공하겠다는 것인데, 차일피일 참전을 미루면서 결국 이스라엘이 독박을 쓰게된 것이다.
이스라엘군의 기습공격에 이집트는 예상밖으로 신속하게 붕괴되었고, 순식간에 시나이 사막에서 정리가 되었다. 이 때 막대한 양의 소련제 군사장비까지 이스라엘에 노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비겁한 프랑스와 영국군은 11월 5일에서야 연합 공수부대를 포트사이드에 강하시켰고, 고작 이미 너덜너덜해진 이집트군 패잔병들을 이삭줍기 한 것 뿐이었다.
이 때, 소련의 후르시쵸프는 당장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소련군을 직접 파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당장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오히려 주제를 좀 알라며 면박과 망신을 주면서 수에즈 동란은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로 끝나게 된다.
영국은 국가적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고, 엔서니 이든 총리가 급격한 건강악화를 이유로 사임하게 된다.
당시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가 파리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에게 수에즈 동란 사태에 이후, 서유럽은 미국의존을 벗어나 통합된 힘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곧 독일과 프랑스 중심의 유럽통합의 시초가 되었다. 훗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때 영국과 프랑스를 망신을 주면서 유럽연합, EU를 결성하게 된 것에 땅을 치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결국 유앤군에게 진지를 넘기고, 이집트땅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군은 여전히 시나이 사막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미국과 소련의 압박으로 이스라엘군도 시나이 사막에서 철수를 하면서, 나세르는 전쟁에서는 패하였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완전히 승리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이집트 국유화 성공과 시나이반도 사수, 재국주의 세력 배격등 모든 정치적 과제에서 처음 결실을 보면서 일약 아랍의 스타정치인으로 부상하고 제 3세계에서 나세르이즘이 부각되기 사작한다.
물론 모든 아랍인들이 나세르를 영웅으로 본건 아니었다.
아랍형제국가 중 사우디, 이란처럼 나세르가 아랍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나대는 것을 눈꼴사나워하는 부류도 적지 않았고 많은 견제를 받았다. 더구나 철저한 세속주의자에 정교분리주의자여서 이슬람 원리주의자와는 정말 상극이었다. 나세르 집권 기간동안은 이슬람 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 종교단체의 정치참여를 엄격히 제한하였다.
56년의 정치적 승리 이후 나세르는 소련과 더욱 가까워졌고, 소련의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기로 결심하면서 이집트군은 소련식 군대로 변모하였고, 많은 소련 엔지니어와 군사 고문단이 이집트에 상주하여서 친소 국가로 차후 분류가 되었다. 하지만 나세르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재임 기간동안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투옥시키며 공산당 활동을 엄격히 재한하여 왔다. 물론 아랍식 사회주의를 내걸으며 국가 개입의 경제 체재를 선택하였지만 이는 엄격히 공산주의와는 다르고 국가경제 중심의 시장 경제 체재로 봐야할 것이다.
사회의 안정화는 점차 이뤄갔지만, 경제 성장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이스라엘과의 전쟁 이외에도 예맨 전쟁 등, 자신의 정치적 성과를 위해 불필요한 해외개입을 많이 하였고, 과도한 국방지출은 국민들의 척박한 생활에 당연히 도움이 안되는 것이었다. 친소 정책을 펴면서, 당연히 서방과의 경제교류도 절대 크지 않아서 재임 기간동안의 경제적 성과를 부각될 것이 없었다.
2차 중동전이 끝난 이후에도 아랍과 이스라엘은 끝없이 긴장상태에 있었는데, 특히 시리아의 골란 고원지역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준동하는 요르단 국경지역이었다. 상호 공격이 계속되면서 반감이 쌓여감에 따라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던 나세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세르는 계속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는데 바로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유엔군의 시나이 반도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사실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릴 형편은 아니었다. 이집트군의 주력이 예맨에 있었기 때문인데,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와 군사동맹을 강화하면 이스라엘이 협상에 나올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초강경파인 모세 다얀을 국방장관에 임명시키며, 전혀 이집트가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테이블로 나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아랍군사동맹이 완성되기전 기세를 꺾어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1967년 6월 5일 일을 져지르고 말았는데 이 것이 그 유명한 6일 전쟁이다.
6월 5일 새벽에 이스라엘 공군이 극비리로 초저공으로 홍해를 건너 군 공항에 있던 이집트 공군을 선제공격하였는데, 이는 홍해에 있던 소련 해군의 레이더까지 따돌린 완벽한 기습이었다.
이스라엘 기갑부대도 진격을 시작하였는데 나치 독일군의 블리츠크릭(전격전)의 중동판이었다. 이스라엘 전차부대들은 보병의 엄호도 없이 무조건 돌격을 하였는데, 모세다얀 장군의 추상같은 명령이 실제로 그랬다.
"모든 지상부대는 무조건 앞으로 전진해라. 낙오한 병사나 전차도 무조건 전진이다. 전진하다보면 분명 먼저 목표에 도착한 부대가 있을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는 아랍 공군이 사라진 이후였으며, 이스라엘군의 프랑스제 미라지 전투기와 우라강 전투기가 일방적으로 이집트군을 두둘겨댔고, 동시에 이스라엘군은 요르단을 공격하여 예수살렘으로 진격하고, 시리아군이 방어중인 골란고원으로 동시에 남, 동, 북으로 진격을 하여 아랍군을 궤멸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스라엘군이 가장 고전을 면치 못하였던 것은 단연 작지만 강한 군대였던 요르단군이었다.
철저히 미국제와 영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서구식 전술을 펼치는 요르단군에 맞서 이스라엘군 역시 수십대의 전차를 격파당하고 상당히 많은 전사자를 내었지만, 수많은 희생끝에 통곡의 벽을 장악하면서 예루살렘 전투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요르단군 최정예인 1왕실 근위사단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재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군 전차를 다수 격파하고 이스라엘 55공수여단이 추춤한 틈을 타서 질서정연하게 예루살렘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는 당시 다른 아랍군은 거의 전멸한데 반해, 요르단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보존하여 건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요르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양측 사상자와 피해규모는 비슷한 수준이었고 모든 전선 통틀어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요르단까지 박살낸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의 시리아군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최정예 보병여단인 골라니 여단을 선두로 투입시켜서 피의 진격을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보병 고지전으로 시작하였는데 이스라엘군은 극심한 병력 소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을 거듭하여 골란고원의 시리아 수비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는데 일부 요새 진지가 함락되자 시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일거에 골란고원에서 동쪽능선을 타고 다마스커스로 철수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된다. 더 이상 시리아군이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군을 향해 포격을 하거나 무력시위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은 것이다.
6월 10일까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가 차례로 UN의 휴전 중재안을 수용하면서 3차 중동전, 즉 6일 전쟁은 마무리된다.
이스라엘은 남쪽으로는 시나이 사막을 이집트로부터 빼앗고, 요르단으로부터는 웨스트뱅크와 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는 골란고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였고, 아랍세계는 미국과 유엔을 통해 영토 반환을 난리를 피웠지만, 이스라엘은 아예 정착촌까지 만들면서 실효지배를 강화해 버린다.
그리고 많은 아랍인들이 강제로 이스라엘국민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아랍인들의 자존심은 구겨져버린 상황이었고, 하소연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라크는 아예 이스라엘로 좀 진격하다가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을 좀 받고 도주해버린 상황이었다. 아랍세계는 치를 떨었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무력함으로는 이스라엘을 어찌할 수 없고 또 이집트, 시리아 정도를 뺀다면 단합도 안되는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한 나세르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고, 본인 스스로도 대단히 낙담을 한 상황이어서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이집트가 유엔의 휴전재의를 받아들인 다음날 6월 9일 스스로 방송을 통해 사임을 발표했다.
"저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완전히 선의로 모든 공직과 정계에서 물러나고 국민의 한명으로 돌아가 다른 국민처럼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려합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행동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저의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 있으며, 여러분의 마음도 저와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길, 희망과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시길."
이집트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대대적인 사임반대 시위가 일어나면서, 다시 사임발표를 취소하는 형태로 국민 재신임을 받게된다. 이 시기에 나세르는 5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당뇨병과 심장질환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오랜 기간 동안의 격무로 인한 과로로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서 다시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받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모전쟁을 바로 시작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소모전쟁은 저강도로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양측의 특공대가 서로의 진지나 시설물을 격파하는 식으로 전투를 계속 하다가 점점 강도가 증가되어 이스라엘군 구축함이 이집트군 어뢰정 2척을 격침시키고, 이집트 해군의 어뢰정이 스틱스 대함미사일을 쏴서 이스라엘군 구축함을 격침시키고, 공군전까지 치루다가 이집트가 밀리니까 소련제 대공미사일일 배치하여 이스라엘 공군기를 격추시키고, 이런식으로 3년을 지겹게 싸웠다.
이집트군 장성이 이스라엘군이 쏜 박격포에 맞아서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에 소련군 군사고문단 수십명이 때죽음을 당하는 등,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나세르는 이 시기에 요르단과 PLO의 전쟁에 중재에 나서는등 아랍의 단합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PLO는 당시 요르단에 본부를 두면서 이스라엘과 게릴라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군이 요르단 국경에 진입하여 전투를 하고, PLO 역시 요르단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무력시위를 하는 등 통제가 안되자 온건한 후세인 국왕이 군대에 직접 명령을 내려, PLO을 강제퇴거 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난민과 무장 단체원 3,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나세르의 호소로 겨우 후세인 국왕과 아라파트 PLO의장이 합의를 보았지만, 나세르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강대국의 중재로 1970년부터 소모전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지만, 긴장상태는 계속되었고 모래알같던 아랍 진영을 단결시키고 산적한 내부문제를 단속하는 방안 등의 격무로 인한 과로 상태였고, 결국 1970년 쿠웨이트 사절단을 배웅하는 길에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하지만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이집트는 물론 나세르이즘에 열광하였던 아랍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그는 죽었지만 전운은 사막에 가득하였고, 바로 부통령인 그의 오랜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처음 그의 정적이나 이스라엘, 미국, 소련은 사다트에 대해 별로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잊고 있던 것은 사다트가 청년장교 시절 스스로 롬멜 원수의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으로 찾아가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과 맞서 싸운 열혈남이란 것과 자력으로 영국군 감옥을 탈출한 풍운아에, 자유장교단 혁명 당시 최일선에서 역사를 만든 혁명 주체라는 것이었고 곧 대가를 치르게 된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2인자 시절의 온화한 이미지를 벗어나 순식간에 정적들을 숙청하고. 군정을 순식간에 장악하고 소련 군사고문단과 민간 전문가 집단을 소련으로 송환시켜 버린다. 그는 나세르 이상의 철저한 서구식 합리주의자 신봉자였고, 정교분리주의자였으며 세속주의자였다. 더구나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소련을 또 다른 제국주의국가로 보고 장차 이스라엘을 쳐서, 친서방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한 큰 그림을 이미 그리고 있었다.
최대의 문제였던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 다른 아랍지도자와는 달리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실체부터 인정하여야만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럴려먼 명분이 필요했는데, 바로 시나이 반도의 이스라엘군 철수였다.
사다트는 극비리에 이스라엘의 골다메이어 총리와 막후 접촉을 시작했다.
사디트 : 평화협상을 하자.
골다 메이어 : 조건은?
사디트 :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해 달라. 우리 영토에 군사를 바짝 붙혀놓으면 협상이 곤란하다.
골다 메이어 : 전쟁에서 이겨 차지한 것인데? 안된다.
사디트 : 알았다.
시오니스트들이 말로해서 안 될 것으로 판단한 사다트는 대규모의 군제개혁을 시작했다. 첫 단추는 먼저 장교단의 개혁이었다. 대부분 유력 집안의 자제들이 장교로 임관하는 것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보고,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 소지자들이 우선적으로 장교로 임관할 수 있도록 하고 또 주요직위로 임명하여 장교단을 더욱 강화하였다.
전쟁사를 보더라도 교육수준이 높은 군대가 항상 정병강군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집트군은 점차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집트 전 국가의 떨어진 자존심과 무기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사실 이집트군이 원래부터 오합지졸은 절대 아니었다. 예맨 내전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아랍 최강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적수가 이스라엘이라는 것과, 기습을 너무 쉽게 허용한 것이 실책이었다. 이미 3차 중동전 직후 많은 청문회와 군사재판이 있었고 이집트 육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메르 원수가 재판전에 자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다트 집권초기 800명의 대령급 이상 장교가 퇴역하였고, 젊고 고등교육을 받은 장교들로 교체되었다.
4차 중동전 전까지 이집트군은 철저한 사후 강평과 분석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스스로의 약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다트의 감독하에 4차 중동전 개전전까지 도하공병들은 매일 하루에 2번씩 부교을 설치하고 분해하였고, 시나이 침공군 전원이 약 35회의 총 예행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눈감고도 돌격 단정을 몰고, 부교를 설치하고 대전차 미사일을 날릴 정도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기갑군에 정면 승부를 하기보다는 포병과 연계작전을 하고, 기계화보병이 전차를 사냥하는 전법을 개발하고 강력한 이스라엘 공군에는 방공포와 신형 지대공 미사일, 근접 공중전에 강한 미그 전투기로 맞서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점차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잘 사용하지도 못하던 소련제 무기들의 교육훈련이 강화되면서 소련 군사 고문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이집트 국민과 군인들 모두 복수심에 불타있었고 아랍진영의 단결도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시리아와의 군사교류와 협력도 점차 끈끈해졌고, 이제 전쟁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은 CIA나 KGB, 모사드 모두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랍 세력이 선제공격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수많은 침공 징후가 있었고 대규모 병력 집결이 있었음에도 개전의 순간까지 모사드는 사다트와 이집트군이 선제공격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사드 최악의 흑역사로 남는다.
사다트는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랍의 한계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랍의 힘만으로는 절대 이스라엘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제외하고는 전부 말만 많았고, 뒷짐만 지고 있었고 요르단은 극비리에 이스라엘과 막후 교섭중이었다. 이라크가 약간의 공군편대와 지상군을 보냈지만, 새발의 피였으며 다른 나라들은 오히려 이집트가 아랍진영의 주도권을 잡을까 견제하기만 바쁜 상황이었다.
즉 제한된 힘으로 이스라엘군을 최대한 무력화시키고, 이 것으로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협상에 나서는 명분도 얻고 이스라엘 총리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것이 사다트의 큰 그림이었다.
사다트는 정치가이면서 뛰어난 군인이었고 또 외교관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최대한 빈약한 정보력을 모아서 퍼즐을 맞추어 가면서 구체적인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그의 의사결정은 아래와 같았다.
1. 이스라엘 공군을 아랍 공군이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집트 공군은 최대한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SAM)의 엄호하에 합동작전을 하여서 이스라엘 공군을 소모시키고 재공권이 미치는 범위에서 이스라엘 지상군을 격파한다.
2. 이집트 지상군은 이스라엘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 기습적으로 이스라엘군의 수비 요새인 바래브 요새를 돌파하고 함락하여 교두보를 확보한다. 최대 1/3의 상륙군 희생은 감내한다.
3. 이스라엘군이 전차로 반격을 할 때 소수의 정예병력으로 최대한 지연작전을 펼쳐 교두보를 확보하고 시나이 사막의 점령에 들어간다.
4. 이 때 시리아군이 골란고원에서 총 공격을 시작하면 이스라엘군의 힘이 분산될 것이고, 사막에서 이스라엘군과 함께 교전을 벌인다.
5. 서로 지쳐 나가떨어진 때쯤 공명심에 눈이 먼 미국과 소련의 외교관들이 어줍잖게 휴전을 들먹이며 막후 교섭을 제의할때, 못 이기는 척 협상에 응한다. 그리고 시나이 사막에 알박기를 하고, 이스라엘은 평화협상 테이블에 미국의 손에 이끌려 나온다.
전쟁에 잔뼈가 굵은 사다트는 온화한 외모와 품격과는 달리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이었고, 호방한 이미지에 불구하고 잔정이 많은 나세르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과감하게 사생결단의 도박에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하는데, 바로 유태인의 최대명절이면서 이슬람의 명절이기도한 욤키푸르(이슬람은 라마단) 휴일기간에 기습을 결정한다.
장소 역시 바레브 요새를 정면돌파하는 무모한 작전이었다. 사실 자살공격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지만 우수한 인재들로 재편성된 장교단에 유능한 참모가 많아지면서 금방 답을 찾게 된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바레브 요새란 것이 결국 대부분이 모래와 약간의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어서 고폭탄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폭탄을 터트려봤자 모래먼지만 피어오르고 말지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이집트 공병장교 중, 누군가가 고압 살수펌프로 모래방벽을 날려버리자고 아이디어를 내면서 일이 급진전이 되어서 극비리에 독일제 고압 살수펌프를 들여오고 도하공병, 전투공병, 해병대로 구성된 전투단이 수에즈 상륙훈련을 위해 맹훈련을 거듭했다. 이스라엘도 눈치를 못챈건 아니지만 기습시기에 대해서는 라마단 명절이 끝나고 국지적인 공격이 있을 것으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에 그 어느 정보기관도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집트군의 포병들이 위장막을 치우고 일제포격이 시작되면서 4차 중동전이 시작된다. 무적의 이스라엘군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욤키푸르 휴일을 맞이해서 휴가중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고위장교들도 역시 연휴를 즐기는 중이었다. 방송국마저 연휴중이라 동원령 방송이 지연되었고 초기대응은 계속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이집트군의 피나는 훈련의 성과가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연막공병과 포병의 지원하, 바래브 요새를 향해 돌격단정으로 이집트 보병과 전투공병이 돌격을 시작하였다. 이집트 건설공병들은 비밀리에 바래브 요새와 맞먹는 높이의 모래성을 수에즈 운하 바로 맞은편에 만들고 있었는데, T-62전차 4대를 끌어올려 이스라엘군 방어진지에 직사포격을 시작하면서 수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적적으로 큰 피해가 없이 상륙한 공병과 보병들은 고압살수 펌브로 모래 옹벽을 쓸어버리기 시작하였는데, 1시간 만에 60군데의 구멍을 만들면서 진격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세계 공병전투사에 모범적인 혁신사례라 할 수 있었다.
도하공병이 부교를 설치하고 단정들도 속속 상륙하면서 바래브 요새의 이스라엘군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포로가 된다.
이스라엘 수비군은 수에즈 운하에 기름을 방류한 후에 불을 지르는 20세기판 적벽대전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미리 침투한 이집트 특공대가 이 곳을 먼저 점령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바레브 요새전투에서 이집트군은 204명이 전사한 것에 반해, 이스라엘군은 1,2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사실 이는 사다트가 기대한 이상의 대성공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라아 역시 골란고원에 공중강습 특공대를 보내 요새에 주둔한 골라니 여단의 이스라엘군을 궤멸시키고, 600대가 넘는 전차가 총공격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풍전등화로 치닺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이 구사하던 공중강습 기습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동 최강이라는 이스라엘 공군의 상황도 좋치 않았다.
수에즈 운하의 이집트 상륙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스라엘 F-4 팬텀 전투기와 크피르 전투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가 맹렬히 공격했지만, 맹훈련을 한 이집트 지대공 미사일 부대와 방공포 부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속속 하늘에서 불덩이리가 되어서 떨어졌다. 너무 촘촘하게 방공망을 만들어 베테랑 이스라엘 파일럿도 속수무책인 상황이었고, 중동전쟁 사장 처음으로 이집트군이 일시적으로 재공권을 장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이 믿고 있었던 기갑부대가 진격을 시작하였는데, 이미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과 치열하게 싸워 엄청난 피해를 입어 상당히 지친 상황이었다. 시리아군의 엄청난 전차부대를 맞아 이스라엘 전차부대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겨우 승리를 쟁취해, 시리아 영토로 진격을 하려고 하였지만 소련측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할 경우 소련군이 직접 개입을 할 것이라는 위협 때문에 재대로 진격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소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참에 시리아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 생각으로 진격을 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는 아랍 최정예 요르단군이 있었고 후세인 국왕의 극비 메세지를 통한 경고도 있었다.
'다마스커스로 진격할 경우 요르단군도 중립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설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군도 골란고원에서 피해가 많았고, 시리아군과는 차원이 다른 정예강군인 요르단군과 또 전투를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시나이 반도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기갑부대는 시리아와의 전투 후 승기를 잡고 있었고, 이집트군 따위는 가볍게 밟아버리고 빛나는 훈장을 챙길 기대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이집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 이스라엘 전차부대가 자기들보다는 한 수 위라는 것은 인정을 하고 있었고, 정면대결을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상륙시켜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대전차 특공대를 최대한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길목에 전진배치하여 시간을 벌 계획이었다.
사실 RPG-7 대전차 로켓포와 AT-2 세거 대전차 미사일 발사기로만 무장한 대전차 특공대원이 전차부대에 단독으로 맞서는 것은 완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고, 자살공격이나 다름 없었지만, 기존의 귀족들로 구성된 장교들과는 달리 우수한 인재들로 주축이 된 청년 장교들은 사명감이 훨씬 높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의 시나이 사막 한가운데 개인호를 파고 엄청난 전차의 진동을 느끼면서, 집체만한 전차가 다가오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 저절로 오금을 저릴 상황이지만, 이집트 대전차 특공대원들은 과거와는 달리, 침착하게 전투준비를 하고 이스라엘 전차를 조준경에 넣고 있었다.
사실 이스라엘 기갑부대들도 치명적인 실수를 이미 진격을 할 때 범하고 있었는데, 바로 기계화 보병을 떼어놓고 진격을 한 것이다. 그 동안 전쟁에서 이스라엘 기갑부대들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 바로 기동전에 의한 기습이었다. 그리고 상대하는 적이 너무 허술한 아랍군들이다 보니 기갑전술의 기본을 등한시하고 기동력이 떨어진다고, 기계화보병은 떼어놓고 전차만 가지고 기갑 돌격을 한 것이다.
이집트군을 밟아버리고 전공을 세울 생각에 정신이 팔려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전진하다가, 이스라엘군의 센츄리온 전차가 불타오르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이집트 대전차 특공대원들이 미친듯이 유선유도 세거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속속 이스라엘 전차들이 격파되어갔지만, 전차의 화염과 모래폭풍으로 이집트 특공대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격파당했다. 격파된 아군 전차의 화염에 숨어 경우 살아남은 전차들도 이집트군의 RPG-7대전차 로켓의 화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는데, 장갑이 강한 편이었던 센츄리온이나 M48 전차들도 집중 화망에는 장사없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만약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선공을 당하고라도 기계화 보병들을 진격시켰으면, 한 줌밖에 안되는 이집트 특공대원들은 꼼짝없이 전멸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군의 지나친 오만이 화를 일으킨 경우였다. 이스라엘은 4차 중동전이 끝난 후 엄청난 양의 기계화보병 장갑차를 사들였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의 공격은 너무 완벽하였고, 이스라엘군은 예비군을 긁어모아 반격을 준비하였지만 너무 초반 피해가 커서 제대로 된 대처가 어려웠다. 평소 이스라엘에 대해서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던 미국이었지만 중동에 세력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바로 니켈그라스 작전을 시작하여, 이스라엘에 엄청난 수량의 전차와 자주포를 비행기로 공수해서 공급을 시작하였다.
주력 기갑부대가 시나이 사막에서 궤멸이 된 상황에서 미국의 전투장비 공수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정말 어렵게 전쟁을 마무리하였어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전투장비 긴급 공급과 예비군의 재편성, 그리고 CIA의 엄청난 정보제공을 바탕으로 반격을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기계화 보병의 합동 공격과 제한적은 근접 항공 지원으로 경우 공세를 시작하였지만, 지난 전쟁과는 차원이 다르게 정예화된 이집트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아주 힘들게 공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집트군도 사정이 있어 상륙군의 병력이 이스라엘을 압도할 수준의 병력도 아니었고, SAM 지대공미사일의 엄호안에서만 재공권이 확보되어 있어서 더 이상 시나이 사막으로 진격할 수가 없었다. 사다트 본인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강경파들로 하여금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서 시나이 사막을 일부 수복하는 것으로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태였다.
이스라엘군은 지지부진한 전선의 상황을 일거에 역전할 수 있는 무모한 계획을 준비 중이었는데, 바로 강경파 샤론 장군이 이끄는 이집트 영토로의 역도하인 것이였다.
이스라엘군의 반격도 너무 엄창난 피해로 지지부진하였고, 이집트군도 SAM 지대공 미사일의 엄호하에 수성전을 시작하면서 전선이 잠깐 동안 고착되는 것 같았지만 시리아에서 긴급하게 수에즈 운하 남부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줄 것으로 요청하면서 마냥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이집트군은 결국 진격을 시작하는데, 이게 곧 이집트군에게는 악수였다.
진격은 시작하였지만, 이는 지대공 미사일의 엄호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곧바로 이스라엘 공군의 영역에 포함되어 불벼락을 뒤집어쓰기 시작하였는데, 자주대공포와 이집트 공군이 최대한 엄호전투를 시작하였지만, 역시 이스라엘 공군에게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진격한 이집트 지상군이 역공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전선의 틈이 벌어지면서 샤론 장군의 미친 계획이 현실화되는데 거대한 부교를 미리 조립해서 전차에 매달아 전진하면서 전선이 벌어진 틈을 이용해서 이집트로 역도하를 성공한다.
상륙에 성공한 이스라엘군은 가장 먼저 지대공 미사일 진지는 파괴시키기 시작하였는데, 곧바로 효과가 나서 이스라엘 공군이 공격을 재대로 시작하고, 전 전선에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을 하는 데 성공을 한 것이다.
확실히 이집트군이 사막에 고립되는 형태로 점점 전황이 악화되어 가는 상황이었고, 이집트 상륙군도 이제는 다시 이집트 영내도 복귀할 준비를 하였지만 전투가 격화되면서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쯤에서 싸움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소련과 미국은 코시킨 외상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막후교섭을 시작하였고, 결국 사막의 텐트에서 양측 장교들이 휴전협상에 조인하면서 18일간의 극렬한 전투는 마무리 되었다. 키신저가 여기서 큰 역활을 하는데, 사다트를 설득하여서 이 정도에서 전투를 종결할 것을 확인받고,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까불면 미국제 무기의 공급와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력을 주어 협상테이블로 끌고 간 것이었다.
휴전 협상에서 이집트는 시나이 사막에 약간의 영토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지대공 미사일의 후퇴를 관철시키는 등의 약간의 협의를 하여 마무리 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9,800명이 전사하고, 이집트군은 7,700명이 전사, 양측 모두 800대의 전차와 300여대의 전투기를 잃는 등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사실 둘 다 대부분의 주력전력을 손실했고,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다. 사다트는 운하의 횡단자, 횡단의 영웅으로 일약 아랍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군인들도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6일 전쟁의 영웅 모세다얀 장군과 골다 메이어 총리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방장관과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이스라엘 역시 더 이상 무적의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고, 이집트의 강력해진 군사력에 위협직면하면서 협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제 협상 테이블에서의 전쟁이 시작될 참이었다.
사다트는 이 시기에 이집트의 영웅으로써 전폭적인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친미, 친서방의 길로 이집트를 이끌고 있었다.
나세르와는 대아랍 정책 역시 180도 달랐다. 나세르는 범아랍국가를 지향하였고, 그 일부로써 이집트가 있다고 보았지만 사다트는 이집트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고 어줍잖고 별볼일 없는 아랍동맹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중동전쟁 기간 동안에도 사우디아라비아나 리비아, 이라크 모두 이집트에게 성화였고 막상 전쟁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라크군도 소수의 병력을 보넸지만 이스라엘군에게 무력화되어, 전쟁에서 별로 한게 없었고, 이집트를 견제하기 바쁜 사우디는 차라리 없는게 나을 정도였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사다트에게는 안중에 없을 뿐이었다.
횡단의 영웅은 이스라엘과의 큰 그림을 거의 완성해나가는 마지막 단계를 평화협정이리고 믿었다. 나세르의 통치 기간동안 기형적으로 군비확장만 하였고, 국가의 경제나 민생은 항상 피폐하였다. 서방의 지원없이는 선진국가로의 도약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이스라엘과의 불필요한 전쟁에 총대를 매서도 안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군도 시나이 반도에서 어느정도 밀어내어 안보상의 위협도 많이 개선한 상황에서 협상에 임하기 위해 이스라엘 방문이라는 카드를 만지작하기 시작한다.
먼저 사다트는 미국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 방문의사를 흘린다. 이스라엘도 4차 중동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다시 한 번 더 이집트와 전쟁을 한다면 국가의 존재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 만큼 협상에 대해서 상당히 전향적인 상황이었다. 마침 이스라엘 정부에서 사다트를 초청한다는 구두초청을 보내게 되는데 노련한 외교관이기도 한 사다트는 미국을 흔들어서 문서로된 공식 초청장을 보낼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받아낸다.
사실 이집트에도 과격파들의 수가 상당하였고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에 반대해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과격 이슬람세력들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다트는 1977년 11월 19일 부통령 무바라크와 전쟁 장관 이스마일과 함께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했다.
메나헴 베긴 총리와 에프라임 카치르 대통령이 공항까지 직접 나와 이집트 대통령 일행을 맞이했다.
왼쪽부터 베긴총리, 사다트 대통령, 에프라임 대통령, 뒷렬 경례하는 군인은 이집트군의 이스마일 전쟁장관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엄청난 사건이었고 상대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존립의 위기까지 몰고간 전쟁영웅 사다트였기 때문이다.
긴장이 역력한 벤구리온 공항에서 이스라엘군은 혹시 모른 과격파 시오니스트의 공격에 사다트 일행이 위해를 입을까봐 철통경계를 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군악대는 전우를 죽인 숙적 이집트의 국가를 생전 처음 연주하느라 진땀을 뺴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예우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아랍국가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국방군 IDF의 의장행렬을 가장 성대하게 받았다.
이전은 물론 이후로도 절대 없는 대사건이었고, 세계의 외신기자들로 이스라엘은 한동안 북적였다.
평생을 두고 이렇게 피터지게 싸운 숙적을 바로 앞에서 만나는 것은 서로에게 처음이어서 상당한 긴장이 흘렀지만, 곧 양측의 전쟁영웅들은 격의없이 담소를 시작했다.
모세 다얀 장군, 샤론, 골다 메이어 모두 사다트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사다트는 영어를 상당히 수준으로 구사하였고 다른 이스라엘측도 전부 영어에 능통해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벼운 만남이 오간 후 사다트는 크네세(이스라엘의 국회)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적진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절대 비위를 맞춰줄 생각따위는 없었던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호전적인 군사정책에 대한 실랄한 비난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역사에 대한 높은 식견과 평화 정착의 의지를 밝히는 명연설을 하게 된다.
"여러분, 평화라는 것은 단지 쓰여진 문장의 나열만을 승인하는 일은 아닙니다. 평화란 역사를 다시 쓰는 일입니다. 평화란 기분 내키는 대로 어떠 일을 변호한다든가 어떤 고백을 숨기기위해 입을 떠드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란 그 본질에 있어 모든 야심이나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일에 대한 무서운 싸움인 것입니다.
고금의 역사를 통해 얻은 경험에 따르면 미사일이나군함또는 핵병기로는 안전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무기는 평화나 안전이 이루어놓은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집트 국민은 광신주의를 배척합니다. 그리고 우호와 사랑과 관용의 나라에서 이집트국민은 회교도, 기독교도, 유대교가 모두 함께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집트입니다. 이집트 국민은 그들의 신성한 메세지를 나에게 위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와 아이들에게 보낸 안전과 평화를 위한 메세지가 여러분의 지도자에게 평화를 위한 싸움에 참가할 용기를 볻돋워 줄것을 당부합니다.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한 거대한 거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나만의 투쟁이 아닙니다. 또 이스라엘의 지도자만의 투쟁이 아닙니다. 평화속에 살 권리를 가진 우리들의 영토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인 것입니다. 이 투쟁은 몇백만 명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과 책임에 관한 투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현대사에서 가장 위험한 투쟁인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방문이라는 평화적인 방법을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이 이번 방문 동안에 달성할 수 있덕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뚯에서 지금 여러분에게 '나는 이번 방문 중에 무엇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방문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이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입니다.
아랍의 영토가 아직 점령되고 있는데 내가 기꺼이 여기 이스라엘에 올 용기가 있다고 선언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동요와 혼란과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고 정의에 기초를 준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투쟁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승리하기 위해 이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을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계시된 일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 야곱에게 계시된 일을 !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계시된 일을 믿습니다. 모세와 예수,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준 성경중에서 신은 모세, 예수, 예언자 (모하메드)를 일절 구별하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사다트를 비난하였고 아집트를 아랍연맹에서 강퇴시키고 아랍 연맹본부를 카이로에서 튀니지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집트 국민들은 귀국하는 사다트에서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그 동안 많은 이집트 국민들은 전쟁에 공포 속에 가족을 전쟁터에 보내야 했고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너무 궁핍한 생활을 하여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사우디나 리비아, 이라크처럼 전쟁에는 소극적이면서, 이집트에게만 뒷짐지고 훈수두는 짓과 팔레스타인의 분탕에도 신물이 난 상태였다.
카다피는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의 아랍에 대한 배신이라고 성토하고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이집트에게 리바이 국경은 후방이었고 주력부대들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랍 최강군인 이집트군에게 리비아군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기습을 하였지만 이집트 공군과 지상군에게 금방 포착이 되어서 불벼락을 뒤집어쓰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400명의 애꿋은 희생자만 만든채 항복하고 만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은 무척이나 길고 고통스러웠는데 카터의 주선으로 미국의 캠프 데이비스에서 길고 긴 중동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1978년 9월 5일부터 13일간의 마라톤 협상이었다.
일생을 풍운아로 살았던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다트에 비해, 베긴 총리는 소련에서 태어나 부모가 모두 나치 독일군에 희생된 사람이라 무척 양파같은 사람이었고, 지독한 시오니스트이다 보니 협상에 진척이 너무 없었다.
서방 지도자중에서 온화하고 가장 성격이 좋다는 카터 대통령마저도 협상 가운데 몇 번이나 분노하게 만들어 계속 결렬이 되었고, 이집트 외무장관이 협상과정에서 사직서를 내기까지 하였다.
사다트도 몇 번을 가방을 직접 싸길 반복하였지만, 카터와 사다트는 평소 워낙 절친한 사이여서 카터의 만류에 테이블로 돌아오곤 하였다. 우여곡절끝에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이스라엘군 기지의 이전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와 골란 고원, 웨스트뱅크, 가자지구 문제는 결국 모호한 합의만 한채 끝나고 말았다.
사다트는 엄청난 승리를 쟁취하였다. 전쟁으로 잃은 시나이 반도를 협상을 되찾고, 시나이 사막의 석유와 안보상의 위험도 단숨에 해결을 한 것이었다. 대신에 이스라엘도 수에즈 운하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얻었고, 아랍진영의 최강 군대인 이집트군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 국민은 열광하였지만 다른 아랍국가들은, 특히 팔레스타인인들의 불만은 엄청났고, 아랍 진영에서는 사다트를 견제했고 또 친미 자유주의자였던 사다트를 소련은 너무도 증오하고 있었다. 중동에서 소련의 외교적 영향력이 급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공공연히 사다트의 암살을 주장하고 다녔다.
사다트 본인 스스로도 자신은 암살당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을 정도로 목숨을 아랍 세계에서는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다트는 전쟁 이후 줄곧 친서방 정책을 폈고, 자유시장경제체재로 전환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이집트 경제는 황폐해졌고, 민생도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의 많은 원조로 힘겹게 경제를 챙겨야만 했지만 많은 이집트 국민들은 사다트를 열렬히 지지하였고 1977년 식량문제로 인하 대규모 시위에서도 사다트를 연호하면서 '횡단의 영웅이여. 우리의 아침식사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다트는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서방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랍 정치인이었지만 동시에 아랍진영에서 급속히 영향력을 상실하던 소련에게는 눈엣가지였다. 소련은 비밀리에 이집트 군내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사주하여서 1981년 라마단 전쟁 승전기념행사장에서 사다트를 암살하고 만다.
현장에는 부통령인 무바라크도 있었지만 팔에 총상을 입고 다른 경호원들이 암살범을 재압하면서 살아남게 된다.
무바라크는 대통령 권한을 이양 받으면서 아랍 극단주의자들을 진압하고 바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다시금 중동은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훗날 나세르와 사다트처럼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장기 집권을 한 무바라크는 대규모시위로 결국 강제 퇴임하게 된다.
사다트의 장례식은 많은 이집트 국민의 애도속에 성대하게 치루어졌지만 많은 아랍 지도자들은 그의 죽음을 외면하였다. 그 빈자리는 생전 그와 막역하였던 많은 서방지도자들이 대신하였다.
나세르와 사다트는 일생을 친구와 정치적 동기로 지냈지만 전혀 다른 성격에, 전혀 다른 정치적 비전을 가지고 이집트를 이끌었다. 물론 이집트의 독립과 혁명의 기간이었던 나세르 집권 시기와 이집트가 전쟁으로부터 출구전략을 구사하여야 하였던 1970년 이후는 전혀 다른 지도자가 이집트에 필요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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