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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수대전과 함께 관도대전, 적벽대전까지 중국의 3대 대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세 대전의 공통점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무찔렀다는 점이다.

전진군을 격파하는 동진군

관도대전에서는 조조가 원소를, 적벽대전에서는 유비, 손권이 조조를, 그리고 이 비수대전에서는 동진(東晉)이라는 나라가 전진(前秦)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비수대전의 전투과정을 보기에 앞서 먼저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전진' 과 '동진' 이란 나라가 좌우지간 어느 시대의 어떤 나라였을까?

먼저 역사적 배경부터 보면,

위, 촉, 오의 삼국시대는 서기 280년, 사마씨의 서진(西晉)에 의해 통일되었다.

하지만 이 서진도 얼마못가 내란과 북방 이민족들의 외침으로 인해 서기 317년, 멸망하고 만다.

서진이 무너진 자리에는 북방 이민족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우후죽순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하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 가 열리게 되는데, 5호 16국 시대란 말그대로 '다섯 오랑캐(5호)' 가 열여섯개(16국)의  나라를 세우던 분열기를 말한다.

그리고 이 5호 16국 시대는 훗날 서기 439년, 다섯 오랑캐 중 하나인 선비족의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화북지방에서 장장 백여년 동안 이어졌고, 한편 화남지방에서는 앞서 말한 서진(西晉)의 명맥을 이은 동진(東晉)이 세워진다. 

즉, 화북지방에서는 이민족의 놀이터가 된 5호 16국 시대가, 화남지방에서는 동진이 위치하여 양자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 동진이 바로 글의 서두에서 말한 비수대전에서의 그 동진이란 나라이다.

하지만 화북에서의 분열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여러 이민족들의 나라가 우후죽순 세워져 저들끼리의 전쟁이 지속되며 세력다툼을 하는 가운데, 그 중 저족(氐族)이란 이민족이 세운 전진(前秦)이란 나라가 군계일학으로 유독 돋보이며 다른 국가들을 멸하고 병합하며 급격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이 전진도 역시 위에서 말한 그 전진이 되겠다.

부견

이 무렵의 전진은 3대 황제, 선소제(宣昭帝) 부견이란 인물의 치세 때로, 이 부견은 비록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총명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다.

남다른 정치술과 지도력으로 전진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부견은 이 무렵 킹메이커라 할 수 있는 한족출신의 재상 '왕맹' 을 얻게 되는데,  이게 신의 한수였다.

왕맹

부견도 그랬지만 왕맹 역시 탁월한 정치력과 지도력으로 부견을 도와 전진을 반석 위에 올려 놓는데에 크게 기여했다.

부견의 통치를 도와 보좌한 왕맹의 노력 덕택에 강성해진 전진은 서기 376년, 화북지방 통일을 이룩한다.

서기 376년 무렵의 상황, 북쪽의 파란색이 전진, 남쪽의 노란색이 동진이다.

오랜 분열기가 마무리 되고 이제 두 국가만이 남은 상황에서, 당연히 어느 쪽이든지 다른 한쪽을 멸하고 천하를 거머쥐게 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렇게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앞서 말한 전진의 부견은 그 무렵 천하통일이라는 로망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만 했던게 당시 전진은 동진보다 영토가 넓었음은 물론이고 인구, 문화, 경제의 중심지인 중원이나 하북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던데다 많은 인구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의 수도 동진을 압도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고대 중국의 중심은 중원이나 하북지방이었으며, 동진이 위치해있던 화남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때는 먼 훗날인 송대(宋代) 였고, 저때만 하더라도 화남지방은 생산력으로나 인구로나 화북지방에 한참 못미쳤다.

즉, 어느 조건에서든간에 당시 전진의 국력은 동진을 압도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부견이 천하통일이라는 야심을 품을만 했던 것이고.

하지만 킹메이커 왕맹의 생각은 달랐다. 

한때나마 동진의 관직에 몸담았던 사람이라 동진의 저력에 대해 느낀바가 있어서 그런지, 줄곧 부견에게 동진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왔고 평소 자신과 왕맹을 유비와 제갈량에 비유하던 부견도 그런 왕맹을 신임하고 존경했기에 왕맹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왕맹이 죽자마자 부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하들에게 동진 침략의사를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죽은 왕맹의 유언을 이유들어 극구 말렸고 신하들이 하나같이 다들 반대하니 그때마다 부견도 어쩔 수 없이 입을 닫곤 했었다. 

심지어는 답답한 마음에 평소 신임하는 동생 '부융' 에게도 의견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폐하의 시책은 훗날 나라에 큰 화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도 자신에게 동조 해주지 않아서 답답해 하던 부견에게 유일하게 동의 해주면서 동진 정벌을 권하는 이가 나타나는데, 바로 '모용수' 란 인물이었다.

모용수

모용수는 성씨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모용부 선비족 출신의 선비족이었다.

모용외의 손자이자, 모용황의 아들이었다. 모용수도 본래는 전연(前燕)이라는 나라의 왕족이었지만, 과거 전진에 의해 멸망당하고 이제는 전진의 신하가 되어 부견을 섬기게 된 처지였다.

참고로 사진 속 드라마 자막에서도 보다시피 훗날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박살나고 사분오열로 찢어질 때 부견을 배신하고 '후연(後燕)' 을 건국하여 황제가 된다.

아무튼, 모용수는 부견에게 동진정벌의 타당성을 열거하며 곧장 군사를 내어 동진을 칠 것을 권했다.

정말로 모용수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그랬던 것인지 그냥 우연찮게 그리된 것인지는 몰라도 얼마 안 있어 부견은 신하들에게 동진 공격의 의사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서기 383년, 무려 백만에 가까운 대군 동원하여 수륙에 걸쳐 동서로 1만리에 걸친 진용으로 동진 국경 전역에 걸쳐 일제히 남진을 개시했다.

흔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백만대군' 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그만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의 대군을 의미하는 표현인데, 여기서 부견은 수치상으로도 백만에 가까운 대군인 97만을 동원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보병이 60만, 기병이 27만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도합 87만이다. 그럼 나머지 10만은 무엇인가 하니, 위 지도에서도 보다시피 당시 부견은 '여광' 이라는 장수에게 이 10만을 주어 서역을 정벌하게 시켰다고 한다.

대규모 대전을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별개로 다른 전쟁도 병행했다고 하니 그만큼 전진의 국력이 엄청났다는 걸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역시 참고로 말하는거지만 이 '여광' 이란 장수도 훗날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작살나자, 그 틈을 노리고 원정간 서역 땅에서 '후량(後凉)' 이란 국가를 세운다.

엄밀히 말해 비수대전에 동원된 병력은 87만이라 할 수 있겠는데, 말이 87만이지 97만이나 87만이나 엄청난 수치이다.

물론 그만큼의 후송대 같은 보급부대까지 통틀어서 말하는 수치겠지만, 전진의 온 힘을 쏟아부어 치고내려온 대규모 병력이었다.

전진군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뉘어 남침해왔는데, 그 경로는 아래 지도와 같다.

첫번째, 수도 장안(長安)에서 출발한 부견 본인과 동생인 총사령관 부융이 이끄는 한 갈래, 동진의 경기권 격인 양주(楊州)로 침공.

두번째, 하북에서 남하해오는 부견의 아들 '부비' 가 이끄는 한 군세, 역시 양주로 진격하되 다른 방향으로 침공.

세번째, 동진정벌을 주장했던 모용수가 이끄는  한 갈래, 형주(荊州)로 침공.

네번째, '요장' 이란 인물이 이끄는 한 갈래, 촉(蜀)에서 출발하여 모용수처럼 역시 형주로 침공.

참고로 말하자면 이 요장이란 인물도 지금까지의 모용수, 여광이 그랬던 것처럼,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대패하자 배신하고 독립하여 '후진(後秦)' 이란 나라를 세운다.

이렇게 네갈래로 나뉘어 동진 전역으로 침공해 가는 것이긴 했지만, 주력군은 부견 본인과 총사령관 부융이 통솔하는 부대였다.

그리고 '비수대전' 도 바로 부견이 이끄는 부대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동진의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적의 숫자는 무려 87만, 반면 동진군의 주력군 숫자는 고작 8만 남짓했으니 그 차이는 무려 열배에 달했다.

당시 동진의 황제는 제8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사마요'.

사안

신권정치로 불리우는 동진답게 당시 조정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명문가 '양하 사씨' 의 거두이자 예술가이기도 했다. 

시시각각 남하해오는 전진군의 공포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효무제 사마요는 승상  '사안' 을 붙들고 대책을 논의했다.

어찌하면 좋겠냐는 사마요의 물음에 사안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소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신이 저들을 막아보이겠나이다."

명색이 일국의 재상다운 호기롭고도 패기넘치는 대답이었겠지만 어디 1~2천 쳐들어 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병력 차이가 얼마인데 아무렇지 않게 그런 대답을 해버리니 사마요 입장에선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막을거냐면서 재차묻는 사마요의 물음에도 사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소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막을거냐고.."

결국, 효무제 사마요는 사안에게 군권을 위임하고 몰려오는 전진군의 방어를 명했다.

그리고 사안은 그 길로 돌아와 자신 가문의 일족들에게 출정을 명했다.

사현

자신의 동생인 '사석' 을 총사령관으로,  사석의 아들이자 사안 본인에게는 조카가 되는 '사현'  사안의 아들, '사염' 을 나란히 선봉장으로 세웠다.

사석과 사현에게는 두갈래로 나뉘어 전진군의 주력군, 즉 부견이 이끄는 친정군을 요격하게 했고, 별도로 역시 전장터가 된 형주(荊州)로는 '환현' 이란 인물에게 형주를 수비할 것을 지시했다.

동진의 군단부대 위치도

아까도 말했듯이 당시 동진군의 주력군은 대략 8만.

전진군을 맞아 싸울 주력부대는 '북부군' 이라고 불리우는 군단이었다.

북부군은 동진의 정예부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동진의 최전선에 위치하여 5호 16국 시대 동안 남하해오는 이민족들을 방어해내고 한편으로는 북벌에도 참가한 경험이 있는, 그야말로 전투에는 뼈가 굵은 프로들이었다.

그리고 환충이 지휘하게 된 서부군 역시 형주전선을 일임하며 나름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렇듯, 동진에서도 전진의 싸움에 응하여 이제 전장이 될 양주(楊州)의 회남지방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양군이 격돌할 지점은 회수(淮水)라는 강 언저리 쯤으로 보였다.

부견의 부대도 동진의 수도 건강을 노리고 온지라 필히 지나야 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기 383년 10월, 부견의 친정군은 '수양' 이란 곳에 당도했다.

그 전에 먼저 선봉군을 일부 나누어 수양을 점거하게 했는데, 이는 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먼저 요충지를 점거하여 본군의 진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수양은 주요 요충지로서 진출의 교두보이기도 했었기에 동진군에서도 마찬가지로 미리 어느정도의 병력을 미리 보내놓아 수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비수대전의 첫 전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비수대전 전투도

부융은 수양을 지키고 있던 동진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동진군의 지휘관 '호빈' 이란 장수는 결국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협석' 이란 곳으로 물러났다.

한편, 형주에서도 동진군과 전투를 벌인 모용수도 한차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승전보가 날아들었고 첫 전투부터 전진에게는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전진군은 '낙간' 이란 곳에도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목책을 세우게 하여 협석에 고립된 호빈의 동진군과 사석, 사현이 이끄는 동진 주력군과의 연계도 아예 차단시켜 버렸다.

한편, 협석으로 물러난 호빈의 동진군은 계속해서 전진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군량마저 부족해지자 호빈은 전령을 띄워 총사령관 사석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도중에 전령은 전진군에게 붙잡혀 그 때문에 협석에 고립된 동진군의 정보는 그대로 부견에게 전달되었다.

부견은 즉각 부융에게 협석의 동진군 공격을 명하는 한편, 동진군의 총사령관 사석에게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게 했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효무제 사마요와 승상 사안 및 동진의 신하들을 위한 새로운 관직과 집까지 마련해두고 나온 부견이었다.

전쟁으로 동진을 멸하고 난 뒤, 동진의 황제와 신하들까지 자신의 신하로 둘 것이라는 야심찬 퍼포먼스였을 것이며, 그만큼 처음부터 이 전쟁에 자신만만해하던 부견이었기에 이런 항복 권유글도 여유있게 보냈던 거였다.

하지만, 부견은 이것이 패전의 치명적인 첫번째 요인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부견의 명으로 동진군 진영으로 떠난 사자는 '주서' 라는 인물이었다.

근데 주서의 출신이 좀 묘했다. 본래는 동진의 장수로, 불과 몇년전에 형주를 지키다가 전진의 침입을 받고 패하자 어쩔 수 없이 전진에 투항하여 이제는 전진의 장수가 된 인물이었다.

비록 어쩔 수없이 전진에 투항하긴 했지만 주서는 아직 동진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었다.

다시 동진으로 귀순하고 싶었겠지만 그러자니 두번이나 주인을 배반한 놈이라는 소리가 듣기 무서웠을 것이고, 그래서 동진으로 귀순할 때 동진에서도 뒷말 없이 받아줄 수 있는 수준의 공을 세우고 투항하기로 하는데, 바로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전진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동진군의 진영에 도착한 주서는 일단 사자로서의 할 일을 하고자 부견의 항복권유 서찰을 전달하고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예비 귀순자로서 사석과 동진의 장수들에게 전진군의 정보에 대해 귀띔해줬다.

"부견이 이끄는 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신속히 이곳 전진군의 선봉대를 꺾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본군까지 와서 합세하게 된다면 실로 이기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선봉이 무너지면 전진군은 사기가 꺾일 것이고 그 나머지를 물리치기란 쉬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기밀유출이었지만 이는  당시 전진군의 진용이나 병력규모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했던 동진군에게 있어서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전진군의 본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과,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전진군이 선봉대라는 걸 알게된 이상,  선봉대를 격파하여 적의 예봉을 꺾어두면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이란 것은 오랜 세월 무관직에 몸담아 온 사석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석은 먼저 낙간에 주둔하며 협석에 고립된 호빈과 사현의 합류를 중간에서 막고 있는 전진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전략을 세운다.

당시 낙간의 전진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수는 '양성' 이란 인물이었다.

수적으로는 불리하니 야간기습을 감행하기로 했고 특공대를 이끄는 이끄는 장수는 '유뢰지' 란 장수였다.

유뢰지는 동진에서 알아주는 맹장이었고, 특히 그가 지휘하는 군사들은 정예로 불리우는 북부군단 소속이었다.

휘하의 맹장과 정예병들을 보낼만큼 사석은 이번 전투에서 최상의 패를 꺼내든 셈이었다.

양성을 목베는 유뢰지

그날 밤 동진군은 몰래 비수(淝水)를 건너 낙간으로 쳐들어가 방심하고 있는 전진군의 진영으로 들이닥쳤다.

양성은 자다 일어나서 잠결에 허둥대다가 날아든 유뢰지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지휘관을 잃은 전진군은 우왕좌왕 하다가 죄다 동진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야간기습으로 전진의 선봉대는 거의 전멸당하고 말았고 동진군의 사기는 갑절로 솟았다.

낙간에서 대승을 거둔 동진군은 기세를 몰아 '팔공산' 까지 진격해 나갔다.

사현은 팔공산에 진영을 세우고 곧 당도할 전진의 본대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한편, 선봉대가 궤멸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부견은 자신이 직접 동진군의 진영을 정찰해보겠다며 '수양산' 에 올라 팔공산에 진을 내린 동진군의 진영을 살펴봤다.

그러나 오합지졸이라 여겼던 동진군의 진영은 방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조금도 빈틈이 없어보였으며, 동진군의 기세가 만만찮음을 깨달은 부견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이들 또한 강하거늘 어찌 약하다고 했는가!"

자신이 뜻하던대로 전쟁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을 직감한 탄식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서기 383년 11월, 얼마 후 부견이 지휘하는 전진군 본대는 '비수(淝水)' 에 이르렀다. 

사현이 이끄는 동진군도 비수를 사이에 두고 회전(會戰)의 구도로 전진군과 대치했다.

이렇게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구도라면 먼저 공격하는 쪽이 핸디캡을 안고 싸우게 되는데,

현재의 '비수'

아무래도 강을 건너오게 되면 도하 도중에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울 뿐더러 막아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방어하는 쪽은 도하하느라 버벅대는 적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는 이로움이 있어 어느쪽에서든지 먼저 선뜻 공격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전진군 보다 수적열세인 동진군 입장에서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석은 부견에게 서신을 보내 이렇게 말한다.

"강가 옆의 진영을 좀 더 뒤로 물려준다면 우리의 병력이 강을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승부를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부견이 봤을 가뜩이나 병력도 모자란 마당에 먼저 선공을 하겠다고 했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석이 바보도 아니고 단순히 그런 무모한 전면전을 감행할 생각은 없었고,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사석의 서신을 읽은 부견은 동진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자 제장들은 분명 동진군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거라고, 들어줘서는 안된다고 뜯어 말렸다.

하지만 부견도 전쟁터에서 늙은 사람이었으며, 사석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건 간에 그걸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었지.

동진군의 요구대로 진영을 옮기는 척 하다가 동진군이 강을 건너오는 그 찰나에 공격을 가하여 궤멸시켜 버리려던 계책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공격에 노출된 적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봐줄 얼빠진 자는 없으며, 약속이고 뭐고 일격에 몰살시켜버릴 생각이었다.

이렇게 서로가 저마다의 꿍꿍이를 가진채 약속대로 전진군은 철수하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그 사이 동진군은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부견은 흐뭇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천하가 나의 것이 되는구나 하며 동진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참으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부견의 명으로 동진군 진영에 항복권유 서찰을 전달한 주서

"아군이 패했다!"

그때 전진군의 후방에 있던 주서가 갑자기 아군이 패했다고 외치며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서는 그때 동진군 진영에서 사석과 사전에 모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비단 전진군의 정보만 흘렸을 뿐만 아니라 비수에서 대치할 때 전진군의 후방에서 헛소문을 흘려 전진군을 혼란스럽게 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진군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 하는 사이 강을 건너오는 동진군이 재빠르게 전진군을 들이치기로 한 것까지 모두 계획대로였다.

뜬금없는 주서의 선동에 전진군은 처음에는 믿진 않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전진군 내부에 공포감이 급속도로 전염되었고, 진위 여부도 미처 가릴 틈도 없이 전진군은 어이없게도 주서의 선동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공포에 질려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걸 보고 주서의 선동능력을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87만 전진군을 멍청하다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장수들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진군 사이로 패전의 공포는 메마른 들에 불이 번지듯 빠르게 확산되어 갔고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그리고 바로 그 틈을 타 강을 다 건넌 동진군은 재빠르게 전진군 진영으로 돌격해나갔다.

이미 진용이고 뭐고 다 흩어지고 앞다투어 도망가기 바쁜 전진의 군사들과 싸움이 될리가 없었다.

차라리 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동진군은 전진군을 깨부수며 진격했다.

비수대전 기록화

이때의 난전으로 전진군의 총사령관 부융은 전사했고 부견도 화살을 몇대 맞는 수모를 당했다.

대혼란 속에 달아나던 전진군은 저들끼리 도망가다 넘어져서 밟혀죽은 숫자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사현파진백만대병도>

그림의 제목은 '사현이 백만대병을 깨뜨리다' 라는 뜻이다.

난전을 묘사한 그림.

왼쪽이 달아나는 전진군이고 오른쪽이 뒤쫓는 동진군이다.

병사들 개개인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진군에게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반면 동진군의 표정은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것 같다.

사현이 진을 쳤던 팔공산의 동진군 진영을 묘사한 깃발들.
달아나는 전진군.
그리고 달아나는 부견을 묘사한 부분.

기록에는 전진군의 피해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로 짓밟혀 죽은자가 개울과 산을 덮었고 바람소리나 새 울음소리만 들어도 진(晉 : 동진)의 군사들이 추격해온 걸로 여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갔으나 도중에 지치고 굶주려 추위로 죽은 군사들이 열에 일곱여덟이었다."

동진군은 도주하는 전진군을 3백리나 더 추격하고 나서야 추격을 그만두었고, 전진군은 이 전투 한방으로 수십만 대군을 소진한 탓에 국력이 크게 쇠퇴하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석은 승전보를 조정에 알렸고 조정에서는 어찌보면 전진을 막아낸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사안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손님과 한가롭게 바둑을 두는 사안을 그린 그림.

그때 사안은 마침 집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파발마가 와서 승전보를 알렸건만 사안은 얼굴 표정 하나 안변하고 무덤덤하게 알았다고 했다.

"자식놈들이 적군을 깨뜨렸다는군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손님에게 사안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다.

하지만 손님이 돌아가자 사안은 신발굽이 문지방에 부딪혀 부러진 것도 모를 만큼 흥분했다고 한다.

비수대전 이후 화북에서의 상황.

전진은 점점 세력이 약해지다가 후진, 서진 같은 나라들에게 결국 멸망당하고 만다.

아무튼, 비수대전 이후 패전의 타격이 워낙 컸던지라 이때를 계기로 전진은 사분오열 되기 시작한다. 

앞서 위에서 말한 모용수, 요장, 여광 같은 전진의 신하들은 저마다 나라를 하나씩 세웠고 결국 부견도 정변으로 살해당한다.

그리고 서기 439년, 북방에서 일어난 선비족의 북위가 다시 화북을 재통일하기까지 분열의 시대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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