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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의 갑주

오다, 도쿠가와 연합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던 다이묘인 다케다 신겐의 갑옷이다. 

다케다 가문은 전국시대를 끝으로 멸족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가문이며, 전국시대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 아래 최강의 가문으로 군림했기에 일본 내에선 인기 1,2위를 다투는 가문이기도 한다.

영화 명량에서 구루지마가 이 갑옷을 색깔만 바꿔서 입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갑주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원수, 가토 기요마사의 갑주이다.

일본 칠본창의 한명으로서 임해군을 사로잡았다. 

대게 일본 무장들은 말년이 불행한데 가토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고니시의 영지까지 흡수하고, 일본 3대 명성중 하나인 구마모토 성까지 축조했다.

가토의 구마모토성

토가 임진왜란때, 울산성에 명군과 조선군에 포위되어 식량과 물이 없어 고전한 경험이 있어 다다미를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서 깔아둔 성이다.

우물도 엄청 팠다.

 

도도 다카도라의 갑주

"무사는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무사가 아니다."라고 주군을 헌신짝버리듯 갈아탄 무장으로 유명한 도도 다카토라의 갑옷, 능력은 있었던 장수였던 것 같다.

명량에서 나온 도도 다카도라

 

 

다테 마사무네의 갑주 

오슈(奧州)의 패자,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의 갑주이다.

일본 내 전국시대 무장 중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하는 인물 중 하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두려워한 다이묘이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릴 1순위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먼 훗날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건 오슈, 정 반대편인 시마즈와 모리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진주성에서 조선 백성들 전부 학살해린 우리나라의 원수이며, <간양록>에서 "왜장 중 가장 음흉하고 사악한 인물"이라고 기록될 만큼 싸이코패스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주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주이다.

임진왜란의 원흉이고 평민부터 관백의 자리까지 오른 전국시대 출세가도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 이케치 미츠히데에게 급습당해 혼노지에서 운명을 달리하자, 당시 최전선에서 모리가와 접전중이던 도요토미는 모리가와 화의를 맺고 이케치 미츠히데를 제압하여 오다가의 부흥을 위해 천하를 쥐지만 이는 사실상 히데요시의 야망을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란게 기정 사실이다.

이후에 관백의 자리에 오르고, 너무나 잘 알려진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다.

결과는 이순신 장군님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실패하고, 후에 병을 얻어 죽어버리고, 도쿠가와에게 천하를 내주고 만다.

KBS 사극 '징비록'에서 배우 김규철씨가 열연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적으로 가장 부합되는 도요토미의 이미지

 

 

혼다 타다카츠의 갑주

삼국지에 여포가 있다면 전국시대에는 혼다 타다카츠가 있었다.

도쿠가와 4천왕 중 한 명으로, 어렸을때부터 도쿠가와를 쫒아다녔고 평생을 그를 따라다니며 활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과분한 2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는 중국의 갑옷이오. 다른 하나는 혼다 헤이아치로이다."라는 말이다.

안하무인인 오다 노부나가 조차 "꽃과 열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용사"라 평할 정도니 그 활약이 실로 대단한건 확실한 것 같다.

혼다 타다카츠 갑주 어깨에는 특이하게 염주가 걸려있는데, 자신에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를 지키기 위해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혼다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들자면 혼다는 평생 전쟁터를 누볐음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사천왕인 사카이 타다츠쿠와 많이 대립했다.(사카이는 상처투성이인 반면 혼다는 멀쩡하니 사카이 입장에서는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후에 말년에 나무칼로 이름을 새기던 도중 살짝 손가락을 다쳤는데 이를 보고 혼다는 "나도 이제 다 됬군." 란 말을 남기고 얼마 안가 숨을 거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주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옷이다.

어렸을때는 유력 가문의 인질 생활을 했고, 말년이 되기전까지는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임진왜란 후 도요토미가 죽고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천하의 주인이 된다. 

도쿠가와 가문의 상징 문양

 

 

우에스키 겐신의 갑주

전국시대 최강의 다이묘 군신(軍神) 우에스키 겐신의 갑주이다.

사진 속 갑주는 실제를 본뜬 재현 갑주가 아닌, 갑옷공장에서 만든 창작물이라고 한다.

우에스키 겐신은 스스로를 비사문천 (毘沙門天)의 화신으로 믿고있었서 전쟁터에서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제일 선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비사문천의 화신이기 때문에 총알이 자신을 빗나간다고 믿었다고 한다.)

다케다 가문과는 가와나카지마에서 5번 (7~11번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5번)의 전투를 치루면서 전국시대 최고의 호적수로 군림한다.

후에 다케다 신겐이 상경 도중에 죽고, 그 이후에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을 치러가지만 겐신 역시 상경 중에 급사하고 만다.

일본드라마 풍림화산에서 겐신을 연기한 각트

우에스기 겐신의 일화 중 가장 유명한건 소금사건인데, 내륙지방인 다케다가 주변국들의 견제로 소금을 얻을 수 없어 곤란해지자 당시에 호적수로 군림하던 우에스기 겐신이 "싸움은 창과 칼로하는 것이지, 백성들이 고통받을 이유는 없다."라며 소금을 유통시켜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위의 일화는 허구라고 한다.

 

 

이이 나오마사의 갑주

도쿠가와 이에야스 4천왕 중 한명인 이이 나오마사의 갑주이다.

외모가 상당히 뛰어나, 남색을 그리 즐기지 않았던 도쿠가와가 시동으로 삼고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다이묘들은 대게 예쁘장한 남자아이들을 시동으로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목적은 개인 상상...)

성인이 되어서는 "붉은 귀신","살인귀 효부"이라 불리면서 용맹을 떨쳤다고 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별도로 나오마사의 군대를 조심하라 할 정도였다고 했다.

 

 

사나다 유키무라의 갑주

다테 마사무네와 함께 일본에서 인지도 1, 2등을 다투는 무장 사나다 유키무라의 갑주이다.

머리에 여섯개의 동전 문양이 있는데 "륙묵전"이라 해서 저승길 길삿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가 곤경에 빠지자, 참전하여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면서 도쿠가와를 수차례 곤란에 빠드렸다.

후에 도쿠가와가 수차례 항복을 권하지만, 무사의 의리를 들며 끝까지 항전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로부터 " 일본 제일의 무사" 라는 극찬을 받는데,  사나다 10용사 일화도 유명하다.

유키무라가 사수했던 오사카성

 

 

나오에 카네츠구의 갑주

머리에 사랑애(愛) 글자가 인상적인 나오에 카네츠쿠의 투구이다.

우에스키가의 충신으로써 지략가로써 이름을 날린다.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서 공을 세우고 30만석의 영지를 받는데, 도요토미 사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번목하나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 도쿠가와의 가신으로써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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