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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instiz.net/pt/4857389?page=1&k=%EC%9D%BC%EB%B3%B8%EC%A0%84%EA%B5%AD%EC%8B%9C%EB%8C%80&stype=9

 

 

사나다 가문의 문양인 육문전.

육도전이라고도 불리며, 여기에서 육도란 불교에서 말하는 죽은 사람이 가는 여섯 행로를 말한다.

그 삼도천을 건너는 노자라고 보면 된다.

 

 

시마 사콘,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전국시대 3군략이라고 불리는 사나다 마사유키이다.

이 마사유키를 표현하는 말 중에 표리비흥이라는 말이 있는데, 원래 겉과 속이 다른 자.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겉보기와 달리 보통이 아닌 자. 라고 해석되고 있다.

 

 

높은 통솔과 지력이 돋보이는 그의 능력치.

 

 

사나다 마사유키의 아버지인 사나다 유키타카(유키무라에겐 할아버지)는 다케다 신겐의 군사로 유명하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세번째 아들이다.

 

 

본래 사나다 가문은 지도에 위치한 북 시나노에 위치한 가문이었으나 본거지를 잃게 되면서 다케다 신겐을 섬기게 된다.

(붉은 배경에 노란색 마름모 네개가 들어간게 다케다 신겐의 문양)

 

 

야마모토 간스케라는 전설적인 군사가 있지만,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가는 알 수 없고 사실은 야마모토 간스케가 했던 모든 책략들이 사나다 유키타카가 했다는 얘기가 있다.

타고난 전략가 가문이라고 보면 된다.

 

 

1. 성장

 

 

사나다 유키타카 아들인 마사유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다케다 신겐의 총애를 받으며 자란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처음 참전한 전투는다케다 신겐이 라이벌 우에스기 켄신과 치열하게 싸웠던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한다.

그때 마사유키의 나이는고작 15살이었지만 이미 아시가루(보병이라고 해석하면 됨) 부대의 대장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에게 참패했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도쿠가와 일생일대 최악의 전투)

이후에는 다케다 신겐의 총애를 받으며 시나노에 위치한 누마타라는 성을 다스리게 된다.

 

 

2. 다케다 신겐 사후

오다 노부나가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던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케다 신겐이라는 강한 다이묘를 중심으로 뭉치던 호족들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사유키의 아버지인 유키타카도 신겐이 죽은 다음해 죽게된다.

 

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케다 카츠요리

 

이후 신겐의 아들인 카츠요리가 당주가 되지만, 이미 가문은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다케다가 멸망하는 나가시노 전투(오다, 도쿠가와 연합군 vs 다케다 군)가 열리게 되며 다케다는 멸망하고, 카츠요리는 할복하여 자살한다.

이때 사나다 마사유키의 두 형이 모두 죽게 되어서 사나다가문은 마사유키가 이어받게 되었다.

다케다 멸망 후 마사유키는 사나다 선조들의 고향이었던 시나노에 자리를 잡는다.

 

주변 강대한 세력에 비해 초라해보이는 육문전, 사나다 가문

 

마사유키는 가문의 보존을 위해, 서쪽에 위치한 강대한오다 노부나가에게 신종하게 되나, 노부나가를 따르기로 한 3개월 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며 노부나가가 죽고 오다 가문이 분열된다.

사나다 입장에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힌 격이었다.

 

 

3. 처세술의 달인

 

 

지도를 보면 오다가가 찢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케다의 영토를 점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사유키는 오다가의 집안 싸움을 틈타 시나노의 누마타 성을 점거하며, 사나다 북쪽에 위치한 우에스기에게 신종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에스기를 배신하고 동쪽의 호조를 따르기로 한다.

아직도 배신은 끝나지 않았으니, 호조가 우에스기와 대치하는 그림을 그린 후에는 다케다를 집어삼키고 새롭게 강대한 세력으로 떠오른 도쿠가와를 따르게 되었다.

격노한 호조는 누마타 성을 공격해오지만 마사유키는 이를 방어했고,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설득하여 북방의 우에스기를 견제하기 위해 강대한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야스는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모든 물자를 지원해주고, 마침내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을 축성했다.

여기까지는 약소국이 강대국 사이에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지만, 호조가 도쿠가와하고 동맹을 맺게 되어버린다.

그러면서 그 협정의 조건으로 누마타 성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자력으로 누마타 성을 탈취한 사나다 입장에서는 억울한 처사였고, 그렇기에 도쿠가와를 배신하고 우에스기에 다시 붙어버린다.

이때 포로로 아들인 노부시게(훗날의 유키무라)를 우에스기로 보내게 된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점거하거나 축성했던 지성들.

주변이 험악한 산지로 구성되었던 지역에 천연의 요새라 할 수 있다.

 

 

4. 제 1차 우에다 전투

당연히 도쿠가와가 괘씸한 사나다를 가만둘리 없었고, 도쿠가와는 7000의 병력을 사나다 본성인, 이에야스 자신이 축성하도록 시키고 모든 물자를 지원했던 우에다 성에 공격을 하게 하고, 동맹국인 호조에게 누마타 성의 공격을 시킨다.

여기서 사나다 마사유키의 전설적인 군략이 드러나는데 이게 제 1차 우에다 전투라 불리는 전투이다.

 

 

도쿠가와의 7천 군대를 막는 사나다군은 주변 농민들까지 끌어모은 겨우 2천밖에 안되는 숫자였고, 나가서 싸우는 전투에 승률이 없음을 깨달은 마사유키는 성을 끼고 싸우는 농성전을 택한다.

먼저 게릴라 전술로 200명의 날랜 병사를 뽑아서, 도쿠가와의 전방 부대를 유인했고 일부러 성문을 열어 도쿠가와의 군대를 우에다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성을 함락시켰다고 방심하는 도쿠가와 군을 향해 일제 사격과 함께 돌과 나무를 이용해 공격한다.

뒤늦게서야 마사유키의 책략임을 깨닫고 당황하고 도망치려던 도쿠가와 군이지만, 사나다 마사유키 일생일대의 축성 경험을 살려 지은 우에다 성은 미로 그 자체였다.

겨우 살아남아 도망치는 적군은 이미 성 밖에 위치하여 대기하고 있던 부대가 2차로 기습하여 공격했고, 성 안에 적을 가둔 다음에 불을 질러서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도쿠가와군은 7,000명 중 1,3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사나다 측은 겨우 40명의 사상자밖에 발생하지 않았다.

사나다 마사유키의 완승이었다.

이는 실제 오늘날 일본의 육상자위대에서 가르치는 유일한 농성전이라고 한다.

호조의 공격 누마타 공격 또한 성 함락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 우에다 전투로 인해 사나다는 우에스기와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지원을 요청했지만 우에스기는 적은 숫자의 군대만을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결국 우에스기를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고, 또 노부시게(유키무라)를 인질로 보낸다.

 

 

5. 히데요시를 따르며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나다 마사유키와의 중재를 하게 되고, 관백의 명령인지라 도쿠가와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를 위해 도쿠가와의 가신이었던 혼다 타다가쓰의 딸이었던 이나히메와 사나다 마사유키의 첫째 아들인 사나다 노부유키가 결혼을 하게 된다.

 

도쿠가와 가문 제일의 맹장이었던 혼다 타다가쓰

 

하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 결혼에 반발했다.

"나도 다이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다이묘인데 왜 다이묘의 아들과 다이묘 가신의 딸이 결혼해야 하냐!"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다 타다가츠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입양하여 노부유키와 결혼시키게 된다.

 

혼다 타다가쓰의 딸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이나히메

 

히데요시는 천하의 중재를 위해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누마타 성이 있는 영지의 3분의 2를 호조에 넘겨주라고 명령하지만, 대신 다른 땅을 사나다에게 주었기에 영지가 작아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호조는 히데요시의 천하에 반발했고, 히데요시는 호조를 토벌하기로 한다.

호조와 히데요시는 이미 싸움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호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나다 마사유키는 냉큼 빼앗겼던 누마타 영지도 다시 되찾게 된다.

 

 

6. 세키가하라 전투

그렇게 잠시나마평화를 얻었나 했더니 히데요시가 죽고 만다.

그리고 강대한 도요토미가를 이루고 있었던 가문들 사이에서는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마침내 세키가하라 전투로 번지게 된다.

히데요시가 죽자마자,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야욕을 불태우고 아군과 적군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 첫 시작은우에스기 가문이었다.

우에스기는 히데요시가 죽었음에도 상락을 하지 않았는데, 도쿠가와는 이를 빌미로 혹시 너희가 반역을 꿈꾸고 있는게 아니냐! 라고 주장한다.

 

 

이에 우에스기가의 나오에 카네츠구는 '나오에장'이라 불리는 긴 편지를 보내는데,

"님은 우리한테 역심을 해명하려면 상락하라고 하시는데, 역심은 당신이 품은게 아닌가? 우리 주군은 태합 전하(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한 분, 근데 당신은 태합 전하가 죽자마자 권세가들과 사돈관계를 늘리기 바쁘신데, 우리 주군은 그런 수치도 모르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이었으며, 이에 격노한 도쿠가와는 군대를 일으켜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우에스기 공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부대엔 사나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야욕의 그릇을 잘 알고 있었고, 언젠가 자신들의 영지인 우에다를 다시 한번 노릴 것이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도요토미가의 2인자였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쿠가와가 아닌 자신들에게 붙으면 크게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시다 미츠나리

 

당시 일본 천하에서 도쿠가와에게 패배를 안긴 인물은 사나다 마사유키가 유일했다.(마지막 패배를 안긴 다케다 신겐은 이미 죽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가문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도쿠가와 가문과 정략적으로 묶인 첫 아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가 속해있는 동군으로, 사나다 마사유키 자신과 둘째 아들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으로 참전한다.

이렇게 하면 둘 중 누가 이기던 끝내 가문을 유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7. 제2차 우에다 전투

 

 

사나다 마사유키를 곱게 보지 않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인 히데타다약 3만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사나다의 우에다 성 공략을 개시했고, 이는 빠르게 우에다 성을 점거하고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사나다의 병사는 고작 2,000명 남짓이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아버지를 공격해오는 노부유키에게 일부러 지성인 토이시성의 함락을 성공하도록 하고, 이로 인해 노부유키는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면서 본성인 우에다 성은 계속하여 농성중이었다.

마사유키의 기묘한 군략에 히데타다는 계속하여 농락당하며 성을 점거하지 못하고, 빠르게 도쿠가와 본대와 합류해야 했지만 성은 쉽게 넘어오지 않아서 점점 초조해졌다.

그렇게 사나다는 1주일동안의 농성에 성공하고 마침내 도쿠가와 군은 우에다 성 공략을 포기하고 세키가하라로 진격하게 된다.

하지만 히데타다의 군대는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참여하지 못해 지각하고 만다.

제2차 우에다 전투의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도쿠가와 측 사료에 의하면 "아군이 크게 패했고, 사상자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다." 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8. 세키가하라 전투의 끝에서

3만 8천이란 대군을 사나다가 묶어뒀음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도쿠가와의 동군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죽음과 함께 서군의 패배가 확실해 지면서 사나다는 결국 도쿠가와에게 항복하게 된다.

생전의 히데요시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보고 표리부흥한 자,(겉보기와 달리 보통내기가 아닌 자)라고 표현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술 더 떠 사나다 마사유키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혼다 타다가쓰와 노부유키의 탄원으로 인해 결국 쿠도산에 유폐시켜 버린다.

일본 전국시대 제일의 군략가 사나다 마사유키는 그렇게 유폐되어 죽어갔다.

그의 나이 향년 65세였다.

사나다 마사유키의 모든 영지는 몰수됐지만,(3만 8천석) 사나다 노부유키는 오히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까지 합쳐서 (9만 5천석) 대 다이묘가 된다.

 

 

9. 평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수차례 고배를 마시게 한 천재 지략가.

후편에 다룰 사나다 유키무라의 이야기에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나다 마사유키를 두려워했다는 말은 계속해서 나올 정도로 그에게 있어 천적 수준이었다.

다케다 신겐에 대한 충성심

본래 다케다 가의 가신이었고, 다케다가 멸망하자마자 오직 사나다가를 존속시키려고 한 모습에서 충성심이 없는 인물이라 생각 할 수 있지만 다케다 신겐에 대한 충성심은 엄청났다고 한다.

히데요시와 바둑을 두다가 다케다 신겐을 비판하는 히데요시를 나무라며 다케다 신겐을 칭송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일본 전국시대 인물을 다루는 것에 있어 가장 민감한 임진왜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참조글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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