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용사, 사나다 유키무라
참조글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266
출처 : https://instiz.net/pt/4981854
사나다 유키무라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슴뿔 투구와 붉은 갑주, 십자창 그리고 사나다 가문의 문양인 육문전이다.
높은 통솔과 무력이 돋보이며, 아무래도 그 아버지가 사나다 마사유키니까 지력도 은근 높게 책정되어 있다.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인기 인물로 3대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나다 유키무라 위에는 오다 노부나가 밖에 없지 않을까하다.
사실 일본 제일의 용사라 칭송된건, 생존에 유행했던 말은 아니고, 그가 죽고난 후인 에도 시대에 이르러 유명해진 말이다.
또한 흔히 알려진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은 생전에 사용된 적이 없고, 본명은 사나다 노부시게로, 사나다 마사유키의 둘째 아들이다.
1. 어린 시절
유키무라의 조부인 유키타카 대에 다케다 신겐에게 귀속했고, 그의 아버지인 사나다 마사유키는 두 형이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나가시노 전투) 가문의 상속을 잇게 된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따르기로 하지만, 3개월 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급사하며 가문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다.
사나다 육문전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우에스기 가문이,
동족에는 호조 가문,
남서쪽은 도쿠가와가 위치해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하나하나가 강대한 가문들이어서 사나다가 그들 사이에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으나 사나다 마사유키는 우에스기가에게 신종을 하기로 하고, 그 아들인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를 인질로 보내며, 그 곳에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의 신뢰를 받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사나다 가문이 도요토미를 따르기로 했고, 우에스기 또한 도요토미에 항복했기에 노부시게(유키무라)는 도요토미에 인질로 보내진다.
하지만 말이 인질이지, 우에스기 가문에서처럼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인재보기로 뛰어났던 히데요시가 총애했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됐던 노부시게(유키무라)였고, (말이 인질이지 이미 항복해온 가신이며, 사실 성장하면 잘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히데요시 뿐만 아니라 오타니 요시츠구의 이쁨을 받은 노부시게는 그 딸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도요토미가에서 사에몬노스케라는 벼슬을 얻고, 이는 오늘날로 치면 경호대장 쯤 되는 위치였다.
물론 임진왜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가 죽고 강대했던 도요토미가는 분열되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세력(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모인 세력(동군)의 싸움이 일어났다.
이를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서군의 주축이었던 4인방
당시 유키무라의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 또한 동,서군 양측 모두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있었고, 영입 제의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사나다 가문은 논의를 시작했다.
사나다 유키무라의 장인어른인 오타니 요시츠구가 서군에 속해 있었기에 유키무라는 서군을 지지하였고, 유키무라의 형 노부유키의 장인 어른인 혼다 타다가츠는 도쿠가와의 가신이었기에 동군에 속한 입장이었다.
마침내 사나다 마사유키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노부유키는 동군에 속하게 하고 자신과 유키무라는 서군에 들어갔다.
하지만 서군인 사나다가 위치한 곳은 동쪽(서군 세력은 겉 테두리가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세력이라고 보면 된다.)
(교토 중심부에 위치한 푸른 문양이 이시다 미츠나리, 옆에 위치한 노랑, 하늘색 문양이 도요토미가다.)
그리고 도쿠가와의 대군은 이에야스 자신의 군대와 훗날 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부대
둘로 나눠 세키가하라로 진격한다.
사나다는 본성인 우에다 성에서 히데타다의 군대와 맞서게 되는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대 3만 8천, 사나다의 본성 우에다의 병력은 2500명이었으며, 이게 바로 2차 우에다 전투이다.
사나다 유키무라 또한 2차 우에다 전투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나다는 멋지게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격퇴했지만, 이것과 관계없이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군이 패배한다.
오타니 요시츠구는 전장에서 할복하여 자결하고,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거리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우키타 히데이에는 유배지에서 그 생을 다하게 되며, 서군에 속했던 사나다 마사유키도 쿠도산으로 유폐된다.
사나다 유키무라 또한 그 아버지와 함께 유배 보내진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때 사나다 유키무라의 처자식만 해도 10명이 넘는 숫자였고, 마사유키의 일가(가신들 포함)를 포함하면 사나다 일가는 50명이 넘는 숫자였다고 한다.
말이 유폐지, 상당히 자유로웠던 생활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큰아들인 노부유키의 배려였다.(하지만 금전적으로는 항상 부족했다고 한다.)
그리고 희대의 전략가 사나다 마사유키는 쿠도산에서 그 생을 마감한다.
3. 성장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이 패배했음에도, 도요토미가는 아직 건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의 사이가 틀어지며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미 일본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도쿠가와를 따르기로 했지만, 도요토미가의 오사카 성에는 그동안 축적된 막대한 재산이 있었고, 그 재산을 이용해 각지에서 낭인들을 끌어모은다.
말이 낭인이지, 전쟁으로 인해 가문을 잃은 다이묘들도 있었다.
도쿠가와군 약 20만, 도요토미군 약 10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도요토미가는 쿠도산에 유폐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도 사자를 보내 영입 제의를 시도했으며, 그 보상으로 황금 200장, 은30관이라고 한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약 10억엔, 한국돈 100억원이라고 보면 된다.)
이에 사나다 유키무라는 아들인 다이스케와 함께 오사카 성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들어가게 되는데, 이에야스는 그 소식에 매우 놀라며
"사나다가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고? 아들이냐 아비냐!" 라고 물었다고 한다.(이에야스가 얼마나 마사유키를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사이다.)
그리곤 아들이라는 대답에 안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미 10년 동안의 유배 시절을 통해 아버지 마사유키로 부터 배운 다케다 신겐류군략으로 인해 '완성된' 상태였다.
오사카성에 들어간 사나다 유키무라는 자신의 부대의 갑옷과 투구, 무기까지 전부 온통 붉은 색으로 칠했다.
이는 아카조나에라고 불리는 다케다 신겐의 정예부대를 표방했다고 봐도 된다.
4. 오사카 겨울의 진
당시 오사카 성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의 어머니인 요도도노였다.
이 요도도노가 누구냐면,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이시와 아자이가의 나가마사 사이에서 난 딸인데, 그 아자이가를 멸망시켰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있던 히데요시였으니 원수와 결혼한 셈이다.
그리고 요도도노는 온건파의 보스라 할 수 있는 오오노 하루나가를 지지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 평생 동안 단 두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 요도도노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이다. (그마저 첫째는 애기때 죽는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학자들은 히데요시가 사실 고자가 아니었는가 하고 예상하는 사람도 많는데, 그럼 히데요리의 존재는 어떻게 된거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텐데, 히데요리는 결국 요도도노와 오오노 하루나가 사이의 자식이 아니었나 싶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오사카 성에 농성하자는 온건파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오사카 성에서 도쿠가와 군을 상대하게 되는데 오사카 성은 히데요시가 세운 천연의 요새였지만, 남쪽 벽이 약점이었다.
유키무라는 그곳에 '사나다마루'라 불리는 흙으로 만든 외성을 만들게 되고 도쿠가와 군을 막게 된다.
당시 오사카 성의 구조인데, 동쪽과 북쪽엔 강을 끼고 있고 서쪽엔 아예 바다가 있어서 방어에 용이했다.
남쪽에 툭 튀어나온게 사나다마루이다.
사나다마루는 2층으로 된 구조였다.
성 앞엔 해자가 있었고, 해자에 들어가면 2층에서 쏘는 조총에 맞아 죽고, 해자를 오르기 위해 올라오면 1층에서 쏘는 총과 창에 죽는 구조였다.
이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가 이끄는 군대는 5,0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배가 넘는 1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만들며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에야스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영입하기 위해 "10만석을 주겠다."라고 하며 귀순하라 하지만 유키무라는 거절한다.
그러자 이번엔 시나노 일국을 주겠다고 하지만, "이 노부시게, 10만석으론 불충한자가 되지 않아도, 시나노 1개국으로는 불충한자가 된다고 생각하나?" 라고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5. 오사카 여름의 진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양군은 화친을 맺게 된다.
사실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도요토미 측이었지만, 요도도노가 화친을 받아들여서 결국 도쿠가와 군을 괴롭혔던 사나다마루의 해자는 이때 매워지게 되고 사나다마루 또한 없어지게 된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오사카성에는 아직 5만이 넘는 낭인들이 남아있었다.
도요토미 측에서도 갑자기 도쿠가와가 배신을 하면 대항할 수 없기에 남겨둔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왜 낭인을 5만씩이나 남겨뒀냐며 막부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것이냐 라며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어오고, 그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다른지역으로 옮겨 가던지 아니면 낭인들을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
말만 돌려했을 뿐이지둘다 항복하라는 말과 다름 없었으며, 그렇게 다시 오사카 여름의 진이라 불리는 전투가 발생한다.
이미 겨울의 진 화친때 사나다마루를 비롯한 해자를 모두 매워버렸기에 오사카 성안에서 농성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오사카 5인중은 나가서 싸우길 요청하지만 역시 오오노 하루나가를 비롯한 요도도노가 거절함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유키무라 등은 오사카 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도쿠가와 군과 싸우게 된다.
도쿠가와는 총대장을 마츠다이라 타다테루로, 그리고 후견인을 그 유명한 애꾸눈의 다테 마사무네로 임명한다.
그렇게 3만 5천의 군대가 오사카로 진격했다.
이에 도요토미군은 선봉에 고토 마타베가 6,000명을 본대에 사나다 유키무라가 이끄는 12,000명을 포진시킨다.
본래 도요토미군의 작전은 좁은 협곡에서 합류하여 싸울 생각이었지만 이른 새벽의 안개가 이를 방해해 이뤄지지 못했다.
이곳에서 홀로 남겨진 마타베는 수차례 적군을 격퇴시키며 '무쌍'에 가까운 성과를 올리고, 심지어 도묘지 전투에서는 적 부대에 의해 삼면으로 둘러 쌓였지만 적의 일부를 괴멸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지원이 오지 않았기에 결국 돌격을 감행했고 고토 마타베는 다테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
한편 유키무라는 자신의 실책으로 고토 마타베가 사망했다고 자책하며 필사의 공격을 다짐하나 모리 카츠나가는 일단 부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만류했다.
유키무라는다테군의 총포 부대를자신의 특기인 매복전술로 격퇴시키며, 남은 도요토미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신가리(후위부대)라는 역할을 맡은 유키무라는 더이상 적군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자 "간토에 무사는 백만이라고 하나, 진정한 남자는 아무도 없구나." 라며 도쿠가와군에 도발했다.
도요토미군의 피해는 막대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 갔기에 유키무라는, 주군인 히데요리가 직접 전쟁에 나서서 사기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도도노가 나서 안된다고 하여 무산되었다.
결국 유키무라는 어쩔 수 없이 아카시 테루즈미, 모리 카츠나가 등과 함께 최후의 작전을 준비한다.
본래 시텐노 산에 모리 카츠나가군과 함께 사격과 돌격을 번갈아가며 시도해 도쿠가와 군을 고립시키고, 후방에 숨겨 둔 아카시 부대를 합류시켜 급습하는 전략이었지만, 갑자기 모리 부대가 신호를 무시한채 사격을 시도해서 무산되었다.
사격을 시도한 모리 부대는 무서운 기세로 돌격을 시도하는데, (모리 카츠나가가 부셔버린 부대를 나열하자면 혼다 타다토모, 오가사와라 히데마사, 아사노 나가시게, 아키타 사네스에, 사카키바라 야스카츠, 안도 나오츠구, 로쿠코 마사노리, 센고쿠 타다마사, 스와 타다츠네, 마츠시타 시게츠나, 사카이 이에츠구, 혼다 타다미즈 등등)
한마디로 무쌍을 찍었다.
모리 카츠나가가 길을 뚫자 사나다 유키무라의 부대는 도쿠가와 군을 궤멸시키며 돌격했다.
"이제 이것으로 전쟁은 끝이다. 끝까지 싸울 뿐."
"노리는 건 도쿠가와의 목이다."
라고 읊조렸다 한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다케다 신겐이 즐겨쓰던 '카케무사(유키무라와 같은 갑옷을 입힌 병사를 여럿 포진시켜 적을 혼란시킴)'전술을 사용하며 돌격했고, 이 돌격 과정에서 미카타가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했던 전투) 이후로 한번도 쓰러지지 않았던 우마 (총대장의 깃발) 가 몇 번이나 쓰러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도 몇번이나 할복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도요토미 쪽에 승리가 오나 싶었는데, 후방 지원으로 있던 오오노 하루나가는 요도도노를 설득하는데 실패했고,그 시간동안 도쿠가와군은 혼란을 정비했다.
결국 모리 카츠나가와 사나다 유키무라의 군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고, 모리 카츠나가는 오사카 성으로 퇴각한다.
하지만 이미 오사카 성은 방어하기에 용이한 성이 아니었기에 도쿠가와군을 막을 수 없었고 이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렇게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해서 요도도노와 모리 카츠나가는 할복하여 자살하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사나다 유키무라의 아들인 다이스케 또한 할복해서 죽는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후에도 몇차례 돌격을 감행하여 도쿠가와군에 피해를 입혔지만, 지친 몸을 시텐노지 근처에 있던 야스이 신사에서 쉬던 중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군의 기습을 받게 되고, 그의 철포대장이었던 니시오 무네츠구에게 발각되어 "나의 목을 공로로 삼거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향년 49세였다.
6. 사나다 10용사
후대에 창설된 사나다 10용사라는 일화가 있는데 허구에 가깝고,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닌자 '사루토비 사스케'이다.
(나루토에 나오는 사루토비의 롤모델이 맞다.)
여담으론 테니스의 왕자라는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일본 역사 인물들의 이름을 따온 경우가 많은데 릿카이 대학 부속에 있는 사나다 겐이치로,
하고 유키무라 세이이치,
는 사나다 유키무라가 둘로 분리됐다고 보면 된다.
7. 평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에 따르면 '사나다는 일본 제일의 강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근데 이건 다케다 신겐을 칭송하던 것과 같은 것으로 '내 적들은 쎘다. 하지만 그들을 이긴 나는 더 쎄다.' 라는 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유키무라가 죽은 이후 그의 딸들은 도쿠가와 군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그들 사이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의 용맹을 존경하는 사람도 대다수였다.
그의 형인 노부유키의 말에 따르면, 사나다 유키무라는 체구가 작고, 성격이 매우 온화하고 침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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