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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instiz.net/pt/5545034?page=1&k=%EC%9D%BC%EB%B3%B8%EC%A0%84%EA%B5%AD%EC%8B%9C%EB%8C%80&stype=9

코에이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13에서의 일러스트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그림을 보고 그렸다는 설도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사실상' 종식 시킨 인물.

3대 천하인의 1인으로 꼽힌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 중 항상 최상위권을 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대가 지날 수록 인기가 떨어진다고 한다.)

일본 전국시대 후반부 대 다이묘들의 영토를 표시한거고 사실 작은 국가로 보면 수십개로 나뉘어진다.

다이묘는 봉건 사회의 지방 호족이라고 보면 되며, 힘이 쎄져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혹은 적이 되면서치고 받고 하던 시절 하극상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오다 가문의 문양

 

 

1. 어린 시절

오와리의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배다른 형제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실상 적자)

사실 오다가는 그리 강대한 가문이 아니었고, 오와리 자체가 당시 시골처럼 불리던 땅이기도 했고,(하지만 부유한 땅이었다.) 노부히데도 하극상으로 인해 자리를 차지한 다이묘였다.

오다는 그렇게 성장하며, 얼마나 양아치 같았던지 오와리의 멍청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 멍청이 같은 모습이 다른 가신들 눈에 차지 않았는지 노부히데가 죽은 후, 오다가의 가신들은 노부나가를 재끼고 그 동생인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했다.

여차저차해서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토모(작은 아버지)와 동생 노부유키를 죽이고 마침내 오와리를 손에 넣게 되었다.

오와리는 작은 도시였지만, 교토로 가기위해 가도가 발달한 곳으로 노부나가는 이곳을 상업의 중심지로 삼을 생각을 하며 발달시켰다.

 

 

2. 다이묘

당시 오와리는 별 볼일 없는 세력이었고, 일본의 수도는 오와리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교토였다.

그리고 이 교토로 상경하기 위해 엄청나게 강대한 군사를 끌어 모은 다이묘가 있었으니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실상 천하에 가장 가까웠던 남자가 바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이다. (훗날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당시엔 이마가와가의 부하1 이었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미카와, 도토미 3국의 군사를 끌어모아 3만이라는 대군을 일으킨다.

사실 이마가와가에 있어서 오와리는 그냥 교토로 지나쳐가는 길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불리게 되는 전투이다.

이마가와의 3만 군사가, 오와리에서 끌어모은 오다 노부나가의 3천 군사의 기습에 의해 패배하게 된 전투였다.

이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목숨을 잃고, 이마가와가는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도쿠가와도 이마가와가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노부나가는 아버지를 죽이고 다이묘에 오른 사이토 타츠오키의 가문을 멸망시킨다.(노부나가의 장인어른과 처남)

이로 인해 오와리에 이어 미농이라는 부유한 땅을 얻게 된다.

노부나가는 사이토가의 다이묘가 거주하고 있던 이나바야바성의 이름을 기후성으로 고치고 천하포무(천하에 무를 퍼트린다)를 내세우게 된다.

마침 교토에서도 난리가 나고 있었는데 미요시 요시츠구가 쇼군을 살해하여, 그 쇼군의 동생이 노부나가에게로 도망쳐왔다.

이로 인해 노부나가는 교토 상락이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의 여동생이었던 오이치를 교토로 가는 통로인 '오미'에 위치한 다이묘인 아자이 가타마사에게 시집을 보내 동맹을 맺는다.

신장의 야망 일러스트 '오이치'
오이치의 그림

미요시가는 원래 강대한 가문이었지만, 내분이 일어나 무너져가면서 노부나가의 상락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여차저차해서 오다 노부나가는 미요시가문과 그와 동맹한 롯카쿠 가문을 집어삼키고, 전대 쇼군의 동생이었던 요시아키를 쇼군에 취임시키는데 성공했다.

시골의 멍청이가, 천하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는 강대한 다이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쇼군에 오른 요시아키에게 오다 노부나가는 껄끄러운 인물이었고, 그는 곳곳에 노부나가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를 멸하기 위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만들어진다.

이 포위망에 참가한 가문 중에는 아사쿠라가라는 가문이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아사이가(노부나가의 여동생이 시집간 가문)와 친했기에 결국 아사이가도 노부나가와 반목하게 되었다.

(바로 이 아사이가와의 대립때 오다가의 부장이었던 키노시타 토키치로가 퇴각을 담당하는데, 이 인물이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여한 가문들만해도 다케다, 아사쿠라, 엔랴쿠지, 혼간지, 아자이, 미요시, 산닌슈 등으로 이루어졌다.

오다가에 일생 일대의 위기가 찾아온듯 했으나, 하늘이 점지한 인물이었는지 오다 포위망에 참여한 가문들중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던 다케다가의 다이묘 다케다 신겐이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에 포위망은 점차 약해졌으며, 미요시 요시츠구는 오다에게 패배하고 결국 자결하게 되고, 산닌슈는 그 세력이 전멸하였으며, 아사이가와 아사쿠라에 이어 혼간지까지 멸망시켰다. (이때 여동생의 남편이었던 아자이 가타마사 또한 죽게된다.)

자신이 내세운 천하포무를 실현하는 오다 노부나가.

이런 자신을 견제하던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마저 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천하에 오다 노부나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져버렸다.

노부나가는 쇼군 요시야키를 교토에서 쫒아버리고 무로마치 시대를 종결시켜 버리고, 시고쿠 정벌 계획을 세우는 등, 이제 본격적으로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3. 적은 혼노지에 있다

노부나가는 츄고쿠 정벌을 위해 혼노지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다.

가신들을 전방에 배치시켜, 정작 노부나가의 주위엔 100여 명의 수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여기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오다의 부장 중 하나였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하려 한 것이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여러 설이 제시되고 있지만, 아무도 그 답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른 새벽 아케치 미츠히데는 병사들을 끌어 모아 '적은 혼노지에 있다'를 외치며 혼노지를 공격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시종이었던 모리 란마루를 도망치게 한 후, 혼노지에 직접 불을 놓아 죽게 된다.

불에 타 죽었다는 설도, 배를 갈라 자결했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오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천하에 가장 가까웠던 이의 죽음치곤 허무한 결말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후 그 가문은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히데요시 손에 넘어가게 된다.

 

 

 

4. 평가

능력 있는 수하에겐 잘해주지만, 그렇지 못한 수하에겐 냉대하다는 평이다.

당시 신분 사회에선 있을 수 없던 계급을 무시하고, 오직 능력 위주로 부하들을 뽑던 인물이었다.(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표적이다.)

이후의 도덕성을 논하는 문제에 있어선 충분한 논쟁이 오가고 있어 딱히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나, 딱 하나 엔랴쿠지사 소각 사건은 일생일대의 잘못으로 남았다.

노부나가는 당시 일본의 종교였던 일향종을 필요악으로 판단했고, 항상 냉담하게 처벌해왔다.

절에서 일하는 시녀와 장로를 참혹하게 죽였던 사건도 있었고, 그러다가 노부나가 포위망때 이들이 가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노부나가는 군대를 이끌고 엔랴쿠지사를 포위하게 된다.

당연히 절에서는 노부나가의 군대를 보고 항복을 하는데, 노부나가는 항복한 절을 향해 활과 철포를 쏘아 모든 승려들을 죽여버린다.

오다노부나가에게 '제육천마왕'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게된 원인이다.

정리하면,

1.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부하들을 기용

(심지어 외국인 노예 중 능력이 있으면 사무라이로 계급을 올린 후 기용했다고 한다.)

2. 하지만 무능한 부하에겐 폭언을 일삼고,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배반한 이유중 하나로 제기되고 있는 설.)

3. 신문물의 기용

철포(조총)의 기용인데, 오다가에서만 쓰이던게 아니라 당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어 곳곳에 쓰이고 있었다.

다만 오다가 점거한 지역엔 질좋은 철들이 많아서 많은 철포들이 개발되어, 보조무기가 아닌 주무기로도 사용됐다.

(당시 일본 전국시대는 기마대 위주의 전쟁이었으나,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함, 삼단 철포 이야기는 거짓으로 판명되었으므로 제외)

4. 프랑스 선교사의 평에 의하면 성격이 급하고 거만한 인물이지만, 알려진 것처럼 잔혹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동생들에게 매우 따듯했다고 한다. (물론 친동생인 노부유키를 죽인 것도 오다 노부나가지이다.)

 

한 지방의, 가신들에게도 인정 못 받던 소규모 다이묘가 일본 전체를 통일할 만큼 강대한 세력을 갖춘 다이묘로 성장.

실제로 야전에서의 군략을 그의 최고 장점으로 뽑기 보다는 외교력과 내정을 먼저 야기하는 사람이 많고 스스로가 근면 성실하여 부하의 태만을 지켜보지 못한 인물.

에도시대에는 인기가 없던 인물이지만,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일본 전역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게 된 일본의 역사 인물.

한 미국잡지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전세계의 명장 100인중 45위에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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