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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항해시대

동쪽의 오스만 제국 통해 막혀있던 무역로를 변방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국이었던,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찾으면서 대항해시대의 막이 오른다.

이에 뒤질세라 옆에 있던 스페인도 해상 무역루트를 찾기위해 국가적으로 지원하던 터였다.

그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내가 한번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찾는 무역로를 개척하겠다며, 스페인 정부에 지원을 받아 인도를 찾으러 갔다가 대서양을 지나 신대륙을 찾아 횡단하면서 대격변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신대륙에서 은과금 작물과 자원이 유럽에 쏟아져 들어오자, 유럽은 역내 무역을 통해 자본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후에 상업혁명이라 불리는 문명 자체의 대변혁기를 맞이하게 된다.

모든것이 빠르게 발견되었고 빠르게 발전되었으면 빠르게 적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하는 패권국가는 단연 신대륙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선점한 에스파냐, 스페인이었다.

당시 유럽의 패권국은 스페인 제국이었다.

폐쇄적이고, 전제적이었고, 바다 밖 상황 자체에 관심이 없는 중국은 논외로 한다면 가히 전지구권 패권국가였다.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에서 부터 극동 동쪽의 끝까지 무역을하고 식민지를 늘려갔다.

당시 전세계의 금과 은을 조절하며, 유럽 세계에 유일하게 금과 은을 유통시킬 수 있는, 기축통화국 지위 및 모든 해상무역루트 장악하였다.

제국의 강역은 물론, 유럽의 다른 경쟁국을 억제시킬만한 유럽 중앙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제국의 지도자 카를5세의 압도적인 치세력, 더불어 땅에서는 무적 육군 테르시오와 바다에서는 제국의 자랑 무적 함대 아르마다..

누구도 의심할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치고 있었다. 

스페인의 패권의 세계가 어떻게 끝날지, 스페인이 어떻게 쇠락할지, 그 시작은 아무도 예상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2. 총체적 난국

독일의 마틴 루터가 95개 반박문 대자보를 독일의 어느 교회에 내걸면서 해묵은 논쟁인 이전부터 있어왔던 교회개혁 문제와 기독교 체제에 대한 불만이 부패한 가톨릭과 교황에게 화살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유럽 국가별 내부의 종교 내전으로 점화되었다.

별다른 국내에서 종교 이념 대립이 없었기에, 내전 자체가 없었던 가톨릭 국가 스페인으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전쟁의 불씨는 그렇게 끝나지 않고 유럽 기독교 세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산된다.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네덜란드에서 신교도 칼뱅파들이 가톨릭과 가톨릭 국가 스페인을 비난하며,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스페인이 승리는 하지만,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아 지속적인 독립 운동의 소요 사태를 묵인할 수 밖에 없는 정도로 마무리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독립 전쟁에 온 힘을 쏟게되어, 해상권 장악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단순 도적질만 하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해적들이, 이제는 유럽으로 오는 스페인 상선을 약탈에 가까울 정도로 보이는 족족 다 털어버리게 된다.

심지어, 잉글랜드의 사략해적의 뒤를 봐주는 엘리자베스 1세를 혼쭐내러간,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만든 무적함대 아르마다는 영국 칼레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프랑스의 종교내전에도 지출을 하게 되자 국가 재정이 바닥이나버려, 결국 디폴트 선언을 하게 된다.

스페인은 금과 은을 상당량 유통시켰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프랑스와의 전쟁, 북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 방면에서의 지출로 아무리 기축통화국가라고 해도 재정적 지불비용이 식민지에서 가져오는 금과 은을 넘어서게 되면서 국고를 탕진하게 된다.

더불어 금과 은을 유통시키고 패권을 유지시킬수록 인플레이션은 심화되고, 실물경제는 답보하고 성장하지 않아 내수가 개판 5분전이 되어버려, 기타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산업 생산력마저 뒤쳐져 만성적 무역적자까지 겹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래도 뭐가 되었던 신대륙과 아시아 극동에서 환차익을 통한 은 무역, 유럽에 들어오는 은과 금을 독점해서 유통과 제어 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인  스페인은 당시의 기축통화국이었고,

더욱더 명백한 것은 스페인 제국은 유럽 최강의 군사력 유럽과 신대륙,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인도 등의 식민지, 아시아와 신대륙의 무역해상루트와 거점을 독점, 전지구권적 패권국이자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선봉에서 막은 공로로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 칭호 등 가히 유럽의 경찰국가였다.

제국은 흔들리고 무너질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제국 넘어설만한 경쟁자는 누구도 없어보였다. 

사태는 잠잠해 지는 것 같았다.

라이벌 프랑스는 종교내전으로 우환, 네덜란드는 소요가 일어날때마다 진압, 잉글랜드는 무적함대를 대파했어도 아직 미약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할 수 없어, 런던 조약으로 사략해적질과 네덜란드 독립 지원을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패권은 그렇게 공고히 다시 유지 될 것처럼 보였다.

 

 

3 .혼돈의 카오스 독일

마틴루터의 95개 반박문으로 촉발된 근 100년간의 유럽내의 종교내전은 이제 프랑스에서 한풀꺽이고 잠잠해 지는가 싶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프랑스 앙리처럼 지도자가 그냥 가톨릭으로 개종한다고 단순히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독일이라는 국가의 특성에 기인한다.

당시 왠만한 유럽국가는 중앙집권화 된 절대왕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볼테르가 비난한 로마도 아니고 신성하지도 않고 제국도 아닌 이 신성로마제국이란 독일이 전신이 된 국가는 황제 선출에 있어서 왕위가 7개의 선제 후의 투표로 결정 되는 일종의 연합체 연맹이였다.

당시 유럽안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며 투닥이는 속에서도 이 국가는 혼돈 그 자체로  작은 땅이라도 영주들이 작위 하나씩 붙이고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종교개혁 문제로 각 영주가 프로테스탄트 신교와 가톨릭 구교로 각기 다른 제스쳐을 취하며 거기다가 정치적 이합과

이익이 번목 되면서 훨씬 심화 되고 있었다.

진작에 엉망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종교내전이 독일에서 심화되지 않은 이유는 이탈리아와 독일 스위스 프랑스를 넘나드는 선대 패왕 카를 5세의 무자비한 진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실정의 연속.

카를 5세 이후 스페인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은 같은 합스부르크가 분리되어 따로 통치되어졌는데 카를5세가 강력한 힘으로 억누렀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종교 전쟁이 유럽의 질서를 패권의 정점에서 통치하던 합스부르크로선 카를 5세 사후 더 이상 그들의 힘으로 이 유럽의 패권을 유지할수도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펠리페 2세의 통치 아래 스페인 제국은 네덜란드 방면에서 휩싸인 전화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된다.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의 최고 요충지로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토보다 제국의 패권을 유지시키고 다른 나라를 억제시키는데 중요했다.

결코 용납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 문제에 개입을 안 할수 없었던 기나긴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결국 17개 주에서 7개주는 독립을 허용할수 밖에 없었고, 프랑스 종교 내전에도 깊게 개입해서 끝까지 프랑스 내전을 지원하며 훼방을 놓았지만, 앙리라는 희대의 명군 덕분에 종식되고 프랑스 중앙집권화는 더 강해졌다.

중간에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어 스페인을 견제하던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포함해서, 기독교의 수호자로 그리스까지 참전하여 싸운 레반토 해전 등, 펠리페 2세 통치하의 제국은 모든 문제에 개입을 안할수도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변변한 승리없이 큰 이득을 보는 승리도 거두지 못한채 제국의 국력만 깎아먹고 국가 파산은 이제 만성적인 문제가 되었다.

반 가톨릭 반 합스부르크 연맹만 공고히 할뿐이었다.

거기다 네덜란드는 종국에는 스페인에 선제 공격하여, 스페인 해군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힐정도로 국력이 강해졌고, 게다가 해외 식민지까지 개척해서 아시아 무역 거점루트까지 뺏았아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 해양무역의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르며 이제 반 가톨릭, 반 스페인 합스부르크 국가에 자금을 댈 정도였다.

서쪽 스페인 제국 합스부르크가의 실정은 그나마 양호한 것이었다.

동쪽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는 실정이 더해졌다.

위대한 카를 5세와 테르시오가 영광을 드높였던 빈 전투의 위용은 난데가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친정까지 해서 싸운 오스만과의 전투에서는 대패까지 하면서 제국내에서 황제의 입지는 좁아지고 이교도와 굴욕적인 강화까지 체결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내에서도 황제를 끌어내리는둥 마는둥 번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5. 내전을 피하기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

신성로마제국내에서 선제후들의 신교 구교 다툼에 까지 개입하면서 쾰른에서는 신교 구교 분쟁이 일어났지만, 스페인의 진압으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내에서 신교 영주들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독일의 자유 도시가 신교 반란을 일으키자 개입한 황제가 일을 더 키우며 신교 제후들이 황제의 파면할 기세였고 오히려 합스부루크가는 그에 동조했다.

스페인은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고 결국 오스만의 아귀에서 벗어나려는 헝가리에서 황제의 동생이 왕위에 오르고 동시에 오스트리아 대공위이자 제국의 변경백인 동생과 내전을 위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보헤미아로 도주하게 된다.

보헤미아는 애초부터 신교 지역이었는데 황제가 보헤미아의 신교 용인을 들먹이며 보헤미아를 이용했고, 보헤미아의 신교를 허락하는 칙서를 내린다.

하지만 피를 부르는 내전은 이성적인 동생에 의해서 평화 협의로 가까스로 마무리된다.

 

 

6. 감도는 전운

합스부르크의 유럽 패권의 주요 요충지를 다스리던 영주가 후사가 없이 급사하면서 여기에 또 황위 승계를 놓고 정치협작질을 하고, 엎친데 덮쳐 구교 영주냐 신교 영주냐 누가 과연 승계할지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게 된다.

프랑스 종교내전에서 프랑스 내전을 더 지속시키기 위한 스페인의 계획에 호되게 당한 앙리가 스페인의 급소를 찔러서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저 요충지를 기점으로, 가톨릭이건 프로테스탄트건 스페인과 합스부르크를 무너뜨려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가톨릭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페인에게 반감을 가진 신교 동맹이 결성된다. 

드디어 유럽 기독교의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앙리가 암살 당해서 흐지부지 되고 만다.

프랑스 종교 내전을 종식시키고 낭트칙령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영웅 앙리는, 어쩌면 그가 합스부르크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종교전쟁의 서막을 열수도 있었지만 신은 그것을 다른이의 몫으로 남겨둔다.

7.결국 피할수 없는 전쟁-30년 전쟁 개막

그렇게 일단락 될 줄 알았던 클레베-율리히 계승권 문제는 선제후와 궁정백이 술먹고 모욕 당했다고, 클레베-율리히 영주였던 애비가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문제가 터진다.

신교측에선 네덜란드의 명장을 불러들였고, 구교측에선 북이탈리아 방면에 주둔한 스페인 제국의 명장이 진군해서 라인강에서 대치하게 된다.

가까스로 선제후와 궁정백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협의를 맺으며 계속해서 전화가 빗겨 갔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의 무능과 정치적 번목은 보헤미아에서 터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보헤미아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보헤미아에서 버티면서 용병대까지 고용해서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황위 찬탈을 노리는 황제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해서 이때다하고 무능한 기존의 황제를 몰아내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황위 유지를 위해서 감금당해있을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도움을 요청했고, 보헤미아로 튀어서 버티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보헤미아에서 신교를 용인하는 칙서를 내린게 화근이었다.

보헤미아의 신교 용인을 보고 헝가리를 포함한 제국의 모든곳에서 신교도가 자신들도 똑같이 자유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고, 정치적 번목이 계속되면서 내전 양상을 보이게 되었지만 제국 의회와 오스만까지 끌어들여 가까스로 평화를 유지 할 수 있었다.

황제는 더이상 평화를 위해서 신교를 용인해서 제국의 분열과 통치를 약화 시킬수 없었고, 결국 보헤미아에서 친가톨릭 정책을 펴게되고 신교를 억제시키는 정책을 한다.

보헤미아 귀족들이 회의에서 언쟁을 하다가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위원을 창밖으로 내던져지고, 같은 개신교파인 신성로마제국의 일곱 선제후 중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그리고 황제 자리에 올라 스트레스만 받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급사하고 다른 황제가 옹립된다.

스페인 제국은 희대의 암군중 암군이라 불리는 말도 못하고 성불구자에 지진아가 스페인 제국의 통치자가 되고 네덜란드와 대립과 전쟁은 지속되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최대 전쟁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7-1. 바이킹 후손들의 시대

보헤미아의 왕 팔츠 선제후의 반란은 그렇게 전쟁보다 큰 내부 분열을 낳은채 진압 되었지만, 이번엔 덴마크가 내가 신교의 선봉에 나서서 싸우겠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당시 북유럽 국가가 흔히 그렇듯, 독일의 변경백과 한자동맹에 막혀 유럽 중앙 진출은 꿈도 꿀수 없었고 무역마찰이 심했다.

스페인을 괴롭혀 제법 짭잘한 수익을 올리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후원을 등에 업고, 덴마크가 전쟁을 일으키지만 바로 진압당하게 된다.

 

 

7-2. 북방의사자 겨울 왕의 등장

국내의 종교내전을 종식시키고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동북방 전쟁을 수행하며 연정연승 승리로 이끌고, 스웨덴의 패권을 다진 신교의 국왕이 있었다.

이름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로 새로운 군제개혁과 발전된 화포를 가지고 신교와 구교 전쟁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신교 선제후들과 영주들이 가세하면서 특히나 합스부르크로서는 눈의 가시인 카를 5세때부터 신교를 외치다가 족족히 진압당한 북쪽의 변경백과 동시에 선제후인 작센 선제후까지 전쟁에 전면으로 가세하면서 전쟁의 불길은 겉잡을수 없이 커졌다.

제국의 테르시오는 보헤미아나 덴마크처럼 각개격파로 손쉽게 승리로 이끌며 전쟁을 이끌수 없었다.

신교 총사령관 북방의 사자는 전쟁을 연전연승 승리로 이끌며 스페인의 명장을 격파해 갔다.

하지만 무적의 테르시오는 북방의 사자도 전장에서 죽이고,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며 협약을 통해 가톨릭의 승리로 전쟁을 종결시키는듯 보였다.

7-3. 프랑스의 배신

프랑스는 30년 전쟁내내 가톨릭 편에 있음과 동시에 신교를 지원했다.

사실 프랑스 입장에선 가톨릭 이념을 가진 국가였지만 합스부르크와 교황의 가톨릭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카를 5세떄부터 스페인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에 억압당하고, 종교내전때 스페인이 방해를 하고 거기다가 앙리가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명분상 어떤 포지션에서도 설수 있었다.

자국의 이익을 살피며 언제 전쟁에 참여할지 기회만 엿보이던 참에 스웨덴이 진압당하고, 전쟁이 끝날것 같자 스웨덴 편에서서 가톨릭 동맹을 공격한다.

북방의 스웨덴 신교측에서서 전쟁을 하던 작센은 전쟁의 십자포화를 그대로 맞아 화평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지만, 신교 국가들의 지원을 업은 스웨덴-프랑스 동맹은 가톨릭 동맹을 몰아 붙였고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약없이 전투를 계속하며 협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크루아에서 제국의 수호자 무적의 테르시오는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하면서 스페인의 패권과 테르시오 시대에 종언을 고한다.

프랑스-스웨덴 동맹은 가톨릭 동맹을 궁지에 몰아 붙였고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전쟁을 끝맺게 된다.

8. 스페인 패권의 종말

모든 전쟁 기간에 개입하며 전투를 해 온 스페인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자신들이 전쟁을 종결짓지도 못햇을뿐더러 오히려 전쟁은 프랑스가 마무리지은 꼴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페인은 패권국 위치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유럽 일개 국가로 조약에 참여하였고 종국적으로는 네덜란드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기 까지에 이르렀다.

이 후 스페인 왕위 승계 전쟁등 합스부르크-스페인은 프랑스 브루봉 왕가로 교체되고,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어 스페인이 향 후 세계 역사를 주무르게될 유럽에서 주도국이거나 주인공이 된 일은 없었다.

광대한 제국의 식민지 영토는 스페인을 연명시킬 뿐이었다.

그래도 스페인은 대영제국의 산업혁명 만큼이나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럽내의 상업혁명과 가격혁명을 이끌었고 한 세기가 넘게 지구권급 패권국으로 기축통화 지위국을 누리며 유럽 세계를 지배했고 광대한 식민지 영토를 다스리며 찬란하게 빛났다.

지금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지구에서 5억명 넘을 정도로 과거 제국의 영향력을 가늠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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