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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이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강대국이었던 사실은 국사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봤으면 대부분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또한 그 근원지와 그리 멀지 않은 한국과 그외 아시아 국가들은 그 위력을 직접 실감해야 했다.

압도적인 기동력을 앞세운 몽골의 최정예 기병은 백병전을 기반으로 두었던 중세 전쟁 방식을 기동력 기반의 전투 형태로 변화 시킬 정도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몽골 제국이 동양 제패후 서양이 초토화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것에 기인한게 크다.)

그렇다고 아시아 국가들이 몽골 제국한테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국 (고려)

김경손 장군 (고려 최후의 영웅)

김경손은 평장사(平章事) 김태서의 아들로써 나름 명문가 출신의 장군이다.

1231년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을 초토화시키고 정주까지 쳐들어 내려온 적이 있다. 이때 김경손 장군은 불행이도 몽골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경손 장군은 7일간의 도주 끝에 귀주성에 당도해서 병마사 박서와 함께 재차 항쟁을 준비한다.

250명의 군사로 1만이 넘는 몽골군을 막아야하는 상황으로만으로 사기가 꺾일텐데, 게다가 이미 한번 대패를 당한지라 사기는 안봐도 뻔할 것이다.

그때 김경손 장군은,

"너희는 나라를 위하여 몸도 돌보지 않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을 자들이다!"

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지만, 병사들의 좌절만 더 커져갔다. 

김경손 장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12명의 결사대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몽골군에게 돌격한다. 그리고 적지 한 가운데서 적장을 활로 저격하고 12명 모두와 함께 무사귀환하는 대활약을 펼친다.

이에 고려병사들은 사기를 회복하여 결사 항쟁을 준비하게 된다.

귀주성에서 항쟁이 시작되자 몽골군은 귀주성을 포위하고 '투석기'를 이용하여 총공세를 펴게된다.

몽골군은 바위에 기름을 발라 화염투석을 했으며, 게다가 그 기름이 고려 백성들과 포로들의 몸에서 짜낸 기름이었다.

이때 김경손 장군은 투석에 맞아 죽을뻔 하기도 했다. 이에 부장들은 김경손 장군에게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경손 장군은 "안된다. 내가 움직이면 민심은 흔들릴 것이다." 하며 최전선에서 항전을 진두지휘한다.

이렇게 1개월의 항쟁이 계속되자, 겨울이 오고 몽골군은 퇴각하게 된다.

이때 김경손이 상대한 몽골군 총사령관이 바로 [수부타이]인데, 칭기즈칸의 절대적 심복 '사준'(네마리의 사냥개) 중 최고의 맹장으로 불리던 사람이었다.(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칭기스칸의 옆에서 몽골의 부흥을 이끌었던 1등공신이었다.

수부타이는 물러나면서,

"어린시절부터 종군하여, 천하를 두루다니면서 수많은 성곽과 해자에서 싸우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았으나 이러한 공격을 당하고도 항복하지 않는 자는 처음 보았구나. 성중의 제장들. 훗날 반드시 장상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렇게 대활약을 펼친 김경손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1237년 전라도에서 백제를 부흥한다면서 반란이 일어나고, 당시 무신정권 즉, 최씨 정권은 커자가는 김경손의 세를 꺾기 위해 김경손 장군에게 이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김경손 장군에게 주어진 휘하 토벌군은 0명이었으며, 게다가 이때 최씨정권은 김경손의 군함 20척을 분해하여 격구장을 만들고 백성 2,000명을 동원해 궁궐 증측을 시행했다.

그러나 몽골에서도 인정한 명장 김경손은 지역민들을 모아 의병군을 조직하고 이를 진압해버리는 엄청난 전공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결국 1251년 최항이 정권을 잡고 김경손을 잡아다가 수장시켜버려, 몽골군에게 대항할 최후의 영웅은 이렇게 어의없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후 1270년에 김통정이 삼별초 항쟁을 주도하였지만, 이미 국운은 너무 기울어버린 상태였다.

 

 

중국 (금)

  완안진화상 (몽골 제국이 두려워한 남자)

완안진화상은 금나라 출신 장군 걸가의 아들이다. (걸가는 남송과의 전쟁에서 전사)

완안진화상은 20세에 고향인 풍주에 몽골군이 쳐들와서 포로가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완안진화상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챈 몽골군이 그를 전격 등용하게 된다.

후에 몽골군의 일원으로써 북방을 평장할때 큰 공을 세운 그였으나, 몽골군의 한족에 가한 피박을 참지못해 풍주의 감독관(몽골인)을 살해하고 사촌형과 함께 금나라로 도주한다.

몽골군이 중국 본토를 침략해오자 완안진화상은 위구르, 나이만, 강, 한인등 몽골의 지배를 피해 금으로 도망친 망명자들을 모아 충효군이라 이름 붙여진 군단을 만들어서 몽골군을 게릴라 공격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완안진화상은 1228년에 드디어 역사에 기록된 대승을 이끌어내는데, 400여기의 기병으로 8,000명의 몽골 기병을 '전멸' 시켜버린 것이다.

금나라가 20년 넘게 몽골에 대항하면서 얻은 첫승이자 가장 큰 승리였다.

완안진화상은 공적으로 정원대장군 평량부판관(定遠大將軍、平涼府判官)의 자리를 받고 일약 천하의 용명을 떨쳐 멸망 직전의 금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이 승리를 발판삼아 섬서 지방에서 연전연승을 달리게 되었고, 금나라는 꺼져가는 희망을 살려가고 있었다.

또한 완안진화상은 1231년 도회곡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어모중랑장(禦侮中郞將)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하지만 몽골군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으며, 오고타이칸(칭기스칸의 셋째 아들)이 총사령관이 되어 대대적인 전면전을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완안진화상을 중심으로한 금나라 총병력 15만이 개봉 서남부에서 전투를 하게된다.

이 전투에서 완안지화상은 칭기즈칸의 손자 툴루즈의 활약으로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중심부에서 대대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형 판결을 받은 마지막 순간에도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여 오고타이칸이 그의 기개에 감탄을 연발하였다고 한다.

 

 

베트남

진흥도(베트남 구국의 영웅)

이번 포스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천하무적이던 몽골군이 아시아 대부분를 휩쓸어 버렸는데, 유일하게 순수 무력으로 정복하지 못한 국가가 베트남이다.

그 주역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둔, 베트남에서는 구국의 성웅으로 추앙받은 진흥도 장군이 있었다.

일본은 신풍 카미카제(태풍)으로 인해 제대로된 전투 자체를 할 수 없었으며, 서아시아는 바투가 차가타이 한국을 건설하면서 정복 루트를 유럽으로 향해서 절반은 무사했던 것이며, 인도같은 경우는 신의 개시로 인해 정복을 '안' 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쿠빌라이칸이 인도 초토화중에 꿈속에 시바(유니콘으로 나왔다고 하는 설도 있다.)가 나타나 서 원정을 중지하라해서 몽골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진흥도는 무려 쿠빌라이칸의 주력 군세를 3차례에 걸쳐 무려 50만의 몽골 기병을 막아냈다.

진흥도는 배트남 쩐(진)왕조의 자 출신으로, 진흥도와 원(몽골 제국)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쿠빌라이칸이 남송을 치키 위해 홍수의 강의 통과 허락을 요구하면서이다.

대부분의 영웅들이 그렇듯이 단번에 거절해 버렸으며, 쿠빌라이칸은 남쪽의 소국이 이런 행동을 취하자 극대노하여 그대로 베트남에 병력을 보내지만, 진홍도가 이끄는 베트남 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진흥도 장군은 [병서요략]이라는 전술서를 기술할 정도로 병법에 능통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다.

후에 몽골 제국은 1282년 2차 쩐왕조 토벌군을 만들고 30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출병시킨다.

하지만, 진흥도는 상대를 정확하게 보고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줄 아는 장군이었으며,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진흥도는 열대의 지형을 이용하여 끈임없이 게릴라 작전을 펼친다.

당시의 몽골군은 기병과 중국의 투석기나 화포등이 주력이었기때문에 베트남의 기후와 지형에 불리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해 몽골군을 철저히 파괴해버린다.

몽골제국도 대패를 통해 베트남을 정복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남송을 압박해 베트남에게 항복을 요구하게 된다.

이에, 진흥도는 "싸우려하지 않고 항복하려 한다면 나의 목을 내놓겠다."하며 베트남 정권의 결사항쟁을 촉구했다.

오히려 자신들과 원수지간이였던 참파라는 국가를 설득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몽골를 더욱 압박해 버렸고, 결국에 몽골제국은 철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쩐왕조(베트남)은 독립을 유지할수 있었다.

1300년 71세의 나이로 진흥도 장군이 죽고, 베트남 구국 영웅으로써 아직도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미국과의 베트남전에서 진흥도의 병서요략이 베트콩의 주력 전략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진흥도의 전술능력은 시대를 몇백년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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