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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陳)이라는 나라가 존속했던 이 '남북조 시대' 라는 시대가 중국사에서 어디 쯤이며, 당시의 배경은 어땠을까?

남조의 진(陳)나라는 남북조 시대 때 남조의 역대왕조들인 송-제-양- 중에서 마지막에 위치하는 왕조가 되겠다.

한편 화북지방에는 이민족들의 세상이었던 5호 16국이라는 혼란기를 서기 439년, 통일한 북위(北魏)를시작으로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 수많은 나라들이 분열되고 흡수되는 격동의 시대였다.

참고로 이들 왕조들은 북방의 이민족인 선비족 혈통의 왕조들이었다.

그리고 화남지방에서는 한(漢)족에 의한 남조가 존속되고 있었고, 앞서 말했다시피 송-제-양-진의 왕조들이 계속해서 교체되며 화북에 위치한 이민족 계열의 북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조와 남조의 대립은 항상 불균형했었는데, 화북의 북조가 화남의 남조의 국력을 거의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조 시대 남조의 귀족

남조와 북조의 특징으로 남조는 향락적, 북조는 호전적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바로 서로 다른 이 차이가 남조와 북조의 국력차이을 결정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5호 16국 시대 때 강남으로 쫓겨난 한족(漢族)은 정착한 화남지방에만 만족하지 않고 상실한 화북지방을 수복하려고 수차례 북벌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었고, 이에 낙담한 한족들은 결국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일삼는 도교에 심취하게 되고 퇴폐적이고도 향락적인 귀족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거기다 화남지방은 화북지방처럼 5호 16국 시대라는 전란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피폐해지는 그런 전란기를 겪은 적도 없었고, 싸워봤자 황실의 윗대가리들끼리의 싸움에만 그쳤기에 국토가 피폐해진다거나 그런 규모의 내란은 없었다.

특별히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관계로 이 시대부터 화남지방은 경제력도 상승하여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조의 귀족문화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문화와 경제부문에 있어서는 오랑캐들의 놀이터가 된 화북지방에 비해 월등히 앞섰던 화남의 남조였지만, 군사력에 있어서는 북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처지였다.

물론 훗날 송대(宋代)였나 언제부터인가 화남지방의 인구와 문화, 경제력이 화북을 서서히 따라잡아 추월하는 때가 있긴하지만, 그때는 나중의 중세 때 이야기고, 고대에 속하는 남북조 시대 때만 하더라도 인구, 문화, 경제의 중심지는 늘 화북지방이었다.

고대의 전쟁에 있어서 군사력은 곧 인구였으며, 소위 말하는 '중원' 지역이었던  화북지방의 인구는 화남을 압도하고 있었다.

선비족 귀족

비록 오랑캐 소리 듣는 선비족이 장악한 화북지방이긴 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북조의 역대 왕조들은 남조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북조의 이민족들이 남조의 한족들보다 싸움을 더 잘하는 데에도 요인이 있기도 했다.

화북지방은 이미 5호 16국 시대라는 전란기를 겪으며 성장한지라 붓보다는 칼을 중요시하여 군사력을 강조했고, 그만큼 군사 분야에 있어서의 전략이나 전술, 무기나 방어구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특히나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남조의 한족보병보다는 아무래도 말타고 싸우는 데에는 도가 튼 북조의 이민족 기병이 상대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기병 vs 보병의 이야기로 봐도 북조의 승리로 귀결된다.

북조의 보병과 기병

소위 말하는 '중장기병' 이라 부르는 기병이 등장하는 때도 바로 이 남북조 시대이며, 우리 고구려에도 개마무사라고 부르는 중장기병이 있었듯이 중국에도 말에게도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이 북조의 북위(北魏) 때부터 등장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陳)과 대립하던  북조의 왕조는 고구려에 백만 병력을 말 그대로 '꼬라박은' 나라로도 유명한 수(隋)나라 였다.

서기 560년 무렵의 상황.

화남의 붉은색 영역이 진(陳) 되겠고 화북의 파란색은 북제(北齊), 하늘색이 북주(北周), 중앙의 분홍색은 서량(西梁 : 후량이라고 부르기도 함)이다.

수 문제 (文帝)  양견

수나라는 북주를 계승한 나라로, 곧 북주를 멸한 후 서기 581년, 화북을 통일했다.

그리고 당시 수나라의 군주는 초대황제이며, 과거제를 성립한 것으로도 유명한 문제(文帝) 양견이었다.

진 후주 진숙보

한편 진(陳)의 황제는 삼국시대 촉(蜀)의 유선처럼 후주(後主)로도 불리우는 5대째의 진숙보였다.

서기 582년, 수가 화북을 통일하고 이듬해에 진숙보가 즉위했을 무렵의 진나라는 상황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남조는 늘 북조보다 국력이 뒤쳐졌던 관계로 늘 을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대 황제들은 국력도 고려하지 않은채 북벌만 벌이며 국력만 대폭 소진한 상태였다.

진의 4대 황제 고종(高宗) 선제 진욱, 진숙보의 아버지이자 북벌을 통해 진의 영역을 확장시킨 군주였다.

특히나 남조의 역대 왕조들 중에서 제일 허약했다는 소리를 듣는 진나라 였기에 북벌로 수복해낸 영토에 비하면, 오히려 얻는 것 보다 잃은게 훨씬 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진의 국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인데, 비단 북조와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 외에도 남조 특유의 황족간의 내란으로 인한 국력손실도 무시못할 수준이었다.

 

<수당연의>에서의 진숙보

이렇듯 국력은 쇠약해져 있었고 반면, 주적 수나라는 북제까지 멸하여 가뜩이나 차이나던 국력이 갑절은 차이가 나게 되어 비실대는 진나라 입장에서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었을텐데, 진숙보란 작자는 전형적인 암군이었다.

위 사진마냥 꽃밭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놀기 좋아하여 소위 말하는 주색잡기에 도통했던 작자가 진숙보였다.

사실 진숙보는 애시당초 황제의 재목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기록에 따르면 진숙보는 시를 짓거나 수목이나 꽃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고 문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고 되어있다. 

냉엄하고 엄격한 분위기에서 국사를 다루는 황제의 자리는 애초에 진숙보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고 봐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랬던 탓일까, 황족출신이었기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정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진숙보는 재위동안 갖가지 무능함을 마음껏 자랑하기 시작한다.

<수당연의>에서의 장려화.

대표적인게 장려화라는 귀비를 총애했던 탓에 장려화가 진숙보를 등에 업고 조정의 일에 간섭했던 일이다. 

장려화는 한 미모했다고 전한다. 이런 장려화에게 반한 진숙보는 어찌나 총애했던지 애지중지하며 심지어는 조정에서 대신들과 조회를 열때도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참여했다고 전할 만큼 말이다.

진숙보의 총애에 기고만장해진 장려화는 점점 도를 넘더니만 나중에는 조정의 일에도 간섭하며, 자신의 소생 황자를 태자로 삼으려는 음모술수도 꾸미고 반대하는 이들은 내치는 등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숙보 역시 전형적인 암군이 벌이는 행각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기에 이르는데, 역시 대표적인게 세 개의 거대한 누각을 세우게 했던 일이다.

각각 망선각, 결기각, 임춘각이라는 이름의 이 세 누각은 그야말로 사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우선 누각을 세우는 자재인 목재에도 최고급 목재를 사용하여 세웠는데다 내부는 온갖 사치품으로 도배를 하여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기록에는 이 세 누각의 향내가 2~3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고 하니 가히 그 사치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세금도 가혹하게 걷고 국고도 죄다 털어서 누각 건설에 다 쏟아부었겠다, 황제가 이 모양이니 덩달아 아랫것들도 날뛰며 매관매직을 일삼기 시작한다.

황족, 대신, 환관 너나 할 것없이 자신들의 무리에만 혜택을 주며 관직을 주고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되고 뜻있는 선비들은 죄다 쫓겨나고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니, 그 아랫것들도 백성들을 착취하고 뜯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탐관오리들이 넘치면서 국고는 바닥났겠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의 상황을 보다못한 대신들이 진숙보에게 충언을 올렸다.

"후궁들은 비단옷을 입고 곡식이 넘치는데 백성들은 굶어 죽은 자가 들을 덮었고,  뇌물들이 오가면서 국고를 탕진하니 이에 하늘이 노하시고 백성들은 조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를 틈타 북방의 수나라가 침입해오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진숙보는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올리는 신하들을 모두 귀양보내거나 처형시켜 버려 귀도 닫고 신하들의 입도 닫아버렸다.

<수당연의>에서의 문제 양견

한편, 충언을 올린 신하들의 경고대로 북방의 수나라는 정신못차리고 흥청망청대는 진나라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수나라는 북제를 멸한데에 이어 서기 587년, 형주(荊州)의 서량(西梁)을 멸한 터였다.

다시 지도를 보자면 중앙의 분홍색이 서량이다. (혹은 후량이라고도 부른다)

이 후량정권은 진(陳)나라 이전의 남조 3번째 왕조인 '양(梁)' 의 황족이 세운 정권으로, 북조인 서위(西魏)에 복속되다시피 한 괴뢰정권이었다.

이 조그마한 나라가 수나라로부터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후량이 위치한 형주의 '강릉' 이란 곳이 그야말로 부와 남조 귀족문화의 성지이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강남지방의 중심지는 역대 남조 왕조들이 그랬고, 이전에 삼국시대 오(吳)나 동진(東晉)이 그러했듯, 양주(楊州)지방으로, 현대 중국의 남경인 건업(建業)이었지만, 저 당시 후량이 위치했던 형주의 경제력도 만만찮았다.

그 부를 근간으로 간간히 수에 대항하고는 있었지만 결국에는 막강했던 수나라의 침공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었다.

이제 강남지방의 또다른 경제 중심지를 장악하게 된 수나라에 있어선 엄청난 이득이었을 것이다.

강남의 후량도 제압했겠다, 그동안 염탐하며 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던 문제 양견은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끼고 후량을 멸한 이듬해인 서기 588년, 차남 양광에게 50만 대군을 주어 진을 침공할 것을 명했다.

양광

양광은 훗날 수의 2대 황제 양제가 되며, 고구려에 백만 대군을 쏟아부어버린 유명한 황제로 익히 알려져 있다.

수나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진의 군사들은 연일 패전하기 급급했고, 위급을 알리는 급보는 매일 수도 건강으로 날아들었지만 이는 간신들에 의해 오는 족족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나중에야 수군이 대규모 침공을 감행해왔다는 소식을 접한 진숙보는 무슨 배짱에서인지 여전히 태평했다.

"우리에겐 장강이 있거늘, 무엇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천혜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장강, 즉 양자강을 믿고 큰소리 치고 있던 것인데, 그런 진숙보의 허세를 뭉게버리기라도 하듯 며칠 후, 수의 병력이 도하하여 도 건강으로 쳐들어 오고 있다는 장계가 다시 날아든다.

소식을 접한 진숙보는 예전의 허세는 온데간데 없이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무서워서 질질 짜면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진의 백성들이 수나라 군대를 쌍수들어 환영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만큼 진의 폭정에는 학을 떼고 있었기에 외국군의 침공에도 환영했던 것이었다.

진숙보는 조정대신들을 붙잡고 어쩌면 좋냐면서 대책을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들 입다물고 눈치만 보던차에 자청해서 진격해오는 수나라 병력을 막겠다고 나선 이가 있었는데,

바로 '소마가' 라는 장수였다.

아마 성씨로 미루어보건데 소마가는 진나라 이전의 남조 3번째 왕조, 양(梁)의 황족출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망국의 황족을 받아준 진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인지 누가봐도 다 끝장난 상황에서 진을 위기에서 구해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진숙보는 크게 기뻐하며 소마가에게 큰 상을 기약하며 덤으로 소마가의 가족들까지 황실에서 안전하게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소마가는 그 길로 병력을 긁어모아 수도 건강으로 진격해오는 수나라 병력을 막아섰다.

명색이 최후의 분전이라 그런지 소마가가 이끄는 진군은 예상 외로 선방해내며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저지하며 시일을 끌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진숙보는 멍청하게도 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을 벌이는데,

자신과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외적에 맞서 싸우고 있는 소마가의 아내를 희롱했던 일이었다.

앞서 진숙보가 소마가에게 고마워하며 가족들을 황실에서 보호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약속대로 궁중에 두고 보호하고 있던 것인데 소마가의 아내가 아름다웠는지 건드렸던 것이었다.

보다못한 소마가의 가솔들은 이 사실을 소마가에게 알렸고 당연히 소마가는 분통이 터져 환장할 지경이었다.

기껏 목숨걸고 전장에 나와 싸우고 있는 마당에 자신의 아내를 건드렸다고 하니 눈이 뒤집혀버렸고, 결국 참다못한 소마가는 배신감에 그 길로 수나라군에게 투항해버렸고 그것으로 진의 최종 방어라인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수나라군은 곧장 건강으로 입성하여 궁성으로 진격했다.

진숙보는 수나라 군사들이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그 와중에도 애첩 장려화와 귀비, 궁녀들과 함께 도주했다. 근데 기껏 숨는다고 숨은 곳이 궁성 내의 우물 안이었다고 한다.

근데 막상 안에 있으니 춥고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수나라 군사들도 진숙보를 찾느라고 찾았는데 차마 우물 안까지는 안 뒤져봐서 계속 헤매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참다못한 진숙보는 크게 소리쳐서 자신이 우물안에 있다고 수나라 군사들에게 알리고 나서야 겨우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진숙보를 우물에서 끌어올리던 수나라 병사가 말하기를,

"황제라 그런가 무겁구나."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숙보는 수의 도읍 장안으로 압송된 후, 그곳에서 문제 양견을 알현했다.

양견은 망국의 황제에게 직위도 내려주고 잘 집과 재산도 하사하여 먹고사는데는 불편함이 없게 해줬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 589년, 수의 천하통일 되겠다.

그렇게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던 진숙보는 어느날 문제 양견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되었으면 좀 사치도 부리고 향락을 누리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양견은 기가 차서 그러겠노라 하고 겉으로는 대꾸했지만 나중에 신하들과의 자리에서는 진숙보를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쩌다 망했는지도 모르고 이젠 그걸 나에게 권하는구먼."

서기 604년, 진숙보는 5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낙양의 북망산이란 곳에 묻혔는데, 공교롭게도 이곳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가 묻힌 곳이기도 했다.

손호 역시 오나라의 폭군이었는데, 진숙보도 손호랑 같은 클라스라는 조롱의 의미에서 같은 곳에다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훗날 당나라가 우리나라의 신라와 나당동맹을 맺고 백제를 멸했을때 잡아온 의자왕도 훗날 여기에 장례지냈다.

의자왕도 손호, 진숙보와 같이 나라를 망하게 한 망국의 군주라는 의미에서 그리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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