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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촉오가 나뉘어 혼란스러웠던 삼국시대를 통일한 왕조는 서진(西晉)이다.

 

하지만 이 서진도 황족들끼리의 내란으로 서서히 무너져갔고, 결국에는 북방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아 완전히 붕괴, 서진이 무너진 자리인 화북지방에는 이민족들의 세상인 5호 16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5호 16국 시대란 말그대로 다섯 오랑캐(5호)가 열여섯개의 나라(16국)를 우후죽순 세워댔던 대분열기의 시대였다.

그 중 서진을 멸하고 제일 먼저 나라를 세워 5호 16국 시대를 열었던 이민족은 5호 중 하나인 흉노였다.

서진 멸망 직후 4세기 초의 정세

이 흉노족은 본래 한(漢)이라는 나라를 세웠었는데, 서진 멸망 후에는 국호를 다시 고쳐 조(趙)라고 했다.

다만 훗날 갈족이 세우는 또다른 조(趙)나라와의 구별을 위해 먼저 세워졌다하여 '전조(前趙)' 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흉노족의 전조도 위 사진처럼 백인 냄새 물씬 풍기는 이른바 '갈족(羯族)' 이란 족속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면서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갈족에 관한 포스팅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168)

당시 갈족의 지도자는 '석륵' 이란 인물로, 본래 흉노의 전조에 복속되어 있던 장수였지만 서서히 독자세력을 기르며 전조로부터 분리독립하여 나중에는 전조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림에 표시된 '유요' 는 당시 전조의 황제, 근준이란 인물은 그 무렵 전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인물.

점점 강성해지는 석륵을 경계한 전조는 석륵에게 조왕(趙王)의 직위를 하사하여 구슬리려 했지만, 야심찼던 석륵은 겨우 왕의 자리에 만족할리 없었고 결국에는 서기 324년, 묘한 긴장감이 감돌던 석륵과 전조는 격돌했다.

몇년에 걸쳐 치열한 세력권 다툼을 벌이던 석륵과 전조의 싸움은 서기 328년, 낙양에서의 한판 대전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대패한 전조는 다시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점점 서쪽으로 몰리게 된다.

이렇게 전조를 코너로 몰아붙이고 석륵의 후조(後趙)는 소위 말하는 중원을 장악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329년, 후조는 전조를 완전히 멸하고 화북일대를 손에 넣게 되었고, 그 기세를 타고 이듬해인 서기 330년, 석륵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후조의 건국을 선포한다.

전조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석륵이었지만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점들은 산재해 있었다.

앞서 5호 16국 시대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삼국을 통일했던 한족(漢族)의 서진(西晉)이 있었다고 했었고, 이 서진을 멸했던 건 흉노를 비롯한 북방 이민족들이었다고도 말했다. 

이 서진을 멸하는 과정에 있어서 중원 땅은 전란으로 혼란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고, 무능했던 서진조정을 불신했던 각 지방의 사족들과 호족들 같은 유력자들은 전란으로 떠도는 유민들을 거두어 들이는 대신 그들을 휘하 사병으로 무장시켜 각지에 할거해 있었다.

요컨데, 난세 속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무장세력이라고 보면된다.

한족 중에서도 사족이나 호족이니 하면서 지위가 높았던 자들은 여전히 흉노니 선비족이나 갈족 등은 오랑캐라고 멸시하며 그들이 세운 나라에도 불복종하고 비협조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힘도 없으면서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티는 한족 사족 및 호족들을 죄다 잡아들이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갈족은 본래 초원에 살던 유목민족이었는데 중국에 들어와 제국을 세우긴 했는데, 그 광활한 대륙을 통치할 시스템이나 노하우, 방법 따위에 대해선 아예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말이나 양젖 짜고 살던 자들한테 갑자기 붓 쥐어주고 대제국을 다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에 비해 한족들은 예전부터 중국에 살면서 중국식 통치 시스템 하에서 살아왔던 자들이고, 그 시스템을 만들기까지 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반 백성도 아니고 유력한 지방의 호족이나 사족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석륵은 이 점을 인정하기로 한다.

넓은 제국을 체계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한족 출신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젠 피지배층이 된 한족들에게 갈족 식의 제도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예전처럼 그래왔듯 한족식 시스템을 유지하고 도입하기로 했다.

물론 석륵의 이러한 한화(漢化) 정책에는 석륵 본인부터가 한족의 문화에 심취해 있었던 탓도 있었다.

앞서 석륵은 전조의 장수로 활약할 때부터 장빈이란 한족학자를 비롯한 다른 여러 한족학자들과 고대 문헌과 고사를 갖고 토론하길 즐겼다고 한다.

비록 지는 일자무식이라 잘은 몰랐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토론하는 걸 보면 즐거웠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요인도 있다는 것이고 석륵은 각지의 호족들과 사족들에게 저자세로 임하며 회유, 자신을 도와 제국의 통치를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물론 그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것을 보장하면서, 벼슬도 주고 돈도 주며 후조의 조정에 입조하여 관료로서 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서진 붕괴 이후 잠시 중단되었던 위진남북조 시대의 전통적인 관리등용제도인 '구품중정제' 도 다시 부활시키고, 위진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거의 쇠퇴한 유교, 즉 '유학'도 다시 회복할 것을 약속하며 후조의 정치제도 대부분을 이전의 한족왕조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바꾸었다.

<삼국지12>에서의 진군, 진군이 구품중정제를 만들었었다.

특히 이 구품중정제의 부활은 기득권층인 호족이나 사족들의 환심을 사기에는 그만이었는데, 구품중정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악용하게 될때에는 있는 자들끼리 해먹을 수 있기엔 적합한 제도였다. 

고로, '있는 자' 들인 호족, 사족들은 이런 석륵을 지지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석륵은 한족 호족들에게 병역의 의무도 면제해줬고, 그 후손들에게는 고위직을 약속하며 실로 엄청난 혜택을 부여했었다.

바로 한족출신 호족들의 협력과 협조로 갈족의 후조는 나라를 지탱할 수 있었고, 위 지도와 같이 화북지방을 완전히 장악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석륵도 서기 333년, 사망하고 후조황실은 잠시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석륵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석륵의 장자, 석홍을 석륵의 조카, 석호가 폐살하고 즉위했던 일이 벌어졌다.

석호는 본래부터 야심찼던 인물로 의례 자신이 석륵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석홍이 후계자가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켜 석홍을 죽여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석호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었다.

석륵도 서진을 멸하는 과정에서 잔인함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군주가 되고는 백성들을 건드린 적은 없었는데 석호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며 갈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참다 못한 백성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무자비한 진압 뿐이었고, 석호의 치세동안 일어난 농민 반란만 해도 수차례는 되었다.

그러나 석호의 폭정은 그치지 않았고 점점 도를 넘기 시작한다.

백성들 수십만을 동원하여 궁궐을 증축하고 처녀 수만명을 뽑아다가 후궁으로 들였다고도 한다.

거기다 그 중 수천은 신하들의 애첩으로 나누어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가뭄이나 홍수같은 천재지변까지 겹쳐, 백성들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수만 내지 수십만이 죽었다고 한다.

석호의 폭정에다 때맞춰 겹쳐 일어난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중원지역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갔고, 더불어 갈족 귀족들과 한족 호족들로 구성된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일반 한족 백성 간의 계급적 모순도 점차 심화되고 있었고 지배층은 더 악랄하게 백성들을 수탈해갔다.

기록에 따르면 백성 10명 중 6,7명이 죽었다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듯 가혹한 정치와 수탈에 못이긴 백성들은 점차 현실에서 눈을 돌려 불가에 귀의하기 시작했다. 

물론 정말 사는게 힘들어서 머리 밀고 승려가 되려고 출가한 케이스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당시 백성들이 그랬던 원인에는 불가의 승려들에겐 조세, 병역, 요역의 의무가 면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승려들이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군주 석호부터가 불교신자였던 점이 컸다.

우리나라 조선의 숭유억불 뺨치는 수준의 탄압으로 후한시대에는 불교가 그리 성행하지는 못했었는데, 이 위진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적극 장려되어 불교사원이 곳곳에 설립되는 등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듯 황제가 불교신자로서 불가의 승려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니 자연스레 백성들은 죄다 머리 밀고 승려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불도징

사실 이러한 불교의 전파는 석호가 일반 민중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종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던 의도가 컸다.

그리고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가 불도징이라는 승려였다.

불도징은 한족과 갈족들을 가리지 않고 불교 전파에 힘썼었고, 석호를 도와 국사로서 조정의 일에도 참여하며 백성들을 탄압하고 수탈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당시 후조에서의 불교의 입김은 강했다.

석호도 불교로 민중을 통합하려 했기에 불교를 장려했고, 불도징도 승려로서 불교 전파에 성공했으니 서로 윈윈 전략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던 석호도 서기 349년, 병사하고 후조는 한바탕 황족간의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황족들이 즉위한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저마다 죽고 죽이는 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다 석호의 양자였던 한족출신의 염민이 서기 350년, 모반을 일으켰고, 이때 후조 황실의 갈족은 물론 귀족들 및 백성들까지 모두 죽여없앴고 후조는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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