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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전만 하더라도 고대 중국의 서북부 지방에는 백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민족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었다.

갈족(羯族)이라고도 불리우던 이 소수민족은 현재에도 어느 계통의 민족이었는지는 정확히 알길은 없다. 

다만 이란계나 투르크계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체성에 대해서는 당시 서쪽에 살던 백인계열 민족 일부가 동으로 넘어와서 살다가 현지인들과 피가 섞이면서 갈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갈족을 이란계나 투르크 계열로 추정하는 이유로는 몇가지가 있는데, 먼저 갈족의 생김새에 대해 언급한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수염이 많이 나며 코가 크다" 고 쓰여있다.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와 얼추 일맥상통하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훗날 5호 16국 시대에 갈족이 중국에서 세운 나라인 후조(後趙) 관한 기록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갈족은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 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중동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 위치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국교였으며, 옛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중동의 이란이다.

기록에 따르면 후조의 황실에서는 '호천(胡天)' 이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호천은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아후라마즈다' 라는 신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인종적인 측면에서도 백인종으로 분류되는 갈족이긴 하지만 이렇듯 종교나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백인종의 특성을 띄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론이고 어느것도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그 유명한 흉노만 해도 당장 출신과 인종에 대해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갈족 같이 마이너한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큰 관심도 없는 편이다.

아무튼, 이들은 원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언저리에 살던 소수민족이었지만, 중앙아시아가 흉노에게 정복 당했을때  이들 역시 흉노의 노예가 되었고 그 바람에 그 중 일부는 당시 흉노의 영역이었던 내몽골이나 중국 북부로 강제이주 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 무제의 흉노 정벌 이후 열린 실크로드 개척으로 동서교류의 길이 열렸을 때,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갈족은 본격적으로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들의 첫 정착지는 당시만 해도 중국의 변경이었던 서북부 지방, 즉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쯤이었다.

이렇게 변경에만 살던 갈족은 점차 후한시대부터 중국 본토인 '중원' 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한족(漢族)처럼 일반 백성으로 한족사회에 편입되었다기 보다는 노예의 신분으로 유입되었다.

본래 흉노의 노예부족이었으니 그만큼 출신을 미천하게 보았고 중국에서도 갈족을 천시하여 노예취급 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중국인들이 이 갈족에게 붙여준 이름인 '갈(羯)' 의 뜻 부터가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갈족의 '갈'의 의미는 "불알 깐 흑양 갈' 자인데, 중국인들이 주변 오랑캐들한테 멸시의 의미를 담아 북적, 남만, 서융, 동이 따위로 불렀다 하지만 이들 갈족에게는 유독 괴상한 글자를 붙여 부른데에서부터 얼마나 갈족을 천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노예로 부림당하면서 살아가던 갈족은 가뜩이나 타향살이도 서럽고 더구나 노예로 부림당하는 마당에 하나둘 씩 중원을 떠나 중국의 북부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당시 중국의 북부지방에는 변경지방 답게 흉노나 선비족 같은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변경이니만큼 상대적으로 중국의 지배도 약한 편이었으니, 갈족은 자신들과 같이 천대받는 다른 이민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중국의 지배도 덜한 북부지방에서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후한이 멸망한 후, 뒤이어 삼국시대가 열렸고 삼국시대도 서기 290년, 서진(西晉)에 의해 통일되었다.

하지만 서진시대에도 여전히 갈족에 대한 멸시는 변한게 없었다.

북쪽 변경의 행정구역인 병주(幷州)나 유주(幽州) 같은 곳의 서진의 관원들은 제멋대로 갈족들을 인신매매하여 노예로 팔아다가 부리기 일쑤였고,

서진의 귀족들은 갈족 여자들을 잡아다가 성노리개로 삼을 정도로 갈족여인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갈족에 혼혈이 섞여 있어서 한 미모하는 갈족여자들도 제법있긴 했겠지만 자신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국적 외모의 갈족 여인들이 신기해서 인기를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갈족들은 당시 서진에서 벌어지던 황족들 간의 내란인 '팔왕의 난' 에도 군사로 고용되어 황족들의 개인사병으로서 군사력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서진은 흉노의 침입을 받아 서기 317년, 멸망했고 서진이 멸망하고 공백으로 남은 화북지방에는 온갖 이민족들이 몰려와 나라를 세우는 5호 16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지도에서도 보다시피 갈족 역시 5호 16국 시대의 주역 중 하나였다. 

석륵

그 중 석륵이란 이는 후조(後趙)라는 갈족의 나라를 건국했고, 사실상 이때가 갈족의 전성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기 328년, 후조는 화북지방을 거의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석륵 사후, 석씨 황족들 간에 내란이 일었고 내란은 몇 년 동안 이어져 후조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고 만다.

그러던 중 서기 350년, 석륵의 양손(입양된 손자)이었던 한족출신의 염민이 정변을 일으켜 후조를 전복시켰고 염민은 갈족을 혐오하여 '살호령(오랑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후조 황실의 갈족들은 물론, 갈족이란 갈족은 모조리 제거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 대학살로 갈족의 씨는 거의 다 말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말 소수의 갈족만 도망쳐 본래 살던 서쪽으로 갔다는 말도 있고, 그냥 아예 멸족당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이때의 학살 이후로 갈족은 두번 다시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현재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사는 위구르족이 갈족의 후손이란 말도 있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래 갈족이란 민족부터가 다양한 민족의 피가 섞인 혼혈로 추정되는데다, 그마저도 정확하지가 않아 위구르인들이 갈족의 직계후손이라 보기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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