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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C 유럽

1. 표트르 대제의 유산

러시아의 계몽군주이자 절대군주라 불리는 표트르 대제의 집권기로 인해 러시아는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서방식 문화의 유입은 물론이고 서구식 모델을 기초로 한 강력한 군대도 갖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북방의 맹주였던 스웨덴을 물리침으로써 새로운 북방의 맹주로 떠올랐다.

표트르 1세 사후에도 이런 기조는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

표트르 대제의 손자인 표트르 2세가 조부의 개혁을 전부 취소했지만,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게 되고, 이에 로마노프 직계가 단절되고 만다.

그 뒤 안나 여제, 엘리자베타 여제의 통치 시기로 이어가게 된다.

러시아 역사에서 안나 여제부터를 여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엘레자베타 여제 마저도 후사없이 사망함으로써 다음 러시아의 제위는 독일의 제후로 있던 카를 울리히에게 돌아갔다.

이가 바로 표트르 3세이다.

표트르 3세
표트르 3세와 그의 가족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음으로써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로 즉위했다.

하지만 친프로이센 정책만 고수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재위 6개월만에 그의 아내에 의해서 폐위당하고 만다.

그리고 새롭게 재위에 오른 여인이 바로 표트르 1세 다음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황제인 예카테리나 2세이다.

예카테리나 2세

당시 예카테리나 2세도 독일에서 왔지만 스스로가 러시아인이 될려고 무지 노력을 하였고, 그 노력의 결과로 러시아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남편의 실정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녀는 1762년 근위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가서 표트르 3세를 몰아내었으며, 표트르 3세는 폐위된지 8일만에 암살되고 만다.

젊은 시절 예카테리나 2세
젊은 시절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1729~ 1796)

2. 1차 폴란드 분할

예카테리나 2세 즉위 후 폴란드에 군대를 파견하고, 강력한 압력을 행사해서 폴란드를 보호령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른바 1차 폴란드 분할이 시작되었다.

1차 폴란드 분할

이런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에 격분한 폴란드의 주교 아담 크라신스등 주교들은 폴란드 국왕과 협력하여 바르 동맹을 창설하고, 러시아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이에 예카테리나 2세는 격분하여 군대를 파병하여 바르 동맹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바르 동맹도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강제 시베리아행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협상을 통해 각각 폴란드의 일부분을 분할했다.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

3. 명장 알렉산드로 수보로프

알렉산드로 수보로프(1729 ~1800)

모스크바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수보로프는 7년 전쟁에 참여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낸다.

특히 바르 동맹의 반란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재치있는 전술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물론 상관의 명령 불복종이 심하다는 비판도 달고 다녔지만,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보던 예카테리나 2세는 그를 총애했고여왕과 장군은 주군과 신하 관계를 떠나 친우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

 

수보로프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였다.

당시 러시아는 세력 확대를 위해 남진 정책을 고수 하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오스만의 무스타파 3세는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수보로프는 2번의 기습 작전을 성공시키고, 코즐루카 전투에서 8,000명의 병력으로 4만의 오스만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영토 양도를 조건으로 협정을 맺어야 했다.

코즐루카 전투
1차 전쟁 후 크림 반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이 한창이던 1773년, 농노제 중심의 체제에 불만이 많던 푸카초프는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놀란 예카테리나 2세는 일시적으로 오스만군과 전투를 중단하고 수보로프를 진압에 파견하였다.

수보로프에 의해 푸카초프는 우랄산맥으로 몰리고, 살렙타에서 패하면서 포로로 잡히게 된다.

수보로프는 모스크바로 그를 압송했고,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예카테리나 2세가 현실적 계몽군주로 변하는데 계기를 주게 되었다.

군대 행진

예카테리나 2세의 연인이었던 프레스키 포튬킨은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크림 한국의 병합 계획을 예카테리나 2세에게 제출했다.

그녀는 즉시 승인하였고, 포튬킨은 즉시 크림 한국을 병합하였다.

크림 한국 병합

이에 오스만의 새로운 술탄 압둘 하미드 1세는 조약을 파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며, 제 2차 러시아- 투르크 전쟁이 발발한다.

삼각주 전투

2차 전쟁에서도 수보로프의 활약은 대단했다.

킨부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데에 이어 림니크, 폭샤니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으며, 결정적으로 이스마일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유럽 대륙은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 있어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크림 한국 병합을 인정하며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다.

이스마일 요새 전투
림니크 전투

오스만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예카테리나 2세는 전 유럽이 나폴레옹 문제에 집중하는 사이에 폴란드에 대해 2차 분할을 감행한다.

폴란드 2차 분할
1차~3차에 이른 폴란드 분할

코시치우슈코의 반란을 계기로 결국 폴란드는 3차에 다다른 러시아-프로이센의 분할로 인하여 결국에는 국가가 사라지게 된다.

4.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과 명장의 마지막 행군

1796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승하했다.

자신의 주군이며 친우였던 그녀의 죽음에 수보로프는 절망에 빠졌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에 의해 해임되고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게 된다.

여제 예카테리나 2세
파벨 1세

하지만 칩거도 잠시, 1799년 제 2차 대프랑스 동맹에 러시아도 참여하게 되면서 파벨 1세는 수보로프를 다시 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재임명 된 수보로프
스위스 원정대

스위스로 파견된 수보로프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샤르테나 국왕으로 부터 공작의 직위를 받게 된다.

고탕르 고개를 넘는 수보로프 원정대
고탕르 고개를 넘는 수보로프 원정대

하지만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코르사코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프랑스의 마세나에게 취리히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군에게 항복을 하면서 수보로프는 이탈리아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철군과 전사의 선택 기로에 수보로프는 결국 알프스 산맥을 넘어 철군을 결정한다.

수보로프 알프스를 넘다
수보로프 알프스를 넘다

수보로프가 알프스를 넘는다는 소식에 마세나는 추격을 했지만, 수보로프의 매복 전술이 두려운 나머지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만다.

별다른 피해없이 알프스를 넘는데 성공한 수보로프는 러시아에서 마지막이자 4번째 대원수에 오르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한 수보로프는 개선식을 준비했으나 궁정의 음모로 인해 무산되고, 파벨 1세는 그의 면담 요청마저 거절하면서 그를 압박했다.

결국 수보로프는 그 해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파벨 1세 이후 즉위한 알렉세이 1세는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고 동상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수보로프의 제자 미하일 쿠투조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나폴레옹 몰락에 1등 공신이 되었다.

미하일 쿠투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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