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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슬람을 믿는 국가가 다수라는점과 '스탄'이라는 국가명이 붙었다는게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전부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역사를 가지고있는 지역이다.

중앙아시아 지역과 러시아의 첫 만남은 표토르 대제시절로 표토르대제는 후진국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유럽의 문화와 기술 법등을 도입하고 한창 북방의 강국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러시아에게 접근한 중앙아시아 국가는 히바칸국(Khiva)으로 히바칸국은 이웃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에 애를 먹고있었다.

히바 칸국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반락을 진압하기 힘들다는걸 깨닫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고 반락을 진압하기로 결정한다.

나르바에서 스웨덴군에게 항복하는 러시아군

하지만 러시아의 사정도 좋지 못했는데 에스토니아의 나르바에서 러시아군은 8만명의 대군을 동원하고도 8000명 가량의 스웨덴군에게 대패를 당하는 치욕을 겪고 스웨덴과의 전쟁에 모든 국가 역량을 쏟아 붓고 있어서 히바칸국의 요청을 거절할수밖에 없었다.

폴타바 전투(오른쪽 하단 표토르 대제)

비록 나르바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러시아는 표토르 대제의 지도하에 폴타바에서 스웨덴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그제서야 히바칸국의 보호국 요청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으며, 전쟁기간 러시아인들은 굶주림과 질병 전쟁터에서의 부상 및 사망등으로 약 2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햇기에 더 이상의 확장보다는 내치에 집중해야할 시기였다.

표토르 대제가 히바칸국의 보호국 요청을 거절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히바칸국에 위치한 아무다리야강 인근에서 엄청난 양의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표토르 대제는 히바로 돌아가던 히바칸국의 사신을 다시 불러오고, 위대한 러시아가 히바 칸국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한다.

러시아 원정대의 대장 알렉산드로 베코비치

표토르 대제는 히바로 가는 원정대를 꾸리고 알렉산드로 베코비치를 원정대의 대장으로 삼았다.

알렉산드로 베코비치는 표토르 대제의 신임을 받는 친위연대의 장교로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대활약한 사람이었고, 이슬람에서 러시아정교로 개종한 사람이었기에 히바인들을 잘 다를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베코비치가 받은 임무는 아무다리야강에 위치한다는 금광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것과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갈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고대에 건설된 중앙아시아의 수운을 이용가능 여부로, 

베코비치의 탐험대에는 해당 지역을 조사하기위한 지리학자와 금광을 발굴하가위한 광물학자, 생물학자등 학자들과 장사를 하기위한 상인, 군인등 약 5000명의 규모로 러시아가 탐험에 거는 기대를 알 수 있다.

 1716년 2월 4일 러시아 탐험대는 끝없는 사막을 거치고,

적대적인 현지 유목민들의 습격과 사막의 일교차로인한 질병, 배고품을 겪고 탐험을 떠난지 6개월만에 히바에 도착할 수있었다.

히바(khiva)칸국의 영역

베고비치의 탐험대가 히바칸국에 도착했을 무렵, 히바칸국에 적대적인 무리들은 모두 진압당했기에 히바입장에서 러시아는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였다.

거기다 대포를 보유한 5,000명 이상의 유럽 군대의 존재는 히바칸국의 칸입장에서 러시아가 히바를 점령하러 왔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고 러시아군을 두려워한 히바의 칸은 러시아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대포를 보유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정면공격을 할수는 없으니 히바칸국은 속임수를 쓰는데, 러시아군을 환대하는 척 그들의 군대를 주민들의 불안감을 이유로 분산배치토록 한 것이다.

베코비치는 히바인들의 따뜻한 환대에 방심하고 군대를 분산 배치시키고, 그 날 밤 저녁 히바인이 러시아인들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베코비치가 연회장에 들어서고 히바의 칸과 포응을 한후에 장교들을 소개하려는 순간, 히바의 칸이 신호를 보내고 연회장에 숨어있던 히바인들이 튀어나와 베코비치를 사로잡고 연회에 참석한 러시아 장교들을 공격했다.

베코비치는 히바의 칸이 보는 앞에서 다른 장교들이 처형당하는걸 끝까지 지켜본후 마지막에 참수당했다고 한다.

베코비치를 비롯한 러시아 장교들이 연회장에서 참수당하는 동안 분산되어 있던 러시아 군대도 도시 곳곳에서 튀어나온 히바군대에게 학살당하고, 5,000명의 탐험대 중 살아남은 자는 40명에 불과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전원 노예로 팔려나가 러시아 탐험대는 사실상 전멸했다.

한편 표토르 대제는 탐험대가 빨리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탐험대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고 탐험대가 전멸한 몇달뒤 유목민들을 통해서 탐험대가 히바칸의 군대에게 전멸당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베코비치 탐험대가 구체적으로 히바칸국의 배신에 전멸당했다는 소식은 노예로 팔린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로 돌아오면서 전해졌고, 표토르 대제는 분노하여 복수를 다짐했어.

하지만 표토르 대제가 히바칸국으로 군대를 보내려는 순간, 스웨덴과 오스만 투르크가 러시아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다.

표토르 대제는 히바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없었다.

히바칸국도 막상 러시아 탐험대를 전멸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가 복수를 한다는 소문 때문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러시아군의 출병 소식이 들리지 않자, 히바칸국은 러시아를 만만히 여겨 러시아 국경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첫 만남은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히바칸국과 히바칸국의 하수인들인 투르크멘 부족들이 러시아의 변경을 약탈해도 러시아는 유목민들을 공격하기보다는 요새를 만들고 수비로 일관했는데, 러시아의 정예군은 전부 유럽에 있었고 중앙아시아에는 비교적 노병들 및 비정예군들만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변경을 약탈하는 타타르족

러시아를 약탈하고도 아무런 보복을 당하지 않자 부하라칸국, 코칸드칸국. 카자흐족 투르크멘족, 키르기스인, 체르케스족등 중앙아시아 모든 부족과 국가들이 러시아 변경을 약탈했고 러시아 국경지대는 난장판이 되었다.

히바의 페르시아 노예

이들 중앙아시아 국가와 부족들은 노예 매매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러시아인과 페르시아인을 노예로 사로잡고 노예시장에 팔고 노예무역은 번성했다고 한다.

백인 노예를 해방시키러 히바에 방문한 영국 군인은 노예시장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히바에서 가장 값이 싼 남자 노예는 타타르인이고, 여자 중 값이 싼 노예는 나이먹은 러시아여자다. 가장 값비싼 여자노예는 15살 이하 러시아 노예고 그 다음이 페르시아 여자다."

영국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도 기록을 남겼는데 상인으로 위장하고 히바를 방문한 러시아 군인의 기록은 "히바에는 3000명 이상의 노예상태인 러시아인이있고 이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있다었다. 내가 러시아인이란걸 알아본 노예들은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모른체 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동포들이 비참한 노예상태로 있는걸 보고있는 건  무척이나 힘든일이었다."

물론 러시아가 가만히 있는건 아니였다. 러시아는 상인들로 위장한 첩자들을 중앙아시아로 침투시켜 중앙아시아의 지리와 주민들 도시의 군대수 등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표토르 대제는 죽기전 유언을 남겼는데, 유언 중 러시아는 동로마제국의 후계자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라는 내용의 유언과 무슨일이 있어도 인도를 정복하라는 내용을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표토르 대제가 남긴 유언은 조작된 유언이었는데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의 위대한 차르인 표토르 대제의 이름을 팔아 러시아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인도정복을 마치 러시아인들의 숙명처럼 인식시키려 했고 이게 러시아의 남진정책의 근복적 이유였다.

인도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있는데 배를 타고 가는 방법과 육로로 가는방법, 두 가지로 배를 타기위해서는 얼지않는 부동항을 획득해야했고 육로로 가는 방법은 중앙아시아를 지나는 방법으로 러시아는 유럽의 정세가 안정되는 대로 인도로 가는 중간거점을 얻기위해 중앙아시아국가들을 손 볼 준비를하고있었다.

마침내 1801년 1월 24일, 러시아의 차르 파벨 1세는 2만 2천 명의 코사크를 소집하고 인도로 행군할 준비를 위한 첫 단계로 오랫동안 러시인 국경을 약탈한 히바칸국과 부하라칸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벨 1세가 인도 원정을 명령한 이유는 나폴레옹 때문이었는데 파벨 1세는 자신의 여동생을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내고 싶을 정도로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처럼 영국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나폴레옹을 위해 영국에게 큰 손해를 입히려 인도원정을 계획한 것이었다.

 "인도로 가라. 하지만 먼저 투르크멘인들부터 제거하라."

인도로 가는 남진정책 일환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원정은 시작되었다.

차르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원정대는 히바로 진군했다.

하지만 러시아 지휘관들은 차르 파벨 1세에게 편지를 보내 원정이 성공할수 없을거 같다고 보고하는데, 이유인즉슨, 병력 부족, 군수품 부족, 히바의 지도가 없는점, 중앙아시아 지역의 변덕스러운 날씨, 적대적인 현지인의 습격으로 지휘관들의 보고를 받은 파벨 1세는, 

"병력과 군수품 카스피해를 통해 전달할 것이며, 지도는 구하는 중이니깐 기다리고, 날씨는 좋은걸로 알고 있는며, 현지인 습격은 예정된 사항이니, 도로를 만들던지... 여튼 우리 러시아군은 용기있고 인내심있는 군대고 신이 보호하는 군대니 잘 풀릴것이다. 계속 진군하라!"

러시아 원정대 지휘관은 차르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계속 진군한다.

하지만 히바를 향한지 한달만에 병력의 절반이 동상에 걸려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으며, 차르가 보내준다는 병력과 보급품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원정대가 꿈도 희망도 없는 원정을 계속하던 도중, 원정을 중지하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암살자들에게 암살당한 파벨 1세

평소 파벨1세의 친프랑스 및 반영국 정책에 분노한 러시아 귀족들이 파벨 1세를 암살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 1세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해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러시아의 원정은 실패로 끝난다.

알렉산드로 1세

러시아의 새 차르가된 알렉산드로 1세는 원정을 중지하기는 했지만, 평소 중앙아시아인들이 러시아 국경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에 분노했고, 중앙아시아인에게 본때를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로 1세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아내고 유럽쪽 국경이 안정되자 기존 중앙아시아 지역에 정예 코사크 부대를 재배치하고, 

대포를 보유한 목조요새를 건설하여 중앙아시아 부족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또한, 기존까지 방어위주의 운영에서 적극적인 공세위주 정책으로 전환하여 카자흐족과 체르케스인을 무력화시킨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존의 정보체계를 바꾼 것인데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탐할때 사용하던 상인으로 위장해 정보를 수집하는 고전적인 방법에서 러시아로 전향한 무슬림들을 첩자로 파견하는 방법이었다.

무슬림 첩자들은 히바칸국과 부하라칸국 코칸드칸국 곳곳을 여행다니며, 지도를 만들며 도시의 병력상태, 러시아군이 처들어올시 진군로, 도시 성벽상태등 모든것을 염탐했고 마침내 1838년 히바(Khiva) 원정을 개시한다.

이번 원정 목표는 히바칸국에 잡힌 러시아 노예를 모두 구출하고 아무다리야강의 수원을 파악하는 것과 아랄해를 조사하는것으로 러시아군의 규모는 5,000명 이었다.

러시아군은 이번에는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지난 원정이 보급 문제와 중앙아시아 사막의 더위 때문에 실패했다고 여겨, 보급용 낙타 1만 마리를 준비시켰고 원정날짜도 더위를 막을 수 있고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겨울로 정했다.

원정은 초반에는 순조로왔지만,

갑잡스러운 눈보라와 괴혈병, 설맹에 병력의 절반을 잃고 철수할수밖에 없었다. 

히바칸국은 러시아를 만만히보고 공격하지 못 할 줄 알았지만 러시아의 공격에 서둘러 대비책을 세우는데 모든 러시아 노예를 해방시키고 더 이상 러시아 노예는 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히바칸국을 공격할때 히바를 방문한 영국 군인의 기록을 보면 "내가 히바에 왔을때 모든 사람들이 전쟁준비에 분주했었다. 어떤이들은 대포 몇 발만 쏘면 날아갈것같은 성벽을 보수하고 있었고 어떤이들은 군사훈련에 열심이었다. 영국인이 히바에 왔다는 소식이 칸에게 전해지자 칸은 나를 자신의 궁궐로 초대했는데, (중략) 칸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러시아의 침략을 막을 수 있냐고 물어봤고, 나는 모든 러시아 노예를 해방시키면 러시아가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계획을 수정했는데 히바칸국을 공격하는 대신, 

상단 녹색 부분이 러시아의 진격로

코칸드 칸국부터 공격해서 히바칸국을 포위하자는 것이었다.

1864년 때마침 코칸드 칸국 소유의 페르가나 분지에서 면화농사에 알맞는 비옥한 땅이 발견되고, 러시아는 코칸드칸국을 우선적으로 침략하여 전 중앙아시아 영토를 지배하겠다는 고르차코프 선언문을 발표한다.

선언문 내용을 살펴보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처지는 야만적 유목민들과 국경을 접하게된 모든 문명국의 처지와 똑같다. 이런 상황에서 문명국들은 문명국의 이익과 상업적 이해관계의 증진을 도모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힘으로 야만족들을 제압할수밖에 없다. 러시아 정부는 야만적인 상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문명을 가져다 줄 필요가 있다. 이게 문명화상태에 이르지 못한 모든 국가들의 운명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위치(히바(khiva)>부하라>코칸드 순)

러시아의 첫 목표는 코칸드 칸국의 도시인 타슈켄트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는 당시에도 천연자원과 교역 도시로 부유한 도시였다.

하지만 타슈켄트 주민들은 코칸드 칸국의 높은 세금에 질려 부하라 칸국의 칸에게 보호요청을 보낸 상태였고, 러시아는 적절한 타이밍에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러시아군의 지휘관 미하일 체르나에프

미하일 체르나에프는 불과 1,300명의 병력으로 타슈켄트로 향했는데 타슈켄트에는 무려 3만명의 병력이 배치되 있었다.

러시아 본국에서도 체르나에프에게 경거망동 하지마라면서 원정을 금지했지만, 체르나에프는 본국의 명령을 무시하고 1865년 5월 8일 타슈켄트로 진군한다.

러시아군대는 타슈켄트의 수원을 끓은뒤에 성을 무자비하게 포격하고  6월 15일도시에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러시아군이 도시로 진입하려고 하자 부하라칸국의 지원군이 도착하는데, 체르나에프는 타슈켄트에 불을 질러 타슈켄트 군대를 묶어 놓고, 부하라 군대를 상대한다.

체르나에프는 부하라 군대를 포병과 보병방진으로 유인시키고, 부하라 군대는 거의 전멸하고 소수만 살아남았다.

부하라 군대를 믿고있던 타슈켄트 사람들은 체르나에프에 항복하였고, 중앙아시아인들은 소수의 군대로 타슈켄트를 점령한 체르나에프를 "타슈켄트의 사자"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체르나에프는 타슈켄트를 함락시키긴 했지만 상부의 명령을 무시한 죄로 좌천당하고 후임자로 카우프만이 왔다.

카우프만은 우선 코칸드칸국을 압박해 보호국 조약을 맺었는데, 코칸드칸국은 중요도시 타슈켄트를 뺏기고 쇠락중이라 쉽게 보호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코칸드칸국을 굴복시킨 러시아의 다음목표는 부하라 칸국의 사마르칸트였다.

사마르칸트 성벽에서 돌격명령을 기다리는 병사들

카우프만은 겨우 3,5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로 처들어간다.

유서깊은 도시인 사마르칸트 사람들은 도시를 파괴당하기 싫어서 러시아군에 항복했으나, 부하라칸의 지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을 거부하고 러시아군대를 공격한다.

사마르칸트 함락

부하라칸국 지원군은 러시아 대포에 제압당하고, 사마르칸트는 함락된다.

제압당한 부하라 병사들

사마르칸트를 빼앗긴 부하라칸국도 러시아의 보호국이 될 수 밖에 없었으며, 러시아의 다음 목표는 바로 히바(Khiva)였다.

히바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1873년 2월 5일, 12,000명의 러시아군은 사방에서 히바로 처들어가는데, 히바군도 5만명을 동원해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대포 56문을 동원한것에 비해 히바군의 대포는 구식 대포 2문으로 그마저도 고장난 상태였다.

아무다리야강을 도하하는 러시아군

 러시아군은 5월 26일 히바에 도착했고 도시를 포위 공격한다.

죽을뻔한 러시아 장교

히바군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는데 러시아 오렌부르크 원정군의 사령관 베로브킨 장군이 히바군의 사격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 전사하고, 약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뒤에야 히바를 점령할 수 있었다.

히바가 점령된후 러시아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투르크멘족의 도시국가인 게옥테페와 메르브뿐이었다.

게옥테페와 메르브의 투르크멘인들은 인간사냥꾼으로 악명이 높았고 투르크멘 부족 중에서도 호전적인 가장 호전적인 부족들이었다.

페르시아 여자를 납치하는 투르크멘족

또 게옥테페의 투르크멘족들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에게 제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 국경에서 약탈질을 하는 유일한 중앙아시아 부족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게옥테페를 쓸어버리기로 작정한다.

게옥테페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행군 도중 투르크멘족의 습격을 받은 러시아군
게옥테페 포위공격

게옥테페의 투르크멘인들은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터키인 기술자들을 초청해 성벽을 강화했으며, 신식 대포와 소총도 구매한다.

러시아군은 정면으로 성을 공격하는데 실패하고, 땅굴을 파서 성을 공략했는데 성벽에 약 50m의 구멍이 생기자 러시아군은 구멍으로 쏟아져들어가 게옥테페를 점령한다.

게옥테페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러시아인을 노예로 잡아간 자들에 대한 본보기로 항복한 자들은 기병도로 손목을 자르고 죽였으며, 아이와 노인할 것없이 도시의 살아있는 모든것은 다 죽였다.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학살은 근대 문명국가가 할 짓이 아닌 야만족이나 할 짓으로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차르의 백성을 노예로 잡아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란없다는 이유로" 학살을 정당화했고 게옥페테의 학살을 지켜본 다른 투르크멘 부족들은 다시는 러시아국경을 건드리지 못했다. 

러시아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자진해서 러시아 노예들을 풀어준 부족들도 있었다.

게옥테페를 점령한 미하일 스코벨레프

스코벨레프는 이후 투르크멘인들에게 "핏빛의 눈"이라고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유명한 말을 남기는데 "아시아 놈들은 맞으면 맞을수록 말을 더 잘듣는다. 더 쎄게 때릴수록 복종하는 시간도 길어진다."

메르브(빨간 동그라미 부분)

게옥테페가 점령되고 러시아의 마지막적은 메르브였다.

메르브는 게옥테페처럼 유명한 노예매매지였고 부유한 교역도시였다.

러시아는 메르브 점령에 앞서 메르브로 스파이를 보내 도시를 정탐하기로 한다.

두사람의 러시아군인이 상인으로 위장하고 메르브로 들어가는데 메르브에는 이미 러시아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다는걸 깨닫자 러시아군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인이라는걸 공개하고 메르브인들에게 러시아와의 교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메르브인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두 달 뒤 러시아 상인들이 메르브에서 장사를 할수있다고 허락했다.

두 달 뒤 메르브에 온 러시아인들은 상인들이 아닌 대포로 무장한 병사들이었고 메르브인들인 자신들과 교역협상을 한 사람들이 러시아군이라는걸 깨닫고 항복하고 만다.

 메르브가 항복한 이후 2,000개의 투르크멘 부락이 추가로 항복했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도 막을 내린다.

이후,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한 영국인이 기록을 보면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 모든 도시가 마찬가지였다. 사막의 지배자였던 투르크맨족은 철저히 길들여져 있었다. 불과 8년전만해도 러시아의 적들이던 투르크멘족 사람들은 러시아 군복을 입고 으스대고 있었고, 백인 차르를 경배하기위해 모스크바로 가는모습은 러시아 정복의 철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에 즉위하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모든 부족을 대관식에 초청시켜 러시아의 힘을 보여주는데, 대관식에 참여한 중앙아시아인들은 대관식의 규모와 화려함에 놀라 "러시아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러시아에게 대항하면 죽음뿐이다."라고 여기고 러시아에 그나마 반항하던 모든 부족들은 전부 항복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 철도를 건설했고, 러시아인들은 철도를 타고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간다.

카자흐스탄에는 1830년 부터 러시아인들이 이주해왔고 우즈베크스탄도 1880년도부터 러시아인들이 이주한다.

스탈린의 통치시기를 거치면서 러시아인 뿐 만아니라, 독일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 유럽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고 유럽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살게되었다.

얼마나 유럽인들이 많이 들어왔냐면 1950년에는 카자흐스탄 인구의 70%가 러시아계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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