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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포스팅은 겨울왕국의 '안나'라는 캐릭터와 다소 비슷한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인물을 시점으로 포스팅합니다.

'엘사'와 비슷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리드리히 2세로, 아래글을 참조하시면 될 듯 합니다.(프로이센의 부흥시대)

참고글 [독일사]패망한 나라를 재건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https://peacefulbreak.tistory.com/123

[독일사]패망한 나라를 재건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위대한 인물'의 영광' 우리가 '독일'이라 부르는 나라는 18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 지역은 서로 작은 국가로 나뉘어 춘추전국시대 뺨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17세기경, 독일 동쪽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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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Maria Theresia Walburga Amalia Christina)

 

유럽 최대의 왕가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상속자이다.

그녀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합스부르크 - 로트링겐 왕가가 되기 때문에 순수한 합스부르크로서는 그녀가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래 남편의 성이 앞에 오던가 아니면 남편의 성만 쓰는게 유럽은 물론 전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전통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인 프란츠 1세는 병풍이나 마찬가지인 신세인데다가 고작 공작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나라 다스렸고, 둘 사이의 능력차이도 심했고(프란츠는 잘해봐야 당대 평균수준의 통치능력을 가졌지만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역사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정치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가문의 역사차이도 심했어서 자식들은 유럽역사상 거의 없는 어머니의성인 합스부르크를 앞에 다쓰고 아버지의 성인 로트링겐만 예의를 봐서 뒤에 붙여주어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왕조를 열게 된다.

하지만 주로 부를때는 합스부르크 왕조였기에 그냥 공식적인 문서상 뒤에 붙은 수준의 허수아비 성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여기에 붙였는지 좀 감이 잡힐 것이다.

 

 

겨울왕국의 크리스토프는 병풍이나 다름없었고, 솔직히 없어도 스토리 진행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인물을 말할대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말할때 남편인 병풍 프란츠 1세는 빼놓고 말하지만 절대 그녀 최대의 라이벌이자 적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빼먹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사실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당연히 비슷하기만하지 똑같지는 않다.

겨울왕국에서,

 

 

안나를 말한다면 필히 말해야될 인물은,

 

 

바로 이 엘사이다.

재미있게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관계는 어떤 부분들은 안나와 엘사와 정말로 많이 비슷하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엄청나게 다르다.

물론 엘사는 여자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남자라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지만...

대신 엘사는 선천적으로 얼음을 다스리는 천재였다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사전략의 천재였다.

엘사가 무적의 힘을 지녔던 것처럼 당대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국가간 국가의 1:1대결에서는 거의 무적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그의 국가가 고작 프랑스나 합스부르크 왕가 인구의 1/10도 안되거나 그 이하의 중규모 국가였지만 그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으로 결코 이들 국가와의 1:1 대결에서는 밀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인기라는 면에서 겨울왕국의,

 

 

엘사가 부동의 1위, 안나가 2위인 것처럼 당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인기가,

 

 

프리드리히 대왕이 1위.

 

 

마리아 테레지아는 2위였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머리색도 유사하다.

 

 

안나가 붉은 기운이 도는 금발머리 혹은 갈색머리이듯이,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발을 안 쓴 원래의 머리색은 붉은 기운이 도는 금발머리 혹은 갈색머리라고 한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안나는 성격적인 면에서 서로 매우 비슷한데, 심지어 이건 엘사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성격도 서로 비슷한면이 있다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사실 시나리오 작가가 이런거 생각안하고 만들었던 것이겠지만 제법 겹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겨울왕국의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에 나오는 그 유명한 언니야 눈사람 만들자 같은 노래를 부르는 밝고 활기찬 안나처럼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격은 댄스를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밝고 활기찬 사람이었다고 한다.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의 한장면으로 이렇게 춤추고 노래부르고 신나하는 성격에,

Love is an Open Door의 한 장면으로 후에 그녀의 남편이 되는 프란츠 1세를 만났을때 어린 나이에도 너무 좋아해서 꿈에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시녀들에게 말한 것을 영국 대사가 편지에 적어 본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실제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라는 영국의 주요한 동맹국이자 당시 프랑스와 함께 유럽대륙을 양분한 강대국의 후계자인만큼 이런식의 철저한 스토킹을 통해서 정보를 습득하고 본국에 전달한 것이다. 당대 유럽의 3강이 프랑스 - 영국 - 합스부르크 군주국이었으니까는 서로간에 정보 수집 자체는 매우 치열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프리드리히 대왕과 엘사는 굉장히 닮은 구석이 많다.

대표적으로 엘사는 부모님에게 일평생 이해받지 못했는데, 부모님은 엘사가 가진 힘을 억제해야 된다고만 가르쳤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열망이 있었고, 실재 자신의 플루트 연주실력이 프로수준에 다다랐으며, 자신이 교향곡이나 오페라등을 작사작곡할줄 알았다. 자신이 직접 작곡해서 자신이 직접 연주했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살아생전에 아버지는 절대로 이걸 인정하지 않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문화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보이면 구타, 강금, 협박등을 하며 절대로 이해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점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더 심하게 고통받았다는 것인데,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가 가정적으로는 심각하게 문제가 많아서 구타, 폭력, 그리고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실재 프리드리히 대왕의 두형은 아버지의 심각할정도로 무시무시한 가정교육받다가 죽었다고 한다.

한명은 아버지가 왕관을 씌워준다고 하다가 왕관크기가 안 맞다고 아들의 머리에 강재로 끼워버리다가 상처가 덧나서 사망했다고 한다...

다른 한명은 어린이인대도 대포 옆에 사열시킨 후 계속 대포를 발포 시켜서 그 쇼크로 사망했다..

이런 아버지 아래서 이해받지 못하고 구타와 폭력과 강금등을 당하며 불쌍하게 살아왔더 인물이다.

어린시절 내내 집에만 박혀 있어야 되었던 엘사와 유사하다.

사실 생각해보면 겨울왕국이 어린이도 볼 수 있는 디즈니의 가족영화라서 저 정도지 약간 암울한 내용의 영화였다면 프리드리히 대왕 찍을만한 캐릭터가 맞다.

이 둘의 정말 닮은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대관식이다.

물론 흐름자체는 다르다. 엘사는 대관식이 실패하고 도망갔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관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왕이 되었다.

하지만 대관식을 기점으로 이 둘의 인생에 극적 변화가 오는 것은 정말 비슷한 점이다.

Let It Go의 한 장면으로 엘사는 대관식에서 뛰쳐나와 작품내 가장 유명한 씬을 탄생, 즉 Let It Go를 부르며 자신의 자아를 한단계 발전시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관식을 통해 드디어 아버지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플루트와 음악과 문화를 마음것 향유하며 이렇게 직접 작곡한 곡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 곡이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는 부분까지 이 둘은 닮았다.

 

20대의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안나와 유사하게 노래를 좋아했다고 하며, 실재로 노래를 굉장히 잘불렀다고 한다.

얼마나 잘 불렀냐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제시절에 하이든의 성가극에서 소프라노 솔로를 부를 정도로 굉장히 잘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하이든이 변성기가 찾아와서 노래가 이상하게 되자, "하이든조차 이제는 오리가 꽥꽥되는 수준이 되어버렸군요." 라고 말하며 하이든에게 거대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나중에 작곡가되서 다시 돌아오니 일도 바쁠텐데, 직접 성가극의 소프라노 솔로까지 불러줄 정도로 하이든을 아꼈다고 한다.

이런 마리아 테레지아의 재능을 물려 받았는지,

 

 

그녀의 6녀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고 한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soprano) : 경쾌한 움직임과 화려한 음색을 지니고 특히 최고음역이 정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의 《마적》에서 <밤의 여왕>은 콜로라투라소프라노이다.

다른 곳에서는 밤의 여왕이 리리코 소프라노라고 했는데, 두산백과사전이 더 맞을테니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맞으리라고 보인다.

그리고,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밤의 여왕하면 역시 밤의 여왕 아리아(Queen of the Night aria)인데,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은 기본적인 모티브가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말이 있다.

아름답고 카리스마 있으며 분노와 증오가 엄청나다는 내용이다.

실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2번이나 전쟁을 치루어 프리드리히 대왕을 증오하고 있었다고 평가받으며, 그리고 모차르트는 어린시절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전에서 노래를 부른적이 많거든.

그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주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결혼해달라고 말했고, 그걸 그대로 쪼르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달려가서 결혼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더 큰 후에 보자"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사족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최대의 실수는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차르트에게 시집보내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정략결혼한 다른 딸들이 참변을 당했겠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하튼 위에 말했듯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중 하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뛰어났다고 하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딸의 적당히 섞어서 밤의 여왕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제법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복수를 위해서 딸을 정략결혼으로 파는 마리아 테레지아, 복수를 위해서 딸을 다그치는 밤의 여왕.

그리고 그 둘 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강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에서 밤의 여왕의 모티브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확률일 가능성은 꽤 있어보인다. 실제 당대에 정략결혼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예술가인 모차르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하나의 강력한 광기라는 느낌이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즉, 겨울왕국에서 엘사와 안나의 사이가 나빠졌으면 흡사 안나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엘사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되었을 내용이라는 것이다.

 둘 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고는 되었지만, 증오하는 그런 사이 말이다.

실재로 끝까지 원수처럼 보고 증오하지는 않았지만, 이 둘의 모든 오해와 증오가 풀린 것은 이 둘이 늙은이가 된 후였다.

 

 

서론을 마치고,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로서 대를 이를 사내아이가 없어 그녀가 후계자가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3명의 결혼 후보가 나타나게 된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왕자
포르투갈의 주제 왕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자(북들고 있고 드레스 입은 아이가 어린시절의 프리드리히 대왕)

 

(저 당시 어린 남자 귀족아이를 여장시키는 유행이나 미신이 있었는 듯하며, 추가로 저 북들고 다니는게 군대 같다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후보자는 3명이었으며, 스페인의 왕자는 또 스페인하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혈연 동맹을 우려한 전 유럽이 반발해서 초반에 무산되었다.

포르투갈도 뭐가 뭔지 모를 이유로 무산되고, 사실상 프리드리히 왕자가 가장 결혼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되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선서로 황제를 뽑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임했는데, 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뽑는 7~8명의 선제후 중 하나가 브란덴부르크 공작이었고 프로이센의 왕이 브란덴부르크의 공작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니 프리드리히 대왕과 결혼하면 7~8명있는 선제후중 브란덴부르크의 투표권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가지고 있는 보헤미아의 왕이렇게 2개의 투표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좋았고, 당대 유럽최강의 명장 사보이의 외젠 공작이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기 최고의 수제자이며 그는 자신을 뛰어넘을 전장 사령관이라고 극찬을 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결혼을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프리드리히 대왕을 굉장히 신경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15살때 아버지 몰래 장서 4,000권이 들은 비밀 도서관을 짓느라 7,000탈러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이걸 이용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결혼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실패해 버린다.

그리고 사실 이 때쯤에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가출이 일어난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의 폭력과 과도한 결혼 압박을 못 이기고, 친한 친구와 함께 18살에 어머니의 사촌이 왕하고 있는 영국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어머니의 나라 영국으로!" 이러고 도망가려다가 걸려서 친구는 사형에 처해지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금당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이 잘보는 밖에 사형당한 친구의 목을 걸어두며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지독히도 괴롭힌다.

그리고 사형시켜야된다고 온갖 난동을 부린다.

참다참다 아무리 남의 집안일이라도 이 정도의 막장 of 막장 상태를 도저희 용납할 수 없던 주변 영주들은 물론 프로이센의 법정과 법관, 신하들, 심지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까지 모두 나서서 적당히 좀 하라고 말리고, 결국 주변에서 하도 하지 말라고 막아대니까는 자기 아들이 가출했다고 사형시키는 막장 짓은 포기했지만 아버지의 명령으로 강제로 결혼을 해야되었다.

이때 선택지가 2가지였는데.

전자는 어머니가 소개해주는 영국 왕실의 인물과 결혼하거나, 아니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때 합스부르크 왕가는 7,000탈러의 빚을 다시금 이용해서 매년 2,500탈러의 연금을 주는 대신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을 결혼시키는 것은 성공한다.

그 인물이,

 

브라운 슈바이크 베버른의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나

 

브라운 슈바이크 베버른의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얼마나 극진히 모시고 신경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랑속에서 위의 병풍 프란츠 1세와 결혼한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터져버린다.(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 영지는 오스트리아였고, 그 계승에 관련된 전쟁이라고 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으로 불린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이걸 막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다가, 굉장히 순종적이고 현모양처였던 엘리자베스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모든 것은 물 건너가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2가지를 대의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킨다.

하나는 슐레지엔 지역은 예전에 조상들끼리의 약속에서 우리 프로이센을 주기로 약속한 땅이니 슐레지엔을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슐레지엔을 주면 헝가리의 여왕 즉 마리아 테레지아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이끌고 슐레지엔으로 무단으로 들어와서 바로 점령해버린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영토 중 하나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빠르게 왕위에 오르는게 확실시된 작위였다.)

당연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대를 보내서 반격하였고, 첫 전투에서 부사령관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도망가라고 종용해서 보내버린 후에 자신이 군대를 통솔해서 합스부르크의 군대를 물리친다.

첫 전투에서 너무 어설퍼 부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내주었으나, 이 첫 전투를 통해 많이 배운 후 그는 전쟁천재라는 소리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능력은 후대의 나폴레옹이 늙어 죽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에 직접 찾아가 경의를 표하며,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반대가 되었을 것이라고 칭송하는 수준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는 이길 수가 없었지만, 기타 다른 지역의 프랑스나 바이에른의 군대를 격파하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녀는 슐레지엔을 제외한 합스부르크의 모든 영지를 상속받았고, 자신의 남편 프란츠 1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시켰고, 주변 국가로부터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프리드리히 대왕보다는 뒤떨어지는 No.2의 능력을 보유했도, 인기도 프리드리히 대왕에 뒤를 이어 No.2였다.

다만 그녀 자체의 인기는 엄청났지, 프리드리히 대왕이 더 인기인이었을 뿐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의 왕족을 대중과 국민에게 사랑받는 행동을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가진 미모와 여러가지 능력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까지 당대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던 근본도 이런 능력으로 가장 먼저 중요한 영지 중 하나인 헝가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헝가리인의 적극적인 지지속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위의 그림은 그런 헝가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행차하는 모습인데, 맨앞에 금발을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이 남편인 프란츠 1세인데 헝가리 귀족들은 대놓고 프란츠 1세를 무시했기 때문에 여왕 옆에 앉지도 못하고 저렇게 구석에서 말타고 있는 것이다.

헝가리 귀족들은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자신들의 아이돌 스타와 결혼한 프란츠 1세를 무시함으로서 나름의 자존심을 보여주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행위는 여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런식으로 아이돌 스타적인 모습으로 인기를 모았다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압도적인 포스로 

 

 

신과 같은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며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괜히 프리드리히 대왕과 겨울왕국의 엘사를 비교한게 아니다.

 

 

인터넷 상에서 엘사를 칭송하는 것처럼,

 

 

저 당시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을 정말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널렸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항하기 위해서 주변에 모든 동맹을 뼈속까지 동원하고 모으게 된다. 흡사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처럼 말이다.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 혼자서 그리스 정교회 국가라고 따돌림 당하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였다.

표토르 대제의 유일한 혈육으로서 표토르 대제 사후 그녀가 러시아를 이끌었다.

특히 국력에 비해서 아주 심하게 따돌림당하던 러시아로서는 당대 유럽의 강국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자신들과 동맹을 맺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으니까는 말이다. 러시아의 국력은 유럽의 왠만한 중급 국가 이상었는데, 유럽의 중급 수준의 국가는 왕족으로 인정하며 왕가들과 결혼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는 따돌림을 당해서 공작수준밖에 결혼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러시아가 유럽의 왕가들과 결혼할 수 있었던 때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나 가능했을 지경이다.

그후 유럽 외교사의 최대 사태 중 하나라는 동맹의 역전이 일어나, 바로 전통의 라이벌이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동맹을 맺게된 것이다.(반대로 합스부르크 왕가와 영국은 사이가 멀어졌다.)

어차피 프리드리히 대왕의 외가가 영국 왕실이었고 그걸 이용해서 영국 왕실과 프로이센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과감하게 프랑스를 중요한 동맹국으로 선택한 것이다.

몇 백년간의 라이벌관계를 청산하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동맹을 맺은 것이다.

당장 마리아 테레지아 당시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싸운 국가가 프랑스인데 말이다.

그렇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돈독해짐은 물론 사실 영국도 무시하지는 않았다.

즉,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획한 외교라인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중심으로 프랑스-러시아와 동맹, 영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천재성이 빛을 발하는 사건인 7년 전쟁이 일어난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과의 동맹관계를 빠르게 진척시키려고 하다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동맹의 역전을 당한데다가,  아무리 봐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동맹관계가 강화되면 자신의 외가인 영국도 은근히 뒤로 슬금슬금 빠지면서 전통의 동맹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친목을 할 것이라고 통찰했다고 봐야한다.(실제 후대의 진행상황이 된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에서의 전쟁이 격화되어서 둘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지 2년이 된 시점에 전격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선제 공격해버린다.(7년 전쟁)

 

 

프리드리히 대왕의 이 선제공격으로 인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동맹인 프랑스와 러시아는 프로이센에 자동으로 선전포고하게 되고, 영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실재로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식민지에서의 전쟁과 유럽에서의 전쟁 양쪽을 신경써야 되니까는 영국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유럽을 들썩이게 만든 세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까지 불리는 7년전쟁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그들이 가진 전세계 식민지에서 전쟁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러시아와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하는 전투를 하게 된다.

여기서 러시아가 스웨덴과 프로이센을 4방향에서 공격하게 되지만 말이다.

다만 아쉽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는 대부분 이겼지만 문제는 프로이센의 인구가 러시아나 합스부르크 군주국보다 한참 적었다는 것이다.

그들 하나하나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각개격파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합한 엄청난 인구만은 그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가 우려하던대로 전쟁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슬슬 프랑스와의 식민지 전투에서 승기를 잡던 영국이 배신을 준비중인 것이 포착되었다.

그나마 조지 2세때에는 그런 모습이 안보였지만 7년 전쟁 중 조지 2세가 죽고, 조제 3세가 영국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은 유럽 대륙에 관심없다며 대놓고 배신을 해버린다.

즉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는 그 시기의 선제공격밖에 사실 답이 없던 것이었다.

조지 2세 때에는 조지 2세가 자신을 도와서 동맹해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 조지 2세가 죽으면 등극하는 조지 3세는 자신이 프랑스-합스부르크 군주국-러시아에게 어떤 수모를 당하던 전혀 안도와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측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다른 능력은 프리드리히 대왕보다 아래였지만, 외교 능력만큼은 그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프리드리히 대왕이 내정과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능가한다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외교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능가한 것이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한탄하며 기적이 없으면 패배한다고 말하며 로켓에 독약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천재인 것은 그가 비범한 존재인 것은 그 기적을 기다리면서 결국 최후의 반격을 할 수 있는 군대를 소모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역전에 역전을 위해서 최후의 반격이 가능한 군대는 소비하지 않고 비축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따라하겠다고, 

 

 

그의 후손인 세계 1차대전 일으켜서 자폭한 독일 제국의 황제나,

 

 

히틀러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실질적으로 이 두 멍청이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양면 전선을 만든 이유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따라해서이다.

문제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너무나도 차원이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 스스로가 천재 전략가이자 전술가였기에 작전계획을 자신이 주도해서 짜며 자신의 작전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것인지 알고 했었고, 상대편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교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이대로가면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도 망하는게 자명한 상태라고 통찰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들과는 다르게 중립국을 공격해서 쓰잘때기 없는 어그로를 끌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던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교공격에 위험에 빠졌지만,

 

 

인터넷에 엘사를 추종하는 자들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을 갓으로 추종하는 무리 중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존경하는 표토르 3세가 있었다.

러시아의 여제 엘리자베타가 사망하자 러시아의 차르직은 이 표토르 3세가 이어받게 되고, 표토르 3세는 상상을 초월한 7년전쟁에서 러시아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프로이센에게 돌려주고 휴전을 맺는 협정을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너무나도 존경하여, 영토도, 승리의 영광도 포기하면서까지, 다 이긴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은 휴전을 하게되고, 심지어 표토르 3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군대를 제공하겠다는 의사까지 보였다고 한다.

물론 최후의 반격을 위한 군대를 남겨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러시아 군대는 필요하지 않았기에 러시아군을 받지는 않았다.

이건 프리드리히 대왕이 당시 유럽의 열강들에게 대항하는 중소국가들의 희망이자 정의 용사라는 식의 이미지가 있었고, 프리드리히 대왕 자체가 신처럼 숭배받은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히틀러나 그의 후손 빌헬름 2세 같은 멍청이들처럼 중립국이나 공격해서 전쟁에 쓰잘때기 없는 어그로를 끌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이탈하고, 그와 함께 러시아의 영향으로 참전했던 스웨덴도 이탈하고, 프랑스는 영국하고 싸움에서 국력을 너무 소진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만 싸워 이기면 되는 것이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승리를 쟁취한다.

그래서 7년 전쟁은 결국 중간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살할 뻔도 했지만,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이 타이밍이 아니면 승리의 기회는 없었다고 생각했듯이 그 타이밍에 공격했었고, 그 타이밍을 이용해서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명실상부 유럽 최강국가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이 프로이센이 나중에 발전해서 독일 제국이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끝난 후 시간이 흐를수록 이 둘의 관계는 매우 재미있어지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결혼은 했었지만 왕비 엘리자베스를 무시하고 늙은 암소라고 부르는 식으로 무시하고, 7년전쟁 막바지나 끝난 후에 오랜만에 만난 왕비에게 예전보다 살이 쪘군이라고 말하는둥 완전 무시로 일관한다.

프로이센의 대사에게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후에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대사의 대답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는 대왕님을 증오하지만 그 능력만은 높이 평가하고 존중합니다.)

표토르 3세의 어처구니 없는 휴전협정에 분노한 러시아 민중과 귀족에 의해서 반란이 일어나 표토르 3세는 쫒겨나가 그 유명한,

 

 

예카테리나 여제가 즉위하는데. 이 예카테리나 여제가 자신의 정부를 이용해서 폴란드를 분할해 먹으려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나에게도 넘겨라 하면서 끼어들게 된다.

참고글 [유럽사]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와 명장 수보로프: https://peacefulbreak.tistory.com/172

[유럽사]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와 명장 수보로프

1. 표트르 대제의 유산 러시아의 계몽군주이자 절대군주라 불리는 표트르 대제의 집권기로 인해 러시아는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서방식 문화의 유입은 물론이고 서구식 모델을 기초로 한 강력한 군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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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왕이 얼마나 강한지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싸워 본 러시아가 더 잘알기 때문에 러시아는 폴란드를 혼자 다먹는 것을 포기하고 프로이센과 나누어 먹으려고 한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같이 나누어 먹어야된다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부르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괜히 혼자 영토를 독식하면, 뒷탈이 심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게 나누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굳이 자기와 전쟁까지한 그것도 자신을 자살까지 몰고간 마리아 테레지아를 부른거 보면 프리드리히 대왕의 심리는 참으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말고 다른 나라를 대신불러서 분할할 수 있는데 말이다.

여하튼 당시에는 꽤 시간이 흐른 후라서 도덕적이고 평화적인 국가 건설에 여념이 없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의 분할은 비도덕적인 것이라고해서 안 간다고 하려고 했지만, 아들이자 후계자이자 당시에는 남편이 죽었어서 공동 황제였던 요제프가 폴란드 분할을 바램했기 때문에 결국 참여하게 된다.(그때 엄청나게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평하기를,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 모두를 철저하게 취했다."

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더 강한 것이 증명되었는데, 오히려 마리아 테레지아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권이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거대한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로 빈사상태급이던 신성로마제국의 황권이 마리아 테레지아 때에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건 프리드리히 대왕의 선진적인 여러 정책 대표적으로 고문 금지등의 정책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받아들이고, 비록 몇년 혹은 몇 십년의 시간차가 나기는 하지만 자신의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신성로마제국 대법원을 통해서 퍼트렸기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각이 변해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 7년전쟁으로 서로 죽일듯이 싸우던 이 사람은 오히려 그 후 은근히 서로 협조하고 돕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게 마리아 테레지아의 탁월한 외교술인지, 아니면 프리드리히 대왕의 변심 때문인지 그런 부분들은 알 수 없다.

어찌되었던, 7년 전쟁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요한 그리고 인류역사상 중요한 업적들으 일으키고 퍼트린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가 시행했던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법적으로 손을 보고 보완해서 통일된 교과서를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서 배포함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마찬가지로 인류 교육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실시한 고문금지 법안을 시간은 걸렸지만 신성로마제국 전체에 퍼트리고, 영주들의 가혹한 농민 착취를 어느정도 왕권과 황권이 강화되자 금지하는 법안을 실시하고, 음악과 예술을 후원해서 하이든이 등장하고 모차르트가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라이벌 중 하나지만 재미있게도 이 둘은 지독할 정도로 서로 닮은 구석이 있고(둘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서로 결혼할뻔 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했다. 등) 굉장한 공생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둘 엘사와 안나가 자매가 다르지만 또 비슷한 부분이 있듯,

 

 

이 두사람은 라이벌이자 앙숙이었지만 또 은근 닯은 구석이 많고 서로 죽일듯이 싸운 후의 시대에서는 서로 공생관계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이를 많이 낳았어서 16명의 자식을 낳았고 10명의 자식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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