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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의 조선 인식

19세기, 이른바 '근대'가 시작되고 통신과 수송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가던 시절, 의외로 서양인들은 한반도와 조선에  대해서 무지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지켜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과도 별다른 문화적  교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것도 거의 없었다.

박연이나 하멜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조선 정부는 표류한 외국인들의 출국조차 금지했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물론 조선의 외국인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박연(벨테브레)와 함께 표착한 서양인들은 평생 조선인으로 살면서 호란 때 조선군으로 싸우다가 전사하기도 했고. 하멜은 조선 귀화를 강하게 거부하고 탈출하려고 했기 때문에 곤장도 좀 맞고 귀향도 가고 고생을 했다.

어쨌든 '코리아 근처에서 조난당하면 절대 못 돌아옴' 이라는 인식이 생긴게 사실이다.

<벨테브레는 초상이 남아있지 않다. 이 동상은 추상예술 기반이다.>

가면 갈수록 표류해오면 청나라 통해 돌려보내주고 하게 되지만 한번 생긴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Hermit Kingdom, 은둔 왕국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 외에 금이 많이 난다거나 하는 근거없는 소문도 퍼져서 한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무역을 해보려는 시도들이 간간히 있었다고는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현된 케이스는 없었다.

19세기에 오면서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고 서구 열강들이 전세계를 나눠먹기 시작하면서 한반도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2. 조선의 서양 인식

<척화비>

대원군을 비롯한 척화파에 대한 인식이, 세계 추세를 모르고 갇혀있다고 인식되는데, 이는 일부는 사실이지만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

대원군같은 경우 '비교적' 서양에 대해 알고 있는 편이었고, 중국이나 일본이 억지로 개항하며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문을 닫아걸고 방어준비를 하자는 결론을 내린것이었다.

미래를 알고 결과를 아는 상황에서 하는 비난은 결국 결과론적인 것이고, 당시 상황 에서는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는 선택이었다.

적어도 이 때는 군대를 포함해서 나라의 기강이 잡혀 있었다. 나중에 민씨 가문이 세도 정치로 나라를 너무 심하게 말아먹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가령, 대원군이 개항 수락했다가 열강 세력들이 밀고 들어와서 더 빨리 식민지가 될 수도 있을텐데, 그러면 또 '개항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제일 좋은건 함부로 개항하지 않고 열강을 명확히 인지하고 엘리트들로 하여금 서구를 배우도록 하는거였는데, 이 역시 결과론적인 논평이다.

 

3. 조선의 군대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약간씩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지만 세계의 전쟁은 점차 최대한 많은 화기를 보유하고, 한 발이라도 많은 탄환을 더 쏟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살륙전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군대는 단계적으로 대규모, 표준화되고 금속으로 된 갑주를 벗어버리게 되며, 창병/총병의 비율에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는 상황이 된다.

이는 총병이 병력을 양성하는데 가성비가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

총 자체는 창보다 훨씬 비싸지만, 전문적인 창병을 훈련시키는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비해 총병은 불과 한 달 정도로 쓸만한 포수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활은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지만 숙련된 궁수가 되려면 6년의 숙련기간이 필요했다고 했다.

이건 절대로 대규모, 표준화 된 근대 군대에서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이는 조선군도 마찬가지라 조선 중기에는 보병들을 사수, 살수, 포수로 분류하여 상호 보완적인 구성을 시도했지만, 사르후 전투나 호란에서 알 수 있듯 갈수록 포수에 편중되는 편제가 된다.

총병이 사각대열을 짜고 포병이 모서리에서 지원하며, 기병이 보조전력으로 충원되는 형태의 전투대형은 비슷한 시기 서구의 전술과 별 차이가 없으며, 비교적 소수의 정예군은 이러한 전술을 유기적으로 쓸 수 있었던것 같지만 대규모 징집군 중심의 조선군은 비참할정도로 적의 돌격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런 형태의 전술을 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군내 기강이고 이를 위해 초급장교들과 노련한 부사관들이 필요한데 조선군이 가장 부족했던게 이 점이다.

소대 지휘관이나 부사관 역할을 해야 할 갑사들이 다른 업무로 전용되고 있었으니 기강이 제대로 설 리가 없었다.

<충렬록의 조선군 삽화>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광해군이 파견했던 조선군의 편성을 보면, 보병의 약 절반이 화승총이나 총통을 쓰는 포수였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그리고 충렬록의 삽화를 보면 포수와 사수로만 이루어진 조선군 방진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런 경향이 일반적이었다고 판단하면 될 것이다.

충렬록의 삽화에서는 모든 포수가 검을 패용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중앙군의 정예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대규모 징집군인 지방군은 포수들에게 일일이 검을 나눠줄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면갑>

금속으로 된 갑주가 줄어든 대신 방탄복과 비슷한 개념의 천 30겹을 겹친 면갑이 지급되는데, 화승총을 상대로는 나름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서구의 강력한 후장식 라이플을 상대로는 별 효과가 없었고, 매우 더웠으며 불똥만 튀어도 쉽게 불타서 위험했다고 한다.

 

 

4. 제너럴 셔먼호 사건

두차례 양요와 달리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건달같은 서양인들이 남의 나라 와서 행패를 부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의 인가도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놈들이 권한도 없으면서 통상하자고 행패를 부린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제너럴 셔먼은 본래 프린세스 로열이라는 함명을 가지고 있었고,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맹이 봉쇄돌파용으로 충원한 스쿠너형 포함이었다.

당시 남부 연맹은 북부 연방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단 인구가 1/3밖에 안됐고, 산업화가 덜 되어서 공업력은 1/10에 불과했다. 그나마 대규모 농장과 노예를 바탕으로 무기 사오고 했었는데, 북부측이 그걸 그냥 두고볼리가 없어서 전쟁 내내 광범위하게 해상봉쇄가 펼쳐졌다.

결국 프린세스 로열은 북부군에게 나포되어 북군 포함으로 쓰이다가 민간에 팔려서 상선이 되지만, 포함 시절의 무장을 그대로 유지한 무장산선이었다.

그래서 그걸 믿고 내륙까지 올라왔다가 화공에 불타버리고 만다.

나중에 이 잔해를 조선에서 수거했다는 말도 있고, 수리되어 미 정부로 돌아갔다는 말도 있는데 어떤게 진실인지, 단순히 이름이 같은 다른 상선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는다.

이 사건 자체는 별로 중요한 건이 아니지만, 당시 가톨릭 신자 박해와 함께 열강이 조선에 개입하는 좋은 건수가 돼. 신미양요의 예고편이기도 한다.

 

 

5. 병인양요

먼저 손을 쓴건 프랑스로, 조선의 선교도 살해를 문제삼으며 개입하게 된다.

사실 프랑스는 전부터 조선에 개입하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헌종 때는 군함이 제주도 근해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조선 측의 구호품을 받고 배를 수리해서 돌아간 케이스도 있었다고 한다.

<로즈 제독과 수병들>

원래 미국에게 연합군으로 조선을 위협하자는 요청을 하지만, 그 시점에서 미국은 아직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니었고, 결국 1866년 충분한 병력 충원이 되었다고 여겼는지 로즈 제독과 북경의 대리공사 벨로네는 총 7척의 함대와 60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한다.

"프랑스인을 죽인 날이 조선 최후의 날이다!" 

병인양요는 전형적인 포함 외교의 일환이다.

함대로 근해에 나타나 위협하고 말 안들으면 대포 좀 쏴서 말 듣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포 쏘고 선교사 살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가 사과할리 없었고, 강화도에 상륙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 가톨릭 신도들이 앞잡이를 했다고 한다. 

<상륙하는 프랑스군>

일단 프랑스는 큰 저항 없이 강화부를 점령했는데, 제일 먼저 한 일이 서책과 도자기 등 문화재들을 약탈한 것이다.

덕분에 조선군의 주요 거점들은 무사할 수 있었고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통제하는데 실패한다.

<문수산성 유적>

이해할 수 없는건, 강화도의 일부만 점령한 상태에서 병력의 일부인 120명을 파견해 조선 본토로 진격을 시도한 것이다.

120명으로 정확히 뭘 하려고 한건지 알 수 없지만, 김포로 진격하다 문수산성에서 매복한 초관 한성근이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기습당해 2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

전투에서 패배한건 아니지만, 큰 피해를 입고 진격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근데 설령 문수산성을 점령했다고 해도, 조선이 경기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뭘 하려고 했는지 아리송하다.

어쨌든 첫 패배를 맛본 프랑스 함대는 발끈해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어촌들을 포격했다고 한다.

이건 그 자체로도 졸렬한 행위였을뿐 아니라, 강화도 부근에 집중되어야 할 화력과 주의를 분산시켜 이어지는 패배의 큰 원인이 된다.

애초에 상당히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육지의 조선군 일부가 강화도로 증원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프랑스군이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양헌수는 300여명의 호랑이잡이 포수에 관군을 합쳐 약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가 정족산성에 매복한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존재를 알았던 것 같기는 한데,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약 160명의 프랑스군이 산성에 접근하자, 마지막까지 매복하고 있던 포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일제사격을 가했다.

결과는 명실상부한 조선군의 대승. 프랑스군은 사망자만 3명에 부상자는 36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입는다. 조선군 피해는 사망자 1명에 부상자 수 명이라는데 조선이 일부러 사망자를 줄였을 가능성을 감안해도 대승리는 분명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조선군은 기세가 올랐으며, 조선 정부와 조약을 맺기는커녕 아예 조약을 맺을 가능성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결국 프랑스 함대는 철수하게 되고, 프랑스측 기록에서는 당시 정족산성을 지키던 조선군이 1만명이라는데 그 만큼 프랑스군이 포화에 위협을 느꼈다고 보면 될 것이다.

 6. 병인양요의 결과

프랑스는 여전히 강국이었고 누구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이를 통해 국제적 위상이 실추된건 분명했다.

열강의 군대가 극동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털리고 나왔다고 보면 되고, 나폴레옹 3세 제국이 생각만큼 내실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 수 많은 증거중 하나였고, 알다시피 1870년 보불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황제 자신이 포로로 잡히고 파리를 점령당하는 희대의 망신을 당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

병인양요는 절대적인 전투 결과로 보나 이후 세계 정세로 보나 조선이 이긴 전쟁이다.

애초에 구식 매치락 머스켓으로 무장한 전근대적 군대가 열강의 근대 군대를 상대했을때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측도 패배라고 여겼고, 조선 침공을 이끌었던 로즈 제독과 외교관 벨로네는 본국의 호된 질책을 받는다.

로즈 제독은 이후 일본에 대한 개입에 함대를 이끌고 참여하지만 68년에 본국으로 송환당하고 한직으로 물러나게 된다.

조선은 승리로 큰 자신감을 얻는다. 반작용으로 더욱 쇄국정책을 공고히 하고 강화도의 방비를 약간 충원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까지 합치면 무려 두번이나 서구 세력의 공격을 격퇴 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는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만큼 열강이 가진 진정한 힘을 인지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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