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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개입

프랑스가 조선에 호되게 혼난 후(병인양요),미국은 훨씬 조심스럽게 조선에 접근하게 된다.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가진것은 훨씬 전 일로, 미국 의회가 조선의 개항을 결의했던게 무려 1845년이다. 남북전쟁 후 일취월장하면서 스페인도 때려잡고 잘 나가고 있긴 했지만, 프랑스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조심하는게 당연했다.

미국이 실패하면 입을 위상 타격은 훨씬 클 것이며, 나중에 성공해서 회사 차린다고 해도 극동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패전했다는 것은 결코 자신들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가 건달짓거리 하다가 불타버렸다는 걸 알고는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외교상 입이 찢어져도 지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는 것이었고, 미국은 몇 차례 조선과 접촉을 하고 제너럴 셔먼호의 배상을 받으려고 했는데 셔먼 호 승조원이 전부 죽었다는 것과 조선 지방 관리들과 면담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당시 조선 관리들은 미국인들이 왜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오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미국과 관계없이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왜 이제와서 조약을 맺어야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애처가 틸튼대위>

 

당시 미해병대 지휘관인 맥클레인 틸튼 대위가 아내에게 열심히 편지를 보내서 중요한 사료가 되는데, 여기 보면 병인양요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이상한 소문들을 퍼뜨려 놨는지 조선인들이 '셔먼호 선원들을 난도질하고 소금에 절여 구경거리로 삼았다.'거나 '프랑스 군의관의 가죽을 벗기고 해안가의 십자가에 메달아 퇴각하는 프랑스군이 보도록 했다.'는 야만인으로 묘사되었다.

 

2. 아시아 전대 출동

존 로저스 제독은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켰을 때에 비해서 훨씬 강력한 함대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강력한 프리깃함 USS 콜로라도를 기함으로 해서, 대구경포를 탑재한 USS 알래스카와 베니시아, 그리고 소형 포함인 USS 모노카시와 팔로스의 총 5척으로 이루어졌다. 탑승한 해병대까지 포함해 총 인원은 1,230명에 이르렀다.

 

<아시아전대 소속 함대>
<아시아전대 기함 USS콜로라도>

 

주요 인물은 전대 지휘관 존 로저스 제독과 해병대 지위관 맥클레인 틸튼 대위, 그리고 공사 프레드릭 로우가 되겠다.

이들은 조선의 개항을 위한 조약을 맺고, 제너럴 셔먼호에 대해 배상을 받으며, 서해의 자세한 지도를 작성하고 여차할 경우 무력 개입의 권한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5월 말, 영종도까지 도착한 미국 함대는 처음으로 조선인 관리들과 회담을 하게된다.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함대는 처음부터 고압적인 자세로 나갔고, '선교사 살해에 대해 국왕이 사과하고 삼정승을 처벌하라'는 등 대놓고 싸움을 걸었지만, 로우 공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고 신중하게 응대한다.

가령 조선 관리들이 3품관이란 점을 알자, 무시하진 않았지만 자기 대신 서기관을 보내 맞이하게 했고 자신은 1품관이 와야 직접 면담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한다. 그리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평화적인 목적'으로 찾아왔다고 분명하게 알리게 된다.

그리고 주변 수로를 조사하겠다는 요청을 하는데, 조선 관리들은 여기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물어물 넘긴 것인지, 조정에 사람을 보내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로우 공사는 '주변 주민들이 놀라지 않도록 24시간 후에 조사를 시작할테니 주민들에게 통보해 달라.'는 상당히 예의바른 요청을 했지만, 어쨌든 양측의 외교 용어는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와 비교해서 젠틀한 편이었지만, 조선 측에서 비난했듯 외교 하겠다는 자들이 함대 끌고왔냐고 하면 미국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대놓고 포함 외교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포격전 발발

미군 소형선들이 측량을 위해 해협으로 들어섰다.

미국 입장에서는 요청도 거부받지 않았고, 24시간의 유예기간 통보까지 했으니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는데, 강화도를 지키던 조선군은 이들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포격을 시작했다.

해협 끄트머리를 지키던 초지진에서 시작된 첫 포격은 15분 동안 이어졌고, 미군은 2명의 수병이 경상을 입었다고 한다. 대기하던 소형선인 팔로스와 모노카시가 해협을 따라 북상하면서 조선군 포대에 포격을 퍼부었고, 꽤 격렬한 포격전이 이어졌지만,(미군은 인상깊었다고 표현했다.) 결국 화력이 부족했던 조선군은 밀려버린다.

호란 당시 최신병기로 남한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던 홍이포는 이때는 '뻥포'나 '공갈포'란 별명을 들으며, '소리는 크지만 효과는 없다'는 비참한 취급을 받는다.

당시 조선이 물량전에 대해 별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했던게, 겨우 하루 동안의 치열한 포격전의 결과로 조선군은 탄약이 거의 바닥나고 만다.

정족산성 전투에서도 탄약이 거의 떨어졌는데, 견디지 못한 프랑스군이 먼저 퇴각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전근대적 군대인 조선군은 충분한 군수물자의 비축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를 외교적 결례이자 도전으로 인식한 로저스 제독은 병력 투입을 결심한다.

그런데 로저스야 그렇다 치고 로우 공사는 진짜로 전쟁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은게, 이 때 조선에 사과를 요청하고 무려 10일의 사과 기한을 두었다(물론 이건 상륙을 위해 밀물대를 기다리는 로저스 제독의 판단도 고려 된 시기).

게다가 프랑스처럼 '조선 최후의 날이다!' 같은 엄포가 아니라 '강화도 연안의 포대들을 파괴하겠다.'는 애매한 수준의 위협만 했다.

역으로 대원군은 친서를 보내 초지진의 포격은 정당방위이며 오히려 미국이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양측의 군사적 충돌은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었다.

 

 

4. 미군 상륙

해병대와 수병들을 합쳐 650명 정도의 상륙군이 편성된다.

 

<상륙하는 미군.>

 

6월 10일 아침, 대구경 포로 강화된 모노카시와 팔로스가 접근해 포격을 퍼부어 초지진의 화포들을 무력화시키는 동안, 미군 상륙부대는 22척의 보트와 기정을 타고 강화도 해안에 상륙한다.

651명의 수병과 해병에 7문의 12파운드까지 포함된 대규모의 상륙군이었다. 포격 지원 때문에 조선군은 상륙중인 미군을 견제할 수 없었지만 갯벌 때문에 미군은 죽을고생을 했다고 한다.

특히나 무거운 포를 상륙시키느라 신발과 양말과 바지가 진흙덩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프랑스와 다르게 용의주도한 군사행동이었고 상륙시킨 이 포들은 전투 내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파괴된 초지진>

 

초지진을 지키던 초지첨사 이렴은 일단 초지진을 버리고 퇴각한다.

덕분에 빈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이를 해병대 보루라고 명명하고 숙영지를 설치하고, 강화성을 점령하고 강화도를 다 차지한 정복자라도 된 양 노략질을 했던 프랑스군과 달리, 미군은 초지진에 배치된 조선군의 소형 포들은 바다로 던져 버리고, 무거워서 그게 불가능한 대형포들은 점화구에 못을 박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노획 물자들을 소각처리하고 초지진을 조선군이 다시 점령하더라도 사용하지 못하게 일정부분 파괴했다고도 한다.

 

 

5. 광성보 결전

미군은 명확한 작전목표를 가지고 행동했다.

강화도를 점령해 조선정부를 압박하겠다는 허황된 생각은 하지 않고, 처음 통고대로 해협에 위치한 3개 포대, 즉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의 점령과 파괴만을 타겟으로 효율적으로 행동했다.

해안을 따라 포함들이 이동하면서 포격으로 엄호하고, 상륙시킨 야포들을 고지대에 배치하여 조선군의 기습을 차단했다. 실제로 병인양요때 기습을 통해 승리했던 조선군은 단 한번도 기습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의 위치>

 

조선은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중간에 놓인 요새인 덕진진을 포기한다. 6월 11일 덕진진을 점거한 미군은 초지진에서처럼 조선군의 화기와 군수물자들을 파기하고 이를 포트 모노카시라고 명명하고 광성보 제압을 위해 진군한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조선군은 무작정 요새를 지킨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새 밖으로 나와 진격중인 미군을 기습공격했다. 특히 광성보에는 어영청 소속의 정예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과 소수의 기병들로 행군중인 미군의 측면을 공격했으며, 상당수의 병력을 길 주변에 매복시켜 기습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고지대를 제압한 미군에 의해 의도를 파악당하고 분쇄당하게 되었고, 기습이 실패하는 바람에 광성보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광성보에 도착한 미군은 무작정 공격하는 대신 포위망을 구성한다. 진격중인 미국에 대한 기습공격이 실패해 병력을 많이 잃고 요새에 틀어박힌 조선군은 200~300명 가량이었으며, 그에 비해 포위망을 구성중인 미군은 지상군+포격으로 지원중인 함대를 포함하면 거의 1천명에 가까웠다.

전근대적 군대가 근대 군대를 상대할 때 유일하게 우위에 설 수 있는건 숫자이다.

보통 제국주의 열강 상대로 자기 땅에서 싸우니까 징집하여 바로 보낼 수 있어서 그런것도 있고, 전근대 국가에서 보병은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문수산성 전투는 조선군이 꽤 큰 피해를 입히고 선전했지만 결국 화력에 밀려 후퇴했고, 정족산성 전투는 조선군 숫자가 거의 3배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빠른 공격(지금 상륙한지 이틀째)과 정확한 거점타격, 철저한 포위로 그 가능성을 막아버린 것이다.

해안까지 접근한 USS 모노카시와 고지에 배치된 7문의 12파운드포의 십자포화가 광성보에 쏟아지기 시작하고, 요새의 서쪽과 남쪽을 포위한 상륙부대가 소총사격을 가하며 접근했다.

광성보는 해협을 지키기 위한 해안포대이기 때문에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서쪽과 남쪽을 막으면 육지와 완전히 격리되는 위치이다.

당시 미군 병사의 수기에 따르면 근대 전쟁의 개념이 없던 조선군은 엄폐를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전근대 머스켓은 엄폐를 하기보다 밀집해서 정확하게 장전해서 많이 쏘는게 중요했으니 말이다. 훨씬 정확한 최신식 소총의 탄막을 그냥 몸으로 떼우면서 싸웠던 것이다. 그리고 제압사격이 충분히 이루어 졌다고 생각한 미군은, 돌격을 시작했다.

휴 맥키 중위의 중대를 선봉으로 미군이 돌격하자 조선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화승총이 장전되기 전에 미군이 광성보 외벽에 도달했고, 비탈진 벽을 기어오르는 미군과 이를 막기 위한 조선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다.

손쉽게 장전할 수 있는 롤링블럭식 소총의 근거리 화력을 장전할 틈도 없이 돌과 흙을 던지며 저항했다는 조선군이 이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총은 사격무기이기 때문에 근접무기인 칼이나 창이 일단 붙기만 하면 유리할 것 같지만, 만화에서나 그렇고 장전이 간편한 근대식 소총이 근접전에서도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미군은 총검술을 가르칠 때 '백병전에서는 총알 가진 자가 이긴다.'고 가르친다고 할 정도였다. 미군은 삽시간에 성벽을 넘고 요새 안으로 진격했다.

이때 선봉에 섰던 맥키 중위는 아군이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돌적으로 돌격했고, 처음으로 요새 안으로 뛰어 든 모양인데,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옆구리를 조선군에 찔려서 전사했다.

격렬한 전투는 모든 조선군이 전사하거나, 바다에 뛰어들거나, 부상을 입은 순간 조선군의 완패로 끝났다. 불과 15분만이었다. 이 때 수습된 조선군 부상병은 20여명으로 알고 있는데, 미군이 철수할 때 석방한 포로의 숫자는 9명라고도 하고 14명이라고도 한다. 아마 나머지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어 치료 중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성보 전투의 의의는, 조선군이 도망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냥당하던 짐승처럼 도살된 전투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 해사 박물관에는 신미양요의 노획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 부채가 하나 있다. 이 부채에는 지휘관인 진무중군 어재연 이하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고 한다.

이는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이 자신들의 최후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의지로 목숨을 바쳐 싸웠다는 증거였다. 무기체계와 전술의 차이에 병력 숫자까지 부족해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기는 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다.

 

<미해사박물관의 일심선>

 

 이게 국사 교과서에 '어재연의 분전'이라고 여섯자로 나오는 광성보 전투의 전말이다.

 

 

6. 광성보 전투 이후

미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목표지점(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을 모두 점령하고 파괴하긴 했지만, 상황은 그리 긍정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광성보 전투에 참가한 미군 상륙부대는 극심한 전투 피로에 시달린 것 추정된다.

승리에서 오는 쾌감보다, 악착같이 저항하던 조선군이 남긴 잔상이 부담과 공포로 다가온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습기 찬 여름에 강행군과 전투를 반복하여 육체적인 피로도 겹쳤기 때문에, 결국 상륙부대는 광성보의 노획물자들을 파기한 후 첫 상륙지에서 가까운 초지진으로 후퇴해 거기서 밤을 보내게 된다.

미군이 초지진으로 퇴각한 날 밤, 원래 초지진을 수비하다가 퇴각했던 초지첨사 이렴의 병력이 미군 숙영지를 야습했다. 야습은 실패로 끝나고 조선군은 다소 피해를 입고 퇴각하긴 했지만, 광성보 수비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겁 없이 야습을 감행하는 조선군의 강력한 의지에 미군의 멘탈은 한계에 도달했다.

잘못하면 프랑스군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결국 '서울까지 진격해서 야만인들에게 교훈을 알려줘라'던 로저스 제독의 호언장담은 '무력을 통한 임무수행은 어려워보인다'는 본국에의 보고서로 변하게 된다. 

다음 날 미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고 함대로 돌아가지만, 계속해서 조선측과 교섭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그랬듯 괜히 건드려서 조선을 분노하게 만들어 놓은 마당에 교섭이 될 리가 없었다.

교섭을 포기한 미 함대가 귀환하면서, 신미양요는 끝나게 된다.

 

<억류중인 조선인 포로>
<억류중인 포로와 대화하는 조선인 관리>

 

여담으로 당시 미국이 포로 송환을 조건으로 회담을 계속 요구하자, 조선측은 '포로 필요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고 하지만 정작 포로가 풀려나자 구휼을 베풀면서 맞이했다고 한다.

 

 

7. 신미양요의 여파

 

<당시 신문기사. 로저스가 해군성에 보낸 전문이라는데 조선군 섬멸, 5개 요새 점령, 수많은 화기 노획, 조선군 수비대 11000명. 사기꾼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승리로 대서특필하긴 하지만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졌다. 대체 이 전투에서 미국이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역공 또한 받는다.

'흑선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에 기반한 포함외교에 대한 반성론도 나왔다.

"평화를 전하기엔 너무 크고, 전쟁을 이기기에는 너무 작은 군대를 파견했다"

로저스 제독은 미해군 연구소장으로 영전되어 얼마 후 사망하고, 강화도에서 전사한 3명은 그 유명한 메달 오브 아너를 받았다.

한편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달리 압도적인 군사적 패배에 충격을 받고 조선군 사망자 규모를 53명으로 축소 발표한다. 일련의 서양 오랑캐의 내습을 '난'이 아니라 '요'로 격하시킨 것도 그 일환이었다.

외부 오랑캐에 의한 전란이 아니라 소요사태 정도로 치부하기로 한 것이었고, 대원군의 외세배격은 더 심해진다. 그리고 조선의 반미경향이 심해지는데, 덕분에 개항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서 영 재미를 보지 못했다.

유력자들이나 외교관들이 '신미년에 쳐들어온 나라'로 여기며 싫어했다고 한다.

듀버네이 교수의 논평은 서양인의 시각으로 신미양요를 보는 굉장히 귀중한 자료인데, 미국은 정말 시기적으로 운도 없었고, 무력으로 겁을 주면 조선이 문을 열 거라고 성급하게 생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광성보 전투를 미국의 알라모 전투와 비교하기도 한다. 알라모는 텍사스 공화국이 아직 독립국가이던 시절에 약 200명의 텍사스 민병대가 1,800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전멸한 사건으로, 미국의 텍사스 개입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다.

 

 

8. 후세의 이야기

신미양요는 두가지 점에서 최초가 붙는데, 미해병대 최초의 대외 원정과 최초의 종군기자가 붙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때의 사진기는 찍으려면 몇 분 걸리는 조악한 물건이라 전투 장면 등을 찍지는 못했지만 전투 종료 후의 상황이나 지형 등은 생생하게 사진으로 남아있다.

광성보 전투에서 자살적인 돌격을 한 맥키 중위에 대해서는 후일담이 있는데, 그 친척이 보관하고 있던 신문에 따르면 맥키 중위가 조선 원정 직전에 여친이 바람났다고 한다. 사교계에서 유명한 미녀였다고 하는데 맥키와 약혼한 상황에서 젊은 외교관과 눈이 맞아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동료들 증언에 따르면 아무나 주먹질 할 것 같은 표정으로 갑판 위를 왔다갔다 했다고 하며, 무모하게 뛰어들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수자기가 반환될 때, 어재연 장군의 후손과 맥키 중위의 종조카가 만나 화해하고 제사에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19세기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작은 전쟁은, 그렇게 21세기 후손들의 화해로 일단락이 되었다.

 

<반환되는 수자기>
<어재연의 후손과 맥키 중위의 후손이 만남>

 

 

9. 맺음

자기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숨진 광성보의 장병들이나, 먼저 싸운 동료들이 어떻게 참혹하게 전멸했는지 알면서도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한 초지진의 장병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훌륭하게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을 다시는 볼수없을 것이다." (슐레이 대령)

"조선군은 창,칼로 우리에게 끝까지 대항했다. 그것마저 없는 자들은 우리에게 흙을 뿌렸다. 비록 우리가 이긴 전투지만 이것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전투는 미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이다." (종군수기)

당시 참전했던 미군의 기록이다.

비록 힘이 부족해 스러지긴 했으나 최후까지 임무를 완수했던 조선군은 불과 4년 후, 물을 뜨러 왔다는 핑계로 상륙한 22명의 일본군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비 정권하에 몇 년 사이 국가기강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목숨바쳐 싸우다 힘이 다하여 자기가 미처 못 지킨 요새에 쓰러지신 분들은 그 참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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