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임진왜란의 가장 참혹했던, 2차 진주성 전투

2차 진주성 혈전

임진년에 진주 목사 김시민은 조국을 위해 이곳에 피를 뿌리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곳.
아니 목사가 피를 뿌린 이곳에서도 꽃이 피었고 진주 백성은 그 꽃을 바라보며 생업을 일으켰다.

진주의 저녁 노을은 날카로웠다.
먼 산과 먼 섬들의 갈묏빛 능선이 도드라졌고 바람의 서슬은 팽팽했다.
임진년의 전투 이후에 왜군은 몇 달째 오지 않았다.
적들은 진주에서 크게 패하여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었고, 다시는 진주 땅에 발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성난 파도와도 같은 한없는 분노가 왜군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작동하고 있었다.
적들은 임진년에 진주에서 당한 설욕을 갚기 위해 진주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1593년 5월 말부터 진주에도 산발적인 급보가 날라오기 시작했다.
진주 인근에 매일 수천 명의 왜군이 모여들고 있었고 고니시와 가토, 우키타 등 쟁쟁한 장수들도 진주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 규모가 9만 3천여 명에 달했다.

멀어서 성 밖에서 보이지 않은 왜군의 기척이 점점 진주의 숨통을 죄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에는 왜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깃발들의 함성으로 다가왔다.
그 깃발 위 허공으로 왜군의 살기는 무지개처럼 펼쳐졌다.

왜군의 진군과 함께 피난민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자들의 울음처럼 그 울음은 맹렬하고 다급했다.
진주 목사 서예원은 각 고을에 경보와 계엄을 선포했고 인근 고을에서도 여러 장수들이 진주로 모여 들었다.

충청 병마사 황진의 700, 경상 우병사 최경회의 500, 복수장 고종후의 400, 여러 복수군 900, 진주성 수성군까지 합하면 군사는 적의 1/10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진주에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많은 백성들이 있었고 예전에 진주 목사 김시민이 목숨 걸고 지켰던 땅이었다.
그리고 진주가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로워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이 막대한 사명감을 생각하노라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전투에 앞서 진주성 지휘부는 성 남쪽에 있는 촉석루가 강물과 잇닿아 있는 험한 곳이라서 왜군이 필시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서북쪽은 왜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참호를 파서 물을 채웠다.
이렇게 되면 적들은 필시 동쪽 한 곳으로만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왜군은 역시 노련한 베테랑이었다.
조선군이 팠던 서북쪽의 참호에서 물을 빼내고 거기다 흙을 메워 큰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6월 21일.
왜군 기병 200여 기가 성 주변에 출몰하여 교란하였고 진주성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그리고 진주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고 진영을 구축하였다.
진주성 사방 수백 리가 왜군으로 가득 찼고 홍계남 등 조선군 장수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왜군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함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그 함성에 진주성의 군민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포위 속에 있는 진주성은 마치 큰 바다에 뜬 외로운 배와 같았으므로바야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리라.

6월 22일.
왜군 기병 500여 기가 진주성 주변을 교란하였고 처음으로 교전이 벌어졌다.
성 안에서 조선군이 조총과 활로 왜군 30명을 쏘아 맞히니 왜군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그러다가 초저녁이 다시 진격해 왔지만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물러났고 야밤에 다시 진격해 오고 다시 물러났다.
아직은 왜군이 대군을 휘몰아 공격하지는 않았다.
조선군은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했지만 그렇다고 방심하지 않았다.
적은 9만여 명이 넘는 대군이었고 진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은 봉쇄되었다.
본인들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

6월 23일 아침.
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수만여 명의 대군이 일제히 전진해 오고 있었다.
곧 조선군은 조총과 대포, 활과 돌 등 여러 무기 등을 일제히 쏘아댔다.
천천히 전진하던 왜군은 고함을 치며 달려오기 시작했고 고함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조선군은 이날 낮에 세 차례, 밤에 또 네 차례 왜군을 격퇴했고 조선군의 탄환과 화살에 맞아 죽은 왜군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날 불어오는 강풍에 전장에서 인육이 썩어가는 고린내가 성 안으로 스며 들었고 성 안에서는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왜군은 포로로 잡은 조선인의 목을 잘라 투석거에 실어 성 안으로 던져댔고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잘려진 목에 가까이 가보면 구더기들이 꿇고 있었고 저 천공에서는 독수리들이 목을 겨누고 급강하했다.

6월 24일 새벽.
왜군의 진영은 새벽녘 달처럼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었지만 조선군 진영에서는 소란이 발생했다.
이상한 환청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로 성벽의 병사들에게 몰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한 병사가 성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조선군 장수들은 병사들의 행동을 통제하느라 새벽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날 왜군과의 전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소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라던 지원군은 오지 않고 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추가로 합류해서 진주성 근방에 진영을 구축했던 것이다.
진주성의 조선군은 절망에 빠졌다.
외부와의 소식도 끊긴 마당에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뿐이라.

6월 25일.
왜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군은 이날 아침부터 동문 밖에 흙을 메워 토산을 만들었고 토산 위에서 진주성 안을 내려다 보고서 조총으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이에 질세라 충청 병마사 황진도 동문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고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군복과 투구를 다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날랐다.

충청 병마사 황진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주 백성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해 황진을 도와 돌을 날랐다.
진주 백성의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 토산이 완성되었고 이곳에서 조선군은 현자 총통을 쏘아 왜군의 토산을 파괴하였다.
충청 병마사 황진은 휘하 병사들을 다독이며 격려하였고 이날 세 차례 왜군의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
또 밤에도 네 번이나 접전하여 모두 다 물리쳤다.

6월 27일.
왜군의 무모한 진격도, 토산도 난공불락의 진주성의 예봉을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왜군은 단단한 궤짝을 가지고 와서 조선군의 탄환과 화살을 막았고 성벽에 접근하여 성벽을 헐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조선군은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고 왜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동문에 큰 나무 2개를 세워 그 위에서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댔고 그러자 성 안의 초가집이 일시에 연달아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뻗쳐올랐다.
진주 목사 서예원은 겁을 먹어 당황하였고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은 곳곳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분전하였다.
이날 밤, 왜군이 투항한 조선인을 보내 성 밖에서 소리쳤다.

"대국의 군사도 이미 투항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겠는가!"

그러자 성 안에서 소리치기를,
"우리나라(조선)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천조(명나라) 군사 30만이 지금 진격 중이니 너희들은 모두 섬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왜군은 바지를 벗고 조선군을 야유하고 조롱하며 명나라의 군사는 벌써 물러갔다며 소리쳤다.
이 소리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겁먹기 시작했지만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진주성 사방에 군사의 기운이 있으니 천조가 곧 와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김천일의 이 말에 성벽의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금 있다가 김천일이 경상 우병마사 최경회 등에게 말했다.
"언제 이 적을 물리치고 하란진명의 살점을 씹을 것인가."
진주성의 회유에 실패한 왜군은 이날 밤 또 전투를 걸어 왔다.
동문과 서문 양쪽에서 언덕 5개를 쌓고 대나무를 엮어 목책을 만든 뒤 위에서 비오듯 총을 쏘아댔다.
이는 타격이 커서 성 안에서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또 큰 궤짝을 만들어 그 속에 병사를 엄폐시키고 바퀴가 4개 달린 수레에 실은 다음 성벽에 접근하여 큰 철추로 성을 파기 시작했다.

김해 부사 이종인이 단독으로 활을 쏘아 왜군 수십 명을 사살했고 성 위에서 솜을 묶어 기름을 적신 다음 불을 붙여 성 밖으로 던져 왜군의 궤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러자 궤 속의 왜군이 비명 소리를 지르며 타죽기 시작했다.
왜군은 잠시 물러나 조선군이 휴식을 취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왜군은 규모가 많아 교대하며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밤 다시 북문이 침범당했고 김해 부사 이종인은 북문으로 달려가 힘껏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이날 죽은 왜군이 5천여 명이 넘었다.
낮에 3번, 밤에 4번 모조리 조선군이 승리했다.

6월 28일 동이 틀 무렵.
당시 서문은 진주 목사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몰래 와서 성을 뚫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서쪽 성벽이 무너지려 하였다.
김해 부사 이종인은 곧바로 서문으로 이동했고 이종인과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해 싸우자 왜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날 이종인은 활로 적장 1명을 사살했고 왜군은 울면서 동료의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
적들이 물러가자 충청 병마사 황진은 성벽 아래를 굽어보며 말했다.

"왜군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군."
이때 성 밑에 시체 속에서 잠복하고 있던 왜군 1명이 조총을 위로 대고 쏘아 충청 병마사 황진의 왼쪽 이마를 정확히 명중하였다.
황진은 곧바로 쓰러졌다.
당시 황진은 병사와 백성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대해주고 보살펴주었기에 성 안에서 인망이 자자했다.
그런 황진이 어이없게 죽자 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목놓아 울부짖었고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6월 29일 진주성 최후의 날.
황진이 죽고 진주 목사 서예원이 순성장이 되었으나 서예원은 겁을 먹고 갑옷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진주성 시내를 이리저리 뛰다니며 눈물을 흘렸다.
경상 우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이 군의 사기를 경동시킨다고 하여 참수하려 하다가 그만 두고 사천 현감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즉사했다.

이날 오후 1시, 비가 억세게 내려 동쪽 성벽이 무너졌다.
왜군이 개미떼처럼 성벽에 붙어 올라오기 시작했고 김해 부사 이종인은 자신의 수하와 함께 최후를 직감하였다.
이종인은 활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자신의 칼을 뽑아 백병전을 벌였다.
그렇게 왜군 5명의 목을 베자 왜군은 물러갔고 동문 근처에 왜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왜군은 다시 서북문으로 고함을 치며 돌진하였고 서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던 조선 창의군이 모두 무너져 남쪽의 촉석루로 후퇴했다.
진주 목사 서예원은 왜군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겁을 먹고 먼저 달아나니 병사들 역시 흩어졌다.

촉석루에 있던 김천일은 최후를 직감했다.
그는 경상도 우병마사 최경회와 복수장 고종후 등과 함께 손으로 서로의 어깨를 만져 주며 울면서 말했다.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이어 주변의 시종에게 술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술을 지니고 있던 자도 달아난지 오래였다.
이에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으려 하였는데 왜군이 바로 이들이 있는 촉석루까지 올라왔다.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과 경상 우병마사 최경회, 고종후와 양산숙 등 1주일 동안 함께 싸운 장수들과 함께 북쪽에 있는 임금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날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편 김해 부사 이종인은 성 안으로 쇄도하는 왜군에 맞서 자신의 칼을 들고 이곳저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남강(南江)까지 밀리고 있었는데 급기야 왜군과 싸우다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평소 힘과 악력이 강했던 이종인은 왜군 2명을 양팔에 끼고 크게 소리치기를,
"조선국 충신 경상도 김해 부사 이종인은 여기에서 죽는다!"
라고 소리치며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같이 싸우던 문홍헌, 오차, 고경형 등도 이종인을 따라 죽었다.

거제 현령 김준민은 휘하의 병사들이 전멸하자
단독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자신의 칼로 왜군의 목 3급을 벴다.
그러나 이마에 왜군이 쏜 탄환이 명중해 말에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다.

여인들도 무기고에서 칼과 활을 잡고 왜군과 싸웠다.
이때 한 여인이 말하기를,
"진주의 용맹스러운 사내들이 조선국의 충신이 되었으니 우리들은 열녀가 되겠다!"
패배를 직감한 장수들과 병사들이 남강에 투신하자 따라서 투신하는 여인들도 많았다.

이날 죽은 조선인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6~8만이라고 하며 일본측 자료에는 수급 2만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성을 공략하면서 악이 받칠대로 오른 왜군은 진주성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베어 죽이고 멸망시켰다.
그리고 성을 허물고 평지로 만들었다.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도 우병마사 최경회의 활약은 약 1주일 동안 진주성에서 맹위를 떨쳤고 왜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5분 재미있는 역사 상식 > 5분 재미있는 한국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프랑스와의 최초이자 마지막 군사 접전, 병인양요 (0) | 2020.03.04 |
---|---|
[근현대사]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 (0) | 2020.03.03 |
[조선시대]청일 전쟁 직전 동아시아 정세 (0) | 2020.01.06 |
[조선시대]성종의 만주 개척 시도 (0) | 2020.01.01 |
[근현대사]고자가 되기전 심영의 행적 주저리주저리 (0) | 2019.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