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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의 황제는 영토를 넓히는 것에서 후대의 칭송을 받지만, 소국의 왕은 선대가 물려준 영토를 보존하는 것에서 후대의 칭송을 받는다.

조선 왕국 9대 왕, 성종(成宗) 이혈

하지만 인류가 정복자를 소리 높여 칭송하는 한, 소국의 왕도 정복에의 이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성종은 스스로 '유교적 제왕'으로 군림하여 유학의 이상적 군주를 꿈꿨다.

성종 때 조선은 사림 세력의 진출로 문치주의가 활기를 띠었고, 군사적으로는 조선 초기의 강건한 상무적 기풍이 잃어가고 있었다.

세조 때부터 착수돼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조선의 성문법)

한편 성종 때 조선은 통치 체제의 기틀이 완성되었고, 양반 관료 사회와 문치주의가 정착돼 완벽한 유교 국가로 탈바꿈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세종 때에 비해 재해도 별로 없었고, 의식주도 세종 때에 비해 안정되었다.

전국의 비축미가 1200만 석에 달했고, 경상도에서는 한해 150~200만 석이 생산되었다.

인구도 날로 증가했다.

 

조선과 여진족의 악연

조선 왕국 1대 왕, 태조(太祖) 이성계

조선 태조는 고려 말 뛰어난 명장이었다.

호바투의 4만 여진 기병대를 '회전'으로 격파한 전례가 있었고, 황산 대첩과 요동성 점령(공민왕 때)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선 태조는 변방의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는데, 이지란 등 수많은 여진 부족장이 조선에 귀부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변방에 순시하였는데, 태조의 용안을 뵙지 못한 여진족들은 울면서 돌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태조(이성계)께서 동정서벌에 나서 수많은 부족을 거느렸고, 변방의 수많은 오랑캐 부족이 우리(조선)에게 귀부하였다."

태조 때는 명나라를 의식하며 지속적인 군비 확장이 추진되었고, 태조 말에 조선은 20만의 보 · 기병과 여러 명장들을 거느렸다.

명나라 1대 황제, 태조(太祖) 주원장

그러나 신생 국가 조선과 명 제국은, 두 태조끼리 알력 다툼이 발생하였다.

명나라 태조는 조선이 변방의 여진족에 대해 영향력을 침투하는 것을 경계했고, 조선 태조에게 인신공격을 퍼붓기도 하였다.

"너희 조선이 온갖 사특한 계책으로 변방의 오랑캐들을 거느리니, 해동 산천의 귀신이 너희 임금(조선 태조 이성계)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성상(태조)께서 이르기를, "요즈음 황제께서 나의 꼬투리를 잡아 질책하기 바쁜데, 하늘이시여! 태산 같은 대국의 황제가 이리도 아량이 좁단 말이오!"

조선 태조 말년에는 흑수 지역의 사나운 여진 부락이 조선에 귀부하였다.

조선은 그들을 '번호(변방의 울타리)'로 삼아 변방을 방어하는 용병으로 이용했으며, 조선의 관직(장군직)과 토지를 하사하였다.

한편 명나라 태조가 사망하고 나서, 중국에서는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은 첩자와 정탐꾼을 보내 중국의 내전을 주시하였고, 5만의 군사를 의주부에 배치해 혹시 모를 명나라 반란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연왕 주체가 승리하여 황제군을 축출하고 영락제가 되었다.

영락제는 조선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이는 막북 - 만주 - 조선에 대한 감시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있었고, 실제로 만주에 누루간도사를 설치해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조선에 귀부하던 여진족이 점점 명나라로 이탈하였고, 이는 조선 태종의 분노를 샀다.

 

명나라 사신이 맹가첩목아 등 여진 부족장들을 회유했으나, 이들은 예전대로 조선을 섬기기로 결심했다.

맹가첩목아 등이 오음부에 이르러 여러 여진 부족장과 회맹의 의식에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조선을 섬긴 지 20년이다. 우리들이 어찌 명나라를 섬기겠는가? 본래의 뜻을 변치 말고 조선을 우러러 섬기되, 두 마음을 갖지 말자!"

는 영락제가 압박하자 곧바로 배반하였다.

성상(태종)께서 조회에서 이르기를,

"이 사특한 오랑캐 무리들이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배반하고, 감히 황제께 귀부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사람의 탈을 쓴 이 도적떼들을 좌시할 수 없다."

조선 태종은 길주도찰리사 조연에게 수천의 기병을 주어 여진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파아손 등 10개 부락을 송두리째 멸망시켰고, 이때부터 조선의 공식적인 여진 원정이 시작되었다.

태종은 평안도에 군량미 100만 석을 비축하고, 대대적인 군비 확장을 통해 태조 때 20만 8백 명이던 군사를 30만 명까지 늘렸다.

병조(국방부)에서 군사의 수를 보고하다, 총 29만 6310명 [1403년(태종 3), 조선왕조실록]

세종 때 여러 화약 병기의 개발과 조선의 주력 병종인 기병의 활약은 여진족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세종은 누르하치의 6대 조상이던 먼터무의 살해를 지시했다.

김종서는 누르하치의 6대 조상인 먼터무에 대해 추격전을 전개했고, 또 한편으로는 6진 일대를 개척하며 변방을 안정시켰다.

조선 시대 변방의 주요 요충지인 6진은 최정예 군사가 주둔한 곳이었고, 임진왜란 때 혼란스러운 조선의 정세를 이용해 역수 부락이 조선을 약탈하자, 선조는 6진의 기병 수천 명을 보내 역수 부락을 멸망시켰다.

또한 임진왜란 때 가토의 왜군을 격퇴했던 노토 부락은 조선의 변방을 자주 약탈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6진의 기병 5천 명을 보내 노토 부락 여진족 1만 명을 사살했다.

조선 선조 때 노토 부락 토벌도(6진의 기병 5천 명 출정)

조선의 임금과 관료들도 자신들의 군사력이 허약함은 알았지만, 6진의 함경도 군사는 인정했다.

"우리나라(군사)는 문치에 안일한 지 오래라 군사가 터무니없이 약하고 쓸모가 없다. 실전에서 적을 만나면 모조리 도망치니, 어떻게 나라를 지킬 계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6진의 군사는 용맹하여 6진의 군사 1명이 적 10명을 감당할 수 있으니, 6진이 보전되지 못하면 나라의 울타리가 무너질 것이다."

세조는 신숙주와 남이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 후일 누르하치의 소속이 되는 건주 여진의 본영을 함락시켰고, 추장 이만주 등을 참살하고 여러 부족원의 귀를 잘라 소금에 절였다.

조선군의 포로 처리가 가혹하여 살가죽을 벗기는 만행이 벌어졌는데, 예종과 명종, 선조 때 조선군의 여진족에 대한 포로 처리 방식에 대해 조정에서도 몇 차례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성종의 북벌

이상 개략적인 조선 초기의 대외 정책에 대해 언급하였다.

유교적 제왕을 꿈꾸던 문치주의의 제왕 성종은, 이상하게도 무(武)에 대한 욕구, 선대 임금의 정벌에의 욕구가 있었다.

한번씩 경연에서도 이러한 의사를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경연관과 선비들은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성상(성종)께서 근래에 흉악한 무기와 거사에 뜻을 내보이시니, 저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 독서가 부족하신 탓입니까? 수양이 부족하신 탓입니까?"

조선 시대 경연관과 선비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유교적 제왕 군주를 만들기 위해 임금 앞에서 거리낌 없이 직언을 퍼부었다.

성종은 유교에 심취하고 성리학 연구에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무(武)에 대한 갈증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경연관들은 그럴 때마다 "임금께서 수양이 부족한 탓"이라며 경고하였다.

성종은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반성하는 뜻을 보였지만, 1491년(성종 22)에 조선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진족 우디거가 조선의 변방을 침략해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고, 변방의 요새와 성보를 불사르자 성종의 분노를 산 것이다.

급기야 성종은 북벌을 결심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3사와 주요 기관의 관료와 사림 세력들이 성종의 북벌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미지의 소굴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국가 장병을 오랑캐의 소굴로 보내 모두 부모와 이별하게 하고자 하심입니까?"

성종이 사림 세력들에게 반박하기를,

"이 나라는 태조 대왕께서 피를 흘리시며 세우셨고, 변방의 경계는 태종 · 세종 · 세조 대왕께서 장구한 계책으로 지켜낸 신성한 강역이다. 한 치의 땅도 오랑캐에게 양보할 수 없는데,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군사의 발동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조정의 관원들이 오랑캐와 내통이라도 했단 말인가?"

성종은 북벌을 위해 4만의 대군을 준비했다.

선대 조종조의 임금께서도 그 정도의 대군을 정벌에 동원한 전례가 없었다.

성종이 북정도원수 허종에게 이르기를,

"북벌의 거사를 맡은 북정도원수 허종은 듣거라. 그대는 의정부에 있으면 요숭과 송경(당나라 때 재상)의 업적을 이룰 수 있고, 변방에서 군사를 지휘하면 곽거병과 이광(한나라 때 명장)의 업적을 이룰 수 있으니, 군사를 지휘해 저 오랑캐들의 소굴을 남김없이 쳐부숴 국가와 조정의 위엄을 천하에 통달하게 할지어다!"

성종은 북벌에 나설 북정도원수 허종과 144명의 장교, 4만의 병사를 사열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허종이 타는 수레를 밀어주며 전송하였다.

반드시 "국가의 설욕을 갚을 것"이라고 당부하였지만...

조선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여진족은 식량과 집을 불사르고 청야 작전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수백 리 이동하며 그냥 도망갔다.

이 북벌에서 조선군은 고작 여진족 7명을 참수한 것이 고작이었고, 북벌의 실패는 사림의 집단 반발로 이어졌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무식하게 대군만 선발해 감정에 호소하면서 시작된 북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 4만 명 중 전투로 인한 피해 역시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회군하는 과정에서 동사자로 인한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남만주 개척 주장

성종은 북벌의 실패로 중앙의 반발에 직면해 잠시 위축되었는데, 이때 함경남도절도사 여자신이 성종을 뵙기 위해 조정에 왔다.

그리고 성종에게 솔깃한 의견을 피력했다.

함경남도절도사 여자신이 성상(성종)께 아뢰기를,

"소신이 변방에 복무하면서 자주 첩자를 보내 오랑캐 땅을 조사했습니다. 을 점령하면 우리나라는 천혜의 낙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성상(성종)께서 이르기를,

"낙토란 무엇을 이름인가?"

실록 내용이 길어서 정리하자면, 야춘 일대는 일단 오늘날 조선족 자치구 지역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야춘은 훈춘을 위시로 한 남만주 지역 일대인데, 변방 사정에 밝은 절도사 여자신은 성종에게 이 지역을 개척할 것을 주장했다.

그 전에는 여진족을 정벌하면 인명을 살상하고 회군하는 것이 다였지만, 아예 관리를 보내 '정복'할 것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여자신이 보기에 이곳의 이점은 무엇이었을까?

 

1. 지리적 이점

야춘(훈춘)은 고대 이래로 동방의 거점이었다.

발해의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가 야춘(훈춘)에 속했고, 인근에는 중경이 위치하는 등 전략적 요지였다.

절도사 여자신은 이 지역을 점령하면 주변의 여진족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여진족의 발흥 자체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 일대에 건주좌위, 호랑위, 협진우디거, 모련위 등 수많은 유력 여진 부족이 할거하고 있었고, 조선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6진을 개척하였다.

하지만 6진은 워낙 춥고 토지도 비옥하지 못하였고, 정작 중요한 것은 "방어상의 공백"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두만강을 넘어 야춘에 성을 쌓으면 사방의 여진족을 통제할 수 있으며, 조선의 우수한 중앙 집권 능력과 행정력을 이용하면 개척은 무리도 아니라고 보았다.

북벌은 준비없이 실패했으니, 대신 준비를 철저히 기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여자신이 보기에, 야춘 일대의 남만주에는 고구려 - 발해 시대의 무너진 성벽이 있으니, 이들을 보수해서 연결하면 충분히 경제적이라고 보았다.

조선의 동원 인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세종 때 6진을 개척하고 6진 일대에 성벽을 쌓는 대역사(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세종 때 동원한 인부 규모만 해도 연인원 70만 명에 달했다.

여자신이 개척을 주장한 지역에는 수많은 여진 부족이 있었다.(이들을 통제해서 여진의 발흥 자체를 차단하자는 주장)

아직 성종 전반기의 조선은 그다지 막장은 아니었고, 여자신은 국력을 이용해 저곳을 개척하면 사방의 요지요, 천혜의 요새이니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경제적 이점

그리고 남만주 야춘 일대에는 야춘해와 근접해 해산물 또한 풍부했고, 토지는 평평하고 넓어 기름진데다가 그 안에 토지가 1만 5천여 결이나 되었다.

1만 5천여 결은 대략 1800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토지인데, 국제 규격 축구장 크기(2,160평)의 8,30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땅이다.

따라서 이 지역을 장악하면 백성들이 '낙토'를 얻게될 것이며, 당연히 백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주할 것이니, 이 지역에 대한 조선의 우수한 중앙 집권력과 행정력을 이용하면 영구히 조선의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야춘에 군사 기지를 대대적으로 양성해서, 서쪽에서 발흥하는 건주위 부락에 대한 견제도 용이할 것이라 보았다.

성종은 목에 막힌 가시가 내려가는 듯 속이 뻥 뚫렸다.

성상(성종)이 웃으며 이르기를,

"절도사의 계책은 실로 나라를 일으킬 만한 위대한 계책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오랑캐의 변에 시달릴 위험이 높은데, 우리가 저곳을 장악하면, 도리어 우리가 천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니, 이 계책은 참으로 가한 계책이로다!"

성종은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야춘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들을 조사케 하였고, 또 곧바로 장성 축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종 전반기 이후 조정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조정의 자리를 대부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 막강한 사림 세력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근자에 성상(성종) 전하께서 변방에 장성을 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국가의 힘을 변방에 소굴시키면 장차 왜구가 쳐들어올까 걱정입니다. 나라의 힘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온데, 성상께서 일을 그르칠까 저희들은 크게 염려가 됩니다."

3사를 장악한 사림 세력은 곧바로 조정에서 공론(여론)을 형성해 성종에 대해 "공사는 민력을 고갈시킨다"며 거세게 반대하였다.

여자신과 성준 등 변방 개척을 주장하던 세력에 대해 집중 탄핵도 이어졌다.

북벌에서는 독단적으로 밀고 나갔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었던 탓일까?

조정의 지분을 대부분 차지한 사림 세력이 성종의 개척을 강하게 비판하자, 결국 사림 세력에게 굴복한 성종도 개척을 중단하였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이 많았던 성종의 무난한 치세가 끝나자, 그의 아들 연산군 때 조선은 쇠퇴하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사냥을 위해 5만의 군사를 동원하고, 사냥터 조성을 위해 민가를 허는 등 인력과 군력을 낭비함이 심했다.

연산군은 자기 제멋대로 조선을 사유 국가화하여 다스렸으며, 이 시기에도 여진족의 침입이 있었다.

연산군은 분노하여 2만의 대군을 선발해 북벌에 나서고자 하였으나, 사림 세력의 반발에 굴복하였다.

천하의 연산군도 사림 세력의 제지에 굴복했던 것이다.

도대체 사림 세력이 얼마나 강했으면 연산군도 북벌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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