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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패배

1636년 겨울,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하해서 조선으로 처들어온다.

약 10만 가량의 군세였다.

마부대의 선봉군은 의주를 함락시킨뒤, 안주나 평양같은 주요 거점들은 우회해서 한양으로 직행하게 된다.

그렇게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조선과 청은 군신 관계를 맺게 된다.

직후 청은 눈에 가시 같았던 가도를 정벌하고자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다.

조선은 여기서 1차로 청나라에 병력을 보내게 된다.

평안도의 있는 가도

가도는 평안도에 있는 작은 섬으로, 모문룡이 요동에서 패하고 무력으로 점거한뒤, 명군이 계속해서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자성의 난과 명나라의 멸망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

청은 조선을 정복하여 배후의 위협을 없애버렸다.

명과의 결전만이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청은 쇠약해져 있는 명나라를 쉽게 공략할수가 없었는데, 바로 오삼계의 명군이 산해관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일부인데, 당시 청군의 소규모의 군대는 만리장성을 우회해서,(이미 청은 몽골을 복속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몽골쪽으로 우회할수 있었다.)

내몽고를 지나 명으로 들어갈수 있는 상황

명나라를 공격할수 있었지만 만 단위의 대군은 굳게 닫힌 만리장성을 지나야 했었다.

만약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명은 적어도 강희제 전까지 생존할수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자성이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킨다.

개봉(옛 송나라의 수도)에서 군사를 모아 장안, 낙양을 점거하고 명의 수도인 북경마저 점거해서 숭정제와 황족들을 자결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자성은 오삼계의 부친을 죽인다.

이에, 오삼계는 산해관을 지키는 병력을 가지고 청군에게 투항했고, 산해관이 열리면서 청군은 중원으로 남하하고 북경을 공략한다.

이로써 명은 멸망하고 만다.

윗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명은 청에게 멸망당한게 아니라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멸망당했다.

물론 황족들은 남쪽으로 남하해 동진이나 남송처럼 남명을 건국했지만, 너무나 쉽게 멸망했다.

청, 러 국경분쟁

당시 청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계속 러시아와 마찰을 지속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여러개의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영토를 확장하고 연해주의 특산물인 표피등을 얻기 위해서 청과의 국경 마찰을 겪은 것이다.

지속적인 교전으로 청군은 상황이 악화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자,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라!"

당시 청나라는 순치제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순치제는 조선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고 국경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다.

병자호란때 겨우 10만의 군세도 못막고 각개격파당한 조선군이 청군도 이기지 못하는 러시아군 상대하려고, 심지어 마무리 지을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한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텐데, 당시 조선은 효종이 즉위한 시점으로 북벌을 외치면서 조총수를 대거 양성 중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력의 정점을 찍은 청나라에 맞서 북벌을 이룩한다는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amur : 아무르강

당시 청군의 목적은 아무르강 일대를 유지하고 서쪽의 영토를 확장하고 러시아군의 남하를 저지함에 있었고, 반면 러시아군의 목적은 아무르강 일대를 장악하여 최대한 남하해서 특산물을 차지하는게 목표였다.

나선정벌의 시작

조선 효종, 이효

조선왕조실록 효종 5년 3월 20일, 동지사(冬至使) 심지원(沈之源)과 부사(副使) 홍명하(洪命夏)등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니, 상이 그들을 불러 보았다.

효종 :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 ? 

한거원 : 영고탑 가까이에 다른 족속들이 나선이옵니다.

장태화[영의정] : 장수는 어떤 관원을 파견하는게 좋겠소? 

한거원 : 북도의 수령이나 변장이 효율적일것 같사옵니다.

효종이 군사의 파견 내용을 서로 상의했다.

북경에서 돌아온 심지원 등이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는 강희제의 서신을 효종에게 전달한다. 

효종은 원군을 보내기로 결단을 내리고는, 1654년 함경도 병마우후(병마우후란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 3품 벼슬)

변급에게 100명의 조총수와 통역관 등을 딸려 원군으로 보낸다.

1차 나선 정벌의 시작이다.

조선군 포수

변급이 이끄는 조선군은 3월 23일 두만강을 도하하고 8일후 영고탑 인근 청나라 장수 사루후다의 분대와 합류 하였다. 

그리고 사루후다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서 송화강과 무단강이 만나는 지점인 왈합(외란)으로 14일이 걸려서 도착했다.

본대와 합류한 조청 연합군은 약 천명 가량으로 외란에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맞이했다.

러시아군은  대선 13척, 소선 26 가량으로 총합 400명이었다.

청나라 장수가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고 하자, 

"어찌 이런 자피선으로 적의 대선을 막을수 있겠습니까?" 

변급은 이렇게 말하면서 선봉에 서기를 거부한다.

사루후다는 전략을 수정했는데, 원래 조선군들을 선봉에 세울 생각이었지만 함선의 차이로 전략을 수정할 수 밖에는 없었다.(당시 청군도 대형 함선이 있긴 하였지만 전부 장강 전선에 투입하는 바람에 작은 사루후다는 작은 배밖에 운영할수 없었다.)

 그리고 전투 당일, 조선군은 강변에 진지를 구축해 러시아군을 맞이한다. 

러시아 군의 공격은 청군이 막아주고, 강변 진지에 있는 조선군이 조총으로 러시아군에 피해를 주었다.

이런 전투의 양상이 지속되었고, 결국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흑룡강을 따라 퇴각해 쿠마스르크 요새에 틀어박힌다.

조. 청 연합군의 전력으로는 요새를 공략할수 없었기에 그냥 돌아간다.

이로써 1차 나선정벌을 마무리 짓고 조선군은 본국으로 귀환했는데, 놀랍게도 조선이 입은 피해는 없었다.

조선군은 개전 7일만에 적을 패퇴시켰고, 1654년 6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 2차 나선정벌

효종실록 20권, 효종 9년 3월 3일, 경자 2번째 기사 -> 1658년 청 순치(順治) 15년, 청차 이일선이 군량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여 이에 따르다.

청차(淸差) 이일선(李一善)이 칙서를 가지고 나왔는데, 영의정 정태화 등이 상에게 교영(郊迎)할 것을 권하니, 승지 서원리(徐元履)도 그 말에 적극 찬동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나아가서 맞이하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대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羅禪)을 토벌하려는데, 군량이 매우 부족합니다. 본국에서도 군병을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국에서 다섯 달 치의 군량을 보내 주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

하자 일선이 말하기를,

"적병은 1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들이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내지(內地)의 곡물을 수송하여 군량을 이어대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자면 형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소."

1658년 제 1차 나선정벌 이후 세력을 회복하여 지속적으로 변방을 괴롭히는 러시아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청나라의 순치제가 효종에게 사신을 보내서 군량과 군사를 원조해 달라고 부탁하며, 조선으로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200명의 포수와 함경도 병마우후 신유 장군을 파견한다. 

신유장군(러시아 원정기인  " 북정록 " 의 저자이기도 하다.)

신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한양을 출발해 경성에 도착한다.

하지만 조선군의 길을 안내할 통역관이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말이 병에 걸려서 죽는등 많은 고생을 하다가 겨우겨우 5월 6일 영고탑에 도착했다.

이후 조선군은 5월 10일 가량, 총대장 사루후다의 부대에 합류한다.

사루후다의 부대와 합류한 후 송화강 어귀 의란 부근까지 나아갔다.

조선군은 아직 합류해야할 청군 부대가 도착하지 않아서 5월 20일까지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그 중 혁철족 이라는 부족의 사람들은 "러시아 군은 지난번 싸움에서 완패한 뒤로 줄곧 말끝마다 머리가 큰 사람들이 두렵다고 말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머리가 큰 사람들은 바로 조선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경에서 오는 청군이 도착했으며, 함선 총합 48척을 규모였고, 이 중 대형 함선 36척, 소형 함선 12척이었다.

전선 한척에 30명씩 태우고,(조선군 5명 및 청군 25명) 함대는 6월 5일 러시아군 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흑룡강 어귀 어라이무청에서 러시아군을 맞이하게 된다. 

러시아군의 총 전선은 11척으로 조청 연합군이 다가오자 강가쪽으로 배를 대고 사격을 시작했으며, 연합군도 응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청 연합군의 화력은 러시아 군보다 한수 위였으며, 점점 러시아군이 밀리기 시작하고 결국 배 안이나 강가로 도망쳤다.

북정록을 읽어보면, 아군이 화공을 가하려고 갑판 위로 올라서면 그때마다 청군이 막아서 어영부영하다가 러시아군의 총포에 맞고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조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러시아군은 약 270명 가량이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군 역시 1차 때와는 달리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25명이 부상을 입고 7명이 전사했다.

또한, 사루후다의 욕심 떄문에 조선군은 굶주리면서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사전 통보 없이 조선군이 주둔하는 기간을 늘리는 바람에 가져온 식량이 전부 떨어져서 조선군은 굶주려야 했었다.

조선군은 8월 27일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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