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백제의 마지막 불꽃, 황산벌 전투
660년 여름,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연합군의 목표는 오로지 백제의 멸망이었다.
나당연합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은 여러 대신들과 회의를 거듭하지만, 결론이 안나오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때 의자왕의 타락을 말리다가 감옥에 갇힌 성충이란 인물이 간언한다.
"당군은 요지인 기벌포에서 막으시고 ,신라군은 육로로는 침현을 지나게 하지 마시옵소서!"
물론 의자왕은 단칼에 거절한다.
의자왕의 심기를 거스른 흥수란 인물도 귀향지에서 이와 똑같은 간언을 하지만 역시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성충은 옥에서 병사하고, 의자왕이 우유부단하게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당군은 백강을, 신라군은 침현을 넘었다는 급보가 전해진다.
당시 백제는 지방귀족과 중앙 정부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까지 침공하는데도 마한 토착 귀족들은 움직이지 않았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흥수와 성충은 대충 요충지에서 시간을 벌고, 지방군이 오면 같이 맞서 싸우자는 주장이었겟지만 의자왕은 현실성을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생각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미 적이 탄현을 돌파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의 병력을 내어주고 황산벌에서 적을 막으라 명령한다.
이후 계백은 황산으로 나아가기 직전 패배를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예가 될바에는 죽는것보다 못하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의를 다지다.
직후, 계백은 좌평 충상, 상영 등과 함께 5천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벌로 나아간다.
황산벌에 먼저 도착한 계백은 곧바로 방어를 준비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황산벌은 분명 황산'벌',
즉 평야라고 나와있지만 실은 산성이었으며, 그렇게 높은 규모는 아니고 동네 야산 정도였다.
백제군은 모촌리산성, 산직리산성, 황령산성 총합 3개의 진영을 세우고 적을 맞이했다.
운명의 8월 20일,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 황산벌에 도착했다.
신라군이 도착하자 계백 장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독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외친다.
"그 옛날 월왕 구천은 5천의 병력으로 70만의 대군을 막아냈다! 오늘 우리 모두의 역량을 모조리 뽑아내어 마지막 싸움을 끝내자!"
계백 스스로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싸움이었다.
이윽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백제군은 눈부신 분전을 뽐내며 4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다.(신당서, 삼국사기 수록 내용)
백제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올라갔으며, 계백 장군도 마찬가지로 패배보다는 승리를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화랑이었던 관창이 적진에 혼자 들어가 분전하다가 계백에게 사로잡히고, 계백은 관창의 용기를 갸륵히 여겨 신라 진영으로 돌려 보내지만 이내 관창은 다시한번 단기필마로 돌진했다가 사로잡힌다.
계백장군은 어쩔 수 없이 관창을 처형하고 신라군 진영으로 시신을 돌려보낸다.
이런 관창의 모습을본 신라 병사들은 하나 둘씩 사기가 오르고, 또 다른 신라의 화랑이였던 반굴도 관창의 분전 이전 분전하다가 관창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김유신 장군은 총공격 명령을 내리고, 이윽고 5차전이 발생해 결국 신라군은 일당백으로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전멸 시켰으며 백제측은 수뇌부 20명이 사로잡히고,
계백 장군은 결국 전사했으며 이 전투를 끝으로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공략, 웅진성으로 도망간 의자왕은 매국노 예식진에게 잡혀 백제는 멸망한다.
'5분 재미있는 역사 상식 > 5분 재미있는 한국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현대사]대한독립운동과 고려인 (0) | 2019.08.21 |
---|---|
[조선시대]북방의 러시아와의 교전, 나선정벌 (0) | 2019.08.20 |
[통일신라]신라의 삼국 통일과 통일신라vs당나라, 나당전쟁 (0) | 2019.08.18 |
[삼국시대]고구려vs당나라, 고당전쟁 (0) | 2019.08.17 |
[삼국시대]고구려vs수나라, 고수전쟁 (0) | 2019.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