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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짖는 3ㆍ1 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 진압으로 이들은 강제 해산되다시피 하고, 이를 계기로 일제는 식민지 통치 노선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소위 '문화 통치' 라고 불리는 것으로. 조선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헌병 경찰제도와 태형령을 폐지하고 보통 경찰제를 도입하고, 그간 완전히 금지되어 있던 집회ㆍ결사ㆍ언론의 자유를 일부 해금시켜주어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일제의 기만이었다. 치안을 헌병이 아니라 보통 경찰이 담당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경찰 병력은 거의 세 배 증가하였고, 경찰서도 몇 배씩이나 배치되어 감시는 더욱 철저해졌다. 또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기사에 대해서도 철저한 감시를 통해 명맥만 유지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 앞에, 국내에서 대한광복회라는 항일 무장 투쟁단체를 이끌어나가던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피신한다.

이는 더 나은 대일(對日) 무장 투쟁을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만주와 간도를 중심으로 각종 독립운동단체와 학교 등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국외 독립운동은 첫 결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일제의 정규군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격파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일제는 만주와 간도 등지에 있던 독립군들을 섬멸하기 위해 하나의 사건을 조작하는데, 그것이 훈춘 사건이다.

두만강 이북 얼마 멀지 않은 곳, 훈춘에는 일본의 영사관이 하나 있었는데 일제는 이 영사관을 이용하여 독립군 토벌 명분을 만들어낸다.

만주에 있는 중국 군벌을 매수하여 자신들의 영사관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자작극을 벌인 후,

일본은 만주와 간도 등지에 있는 자국의 국민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로 진격한다. 그 수가 무려 15,000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아무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와 대한독립군이라 하여도 이러한 일제의 대병력을 혼자 상대하기는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청산리 일대로 이동,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과 합류한다.

이러한 정보를 간도 주민들로부터 입수한 일본군은, 청산리로 진격한다. 일제는 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을 완전 섬멸할 작전을 수립하는데, 병력의 반을 나누어 하나는 독립군의 후면으로 진입하고, 나머지는 정면으로 진격하여 양면을 포위하여 공격하겠다는 포위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 청산리의 주민들은 이미 독립군의 편이었다. 독립군이 그 곳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는 독립군의 유인작전을 위한 것이었다.

청산리의 지형 지물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청산리의 독립군들은 청산리가 안개가 자주 낀다는 점을 이용, 일본군을 격파하기로 한다.

일본군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는 동안 독립군은 이에 응사하며 버티기에 들어간다. 그러던 와중 청산리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데, 이 때 독립군은 빠르게 철수하여 전장에서 벗어나게 되고, 전장에는 후면으로 진입한 일본군과 정면으로 진격한 일본군 만이 마주보게 되었다.

하지만 자욱한 안개 속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독립군과 격렬한 교전을 벌였던 양측 일본군이 알리가 없었다.

일본군은 아군들과 총격전을 하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강해진 적의 저항과 화력에 당황하게 되는데, 이에 서로 더 강하게 반격한다.

안개가 개고. 일본군은 그제서야 서로 싸웠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 때 독립군의 사상자는 겨우 60명, 일본군의 사상자는 약 2천여명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격분한 일본군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인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게릴라 전에는 빠른 기동성과 지형 지물에 대한 이해, 그리고 지역 주민과의 연계가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간도 참변으로 인해 이것이 불가해진다.

결국 독립군들은 '대한독립군단' 을 결성하여 러시아와 접해있는 밀산부를 거쳐,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게 되는데.

러시아 측에서는 독립군을 받아들여 일본과 관계를 악화시켜봐야 좋을게 하나 없었으므로,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독립군은 이러한 요구에 불응. 결국 교전이 벌어져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뿔뿔이 흩어져 만주나 연해주로 다시 돌아갔다.

이들이 바로 고려인이 훗날 고려인이 되는 것이다. 30년대 중후반,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던 독립군과 한국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이들은 생판 모르는 중앙아시아까지 강제로 이주되어, 강제 노역과 같은 일에 시달리며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죽어갔다.

이들이 바로 고려인인 것이다.

독립군의 후손들도 꽤나 있고,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고려인들 중에는 본문에서 등장하는 대한독립군의 사령관 홍범도도 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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