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청일 전쟁 직전 동아시아 정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 중국이 깨어나면 세계가 흔들린다"
인류 4대 문명 중에 한곳이자, 로마시대 이후 인류 문명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나라 중국.
그러나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서양열강은 식민지 지배를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帝國主義) 를 표방한다.
이는 19세기 중엽부터 나폴레옹 조차 두려웠던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게 된다.
중국(청나라)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 중국내 영국상인들과의 무역 분쟁으로 인한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해, 1842년 홍콩을 할양하고 상해를 강제 개항하게 된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① 광저우에 정박하고 있던 애로호의 영국 국기가 바다에 버려지는 사건. ② 불법적인 포교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
두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베이징이 점령당하고,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圓明園) 이 방화된다.
1862년. '태평천국의난'
아편전쟁 이후, 홍수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중국 혁명 운동. 사상,종교,정치 등 사회전반의 개혁을 요구하여 광서성에 봉기하고, 국호를 태평천국으로 정한다.
청 정부는 스스로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기에, 서양열강의 군사력에 의지했고 이는 외세 간섭이 더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서양열강과의 두번의 패배와 내세의 난은 세계를 호령하던 중국인과 동양인의 머리 속에 박혀있던 중화사상(中華思想) 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리게 된다.
일본(에도막부)
1854년. '미일화친조약' : 미군해군제독 페리에 의해, 별다른 저항없이 '하코다테,시모다항의 개항' '미국선박에 대한 보급' 등의 조약을 체결한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 '나가사키,효고 등의 추가 개항' 및 '재류외국인의 치외법권 인정' 등의 조약을 체결한다.
1603년 에도막부의 시작 이후, 250년간 쇄국정책을 펼쳤던 막부는 서양열강에게 무기력하게 대응한다고 판단한 다이묘들에게 큰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1863년 12월.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조선의 제 26대 왕 고종이 즉위한다. 그의 나이 12세가 됬을 때의 해였다.
당시 조선은 김조순 등의 안동김씨 가문이 순조(純祖),헌종(憲宗),철종(哲宗)시대를 거치며 약 60여년간 세도정치 를 펼치고 있었다.
조선의 제 25대 왕 철종이 자식없이 승하하자, 안동김씨 가문과 대립각을 세웠던 풍양조씨 가문의 신정왕후가 대비가 되어 왕위지명권을 갖게된다.
신정왕후는 안동김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흥선군과 정치적 파트너가 되었고, 그의 둘째아들을 왕으로 지명하였다.
안동김씨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破落戶) 생활 을 했다고 전해지는 흥선군은 조선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대원군' 칭호를 얻게 되었고,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섭정(攝政)을 실시하게 된다. 조선초기의 강력한 왕권통치를 목표로 삼아 붕당정치를 없애는 등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한다.
1864년. '서원정리' : 국가보조금으로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6백여 개소의 서원이 붕당정치의 근원이라 보고 47개소만 남기고 전부 폐쇄한다.
1865년. '비변사폐지' : 세도정치 타파를 위해 당시 막강한 권력으로 국정 전반을 총괄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 시킨다.
1886년. '사창제실시' : 마을 단위로 봄에 양식이 떨어진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 추수 때 갚게하는 농민 보호책을 실시한다.
'호포법실시' : 호(戶)를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농민 장정에게 부과하였던 군역의 의무를 양반에까지 확대하였다.
이러한 개혁들로 어느정도 민생이 안정되고, 국고도 충실해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1865년~1868년. '경복궁중건'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경복궁 재건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건설이 진행되면서, 부족한 공사비를 충족하기 위해서 공공연히 벼슬자리를 팔게 되는 등 비리가 속출하였고, 1866년 발행된 당백전(當百錢) 은 물가상승을 촉진 시키는 등 경제적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되었다.
이때 조선에 새로운 위협 존재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러시아 였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베이징조약의 결과로 러시아는 연해주를 얻게 된다.
조선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자, 흥선되원군은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랑스와의 접촉을 시도하려 하였다.
당시 조선에 체류 중이던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 베르뇌 와의 만남을 추진하였다.
1866~1873년. 병인박해(丙寅迫害)
그러나 결과적으로 만남은 성사 되지 않았고, 오히려 '흥선대원군은 효를 부정하는 양이와 손을 잡으려한다' 라는 비난여론이 퍼져나갔다.
커다란 정치적위기를 맞게 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하였다.
베르뇌를 비롯해 9명의 프랑스의 신부가 처형 당하였으며, 천주교인은 약 8천여명이 처형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초강경 조치는 프랑스 등의 서양열강이 조선을 침략하는 계기를 초래한다.
1866년 7월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미국 상인 프레스턴이 이끄는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가 대동강 하구에 나타나 평양에서 통상요구를 하며 행패를 부리게 된다.
평양 감사 박규수 는 제너럴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 되자, 군인들과 백성을 이끌고 불태워버린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8월. 1차 침략
병인박해의 책임을 물어, 프랑스의 로제 제독이 이끄는 군함 2척이 출현한다. 프랑스와 조선군은 격돌하였고 조선은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프랑스는 한양의 양화진까지 진출하게 된다.
9월. 2차 침략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600여명의 프랑스 해군은 강화도 상륙을 감행한다.
이들은 외규장각(外奎章閣) 과 강화성을 탈취하는 등, 강화도 대부분을 점령한다.
조선의 절체절명의 위기
12월.
160여명의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 정족산성 의 공략을 시도한다.
그러나 양현수가 이끈 조선의 포수 800명은 36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수성에 성공하였다. 프랑스군은 약탈한 서적,무기,보물 등을 갖고 청나라로 철군한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미국은 군함 2척을 앞세우고 강화도에 쳐들어온다.
미국은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강경한 민중과 조선정부에게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철수한다.
양이에 의한 침략을 2번이나 막은?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가 일어난 해에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 를 건립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 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두 양이의 침범과 개항요구에 대응하여 방어에 성공한 조선.
이는 장기적으로 조선의 개혁을 늦추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일본(에도막부->메이지정부).
1866년 1월. '삿초동맹체결' : 텐노 중심의 개혁과 막부를 타도를 명분 으로 지방세력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쵸슈와 사츠마가 동맹을 맺고 에도막부에 대항한다.
1867년 10월14일. '대정봉환' : 삿초동맹군의 압박에 에도막부 제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조정에 정권을 이양한다.
신정부세력(사츠마+쵸슈가 주축이 된 세력)은 구막부세력과 보신전쟁(戊辰戦争)등의 내전을 겪지만 차근차근 이를 정리해 나간다.
(에도막부-소극적개혁 VS 삿초동맹-적극적개혁의 싸움에서 삿초동맹이 승리를 거둔것이다.)
이후 일본은 메이지유신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871년 8월29일. 폐번치현 廃藩置県 : 295개의 번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개혁.
1871년 9월23일. 단발령 斷髮令
1876년 3월28일. 폐도령 廃刀令 : 사무라이의 특권신분의 보장이었던 칼의 휴대를 금지한 개혁.
그리고 이때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인물이 있으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쵸슈번의 하급무사 출신인 그는 막부말 개혁파 중 한명인 요시다 쇼인 의 제자였다.
삿초동맹 체결 후, 사츠마번 명의로 7,300정의 신식총을 구입할 당시 책임자였던 그는,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 의 주축 멤버로 해외를 시찰하였고, 1878년 유신삼걸 이라 불리우는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가 암살 당하자, 그를 계승해 내무성의 내무경(内務卿) 직임을 역임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 이와쿠라 토모미, 오오쿠모 도시미치 등의 106명으로 구성된 외국사절단으로, 미국과 유럽을 둘러보고 근대화 정책의 방향성을 찾기위해, 2년간에 걸쳐 서구를 순방한다.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와 갈등을 빚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는 실각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이 이루어진다.
이무렵 중국(청나라).
1861년. '신유정변' : 청나라 함풍제가 서거한 이후 서태후가 등장한다.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과 손을 잡고, 정권을 잡은 후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1861년. '양무운동' :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자강(自强) 운동 시작된다. 군수산업 부문에서 시작된 양무운동은, 교통과 교육, 광공업 등의 부문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인물이 있으니 이홍장(李鴻章) 이다. 이홍장은 안후이성 허페이 출신이다.
1864년 장쑤순무 로 발탁되어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난을 통해서 그는 서양열강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절실히 느낀다.
이후, 1870년 직례총독(直隸總督) 겸 북양 대신(北洋大臣)ㆍ내각태학사(內閣太學士) 등을 역임하는 등, 군인,외교관,교육가,사업가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을 내세우며 양무운동의 선두주자가 된다.
안칭(安慶)에 군사무기제작소를 설립, 샹하이에 강남제조총국 설립하는 등, 부국강병을 특히나 중시하여 1880년대 즈음에는 북양,남양,복건 3군데에서 함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적지 않은 군대가 상당히 현대화 된 수준에 이르게 된다.
1866년. 대한민국(조선)
이러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 조선에는 하나의 태풍의 눈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명성왕후(明成王后) 이다. 여흥 민씨 출신인 그녀는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다고 주변에 알려졌다.
16살이 되던 해 그녀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의 비(妃)로 간택된다.
그녀가 왕비가 되는데 커다란 힘을 실어준 흥선대원군. 자신이 간택한 며느리와의 길고 긴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 된다.
민비의 간택에 있어서 흥선대원군은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 하였다고 한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의 세도가문을 견제하고,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처가의 가문과 가까웠기에 안전하다고 판단 되었기 때문이다.
1868년.
1867년 10월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의 신정부세력은 1년 뒤, 조선에 외교문서를 보낸다.
조선 관리에 대한 호칭이 대인->공 으로 바뀌었고, 텐노를 황제라 칭하였다(그동안은 일본왕).
흥선대원군은 외교문서가 격식에 맞지 않다며, 수리를 거부하며 강경 대응하였다.
1871년. 왕실에 경사가 찾아든다.
혼례를 치른지 5년만에 민비가 회임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아들내외를 찾아, 태아에게 좋다며 인삼을 전해 주었다.
그해 11월 4일. 민비는 원자를 낳았는데, '쇄항증(항문이 닫힌 채 태어나는 선천성 기형 증상)' 이라는 기형을 안고 태어난다.
원자는 4일만에 사망 하였다.
민비는 이를 흥선대원군이 전해준 산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 일본(메이지정부) 은 1869년 에조 공화국의 항복을 끝으로, 구막부세력의 저항은 막을 내린다.
메이지정부의 두 주축인 사츠마번과 쵸슈번 은 사쓰에이 전쟁(영국 vs 사츠마번), 시모노세키 전쟁(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 vs 쵸슈번) 을 통해서, 누구보다 서양열강의 힘을 알았기에,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간다.
1868년. 에도->도쿄 개칭. 수도.
1869년. 판적봉환 : 사무라이들이 다스리던 토지와 백성 모두 텐노에게 귀속.
1870년. 병제통일(육군-프랑스식, 해군-영국식).
1871년 8월29일. 폐번치현 廃藩置県 : 295개의 번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개혁.
우편제도 단행
청일수호조약 체결
1871년 9월23일. 단발령 斷髮令
1872년. 사범학교 창설, 국민교육목표의 학제 공포, 철도개통, 태양력.
1873년. 국민개병제에 기초한 징병령, 근대은행 설립.
1876년 3월28일. 폐도령 廃刀令 : 사무라이의 특권신분의 보장이었던 칼의 휴대를 금지한 개혁.
이 때 논의 되었던 사상 중 하나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의 정한론(征韓論) 이다.
'서양열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사력과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라는 주장이다.
1872년.
메이지정부는 조선과 일본의 무역을 담당한 초량왜관(부산 용두산공원 부근) 에 군대를 파견하여 침탈한다.
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일본의 외무성 관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
메이지정부는 조선에게 자신들의 국가의 격이 높아짐을 알림과 동시에, 새로운 외교틀을 조선에 강요하기 시작한다.
1874년. 중국(청나라) / 일본(메이지정부). 대만정벌.
1871년에 대만에 표착한 류큐(琉球)의 어민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메이지 정부는 류큐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과 급진파의 불만을 잠식시키기 위해 1874년에 오천여명의 군사로 대만 정벌을 단행한다.
하지만 청나라가 즉각 무력으로 대결할 태세를 갖춘데다가 서구 국가들의 비난으로 인해 일본은 북경 주재 영국, 프랑스 공사의 중재를 받아들여 청나라로부터, 50만원의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1872년. 대한민국(조선)
고종은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 뜻을 같이 했으나 서양과의 두번의 전투를 겪고, 일본의 근대화에 이은 침탈의 야욕을 보며, 세계적인 정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쇄국정치에서 벗어나 개국정치를 실행하고자 친정(親政)을 원하게 된다.
1873년. 계유상소(癸酉上疏)
고종10년. 등부승지 최익현은 상소문을 올린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인해 정사가 옛 법도에서 크게 어긋났고, 탐관오리들이 많아져 과중한 세금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는 준엄한 비판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노하여, 당장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고종은 오히려 그를 옹호하고 호초참판에 임명했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비호아래, 여흥민씨 세력이 커졌는데 이 사건 이후 민비와 고종편에 서게 된다)
이후로 흥선대원군의 정치개입을 막은 고종.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물러날 때라 여겨 섭정을 포기.
고종은 22살 나이에 드디어 친정(親政)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개혁을 하기에는 민생이 파탄에 빠진 상태였으며, 일본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서 제국주의를 표방하기 이른다.
1875년. 9월20일. 운요호 사건.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한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다.
1876년. 2월27일. 강화도조약.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지 5개월 후. 메이지 정부는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特命全權辦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 사이에 12조로 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은 부산과 원산과 인천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둘째, 치외 법권을 인정하여,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범죄가 발생할 경우 일본인은 일본인의 법률에 의해 처벌된다.
셋째, 조선의 연안 측량을 자유롭게 한다. 넷째, 조선과 일본 양국은 수시로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한다.
이는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과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는 더 이상 통교를 거절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의도 교섭에 영향을 주었다.
1881년. 별기군 창설.
국외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신식군대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은 양반 자제 출신들을 모아서 신식군대인 '별기군' 을 창설한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親政) 하면서 부터 여흥 민씨 가문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자, 부정부패가 더욱 만연하게 되었으며, 이는 군대에도 방영되었다. 결국 별기군에 비해 하층민으로 구성된 구식군대는 차별을 받게 된다.
1882년 6월9일. 임오군란(壬午軍亂).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구식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요구 하였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이후, 개화파를 견제하여 재집권할 기회를 엿본 흥선대원군과 수구파들의 정치적 공작이었다는 설이 많다.
고심하던 고종은 결국 친정 9년만에(당시 31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다시 궁궐로 불러 들여 임오군란의 수습을 부탁한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벌여놓은 개혁을 폐지 시키며, 사태를 수습해 나아간다.
이때 영선사(領選使)로서 청나라에 체류중이던, 김윤식은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선대원군을 제거할 수 있는 방략 등을 제의, 청나라의 개입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청군은 한양 입성에 입성한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1개 중대 투입하였다.
두 국가는 비밀 회담을 통하여, 양국이 조선에 주둔하는걸 합의하였다.
이때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청의 이홍장은 일본과의 대립을 피하고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33일째 되는 날. 청의 지휘관 마건충(馬建忠) 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천진으로 끌고 가 버린다.
조선에는 임오군란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황제가 친히 물어보고자 청으로 떠났다라고 방을 붙였다고 한다.
이는 흥선대원군을 제거하고 민비를 기축으로 하는 여흥민씨 집권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청의 의도에 의한 사건이었다.
이때 부터 조선은 청과 일본 양 열강으로부터 시달리게 되는 아픔의 역사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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