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
보통 조선은 문약의 이미지가 강하고, 교과서에서도 대응 한 번 못해보고 일본에 먹혔다는 식으로 배우고 있다.
하지만, 윗선들이 매국, 나라를 팔아먹는 와중에서도 진충보국의 신념으로 무기를 잡았고, 종로와 남대문 거리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숨져간 영웅들이 역사속에 존재했다.
구한말의 군사력
다들 알겠지만, 조선이 끝나가던 시기의 군사력은 말이 아니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피던 시기만 해도 나름 기강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나름 강군이었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확실하게 격퇴했다.
신미양요는 미군들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는데, 조선군이 너무 악착같이 싸워서 결국 미군은 한양 진격을 포기하게 된다.
전투를 하면 포로가 나오게 마련인데, 광성보의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 부상을 입고 드러누워서 돌을 던지고, 군기를 빼앗길 지경이 되자 몸에 묶고 바다로 뛰어 들 정도로 치열하게 저항해서, 미군은 으스스함을 느끼고 기껏 점령한 요새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비 외척이 득세해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개판이 5분전이 된다.
왜군이 쳐들어온 운요호 사건에서는 더 이상 양요에서와 같은 조선군의 근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군사력 증강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광무개혁을 시작되는데 이 때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사실 그 전부터 조선은 야포, 개틀링 등 신식 무기들을 도입은 하고 있었지만 군사 체계 자체는 임진왜란 시대에서 별로 진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군사 학교도 설립해 장교를 양성하고, 근대적인 군대로 탈바꿈 시키려는 작업에 착수하는데, 국가예산의 30퍼센트 이상을 국방비로 몰아주었을 정도로 독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많은 유형이 있었는데, 비싼 돈 주고 사온 개틀링은 동학농민군, 자국민을 학살하는데 사용하고,
을미사변(민비시해)때는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와 왕궁을 지키던 시위대가 동족상잔을 하기도 한다.
명성황후 뮤비 보면 일본 무사들이 포졸들을 학살하고 왕궁 진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현실은 대한제국 정예군끼리 충돌한 것으로 가슴 아픈 역사이다.
어쨌든, 20세기 시작 무렵에 대한제국군은 일본이 러일전쟁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서 상당한 체질개선과 몸집 불리기에 성공한다.
당시 대한제국군의 구성을 보면,
친위대 - 수도 방위군. 2개 연대 5~6개 대대.
시위대 - 근위대. 2개 보병연대 4개 대대 + 근위기병대대, 군악대 + 왕궁 호위대
진위대 - 지방 주둔군. 6개 연대 18개 연대.
각 연대 정원은 대략 천 명이라고 보면된다.
대충 계산해도 최소 25,000~30,000명의 상당한 숫자이며,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근대화 된 훈련을 받고 신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고, 특히 중앙의 정예부대들이 갖춘 야포나 기관포 같은 장비들의 질과 양의 경우 오히려 일본군을 앞서 영국이나 독일 같은 유럽 열강과 비등한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광무호 건처럼 호구짓을 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돈 써서 준비를 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의 방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침탈을 더욱 가속화한다. 그런데 위에서 적었듯 그 사이에 대한제국군은 눈부신 성장을 해 둔 상태였다.
일본 입장에선 정신 차려보니 ‘어? 이게 아닌데’ 싶은 것이었을 것이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기껏 양성한 대한제국군의 손발 잘라내기에 착수한다.
친위대 - 폐지
시위대 - 2개 보병연대를 1개 보병연대로 개편, 포병 대대, 기병 대대 중대 규모로 축소하고 시위여단으로 개편.
진위대 - 18개 대대를 8개 대대로 감축하고, 각 대대 인원 축소.
결과적으로 병력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전술단위가 크게 축소되고, 병력 숫자도 거의 1/3 수준으로 대폭 감소하게 된다.
장담하지만, 이 때 고종이 명령 한 번만 내렸어도, 하다못해 일본과 친일파놈들의 위협에 조금만 단호하게 대처하고 제스쳐만 했어도 전국의 대한제국군은 앉아서 지켜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러일전쟁 직후 군사비 지출로 휘청대던 일본은 새로운 전쟁에 부담을 느꼈을 테고, 무력으로 진압은 하더라도 나라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고 1907년과 1910년에 그렇게 맨입으로 홀라당 집어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개인적 생각)
군대해산
일본이 대한제국군을 축소시키기는 했어도 존속시켰던 이유는 각 지역의 치안을 관리하고 ‘반란군’ 즉 의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위에 말했듯, 일본은 군사비 지출로 고심하고 있었고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준으로 병력을 파견하는건 무리였다. 그래서 최소한의 군사력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면암 최익현 선생같은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다.
74세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의병항쟁에 투신했던 최익현은 대한제국 정부(에 존재하는 친일파)의 명령으로 토벌군으로 파견된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자, ‘저들은 황제폐하의 군대이다. 같은 민족을 공격할 수 없다’ 라며 전투를 회피하고 체포되어 대한제국이 아니라 일본 사법부에 의해 재판을 받아 대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결국 최익현 선생은 이듬해인 1907년 1월 1일, 단식 끝에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대한제국군 장병들 상당수의 가슴 속에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일본이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의병 토벌에나 끌려 다니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마침 이 때 고종이 마지막 몸부림으로 조칙을 내려 시위대로 하여금 왕궁에 진입해 정권을 되찾아오게 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이걸 국방부 장관격인 군부대신 이병무가 일본에 누설한다.
미리 이 사실을 안 일본군은 경운궁을 봉쇄하고 시위대 본영을 포위해 버린다.
결국 조칙을 받지 못한 것인데, 이 와중에 분노한 병사 100여명이 병영을 이탈해 종로경찰서를 습격하고 덕수궁 인근까지 진격해 일본군들과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작전은 실패하고, 일본군이 대한제국군 병기고를 점령해 버린다. 당시 수도에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비율은 못해도 2:1 정도이고 무장은 더 좋았음에도, 힘 한번 못 써보고 손발이 묶여 버린다.
근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군부대신부터 시작해서 군 수뇌부 대다수가 친일파였다.
결국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서 대한제국군은 ‘이용가치’가 사라지게 된다. 오히려 부담스러운 위험 분자가 된 것이다.
일본은 외교권, 경찰권 등 대한제국 정부의 주권들을 빼앗으며 군대도 해산시킬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구실이 붙고, 이 구실을 만든 자들이 바로 친일파 이완용 내각이다.
한국 육군은 교육이 불완전하고 규율도 엄정하지 못하여 유사시 국가의 간성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이는 용병주의(傭兵主義)를 취해 왔기 때문이므로 장래에 징병법을 실시하여 정병을 양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다음과 같이 군비를 정리해야 한다.
① 육군 1개 대대만 존치하여 황궁 경호에 임하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
②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에 관계되는 기관을 모두 폐지한다.
③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한국군에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④ 해산한 하사와 병사 가운데 경찰관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하게 하거나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킨다.
정리하자면, 명목상의 근위대를 뺀 모든 군대를 해산하고, 작전에 필요한 조직 및 사관학교를 모두 폐지하며, 일본군이나 경찰(일본 소속)에 편입 거부시 만주 가서 농사나 지어라, 이것이다.
반발
군대해산령을 위해서 일본은 한반도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3사단을 서울로 집결시키고 12여단을 추가파병하면서,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차관과 수도방위사령관을 불러 군대 해산전까지 병력을 잘 통제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거사 계획을 일본에 알린 군부대신 이병무는 사전에 미리 포병 전력을 몽땅 일본군에게 넘겼고, 7월 31일 야밤에 순종을 협박해 군대 해산 조칙을 발표하도록 한다.
그 와중에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군대를 해산할 때 민심을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하는 자가 있으면 진압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결국 8월 1일, 일제 한반도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대대장급 이상 장교들을 전원 소집해 ‘대한제국 군대해산’ 발표를 하게 된다.
‘장교들은 고용보장을 해줄테니 쫄지 말고 병사들 통솔 잘 해라’ 라는 명령과 함께.
또 여기 혹한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군대해산 소식을 숨기고 ‘도수훈련’과 공로금 지급 명목으로 비무장으로 병사들을 훈련원에 소집하게 된다.
결국 일본군의 감시 아래 계급장을 뜯기고, 퇴직금 명목으로 푼돈을 받고 모조리 쫓겨나게 된다. 일본군에게 한 명, 한 명 계급장을 뜯기던 병사들은 돈을 내던지고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한편, 시위대 제 1연대 제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대대장급 소집에 응하지 않고 대신 휘하 고참 중대장을 파견한다. 그리고 군대해산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군불능수국 신불능진충 만사무석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은들 애석함이 없다.
분노를 참지 못한 박승환 참령은 위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을 한다.
그리고 평소 믿고 따르던 지휘관을 잃은 휘하 병사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그렇게 대한제국군 최후의 저항은, 군적이 사라져 버린 다음에야 시작되었다.
8월 1일 전투
유서 한 장 남기고 생을 마감한 박승환 참령을 따라 분을 참지 못한 오의선 정위도 자결하고 만다.
안타까운 점은, 많은 지휘관들이 이렇게 자결하거나 군무를 이탈해 항전을 결의했을 때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에 나왔다는 것이다. 일단 상당수가 일본의 간계에 포섭된 상황이기도 했다.
병영이 어수선할 때 참위 남상덕이 ‘대대장이 죽음으로 의를 보였는데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적들과 결사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 라고 봉기를 주도한다.
병사들은 곧 탄약고를 접수한 후 무기를 가지고 항전을 결의한다. 1907년 8월 1일 전투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각, 2연대 1대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2연대 1대대장 이기표 참령은 대한제국군 약화와 해산에 항의하다 해임된 와중이라 병사들은 이미 흥분 한 상태였고, 1연대 1대대가 봉기하자 무기를 회수하던 일본군을 습격해 항쟁에 참여하게 된다.
그 외에도 다른 대대 소속 병사들 중 일부도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는데 부대 전체가 항쟁을 결의한 것은 이 2개 대대가 핵심이다.
각 대대 정원은 500~600명 정도였고, 외부에서 참여한 인원은 300명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각 대대는 결원도 있었을테고, 기껏해야 다 합쳐서 1,000~1,500 남짓한 숫자였을 것이다.
이것이 한 때 3만명의 숫자와 당대 최강 영국군에 밀리지 않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던 대한제국군이 겨우 전투다운 전투를 시작했을 때 참가한 총 병력 숫자이다.
한 때 당대 최강 영국 육군에 비견될 질과 양을 가졌다는 야포와 기관포 등 중화기는 이미 전부 일본군 손에 넘어가 있었고, 심지어 총알도 충분치 못했다.
일본군은 ‘예기치 않은 소요사태’가 일어날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고, 이미 대한제국군 병영 외부에 병력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제압될 거라 생각해 각 대대에 겨우 1개 중대만 배치한 상태였고, 대신 호치키스 기관총을 배치해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병영 건물 등 엄폐물에 의지해 집중사격을 가하는 대한제국군과 교전하면서 상대의 전투의지와 화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군의 수차례 진입을 막은 대한제국군은 오히려 반격을 시도 할 정도였고, 고전하던 일본군은 2개 중대를 추가 파견하고 공병대를 통해 폭약설치를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로 근처에 있던 남대문에 2문의 기관총을 설치해 병영 전역을 사정권에 두면서 대한제국군의 활동을 위축시킨다. 그 때 서울 시내는 2층 건물도 거의 없는 시절이었는데, 고지대에 기관총이 설치되니 그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일본 9중대장인 가지하라는 직접 공병대와 함께 폭약을 가지고 대한제국군 병영 후문으로 진입해 폭약을 설치한다.
이 와중에 러일전쟁에서 대활약을 했다는 가지하라가 대한제국군의 사격에 목숨을 잃지만, 폭약이 폭발하면서 생긴 화염과 연기 속으로 일본군이 돌입하자, 이미 탄약이 떨어져가고 있었던 대한제국군은 결국 병영을 잃고 만다.
봉기를 이끌던 남상덕 참위는 병영으로 돌입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칼을 뽑아 백병전을 벌일 정도로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화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바로 전 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는 이준영 참위(소위)도 장교가 된지 하루만에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
이 날 대한제국군 장병 68명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백여명이 부상당하고, 516여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일본군의 사망자도 30~4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날 봉기한 병력들은 포위 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우고 ‘단순한 소요사태’라 치부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만, 결정적으로 탄약과 중화기가 부족해 일본군의 진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은 2개 대대가 약 천명 이상의 인원이 전투에 나섰는데 지휘관이 소대장이었다.
대대장 한명은 자결, 한명은 해임된 상태, 중대장 한명도 자결한 상황이라고 해도 병사들이 봉기하는 상황에서 이끌어준 중대장급 이상 장교가 아무도 없었다.
8월 1일 오전 동안의 전투는 단순히 이 병영에서만 일어난게 아니다.
외부로 탈출한 병사들도 있었고, 시가지 내에서 교전이 벌어지자 일반 백성들이 돌을 던지며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약 한달 후에 프랑스에서 발간된 잡지에 실린 삽화를 보면 군복을 입은 병사들과 하얀 도포를 입은 백성들이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다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외에도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들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동양으로 왔던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트.
"1개 소대병력 정도의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총을 땅에 버리라고 했고 조선군은 저항했다."
"곧 교전이 벌어졌고 일본군과 조선군 측에서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군은 숫적 우세로 조선군을 압도했다."
"그때 길을 지나가던 조선인들이 우르르 몰려 구경하던중 몇명이 일본군에게 돌을 투척했고 곧이어 수백명이 투석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조선인들에게도 발포하기 시작했고 몇명이 쓰러지자 군중이 해산했다."
"조선군은 창고를 방어물 삼아 저항하다가 모두 무장해제 당했다."
"하지만 그중 한명은 총을 버리려 하지않았다, 일본군이 강제로 총을 뺏자 그 조선군은 일본군의 총검을 뽑아든뒤 얼굴을 찔렀다".
"일본군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동료들이 그 조선군을 난도질했다, 조금후 그의 시체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조선군 장교 몇명이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무기를 모두 뺏겼다. 조선군 장교들은 벌벌떨며 기어나왔다."
"나의 통역 윤갈산은 땅에 고개를 처박고 벌벌떨고 있었다. 길거리에 서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프랑스의 일라스트라시용 기사
“한국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사망한 용감한 이들의 시신은 동대문 밖에 전시되었다.”
“부모들은 자식의 시체를 찾아 그들을 장례 지냈다.”
“일본인들도 이 영웅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했다.”
영국인 기자 존 멕켄지의 취재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후의 의병전쟁 진행
이때 의병전쟁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지만,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전쟁은 극적인 전개를 맞이하게 된다.
기존의 의병들은 훈련 받은 군인들이 아니라 의기와 분노를 참지 못한 유생들이 이끄는 경우가 많았고, 무기도 기껏해야 창칼에 임진왜란때나 쓰던 화승총이 전부라 투쟁다운 투쟁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해산령을 거부하고 무장탈영한 대한제국군 장병들이 의병전쟁에 가담하고 막대한 양의 신식 무기가 의병들에게 흘러들어가면서 의병전쟁이 보다 체계화 될 수 있었다.
국권을 빼앗기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때에 내가 일본에 투항하면 일본 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귀가 8역적(逆賊)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倭)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민긍호 의병장. 강원도 관찰사의 귀순 권유에 대한 선생의 거부 답신 중에서-
대표적으로 강원도 원주 진위대 소속 특무정교(특무상사) 출신으로 강원도 의병을 이끈 민긍호 의병장이 있는데, 군대해산에 반발해 무장탈영한 병사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의병부대는 뛰어난 전투력과 화력으로 100여차례의 전투로 일본군을 괴롭히지만, 결국 1908년 변절자의 밀고에 의해 일본군에게 사로잡히고, 의병들이 이를 구하려 하던 와중에 도주를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사살당하고 만다.
‘심 구장’ 이라고 알려진 조선인 변절자는 이후 의병들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2010년에 데니스 텐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 피겨 선수가 한국을 방문해 민긍호 의병장 위령비를 방문했는데, 이 사람이 민긍호 의병장의 고손이라고 한다.
민긍호 의병장이 사망하자, 부인이 어린 남매를 데리고 연해주로 갔는데, 이후 고려인 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에서 살게 된 것이다.
현재도 카자흐스탄에 50가구 정도가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순국열사의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한국정부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2007년에야 비로소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짧게 넘어가고, ‘군대해산령에 반발’ 정도로 처리되는 이야기들이다.
교과서에서도 ‘조선은 저항도 없이 일본에 넘어간’ 나라로 나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열강의 각축장이 된 극동의 작은 나라를 주목하던 유럽인들은 대한제국군의 봉기와 의병전쟁 전개를 묶어서 약 20년에 걸친 ‘조선-일본 전쟁’으로 여겼다. 실제로 보고서나 기사에 그렇게 표기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패배했고 국권침탈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무력하게 나라를 빼앗기지만은 않았다.
윗선들이 무능력하거나, 매국노라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손발이 묶이고 무기도 빼앗긴 상태에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종이 제대로 조칙을 내리고 일신의 위협을 각오했었다면, 대한제국군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일본이 마음먹고 병력을 투입하면 결국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마음먹고 병력 투입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고, 적어도 무력하게 국권을 통째로 빼앗기진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시 식민지 군대와 열강 군대가 상대가 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무기체계와 근대전술 때문이었는데 적어도 20세기 초반의 대한제국군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남대문 전투에서 순국한 하급장교들은 보통 20대 초반~후반 정도이고, 총알이 떨어져 빈 총을 끌어안고 숨져간 병사들의 나이는 어리면 17살 정도였다.
적어도 현충일 하루 정도는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군에 의해 한 많은 삶을 마감했던 이 용사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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