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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李資謙)

자신의 딸을 예종의 비로 보낸 것도 모자라, 예종이 다른 여자를 후궁으로 맞아들이면 자신에 대한 총애와 권세가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나머지 두 딸 역시도 예종의 비로 '강제로' 바쳐 그 역시도 아내로 맞이하게끔 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고려 최대의 귀족이었다.

이 이자겸이 일으킨 이자겸의 난은 국사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고려사에서 비중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건인데, 그런 이자겸의 난이 영광 굴비와 무슨 상관인걸까?

이자겸이 본격적으로 탄탄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해동공자로 불리는 최충의 손자, 최사추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이후이다. 

그는 과거 시험도 보지 않은 채, 친가와 처가의 배경만을 가지고 음서(5품 이상의 고위관료의 친족을 시험 없이 관료에 임명시키는 것)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 때 맡게 된 관직이 정 7품 합문지후閤門祗候 이다.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자들은 정 6품부터 시작하는데, 단순 음서만으로 관직에 진출한 자가 정 7품부터 시작한 것이니,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능력보다는 이었다.

처가의 해동공자 최충은 구재학당이라는 일종의 학원가를 형성하여 '최충 학파' 로써 어마어마한 수의 인재들을 길러내고 실무에도 능했는데, 이러한 공으로 후에 현재 국무총리 급의 문하시중, 명예직이었던 수태보, 거기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까지 더한 벼슬을 받았다.

말년에는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 이라는 공신에 평시임에도 봉해졌으니, 당대 고려 최고의 귀족 집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자겸의 집안은 대대로 인천의 호족 집안이었던 인주 이씨. 단순 친가와 처가의 빽 만으로 탄탄대로를 걸어온 인물인 것이다.

하여튼 이런식으로 빽으로 꿀을 빨고 있던 이자겸이 '임금의 자리를 넘볼 정도로' 권세가 강력해지는 계기가 생기게 된다.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 후 이자겸은 참지정사, 상서좌복야를 거쳐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다시 소성군 개국백에 봉작되어 최충에 비견할 정도의 명문, 최대 귀족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런데 예종이 죽어버리고 만다.

(참고로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맞아들인 이유는 '이자겸의 딸' 이라서가 아니라 '최사추의 사위'의 딸 이라서다.)

이에 이자겸은 예종의 동생 중 하나를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통해 인종으로 추대하는데, 나이가 열넷에 불과하였다. 

나이가 어린 왕. 게다가 자신의 추대로 즉위한 왕을 끼고 도는 이자겸에게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이에 신하로서 최고직에 오르게 된다.

이후 이자겸은 자신의 반대파를 역모라는 명목 하에 모두 유배, 혹은 사형시키고 거의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게 된다. 

이에 이자겸은 자신의 부府 에 속해있던 하급 관료 소세청을 송나라에 보내 스스로를 지군국사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지군국사란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왕이 아니고서야 절대 받을 수 없는 칭호인데, 이자겸은 왕에게 이 직함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자겸의 도 넘은 행보에 인종은 점점 경계심과 반감을 느끼게 되고, 이자겸을 축출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것이 바로 후일 이자겸의 난을 불러오게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자겸이 난을 먼저 일으켰고 조정이 진압한 듯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조정에서 먼저 이자겸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손을 썼다가 실패하여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기로 사전에 모의한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 등은 약속된 날 밤에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과 아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이자겸과 척준경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궁궐을 포위, 궁성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종을 협박하여 남궁으로 옮기고, 자신에 대한 변란을 모의했던 최탁, 권수 등 17명을 현장에서 죽여버린다.

이후 이자겸은 인종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거의 모든 국사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다시피 하였고 또 다른 딸을 인종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 못이긴 인종은 이자겸에게  의사를 표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많은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기회가 인종에게 찾아왔다.

이자겸과 정치적 동지 관계를 결성했던 최측근, 척준이 이자겸과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척준경은 과거 윤관이 여진 정벌에 나섰을 때 같이 참가했었고, 여진족에게 윤관과 함께 포위됐었을 때 단신으로 포위를 돌파한 적 있는 맹장이었다.

이에 윤관은 척준경을 양자로 받아들이기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무장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뜬금없게도 둘의 노비가 싸운데서 비롯되었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말하길, "너의 상전은 임금 있는 자리에 대해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하며 너도 마땅히 관노로 편입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크게 격분하여 이자겸의 집에 들이닥쳐 의관을 벗어던지면서 호통을 쳤다.

"내 죄가 크지! 조정에 나아가 자수하면 그만이지!"

척준경은 이 말을 뒤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당황한 이자겸이 아들들을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척준경의 마음을 돌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이어 척준경은 최사전을 통해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최사전은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가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종에게 처음 알린 사람이다.

이후. 인종은 척준경이 이끄는 군사들을 대동하고 궁궐 내 천복전에서 이자겸을 불렀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궁궐에 들어왔다. 척준경은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창고에 가두었고 이자겸을 믿고 반왕적 행태를 보인 자들을 처벌하였다. 결국 이자겸과 그의 처는 영광(현재 전남 영광)으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이자겸은 영광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형은 아니었다.

이렇게 이자겸이 영광으로 유배 가 있었을적에, 영광 굴비의 맛에 흠뻑 빠져 인종에게도 이러한 굴비를 진상하였는데, 진상품으로 올리면서 굴비屈非 라고 적어보냈다.

비굴하게 용서를 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맛이 좋아 보낸다는 것이다. (屈 굽을 굴, 非 아닐 비) 

굴비를 접할 기회가 있으면 근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아는척 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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