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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 충절공 (太師 忠節公) 유금필 (庾黔弼)┃

유금필에 대한 생년월일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와 사망시기로 볼 때 왕건과 비슷한 연배가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인데,  당시는 국제적으로 당나라와 발해가 쇠퇴해갔고, 일천년 역사의 신라 또한 정치가 어지러워 전국 각지에 독자 세력을 지닌 수많은 호족이 난무하던 이른바 "호족시대"에 접어들어 망국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신라 말. 궁예와 견훤이 각 호족들을 통합하여 새 나라를 건국하려던 무렵 유금필의 평주 역시 전쟁이냐 복속이냐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의 민심을 얻으며 미륵군이라 불렸던 궁예의 군대는 파죽지세의 기세로 가는 곳마다 성을 함락 시키며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감히 누가 대항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송악의 대호족 왕륭을(세조) 필두로 근방 패서의 호족들은 궁예의 "후고구려"로 흡수 되었는데 곧 강력한 해상세력을 바탕으로 고려의 건국 주체들로 자리잡았다.

이 때 청년 유금필은 송악의 왕건을 평생 주군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출생성장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추정만 할 뿐이다.

여튼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데, 서로들 제대로 알아본 것일 것이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고려를 건국. 

장수에서 한 나라의 태조가 되어 본격적으로 후백제의 견훤과 천하의 자웅을 겨루게 된다. 

다시말해 지금부터 후삼국 판도에 유금필이라는 회오리가 휘몰아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태조가(왕건) 궁예의 휘하에있으면서 여러 전투에서 신묘한 전술 전략으로 승승장구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고있을 때 유금필 역시 태조의 충직한 부장으로서 수차례 활약헀었다.

이제는 "왕건의 유금필"이 아닌 "고려의 유금필" 로서 삼한땅에 이름 석자를 제대로 찍을 때가 온 것이다.

[ 920년. 즉 천수(天授) 3년 ]

천수: 고려 태조의 연호

북방의 여진족이 아직 삼한판도의 승세도 잡지 못한 고려의 변방을 위협하자, 태조는 즉시 유금필에게 3천의 개정군(開定軍)을 주어 북방으로 파견했다. 

유금필은 평주 사람으로 북방 지역에 대한 이해와 상황파악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 개정군이란 고려가 북방의 국경을 개척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 

북방으로 떠난 유금필은 우선 여진 추장 300여명을 초대하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잠시 후 추장들이 술에 취하자 모조리 포박하고 고려에 복종할 것을 강요해 전부 굴복시킨다.

그리고 곧바로 그 사실을 각 마을에 통보했다.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을 맹세했으니, 너희들도 어서와 복종하라!"

훗날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도 비슷한 전략을 구사했는데, 윤관은 추장들을 모조리 도륙냈지만 유금필은 스스로들 복종하게 한 것이 차이점이다.

소식을 들은 잔당들은 감히 대항할 엄두도 못낸채 유금필에게 투항하여 고려 조정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유금필이 전투도 치르지 않고 북방을 안정시키자 태조는 안심했고 그에 대한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 후로 북방에서 유금필의 영향력은 무지 탄탄했는데,

고려가 거란을 적대시했던 반면 여진은 고려의 울타리이자 회유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은, 고구려의 해동 천하 관념을 이어받아 숙신(여진) 또한 고려의 신민으로 통합하고자한 이유일 것이며, 여기에는 국초에 그들을 평정했던 유금필의 역할이 크게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 여진은 이후 동/서 여진으로 갈려 고려와 거란, 두 강국의 세력을 살피며 줄을 타지만, 환란이 터지면 고려의 용병으로서 큰 전쟁을 함께 수행해 의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진 몸풀기에 불과하며, 유금필의 진면목은 지금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 태조 천수(天授) 8년. 서기 925년 ]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는 바로 그 해이다. 

태조는 유금필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해 연산진을 공략하게 했다.

이 곳은 본래 태봉의 영토였으나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자 백제로 귀순한 지역으로, 다시 말해 원래 고려의 땅이었으니 태조로서는 되찾기를 매우 고대하던 했던 지역이었다. 

※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후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

유금필은 곧바로 출정해 연산진의 백제 장수 길환(吉奐)을 참수하고, 연이어 임존성을 공격해 적병 3천명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았다.

그 후 태조가 견훤과의 조물성 전투에서 고전을 하자 말을 몰아 조물성으로 진격, 유금필의 참전 소식을 들은 백제 측은 서둘러 고려 측에 화의를 요청한다.

이 때 유금필은 백제와의 화친을 극구 반대하지만 태조는 '경이 연산진과 임존군을 격파했으니 그 공적이 이미 적지 않도다.' 라며 위로한 후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백제와 강화를 맺었다.

사실 기록에는 불리해진 백제측이 화의를 요청했다고 되어있는데, 정황상 고려측에서 먼저 요청하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고려에게 불리한 상황었다고 한다.

[ 이듬해인 태조 천수(天授) 9년 ]

견훤의 처남이자 볼모로 와있던 진호(眞虎)가 돌연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분개한 견훤은 태조의 사촌아우였던 왕신(王信)을 죽이고, 전쟁준비를 한다.

볼모들의 죽음에 정치적 계산이 깔렸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두 나라는 다시금 일촉즉발의 전시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뛰어난 지략가였던 견훤은 고려를 정면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말머리를 동쪽으로 하여 속공으로 신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세운뒤, 친 백제계 정권을 수립해버린다.

즉, 천년사직 신라가 백제의 위성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1만의 구원군을 급파했지만,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상황이었고, 태조는 다시 5천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퇴각하는 백제군을 치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미리 간파한 견훤이 공산으로 향하는 고려군을 역으로 공격 "

백제의 맹공으로 고려는 전군이 전멸하는 다시 없을 참패를 겪게되고, 태조는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 등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달아나니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공산전투이다.(公山戰鬪)

이 때 견훤은 태조를 사로잡고 통일대업을 완수하려 했는데, 신숭겸 장군이 태조인 척 위장하여 태조의 백마를 타고 갑주를 바꿔입어 백제군으로 돌격하며 대신 죽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과 여러 장수들의 숭고한 죽음이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아마 고려가 아닌 백제가 통일한 후삼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삼한 판도의 승세를 잡은 견훤은 여세를 몰아 대야성이 위치한 합천읍과 초계지역마저 장악한 뒤 강주(康州: 진주)까지 차지하고, 고려의 남해안 지역 해상활동을 차단하여 둘째 아들 양검(良劍)을 강주도독으로 삼아 지방통치를 강화했다.

[ 태조 천수(天授) 11년. 928년 ]

고려는 거듭된 패전으로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 였지만, 백제의 견훤이 이런 고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맨손으로 일어나 한 나라를 창업했던 견훤은 뛰어난 무공과 통솔력 뿐 아니라, 맹수와 같은 기질 또한 가진 냉철한 지략가였다.

견훤은 장수 김훤(金萱)·애식(哀式)등으로 하여금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청주를 치게했다.

근데 마침 근방에서 성을 쌓는 임무를 수행중이던 유금필. 

유금필은 곧장 달려가 백제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독기진(禿歧鎭)까지 추격하여 3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아버렸다.

이 소식을 듣자 태조는 '공산에서 두 명장을 잃어 근심하던 차였는데 경의 말을 들으니 짐의 마음이 안정되는도다.'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고려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백제에 눌려있었고, 유금필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한다."

백제군이 유금필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견훤은 이듬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의성부를 함락시킨 후 

고창으로 진격했고, 태조 역시 백제군을 막기위해 고창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려군의 자신감이란 이미 땅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안절부절 망설이던 태조가 장수들을 불러놓고 묻기를 '만약 상황이 불리해지면 어찌해야 옳은가?' 라하자 유금필은, 

"구차히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워야만 승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길 바라옵니다."  

라며 설득했고, 마침내 태조는 이를 허락했다.

분위기 반전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길로 유금필은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즉시 돌격하여 백제군을 완전히 궤멸시켜버린다.

유금필이 활약한 이 전투에서 백제는 전사자 수만 8천에 이렀을 정도의 대패를 했는데, 이 전투 후 신라 동부의 수많은 성들이 고려로 귀부했고, 풀 죽어있던 고려는 승승장구하여 후삼국 쟁패의 주도권을 쥐게되는 쾌거를 이루게된다.

유금필의 용맹과 무공에 감격한 태조는 '오늘의 승전은 오로지 경의 공이로다.' 라며 극찬했는데,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고창전투이다.(古昌戰鬪) 

무장 하나가 전투의 흐름을 바꾸고 더 나아가 삼한통일의 주도권을 쟁취해내자 조정에는 시기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금필은 참소를 입게 된다.

결국, 곡도(鵠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금필이 사라지자 백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수군 장수 상애(尙厓)와 상귀(尙鬼)로 하여 고려의 황도 개경을 유린케하고,  대우도(大牛島 :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의 부근)를 공격하여 고려의 후방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태조는 대광 왕만세(王萬歲)를 보내 적을 막도록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유배지에 있던 유금필은,

'신이 비록 귀양살이 중에 있지만 백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이 장정들을 충당하여 이를 막으려 하니 부디 근심하지 마소서.

라며 유배지인 곡도, 그리고 포울도의 장정들을 소집해 의용군을 편성. 백제의 수군을 막아냈다.

이를 들은 태조는 비로소 그를 내친것에 대해 눈물 흘리며 크게 후회했고, 사자를 보내 유금필을 소환시킨다.

이쯤되면 이미 무장으로서 유금필의 명성은 삼한천하를 뒤덮고도 남음이 있을 지경이었지만, 그의 무패신화는 멈출줄 모르고 계속된다.

[ 태조 천수(天授) 16년. 933년 ] : 이때 부터 후당 연호 사용.

후백제의 태자 신검(神劍)이 이끄는 군대가 경주 부근을 침략하자 태조는 유금필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다.

'그대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된 유금필은 명을 받자마자 고작 80명을 뽑아 정예 별동대를 꾸린 뒤 그날로 서라벌로 향한다.

사탄(槎灘)이라는 지점에 이르자 그는 부하들에게 '이곳에서 적을 만난다면 나는 살아남기 힘들테니 각자의 살길을 강구하라.'라고 했다. 

아무래도 수적 열세에 죽음을 각오했었겠지만, 용사들은 굴하지 않고 답하기를 '저희가 죽으면 모두 죽었지 어찌 장군만 죽도록 하겠습니까!라며 충의로 결의했고, 통군을 넘어 백제군과 마주하자 정작 적은 유금필의 정예군의 위엄에 눌려 우지도 않고 기세가 무너져 달아나버렸다.

유금필이 신라 왕경에 도착하자 백성들은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모두가 성 밖으로 뛰쳐나와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대광을 뵈올 줄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대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어육(魚肉)과 같이 무참히 죽었을 것입니다.” 

하며 울었다. 

뿐만 아니라 유금필은 돌아오는 길에 신검군을 맞아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백제의 장수 일곱 명을 생포했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 또한 매우 많았으니 소식을 들은 태조는,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며 또 한번 감탄했고, 개선하는 그를 맞아 직접 대전에서 내려가 손을 부여잡을 정도로 기뻐했다.

승세를 잡고있던 고려는 이듬해인 934년. 

여세를 몰아 운주를 정벌하기 위해 태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자, 견훤 역시 갑사 (甲士) 5천 명을 뽑아 운주까지 와서는 전날 고려와 같이,

'두 나라 군사가 서로 싸우면 형세가 양쪽 모두에게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무지한 사졸들이 많이 죽고 다칠까 두렵소.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하는 게 옳을 것이오.

라며 화친을 제의했다. 그러자 태조는 장수들을 모아 의견을 물었는데, 

유금필은, 

"오늘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신들이 적을 쳐부수는 것을 보시옵소서!"

라고 한 뒤 곧장 정예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적병 3천명 이상을 살해, 혹은 사로잡고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사(醫師)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과 최필(崔弼)등을 생포해버린다.

곧 이 소문을 들은 웅진 이북 30여 성이 항복했고, 기세가 꺾인 백제는 내분에 휘말리게 되는데 고창전투에 이어 이 운주전투까지 대승을 거둔 고려는 비로소 통일의 주도권을 완전히 굳히게 된 것이다.

백제의 거듭된 패배와 설상가상의 내우외환. 거침없는 고려의 반격은 계속 되었다. 935년. 

태조는 전날 빼앗겼던 나주 일대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이 나주라는 곳이 기막힌 사연이 있는 땅이었다.

나주는 원래 백제의 땅이었다. 

그런데 태조가 궁예의 휘하에서 활약할 당시 강력한 수군을 키워 눈부신 전술로 나주를 점령해 백제 땅 한 구석에 태봉의 영지를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백제가 다시 강성해지자 나주는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지금 태조는 오랜 숙원이었던 그런 나주를 재탈환하고자 했다.

이 때 신하들은 또 한번 유금필을 천거했다.

하지만 태조는,

'그의 공적이 그 간 너무나 컸는데 짐이 어찌 또 한번 수고를 지키겠는가.'라며 망설였는데,

그러자 유금필은,

'신이 신하된 몸으로 어찌 국가의 큰 일을 감당치 않겠나이까.라며 다시 출정했다. 

감동한 태조는 그를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임명했고, 유금필은 전날 태조가 그러한 것처럼 수군을 이끌고 6년 동안 백제의 지배 영역이었던 나주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한다.

그 무렵 백제에서는, 견훤이 후계자로 장자 신검이 아닌 넸째 아들 금강을 선택하자,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다.

그러자 견훤은 유금필이 재탈한 백제의 옛 영토인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을 했는데, 유금필이 이들을 맞는 군을 통솔했다.

후백제의 창업주 견훤이 자신이 세운 백제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은 세계역사상 유일무이한 케이스였으며, 아버지 견훤을 몰아내고 용상에 앉은 신검은 고려와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는데.

이 전투가 곧 한국 역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규모로 꼽히는 후삼국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이다.( 一利川戰鬪 )

이때 고려군의 병력만 무려 8만7천5백명으로 약10만에 달하는 대군이 동원됐는데, 최후의 전쟁이니 만큼 긴 호족시대를 마무리하는 호족들의 총 연합군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유금필 또한 자신의 휘하에 있던 여진 소국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의 용병들로 구성된 9500기의 강하고 날렵한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 때 백제군의 규모는 정확하지가 않은데, 다만 삼국유사 견훤전에 따르면 병신(丙申; 936)년 정월. 견훤이 아들에게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

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백제의 병력이 결코 고려에 열세는 아니었을거라고 보여진다.

예로부터 곡창지대를 끼고있던 백제의 인구가 많았으니까 실제 배나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양측 모두 이 전투에 총력을 퍼부었으며, 후삼국 최후의 대격돌을 하게 된다.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라를 뺏겨 분통해하던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태조와 함께 직접 참전했고, 견훤을 본 백제의 장수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애술/효봉/명길 등이 견훤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신검이 중군에 있음을 알렸고, 곧 좌우중 삼군으로 중군을 맹렬히 공격하자 백제의 중군이 무너지니 장군과 포로로 잡은자가 3,200명, 죽인자가 5,700명이었다고 한다.

패퇴한 백제군은 황산으로 도주했지만 고려군의 추격을 받아 신검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항복한다. 

44년, 약 반백년을 번영했던 후백제는 이렇게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통일 제국 고려의 시대가 도래하게된 것이다.

태조와 함께 통일대업을 완수한 유금필 장군은 941년, 즉 태조가 붕어하기 2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했으며, 성종13년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고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딸은 태조의 아홉번째 비였던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며, 그녀와 태조사이 효목, 효은태자를 두었으나 효목은 승려가 되었고, 효은은 광종(光宗)에게 숙청당했다.

※ 태사(太師)란 예로부터 중국에서 황제의 고문 구실을 하는 삼공삼사 중 으뜸의 직위로 명예직에 해당.

유금필. 

그는 뛰어난 판단력과 무서운 용맹으로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날려 당시 백제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유금필이 참전한 전투에서 고려군은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만일 왕건에게 유금필이 없었다면, 결코 견훤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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