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임진왜란 조선군의 명운을 건 일전, 탄금대 전투
때는 1592년, 일본열도는 드디어 오랜기간 지속되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막이내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에 전국을 통일하면서 1인자로 떠올라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전국통일이후 승전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수들에게 영지로 나눠줄 땅이 더이상 일본열도엔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에 진쪽은 지는쪽대로 괴로웠겠지만, 승전한 도요토미 또한 부하들에게 영지를 하사해야 하는데 줄땅이 한뼘도 남아있지 않는 이 상황은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전국시대가 막 끝난 참이었기 때문에 모든 장수와 휘하 병력들은 모조리 숙련된 정예병들이었고, 이들 중에 누군가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경우 연쇄적으로 도요토미 진영에서 대규모 이탈, 또 다시 일본열도가 전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도요토미가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땅이 더 없으면 남의 나라 땅을 빼았아 주면 된다."
그 중 가장 좋은 먹잇감은 바로 이웃나라 '조선'이었고, 도요토미가 조선침공을 계획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질수 있었던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존재했다.
1. 왜군은 전국시대의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많은 병력이 숙련, 정예화 되어있었다.
서양으로부터 철포를 도입, 당시로썬 상당히 근대적인 병기였던 '조총'을 활용해서 전쟁을 수행했던 왜군들은 경험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상당히 진보된 상태였고 전국시대가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재무장 정책을 거칠 것없이 바로 전쟁에 투입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2. 반면 조선은 왜를 대비한 재무장 정책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으며, 조선육군의 주력은 북방군이었다.
이 당시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을 필두로, 일본에 대비해 전쟁준비, 재무장 정책을 주장하고 있던
[오늘날 율곡의 십만양병성은 사실 존재하지않았던 낭설이라고 주장하는 사학가들도있으니 참고바람.]
조정내 의견은 모조리 묵살당하고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조선육군의 주력은 '북방군' 이었다.
이유인 즉슨 한반도는 항상 중원대륙의 국가들로부터 침략당해왔던 역사를 겪어왔고, 그에 따라 국경을 사수해야했던 북방군은 잦은 전투경험으로 정예화된 강군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남쪽의 왜로부터의 침략에는 아무런 대비가 안 되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주력병력인 북방군이 뒤늦게 보고를 받고 남하해봐야 현실적으로 왜군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속전속결로 왜군이 수도 한양을 점령, 임금을 생포할경우 주력인 북방군과 단 한번의 전투도 치르지않고 전쟁을 끝낼수있었던 최적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위와같은 이유들로 왜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쳐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군의 교리에도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왜군의 동향이 심상치않다는 첩보를 받은 선조는 지상전 위주의 방위전략을 전군에 하달하는데, "왜군은 섬나라로써 해전에 강하지만 육지전에서는 나약한 오합지졸이므로, 왜군이 쳐들어올경우 수군은 가능한한 해상에서 방위를 시도하지말고 육지에서 제압하라." 라는 말도안되는 교리가 전달된 것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공문이 내려왔을때 조선수군 중 단 한 명의 장수만이 반발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육지와 바다의 전투가 다르고 육지와 바다를 수비하는 것 중 어느것 하나도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장계를 올려 간청하지만 이러한 이순신의 의견은 묵살당한다.
되려 이 일로인해 이순신은 유일하게 선조의 방침에 거부감을 표명한 장수로 지목되면서 미운털이 박히게된다.
그리고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선봉 제 1군이 부산진에 출현한다.
왜군은 절영도에 정박후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이니 길을 빌려 달라" 라고 통보하며 기만술을 펼치지만 이를 부하들로부터 통보받은 당시 부산 첨사였던 '정발' 이 거절하면서,
다음날인 4월 14일에 고니시 휘하의 1만 8,700여명에 달하는 1군 병력이 부산진에 총공격을 개시, 겨우 1천여명의 병력으로 항전해야했던 부산성 병력을 거의 전멸시키고 당일날 부산성을 점령하는것에 성공한다.
이때 부산첨사 정발은 극도로 불리한 상황속에서 왜군에 맞서싸우던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지만, 수도 한양으로 봉화를 올리는것까지 왜군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왜군의 침공사실이 조정에 닿지않게 된다.
[이때 정발이 사냥을 하기위해 성밖으로 놀러갔다가 당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며 정발이 부산성을 지키기위해 항전하던 끝에 전사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부산성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바로 다음날인 4월 15일, 왜군은 동래성에 공격을 개시한다.
이때 어마어마한 왜군의 군세를 보고 겁먹은 경상좌수영 박홍이 동래성을 버리고 혼자서 도주해버리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바닥을 찍었고, 반면 동래부사 송상현은 끝까지 동래성에 남아 왜군에 항전했지만 결국 전사하게 된다.
부산성과 마찬가지로 동래성 또한 공격개시 당일날 왜군이 점령하는 것에 성공한다.
정발, 송상현의 목숨을건 항전에도 불구하고 불과 이틀만에 부산일대가 왜군에게 장악당하면서 사흘뒤에야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된 수도 한양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부산성전투에서 언급되었듯이, 봉화가 저지당하면서 정보가 늦게 전달되었다.]
조정에선 이와중에도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말다툼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고, 어찌되었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서 왜군을 저지하기위한 방편의 물색에 나선다.
그에 따라 조선육군 최고의 엘리트 장군들을 중앙으로 소환하는데 그때 불려온것이 여진족 토벌전의 스타였던 이일 장군과,
조선 육군의 최정예, 북방군을 이끌던 신립장군이었다.
신립과 이일 두 장군은 조정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었고, 두 장군은 중앙으로 불려와 맞서 싸우게된 것이었다.
하지만 조정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조선육군의 상황은 심각하게 꼬여있었는데,
이 당시 조선육군의 전시체제는 이전의 '진관체제'를 버리고 '제승방략체제'로 운용되고 있었다.
제승방략체제는 다른지역에서 근무중이던 장군을 중앙으로 불러오는동안 집결지를 향해서 인근지역의 병력을 집결, 이후 중앙에서 내려온 장군이 집결해있는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구조였다.
게다가 조선육군중 북방군에게만 적용되어있는 특별한 조항이 있었는데, '북방의 장군은 휘하 북방군을 이끌고 중앙으로 내려올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 역사 자체가 북방으로 향했던 병력의 반란으로 시작했던만큼, 중앙을 향해 북방군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잠재적으로 반란 세력이될 경우 가장 무서운 존재였던 북방군에겐 저러한 족쇄가 묶여있었고, 따라서 신립은 조선이 자랑하는 최정예 북방군을 휘하에 두고도 홀몸으로 중앙에 내려와야만 했다.
안그래도 불리한 상황속에서 조선육군은 손발이 묶여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저러한 신립의 상황못지않게 이일 군의 상황 또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구로 출진해서 왜군에 대항하기로 결정되어 있던 이일은 제승방략체제에 따라 중앙으로 불려왔지만, 한양에서 사흘 내내 병사를 모았음에도 고작 '300명'이 모병되면서 시간만 크게 지체한채 조정의 재촉끝에 빈손으로 대구로 내려가야만했다.
하지만 이때 제승방략체제의 허점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대구에 집결해있던 병력들이 수 일을 기다려도 장군이 도착하지 않자 집결해있던 병력이 모두 뿔뿔히 흩어지면서 왜군에게 모조리 각개격파 당했고, 이일이 대구에 도착했을땐 이미 병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중앙에서 데려왔던 300명만으로 상주에서 고니시와 대면하게된 이일은 현실적으로 고니시군에 대항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한양으로 퇴각하게 된다.
제승방략체제의 허점으로 인해 대구에 집결해있던 수 많은 병력이 싸움도 제대로 못치뤄보고 공중분해되면서 한양에는 비상이 걸리게 된다.
이제 신립군만으로 왜군 군세를 모두 막아내야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신립은 각지에서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아 8000천여명의 병력을 간신히 모병하는데 성공했으나 왜군의 군세는 수만을 이루고 있었고, 그나마 8천명 중에서도 기병 2천과 소수의 보병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농민군인 오합지졸의 군대였다.
게다가 왜군의 선봉군은 고니시군 이외에 가토군까지 양방향으로 동시에 진격해오고 있었다.
신립은 둘중에 하나를 택해 고니시를 막든, 가토를 막든 그 동안 나머지 군이 한양을 기습, 점령해버리면 미래가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결국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립은 충주로 향해 고니시군을 격파하기로 결정한다.
신립은 조선육군의 주력병과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해야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었고, 충주성에서 버티며 공성전양상으로 갈 경우에는 기병전력을 제대로 써보지도못한채 패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함에 따라 성을 버리고 드넒은 평야로 진출해 야전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정한다.
조선육군의 명운을 건 일전인 탄금대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었다.
이때 이일은 신립에게 충주성을 버리고 한양에 병력을 집결시켜 조선군이 왜군보다 앞서고 있었던 화포전력을 최대한 활용해 수비전에 들어가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신립은 고작 1만도 되지않는 병력만으로 고니시, 가토군이 한양앞에서 합류하도록 내버려둔뒤 총공세를 펼치는 것을 막아내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한다.
이외에 문경새재의 바위를 방패삼아 궁병전력을 활용해 공성전을 치룰 경우 충분히 승산이있다는 종사관 김여물의 의견도 제기되었지만, 조선육군의 주력인 기병전력을 전혀 활용할 수 없다는 결점으로 인해 기각된다.
게다가 신립은 성을 버리고 탄금대평야를 전장으로 택하는 과감한 결단과 동시에 또 하나의 강수를 던지는데, 바로 '배수진'이었다.
급하게 여러지역에서 모인 8천명의 병사는 대부분이 농민군으로 오합지졸이었고, 그들이 도망갈 곳이 없는 배수진을 취함으로써 사생결단의 일전으로 승리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8천여명에 달하는 신립군이 야전으로 나와 배수진을 취하고 버티고있었기 때문에 고니시 또한 신립군을 우회, 그대로 뒤에 남겨두고 진격하기엔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립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탄금대 전투가 치뤄지기 직전, 장마철었던 탓에 탄금대 일대에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면서, 논밭과 평야는 비에젖어 기병을 운용하기 불리한 질척질척한 습지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탄금대 일대가 습지로 변해버리면서 당초 기병의 운용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오판이 되었고, 이러한 지형적변화를 신립이 감지하지 못하면서 조선육군에겐 암운이 드리워지게 된다.
한편 이러한 신립군의 동향을 적극적인 척후병의 운용을 통해서 파악한 고니시는 군세를 중군, 우군, 좌군 3개로 쪼갠뒤 자신의 중군을 이끌고 바로 빈집인 충주성을 공격,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좌군은 강가를 따라 탄금대로 진출시키며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진출하게 했다.
사실 이때 신립군의 척후병중에는 이러한 고니시군의 이동을 포착, 보고한 병사가 있었지만 신립이 이를 믿지않고 무시하는 오판을 하면서 두 눈뜨고 충주성을 뺏긴 것이었다.
충주성에 공격이 개시되는 순간까지 사실을 알지못했던 신립은 뒤늦게야 충주성으로 향했었지만 이미 왜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말을 돌려야만 했었다.
결국 군세를 3개로 쪼개서 진군하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 고니시군은 상당한 이득을 봤고, 이제 신립은 충주성을 빼앗긴채로 도망칠곳도 없는 배수진에서 결전에 임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
4월 24일, 고니시군의 군세와 맞닥뜨린 신립군은 기병을 앞세워 돌격을 개시, 드디어 탄금대 전투가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승전을 거듭하던 고니시는 예상과 달리 신립군을 맞이해 크게 당황하게 된다.
당초 소나기로 인해 탄금대가 습지화되면서 조선기병의 운용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고 신립군의 기병들이 왜군의 진형을 격파, 도륙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당시 왜군의 주력은 조총병이었고, 당연히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메인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흔히들 임진왜란에서 막강한 병기였다고 평가하는 조총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는데,
1. 당시의 화약병기, 특히나 철포는 위력은 강력했지만 명중률이 굉장히 낮았다.
2. 당시의 화약병기들은 연사력 또한 굉장히 떨어졌기 때문에 첫공격이 빗나가면 재장전이 오래걸렸다.
흔히들 신립이 조총의 성능을 무시하고, 그로 인해 패전한 무능한 장수로 알고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달랐다.
오히려 그는 화약병기의 위력과 장단점을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는 장수였고, 실제로 그는 북방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화포전력을 적극 활용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대승했던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왜군의 조총병을 파훼하기 위해 기병운용법에 미묘한 변화를 주는데,
신립은 기병간 간격을 최대한 벌리며 돌격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위에 설명된것처럼 당시의 조총은 명중률이 낮았기 때문에 특정지역을 향해 집중사격, 집중적인 화망을 조성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는 병기였다.
따라서 신립은 기병간 간격을 넒혀서 기병이 조총에 피탄당할 확률을 줄이는데 성공했고, 간혹 화망에 걸려 조총에 피탄당한 말들이 쓰러지더라도 간격을 넒혀놓았던 덕에 앞에서 쓰러진 기병이 뒤에서 오고있던 병력과 충돌하는 사태까지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게다가 조선기병은 근접 창, 검술만을 사용하는 일본기병들과 달리 북방민족들의 잦은 침략을 겪어오면서 그들과 똑같이 '마상궁술'을 사용 가능했었고,
조선육군이 사용하고 있었던 '각궁'의 경우엔 당시의 낮은 공업 기술력으로 생산되었던 '조총'과 비교했을때, 관통력은 조총보다 떨어졌지만 사거리는 오히려 우세했었다.
따라서 신립의 기병들은 정면으로 발사되는 조총의 화망을 피하면서 기병의 기동성과 각궁의 사거리를 활용한 기동전을 펼침으로써 왜의 조총병들을 손쉽게 제압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기병의 돌격이라는 뻔한 고전 전술에도 불구하고 예상치못한 피해를 입으면서 적지않은 충격에 빠진다.
탄금대전투가 개시된 후, 1차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2차 전투에서도 또 패배하면서 신립과 그 휘하의 조선기병의 막강한 저력을 실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본토에서 전국시대를 겪어오며 기병을 활용한 조총병 격파는 이미 수없이 많이 겪어왔던 케이스였고, 왜의 장수들에겐 그에 대한 해법 또한 충분히 대비가 되어있었다.
당연히 고니시는 그대로 무너지지않고 이번엔 신립의 기병에 대한 파훼법을 명령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밑밥으로 고니시는 '일부러 소수의 병력'을 미끼로 전진배치시킨다.
탄금대 전투가 시작된 이후 2차례의 전투에서 연속해서 이긴 신립군은 탄력이 붙어있었다.
조선기병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진형이 무너지는 왜군을 본 병사들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이 와중에 고니시의 병력중 일부가 낙오되있는 것을 목격한 신립군은 그대로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한다.
신립의 기병대가 또 다시 왜군을 유린하러 돌진하고있었지만 이것은 고니시의 함정이었다.
처음에는 위와 같은 형태로 신립의 기병대가 왜군의 미끼부대를 향하고 있었지만,
기병대가 미끼부대를 물은 순간 갑자기 고니시의 조총부대가 기병대의 좌익과 우익 양쪽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탄금대엔 평야뿐만이 아니라 논밭도 존재했고, 그로 인해 조총부대가 숨을만한 장소가 충분했었다.
정면으로 화망을 조성했던 1, 2차전투와달리 기병대의 양쪽 측면을 향해 순간적으로 집중적인 조총 화망이 구성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의 조총세례를 받은 기병대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이 일전으로 인해 신립의 주력이었던 기병대가 전멸하면서 유리하게 이끌어왔던 전세가 한번에 역전당하고,
기병대의 전멸소식을 들은 신립은 하늘이 노래졌다.
충주성을 빼앗겼기 때문에 신립에겐 더 이상 도망칠 성조차 없었고, 거기에 배수진을 취하고있었기 때문에 퇴로 또한 없었다.
이로 인해 배수진이라는 극단적인 진법을 택했던 신립의 판단은 악수가된 것이다.
적의 주력인 기병전력을 전멸시킨 왜군은 신립군 진지를 포위하며 대다수가 농민군으로 구성되어있던 신립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배수진으로 인해 도망갈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탄금대 전투는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고, 코앞까지 들이닥친 왜군에 맞서싸우던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살고자 하는가?"
그러자 김여물이 답했다.
"내 어찌 살고자 하겠소."
신립과 김여물은 서로 씁쓸한 미소를 띄었고, 왜군에 맞서 싸우던 끝에 둘 다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탄금대 전투로 인해 수도방위의 최종보루였던 신립군 8천명이 전멸하면서 중부~남부지방의 조선육군에 결정타를 입혔다.
조정에서 '아직은 해볼만 하다' 라고 생각되고 있었던 임진왜란의 전세가 왜에게 순식간에 기울어버리는 분수령이 되었고,
탄금대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선조는 조정과 백성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왕조로써는 최초로 수도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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