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진 귀족들로 인해 망했던 나라, 폴란드
폴란드는 근대까지 유럽을 호령한 엄청난 강대국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러시아를 공격해 모스크바를 점령했던 국가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고 해야겠지만, 현재 폴란드의 영토는 전성기 시대의 1/4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폴란드는 강대국의 괴롭힘이 아닌, 내부 사정으로 완전히 쇠락해버린 나라이다.
폴란드의 역사는 우선 마이에쉬코(Mieszko)라는 사람이 현재 폴란드의 중부쯤에 있는 그니에즈노라는 곳에 도시를 하나 세운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마이에쉬코 본인은 나라를 건국할 생각이 아니었겠지만, 거기가 살만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이 마구 몰렸다.
그니에즈노시는 마구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커지다 보니 어느 순간 국가가 되어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폴란드는 별볼일 없는 국가였다. 애초에 동유럽은 유럽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도 하고 말이었다.
그당시 동유럽은,
몽골의 침략으로 말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한편, 리투아니아는 경쟁자였던 러시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러시아가 약해지자 군사를 일으켜 러시아 영토를 엄청나게 잠식해 들어갔던 것이다.
Grand duchy of Lithuania.
리투아니아 대공국.
글자 그대로의 실력을 가진 나라였다.
현재 리투아니아는 예전 영토의 1/15도 안되지만, 과거엔 엄청나게 잘나갔던 국가였다.
하여튼 폴란드 이야기로 돌아가서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쉬 3세는 자식을 남기지 못해 폴란드의 왕위가 끊길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폴란드의 귀족들은 현재 한참 잘나가는 리투아니아 공국의 수장을 현재 폴란드의 요기엘라 공주와 결혼시키고, 그를 폴란드의 군주로 모시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리투아니아 대공에게 제안했다.
그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인 브와디슬라프(Władysław)는 이에 승낙하며 폴란드와 합치게 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연합왕국이 결성되었다.
그당시 리투아니아 대공의 성은 야기에우워(Jagiełłon)이었으며, 야기에우워 왕조라고 불렸다.
(Jagiełłon : 폴란드식으로 읽으면 야기엘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야기엘론 왕조로 더 많이 알려져있음.)
일단 리투아니아 대공을 중심으로 세워진 왕조라 이 글에서는 야기에우워라고 칭하는게 맞을 것이다.
리투아니아어로 야기에우워이니 말이다.
하여튼 그렇게 거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 생성되었다.
그 후로 폴란드는 정적이었던 튜턴 기사단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제압해버리고 종속키게되며, 명실공히 동유럽의 최강의 패자가 되었다.
근데 말 그대로 폴란드가 바보도 아니고 리투아니아에게 너 우리 왕 해라 하면서 왕자리를 바쳤을 이유는 없었다.
폴란드로써도 리투아니아를 흡수하려는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이지만 사실상 폴란드의 지배관계나 다름없었다.
지그문트 2세(1548~1572) 시대에는 리투아니아의 특권 자체를 폐지하고 아예 연방에 합병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 전에는 사실 그냥 비슷한 동군연합의 개념이었지만 이제 정책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고, 지그문트 2세때 모든 도량형과 헌법을 폴란드 기준으로 통일시키고 리투아니아인의 특권을 빼았았다.
그리고 리투아니아 영토도 행정구역을 폴란드 임의로 나누어 폴란드 아래로 두었으며, 리투아니아인의 정치 참여도 일부 제한했다.
말 그대로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에 합병당한거나 다름없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엄청나게 반발했지만, 이미 늦은 후 였다.
공식 문서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라고 쓰는게 아니라, 그냥 폴란드 라고 쓸 정도였다.
나중에 폴-리 연합이 망해 열강들에게 분열될 당시, 리투아니아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아니고 폴란드라고 써져있으니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실제 아무런 권력도 없었다고 했지만, 분할되어 타 열강들에게 합병되어 버린다.
그런데 착취가 나름 심했던지 현대에서도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폴란드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는 못하다고 한다.
하여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폴란드의 귀족의회 세임(Sejm)이었다.
폴란드 귀족들로 이루어진 이 세임은 리투아니아를 사사건건 방해하며 폴란드인의 권리를 내세우게 만들었다.
결국 너무나 강력해진 이 세임은 왕을 세습제가 아닌 선거제로 만들어버렸는데, 이는 유럽역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들은 세가지 권리를 왕으로부터 얻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팍타 콘벤타(Pacta Conventa) : 왕은 의회를 건들 수 없다.
리베룸 베토(Liberum Veto) : 의회는 왕에대한 무제한 거부권을 가진다.
콘페데라치아(Konfederachja) : 의회가 무엇을 하던 그 무슨 단체를 결성하던 왕은 그것에 관여할수 없다.
왕이 이 세가지를 제한할 경우 의회는 왕권에 대한 군사적 타격권을 가진다, 말 그대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건이었지만 이것이 폴란드 자체의 목줄을 죄게 될줄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만은, 이것만 보아도 왕이 무엇을 할수가 없었다.
특히 리베룸 베토. 무제한 거부권을 가진다는것은, 다시말해 왕이 무슨 정책을 하려고 하면 모든 귀족들에 대한 만장일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왕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고, 모든것은 의회의 손에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왕까지 신물이 나서 폴란드 왕 자리를 사퇴할 정도였는데, 폴란드의 왕이었던 헨리크가 바로 그다.
그는 프랑스의 앙쥬 백작으로써 폴란드 왕 후보로 뽑혀서 폴란드 왕까지 된것은 좋았는데, 알다시피 폴란드에서는 뭘 해먹을수가 없는 구조였던 것이었다.
결국 폴란드의 왕이었던 헨리크 발레지 왕의 자리를 버리고 프랑스로 도망갔다.
세임은 화가 나서 그를 추격했으나, 길고 긴 추격전 끝에 그는 프랑스로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왕이 그냥 왕의 자리를 버릴 정도로 폴란드는 뭔가를 할 수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헨리크. 프랑스어로는 앙리.
그래도 야심은 상당히 넘치는 사람이라 프랑스로 도망간 이후 여차저차 해서 프랑스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던 중, 폴란드 국왕이 세임을 패닉에 빠뜨려버린 사건도 나오게 된다.
폴란드는 말 그대로 선거로 왕을 선출하였으며, 사실 딱히 후보가 누구건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종종 외국인이 당선되기도 했었는데, 아까 말한 프랑스의 앙주 공이나 독일의 작센공등도 왕이 되기는 했고 말이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의 왕족인 바사(Vasa) 가문 출신인데, 폴란드에 취임한 그는 스웨덴을 폴란드에 종속시키길 원했으며 세임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 스스로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해버린다.
세임은 패닉에 빠졌고, 스웨덴의 군대는 밀물같이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긴 공방전이 있었으며, 폴란드는 패했고 발트 지방을 스위덴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패한 폴란드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대홍수(Potop)라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반란이었다.
그 시대에는 우크라이나가 아닌 루테니아라고 불렸지만, 전쟁에서 막 패한 폴란드로서는 루테니아의 반란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지방을 상실해 버렸으며, 러시아가 그 반란이 일어난 곳에 치고들어와 점령하고는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켜 버린다.
앞서 내용은 암울했지만, 그 이전 나름 중흥기가 나오는데, 헨리크가 프랑스로 도망간 이후, 다음 왕이 된 사람이 트란실바니니아 공국의 공작인 스테판 바토리이다.
이 사람은 폴란드 근대화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꽤나 큰 업적을 발휘했다.
바토리 하니까 뭔가 알아챈 사람도 있겠지만, 수천명의 처녀를 죽여서 그 피로 목욕을 한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삼촌이다.
세임이 왕을 외국인들도 뽑는 궁극적인 목적은 선거니까 만인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발상은 물론 아니었으며, 외국의 권세를 이용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세임들이 선거왕제로 만든 것과 외국인들을 뽑는 이유는 바로 왕권의 약화였다.
첫번째 이유로는 바로 외국인들의 언어적 문제였다.
영국의 조지 1세가 가장 큰 예시인데, 영국의 왕실의 후계자가 없어서 그나마 피가 닿아있던 독일 하노버 공국의 공작이었던 조지가 영국으로 초청되어 영국 국왕이 되었다.
조지 1세는 순수 독일인이라 영어를 못하였으며, 이에 정책이고 뭐고 내릴수가 없어 모든 업무를 의회에 맡겼다.
세임도 이와 같은 이유 중 하나로 외국인들을 왕으로 뽑았던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애국심이 약한 외국인의 특성에 있었다.
폴란드의 왕이라고 해도 그들은 외국인이었다.
자식에게 세습할수도 없고, 선거제 특성상 임기 끝나면 왕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폴란드에 애착을 느낄 이유 자체가 없었다.
그냥 세임에게 다 맡겨놓고 놀고먹는데만 집중했었다.
그런데 스테판 바토리는 달랐던게 외국 왕으로써 폴란드에 애착을 다 했었다.
세임의 반대를 무릅쓰고, 폴란드의 군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바토리 이전의 폴란드 기병은 갑옷 자체가 없어서 돌격 능력이 없었으며, 그냥 말 덕분에 빨리 이동할수있는 육군 보병대 정도 수준이었다.
사실 폴란드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강력한 리투아니아를 흡수했어도, 세임이 워낙 군권에 대한 통제를 강하게 하고 있어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폴란드군 개혁에 세임들이 결사 반대를 하자, 그는 고향인 트란실바니아의 개인 재산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특히, 가장 크게 신경썼던 것이 갑옷이었다.
기병대 위주로 갑옷을 지급했는데, 이는 폴란드의 상징 윙드 후사르가 된다.
즉, 윙드 후사르를 창설한게 바로 스테판 바토리이다.
거의 바토리의 본인 사비로 만든 부대였다.
러시아에서 이반 뇌제가 아들을 때려죽이는 실정을 저지르고 있을 무렵, 바토리의 폴란드는 계속 러시아로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의 주요 도시였던 프스코프를 쑥대밭은 만들고, 저시아는 위기에 빠져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바토리도 점차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데, 자신이 죽게되면 다시 세임에게 모든 권력이 돌아가는걸 걱정했어.
그래서, 자신의 사후 폴란드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는 그당시 자신의 부관이었던 얀 소비에스키에게 자신의 지지층을 넘겨주고 은퇴해버렸다.
지지층을 얻은 소비에스키는 선거에 출마했다.
세임의 강력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어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치세를 쌓았는데, 그는 바토리와 더불어 국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세임들은 그를 끊임없이 견제했다.
그가 지신의 사람을 만들면, 세임쪽에서 회유해버리고, 회유가 안된다면 암살까지 해가며, 완전히 그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무슨 정책을 시도하려고 하면, 계속 훼방을 놓으며 왕을 실각시키는데에만 몰두했다.
소비에스키가 나이를 먹어서 약해질수록 세임의 견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소비에스키도 어쩔수 없었는데, 자신의 편이 없는 이상 폴란드를 지키려면 바토리시절부터 이어져 온 권력을 누군가에게 이양해야 하는데 자신의 손발이 세임에 의해 모두 잘려나가 버린 후였다.
남은것은 자신의 아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거왕제에서 세습왕제로 법을 바꾸려 했다.
그는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지지를 받고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게, 세임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었다.
세임들은 그의 아내인 마리아를 매수했다.
바로 바람이 나게 만든 것이었다.
얀 소비에스키는 원정으로 인해 폴란드를 자주 떠났으며, 그가 없을때 세임들은 선물공세와 미청년을 골라 계속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결국 결실을 맺어 그녀는 남편을 배신하게 되는데, 공석에 나가 자신의 아들을 다음 왕으로 만드는것을 반대해버렸다.
아들이었던 야쿠프로써도 충격이 엄청나게 컸고, 다시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 어머니는 다른남자랑 바람이 나 잘 살고 있었지만 말이지만.
하여튼 기나긴 권력 투쟁은 세임의 승리로 끝나고 폴란드는 완전히 세임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
그 이후 폴란드는 카오스 상태가 되어버린다.
경제는 붕괴되었고, 지방에선 매일 반란이 일어났고, 세임은 한층 더 왕권을 탄압하려 했고, 공석인 폴란드의 왕위를 노리고 세계 각국의 국가들이 몰려들어 자신의 가문을 폴란드의 왕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바토리와 소비에스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던 러시아는 폴란드가 내홍을 치르는 동안 점차 폴란드 영토내로 진격을 해왔다.
왕권을 장악한 세임들은 한술 더 떠, 자신들끼리 왕이 되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결국 폴란드 유명 귀족인 Stanisław Leszczyński, 스타니스와프 레진스키가 왕이 되었다.
세력을 키우던 러시아는 이제 폴란드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에 엄청나게 로비를 하는데, 이게 결국 결실을 맺어 폴란드 내의 대표적인 친 러시아 세력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Poniapowski)가 레진스키를 몰아내고 국왕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당선되고 보니 포니아토프스키는 말 그대로 러시아의 기대를 배반했다.
러시아에 웅크렸던건 말 그대로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고, 왕이 되자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주도적으로 정치를 해 내갔던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러시아로서도 폴란드는 넘어야 할 적이었고, 국왕 선거는 그냥 한번 기대감에 로비만 해 본 것이었다.
폴란드는 오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였다.
오랜 동맹국으로서 폴란드 내부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더 이상 폴란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에게 다 넘겨줄 바에야 폴란드에 대한 지분을 확보하자는 판단이었다.
이후 프로이센도 함께 뛰어들어 폴란드를 잠식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말 그대로 두들겨패버리고는, 폴란드를 분할해버리고는 점령해버린다.
그리고 분할이 완료된 1795년, 폴란드의 시계는 멈춰 버리고 말았다.
3차례에 걸친 분할이 끝난 이후 폴란드라는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폴란드의 쇠락 원인을 귀족과 왕의 왕권 대립문제라고 본다.
의회라는게 애초에 영국처럼 절대 왕권 휘하에서의 의회정이 정착된것도 아닌 선거군주제였고 왕 입장에서도 임기끝나면 자신들과 아무관계도 없는 폴란드에 애착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특히 외국인 입장에서 국왕이 된 경우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지방정권의 통제가 부실했고, 마찬가지로 리투아니아를 너무 천대했던것도 큰 원인이었어.
타 귀족들이 커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세임들이 견제를 했는데다가, 왕권은 땅에 곤두박칠쳐서 지방에 큰 통제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 후 독일이 1차대전에 패해 폴란드를 놓아줄때까지 폴란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때 화려했던 폴란드의 역사는 그렇게 1795년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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