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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영역 확장 과정

일본 제국, 그것은 일본인 고유의 파시즘과 민족주의로 만들어진 거대한 악마와도 같은 제국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일본이 개항되면서 일본은 서양의 여러 문화들을 받아들이고 군사와 교육, 정치 부문도 근대적으로 개혁시켰다.

그리고 정식적인 일본 제국 출범과 함께 일본은 대외적 침략에 나서 류큐와 요동, 타이완을 병탄하고 한국까지 병탄하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본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호황기를 거치면서(말년에는 경제적 침체) 일본의 산업은 고도로 발달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 체제의 강화와 함께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전쟁을 확전하여 아시아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일본 제국 기병의 그림(노기 마레스케 장군)

이 본문은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 과정이나 전쟁에 관한 것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글이 아니다.

글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의 대립"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편의 유익한 글이 될 수 있도록 일본 제국이 겪었던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도 조금 자세히 다루면서 제국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다루고자 한다.

쇼와 14년(1939) 히로히토 일왕의 일본 제국 육군 사열식(열병식)
1940년경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제국 기병의 훈련 모습
중일 전쟁에서 중국군 벙커를 점령하고 환호하는 일본 육군
뉴기니아, 코코다 비행장 점령 전투에서 칼을 들고 대기하는 하츠오 츠카모토 중좌
뉴기니아 부나 해변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들

일본 제국 육군은 1870년 1만 2천 명 수준에서 시작하여 1900년대에는 12개 사단으로 38만 명으로 증강하였다.

그리고 1941년에는 41개 사단에서 46만 명이 복무했는데, 여기서 12개 사단은 거대하고 광활한 만주 전선에서, 27개 사단은 중국 전선에서 주둔했다.

1945년에는 145개 사단으로 증강하여 육군 병력만 400만 명 이상 증가하였으며, 2차 세계 대전에서 제국 육군 150만 6천 명이 전사하였다.

일본 제국 육군은 점점 갈수록 병력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제국이 점점 거대해지면서 전선이 넓어지고 싸워야 할 상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전선을 유지하기에는 제국 재정으로는 어림도 없었으며,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수탈하고 고혈을 짜내버렸다.

1920년경에는 별 다른 거대한 전쟁은 없었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 후반기에 일본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를 돌파하기 위해 여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일으켜 일본은 거대한 전선을 상대로 '보이는 적',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중국 게릴라)'과 싸워야만 했다.

자연히 육군 병력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본토의 일본인만 충당한 것이 아니라 선량한 한국인과 현지 백성과 원주민까지 충원했으므로 병력은 거대해졌다.

1937년 남경(南京) 외곽에서 남경(南京) 시내로 포격하는 일본군 포병 [중일 전쟁]
일본 제국 해군의 복식

모두가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일본은 섬나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물론 식민지 확장 과정을 통해서 섬나라만이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 일부를 획득하기는 하였지만, 대본영을 비롯한 일본의 지휘는 섬 본토에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본토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한 태평양 전쟁 초전에서 획득한 태평양 지역의 해상 방위권을 지키기 위해서 해군 육성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심하여 육군과 해군의 합동 작전이 치루어진 것은 과달카날 전투,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레이테 만 해전 뿐이었다.

당시 일본은 육군의 숫자가 해군보다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육군에 대한 복지 비용이 상당히 적었다.

당연히 해군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해군에 대한 복지가 잘 돌아갔으며, 이로 인해 육군은 해군에 비해 여러 박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 막부 해군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신정부에 흡수되었으며, 1870년에는 독자적인 해군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876년에는 일본해군병학교가 세워지고 해군 양성을 체계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해군 육전대'도 많이 들어봤을 것인데, 이것은 해병대 기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해군 항공대'도 있는데,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은 2,900대 가량의 항공기를 운용하였다.

참고로 일본은 1944년 6월에 항공기 생산이 절정에 달하면서 6월에만 2,857대를 생산하였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일본의 군수 시설이 파괴되면서, 항공기 생산률은 크게 감소하였으며, 전쟁 내내 누적 총합으로 62,795대의 항공기를 생산하였지만, 전쟁 기간 동안 52,190대를 잃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 해군은 20척의 항공 모함을 생산하여 운용했지만, 전쟁 기간 동안 미군에 의해 16척이 파괴되었다.

필리핀 전선에서 죽어가는 말에게 물을 주고 있는 일본군 보병(1942)
러일 전쟁 때 노기 마레스케 장군
일본군 전사자들의 시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러시아군 [러일 전쟁]
실종된 부하를 찾다가 산화한 해군 지휘관, 히로세 타케오

러일 전쟁 당시 요동과 동해,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일본 육군과 러시아 육군의 전투, 일본 해군과 러시아 해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러일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던 1904년, 러시아군이 주둔한 뤼순항을 향해 군대를 진군하고 있었던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육군 제3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3곳의 공격 목표를 설정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203고지였다.

하지만 그 전에 일본 해군이 뤼순항을 정찰하고 취약 지점을 잘 파악해서 노기 마레스케 장군에게 전달하였지만,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해군의 말을 묵살하고 203고지를 향한 대대적인 공격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헌데 203고지는 러시아군이 강력하게 방어선을 친 곳이었으며, 고지 위에는 러시아군의 맥심 기관총과 대포가 산재해 있었다.

맥심 기관총

일본 해군 정찰대가 러시아군의 방비가 매우 부족한 지점을 발견해 육군에게 전달했지만, 육군은 고집을 꺾지 않고 203고지를 향한 공격을 개시한다.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총검 돌격을 감행하였으며, 일선에서 지휘관은 칼을 뽑아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콘크리트 방어벽을 형성하여 위에서 맥심 기관총을 갈겨대는 러시아군에 의해 일본군은 추풍낙엽처럼 갈려져 나갔으며, 1차 초전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게 된다.

현장 일본군 참모진들은 280mm 해안포를 배치하여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였지만, 이지치 코우스케 소장은 해안포 배치를 반대하였다.

다만 상부에 추가 병력만을 요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코우스케 소장의 독촉에 의해 상부는 추가 병력을 파견하였지만, 이 역시 계속된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에 의해 280mm 해안포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포병대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된 총검 돌격으로 인해 일본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격노한 코타마 겐타로우 대장은 이지치의 지휘권을 환수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203고지를 점령에 성공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 육군이 고지 점령에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203고지에서 착검 돌격하다가 갈려나가는 일본군
203고지 점령에 성공하는 일본군(오른쪽 작은 그림은 항복하는 러시아군 장군)

203고지 전투에서의 잘못된 착검 돌격 명령으로 인해 일본군은 3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전투로 인해 3만 명의 일본군이 사망하면서, 전투가 끝나고 가족을 잃은 일본인 유족들이 노기 마레스케 장군에게 잡아먹을 듯 달려들어 항의하였다.

그러나 노기 마레스케도 이 전투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에 전사한 일본군 유족들이 그냥 지나쳤다는 카더라도 있지만, 아무튼 해군 정찰대가 러시아군의 취약 지점을 파악해서 육군에게 알렸음에도 이를 듣지 않는 것은 당시 일본 육군과 해군의 암묵적인 대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203고지에서의 많은 사상자는 무엇보다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바보짓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노기 마레스케는 수많은 젊은이를 죽인 책임을 인지하고 할복할려고 하였지만, 메이지 일왕이 자신이 죽기 전에는 안된다서 만류하였고, 1912년 메이지 일왕이 저세상으로 떠나자 노기 마레스케는 부인과 함께 자살하였다.

한 가지 추가적인 일화로는 당시 유럽의 여러 기자들은 러시아군 포로들을 신사적으로 대우한 노기 마레스케를 칭찬했다고 한다.

사토 테츠타로(1866~1942), 일본 제국 해군 중장, 귀족원 의원, 황태자 해군 교관 역임

아무튼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은 승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 세력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의 승리와 함께 일본은 국제 정치적 위상이 한층 격상되었다.

따라서 향후 일본이 취해야 할 외교 및 군사 정책과 국가 방위 전략의 방향성에 있어서 일본의 정치적 위상의 격상은 중대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지적하는 바이지만, 일본 제국사에 있어서 일본의 러일 전쟁 승리는 제국 전체의 역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확실히 독이 되었다.

왜냐하면 러일 전쟁 이전까지는 일본 군부의 기본적인 입장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며 한반도 등에서 일본의 권익을 확보하자는 수세적 전략이었지만, 러일 전쟁에서 자신보다 체급이 큰 러시아군을 격파했다는 그 승전의 자신감은 일본군의 대규모 군비 확장을 동반케 하는 악요인이 되었다.

러일 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은 대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본 제국 국방에 있어서 '공세적 방침'을 굳히게 하는 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육군 수뇌부의 '공세적 대륙 전략론'이었으며, 이것이 일왕에게 보고됨에 따라 일본 제국은 '제국국방방침'을 정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의 일본군의 팽창 역사는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가 지적한 것처럼,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달리는 여우'가 잘 표현해주는 문구라고 생각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관(진주만 기습 지휘)

아무튼 일본 제국 육군 수뇌부의 '대륙 전략론'에 따라 일본은 육군에 대해서 군사력을 증대하고 군비를 할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토 테츠타로라는 해군 사령관은 육군의 군사 전략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무엇보다도 '육상 중심의 방위'보다는, 일본 제국의 국가 방위 안전 보장 수단으로서 '해상 중심의 방위'가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본의 방위는 본질적으로 해양의 문제이며, 일본이 취해야 할 최우선적 전략이란 해상으로 일본에 접근하는 적을 격퇴시키는 것입니다."

즉 일본 제국의 국방에 있어서 해군이 육군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사토 테츠타로는 국방의 실제적 의무는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고 통상 무역을 보호 확장하며, 적군을 제국 경계 내에 들여놓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무력 증강을 하는 것만이 육군이 주장하는 군비 확충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타방을 침략하고 제국의 강성함을 자랑하는 것은 군비의 목적이 아니다. (중략) 만세불역의 국체를 옹호하고 타방의 주시를 피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국가의 이원을 보호하고 이로써 성대(태평성대)를 촉진하고 위업을 천하에 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국 군비의 목적이다." - 사토 테츠타로 "제국 국방사론" p29

사토 테츠타로는 육군의 '타국 침략(대륙 침략)'과 '공세적 공격 전략'보다는, 자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군비 확장을 우선적으로 두었으며, 따라서 제국의 본토를 지키기 위한 해군 양성을 육군 양성보다 우선시하여 해군의 역량을 키우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육군 수뇌부는 사토 테츠타로의 '해군 중심론'에 반대하였으며, 일본 제국이 만세의 태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공세적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제국의 군사 전략 및 군비 결정과 관련해서도 당시 일본은 육군과 해군의 이견 대립과 마찰이 있어왔다.

군대를 사열하는 쇼와 일왕
일본 제국 육군 보병

한편 1936년(쇼와 11년) 2월 26일에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1천 5백여 명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켰다(2.26 사건).

황도파는 일본 육군의 청년 장교 파벌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 청년 장교들은 일본 정부의 중신들이 일왕을 등에 업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의 고관들을 살해한 뒤, 쇼와(히로히토) 일왕에게 권력을 환수하는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황도파와 대립하는 '통제파'도 있었다.

'통제파'의 주요 입장은 '정치는 정치인이, 군대는 군인에게'였으며, 1935년에는 황도파 숙청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황도파 청년 장교는 통제파의 이러한 일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제국 근위 보병 제3 연대, 보병 제1 연대, 보병 제3 연대, 야전 중포병 제7 연대가 주력군이 되고 자신들이 살해할 고위 관료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어서 1936년 2월 26일에 도쿄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령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도쿄 관청 일대를 점령한 장교들

당시 오카다 총리는 총리 관저에 있었는데, 반란군이 엄습하자 오카다는 즉시 숨었으며, 경찰 4명이 권총으로 반란군을 사살하였다.

한편 오카다의 경호 담당인 마츠오가 나가자 반란군은 마츠오를 오카다로 오인하여 살해하였다.

반란군은 다카하시의 저택을 기습하여 경찰을 제압하고 장칼(일본도)로 다카하시를 찔러 살해하였다.

그리고 반란군은 사이토 마코토에게 47발의 총을 발사하여 살해하였다.

사이토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접근하여 지키고 있다가 반란군이 그것을 보고 일본도로 사지를 자르는 토막 살해 행각을 벌였다.

"투항하라!" / 일본 군부

일본 군부는 반란군에게 투항하라고 하였으며, 일본 군부는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2만 4천여 명의 군인을 투입하고자 계획하였다.

반란군은 군부의 투항 명령에 반대하면서 계속해서 일왕에게 권력을 환수하고 일왕이 직접 통치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정작 일왕은 반란군들에게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란을 주도한 청년 장교들 휘하의 부사관과 병사들은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으며, 결국 이들은 투항했다.

반란을 주도했던 노나카 시로 대위와 안도 대위는 자결하였으며,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그해 현역 장교 16명은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집행되었으며, 민간인 6명도 동시에 처형되었다.

2.26 사건 과정에서 육군 제1 근위 사단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해군 출신 정치가들을 마구 암살하자,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은 쿠데타 세력의 정확한 소속을 인지하지 못하고 육군의 조직적인 음모 및 계락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 해군은 본토의 중심인 도쿄에 함포 사격을 가하고자 하였으며, 해군 육전대를 동원하여 시가전을 벌일 계획까지 세웠었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반란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면서 반란은 더 이상 확전되지 않았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일본 해군의 명장), 미드웨이 해전(1942) 지휘, 미국 육군 항공대의 P-38 라이트닝 편대에 격추되어 전사(1943)

당시 일본 해군의 명장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해군 항공대 육성과 이와 관련한 전술 능력 함양에 힘을 쏟았다.

우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 유학파였으며, 주미 일본 대사관 무관 근무 시절에 미국이 얼마나 막강한 대국인지 직접 체득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하자는 육군 수뇌부와는 다르게, 유학 경험이 있었던 그로써는 미국과의 전쟁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육군 사령관 중에서 미국 유학파인 쿠리바야시 장군이 미국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 직접 체득하고 지금까지 일본 보병의 전략을 바꾸어,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에게 엄청난 피해(2만의 미군 사상자)를 안겨주기도 하였지만, 이 사람 역시 미국 유학파 출신인지라 무능한 당시 일본 육군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전략 전술을 짜놓아 일본 해군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당시 도조 히데키를 거두로 하는 친독(친독일) 육군 강경파는 미국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쓰미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의 일본 제국 해군 3인방으로 대표되는 친영미파는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하였다.

'친영미파'라고 해서 일본 해군 전체가 영국과 미국을 좋아했다는 뜻이 아니고, 영국과 미국과의 전쟁을 되도록이면 피하자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해군 내에서도 미국에 대해서 배척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제국 해군 지휘관들도 많았는데, 아무튼 미국과의 전쟁을 둘러싸고 육군과 해군은 대립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해군에게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육군 지휘관들은 해군 지휘관들에게 강력한 압박과 협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고노에 수상이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승리의 가능성이 얼마냐고 묻자, '진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또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해군사관학교 동기생인 해군 부관에게도 대본영에서 회의 때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미국과의 전쟁 반대 의지로 인해, 육군 강경파에게 암살 위협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었으며, 재밌는 것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해군 대신이 되어야 할 시점에 연합 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것도 육군 강경파들의 암살 시도로부터 피하기 위함이라 한다.

연합 함대 사령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1940년 촬영)

아무튼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빈번해지면서, 육군은 대놓고 해군성 바로 앞에서 시가전 훈련을 하기도 하고, 해군은 이에 자극을 받아 해군성 건물 안에 병기와 탄약, 식량을 비축하고 전기가 끊길 것에 대비하여 자가 발전 장치를 만들고, 심지어 우물이랑 변소까지 파서 해군성에 근무하는 3천여 명의 일본 제국 해군 병력이 농성전 준비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외람된 말이지만, 육군이랑 해군만 대립한 것이 아니고 육군과 해군 내에서도 대립 파벌이 있었다.

육군은 크게 황도파와 통제파, 해군은 크게 조약파(연합국과의 조약 우선시)와 함대파(조약파에 대비되는 강경파).

일본과 미국의 운명을 바꾸다, 진주만 기습.

미국 유학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지만, 친독 성향의 육군의 대미 강경책으로 인해 결국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어차피 대미 전쟁을 펼칠 것이라면, 초전에 미국에게 강력한 한방을 날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연합 함대는 진주만을 향해 출정하였으며, 일본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인해 진주만의 미군은 큰 비극을 겪어야 했다.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은 일본과 미국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군의 산발적 공격으로 초래된 진주만에서 미군은 3,581명이 전사하였으며, 1,247명이 부상당하였다.

또한 전투기 188대가 파괴되었으며, 155대가 손상되었으며, 전함 3척,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이 침몰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반일 감정에 드세져, 미국 정부는 미국 내의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용소를 설치하였으며, 한국인들도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한국인 역시 일본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공격 이후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환호하는 부하들 사이에서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지며, 야마모토가 1943년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섬의 시찰을 위해 라바울에서 항공기를 띄어 출발했을 때, 미군에 의해 격추당하여 전사하자, 전후에 작전에 참가한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서 누가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는가 하는 문제로 법정 공방까지 벌였다고 한다.

아무튼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미국이 대일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하게 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은 더욱 확전되어 쌍방이 큰 피해를 내게 되었다.

과달카날 전투(1942년 8월 7일)

이미 제국 육군은 광활한 만주와 중국 전선에서 다양한 적들과 싸우고 있었으며, 또 다른 육군은 일본이 1942년에 개척한 섬에 주둔하면서, 미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하여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일본 해군이 참패하여 미군이 결정적으로 제해권을 잡을 수 있게 된 계기) 이후로도 미군과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미 해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인해 일본 해군은 맥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과달카날전에서 일본 육군과 미 해병대와 전투를 전개하게 되는데, 일본 육군은 해군이 미군의 수송선을 격침시켜 보급을 끊겨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해군은 육군의 말을 무시하고 미군의 전투함만을 쫓아다니면서 전투를 벌였으며, 그러한 결과 일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사보섬 해전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사보 섬 해전에서 미 해군과 전투를 벌여 중순양함 4척을 침몰시키고 구축함 2척을 침몰시켰다.

그리하여 미 해군 1,077명이 전사하였으며, 일본 해군은 고작 58명 밖에 전사하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 패배 이후로 일본군의 달콤한 승리였지만, 정작 당시 과달카날 전투에서 벌어지는 지상 전투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 육군의 전세가 점점 기울어지면서 일본 해군은 섬에 주둔한 육군의 보급을 위해 구축함을 보내었지만, 미군에 의해 자꾸 격침되었으며,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측에게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통보하였다.

"우리 제국 육군은 자체적으로 보급을 충당할 수 없단 말입니까? 육군으로 인해 우리 해군이 큰 피해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보급은 육군이 알아서 충당하십시오."

결국 육군은 독자적으로 육군용 잠수함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일본 제국 육군 잠수함의 모델이 된 니시무라식 잠수정

"일본에는 육군과 해군이라는 2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 일본 해군에 파견된 독일 기술자의 회고

레이테 만 회전, 반자이(만세)를 외치는 즈이카쿠의 일본군 승무원들 사진

레이테 만 회전에서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이견차가 존재하였다.

제국 육군은 제한된 일본군의 항공 전력으로 미군의 수송선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해군은 항공 모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이 일관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서로의 의견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결론이 나지 않자 육군과 해군이 따로따로 공격하는 작전을 벌였다.

당시 미군에 비해 전력에 약세였던 일본군이 서로 힘을 하나로 합치지도 못할 망정 이렇게 의견차가 발생하고 전력을 분할하여 따로 공격하니, 결국 일본군 육해공 부대는 미군에 의해 각개적으로 격파당하게 된다.

육군으로서는 해군의 제안을 반대한다(陸軍としては海軍の提案に反対である).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지휘관 사진
일본 제국 해군 지휘관이 사용한 해군 지휘도

한편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는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있다.

물론 언급한 전투 이외에도 여러 전투에서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해군은 비행장이 훗날의 반격 작전에 꼭 필요하므로 보존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섬에서 수비 작전을 맡은 육군은 이것이 미군에게 넘어가면 오히려 아군에게 큰 해가 될 수 있으므로 파괴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군의 고집과 함께 비행장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비행장 건설 및 보수 작업에는 방어 진지 구축의 인원까지 투입하여 작업을 벌이는 바보짓을 저지른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 영화에서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영국군 격파 이후로 구룡 반도로 일본 육해군이 합동 입성식을 거행하는 사진

맨 앞에서 경례를 하는 사카이 중장은 중국 국민당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남경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해진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중유 탱크 폭발, 치솟는 연기를 배경으로 홍콩항에 돌입하는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구룡 반도의 영국군 진영에 포격하는 일본군 포병 부대

이렇듯 일본의 육해군은 곳곳에서 대립했는데, 대립의 정도가 심하여 정보의 비공유와 함께 보급의 비활성화 문제도 빈번하였다.

육군이 실시하고자 했던 작전은 해군이 알지 못했으며, 육군은 진주만 공격을 해군에 심어둔 첩자에게 들어서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무기 생산과 보급도 양측이 완전히 분할되어 독자적으로 실시했으며,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와 함께 자원 반출을 금하면서, 일본의 자원 부족난이 심해졌으며, 육군과 해군의 분할 생산으로 인해 재정의 압박이 매우 심해져 전쟁 말엽에는 악순환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와 사이판 전투,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를 거치면서 일본의 패전은 확실해졌으며, 본토 결전이 임박해지고 있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으로부터 자국의 본토를 지키기 위해서 본토 내에서 육군 235만, 해군 160만 편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활약한 퇴역 군인까지 동원되어 새롭게 징집된 병력과 시민 부대들을 훈련시켰다.

이쯤이 되면 전쟁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질 법도 하지만, 육군에게 있어서는 아직은 일본이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었고 승산이 있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 제국은 아직 광활한 전선에서 엄청난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자세히 파헤치면 일본 육군의 전쟁 지속과 일본이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는 그 믿음은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알 수 있다.

우선 중국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군 100만여 명은 사실상 무기와 장비, 그리고 식량과 탄약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전투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식 게릴라 전술과 함께 국민당은 독일제 무기로 훈련받은 우수한 정예군으로 일본군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일본이 점령한 광대한 점령 지역에 보급이 보내진다고 하더라도 중국 게릴라군에 의해 보급 차량이 폭파되거나 보급 수송자가 총에 맞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 전선에서는 수십만 명의 관동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무기와 장비는 정말로 조악했으며, 국경 인근에 소련군이 증강되기 시작하면서, 관동군의 사기도 크게 떨어지면서 일본 육군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필리핀과 마닐라 섬, 그 인근 지역에는 10만 명의 일본 남방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지켜지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맥아더가 이 지역의 견고한 일본군 방어선을 보고 결전을 회피하고 다른 곳을 노렸기 때문에 사실상 남방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게 있어서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동맹국 독일 제국의 항복이었다.

인도양 전선에서의 일본 제국 해군과 독일 제국 해군의 만남
아! 우리가 2차 세계 대전 일으켰다!

독일 제국의 붕괴라는 긴급 사태에 직면하여 일본 제국은 1945년 5월 11일부터 극비리에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궁궐 내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수상, 외무상, 육해군의 수뇌부 6명만이 참전하였으며, 대소 전략의 방침을 재검토하기로 하였다.

당시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만주 국경으로 대규모 군사 이동을 감행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제국에 대해서 강경책을 구사하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8월 폭풍 작전을 시도하여 관동군을 거의 무력화 시켜버린다.

뭐 아무튼 독일이 항복한 상태에서 일본은 전쟁 지도 회의를 열었으며, 여기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전쟁보다는 조기 종전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육군 참모 총장인 우메즈 요시지로는 적극적인 외교 수단을 통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저지하고자 주장하였으며, 해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는 '해군으로선 소련의 참전 저지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소련의 호의적 태도를 이끌어내어 (후략)'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나미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는 '제국 육군은 아직 승산이 있다. 지금은 싸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며, 강력히 전쟁을 주장하였다.

결국 강경파의 입장이 채택되었으며, 대다수의 육군은 어디까지나 본토 결전만을 위한 최고 전쟁 지도 회의를 열었다.

육군 강경파를 필두로 일본의 본토 결전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전국에는 엄청난 병력이 징집되었고 의용 부대원과 특수 병력을 조직하였다.

육군은 제국 백성들에게 미군과 싸우기 위한 미군 살육법 교본을 만들었는데, 그 모토는 '1인 1살(한 명이 한 미군을 죽이자!)'을 기초로 하였다.

원시적 무기인 칼, 창, 낫 등이 동원되었으며, 공장에서는 99식 아리사카 소총과 여러 보병 총이 만들어지고 학교 운동장은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육군 강경파는 일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믿었으며, 회의에서는 여러 해군 대신들과 육군 온건파까지고 육군 강경파에 대해서 크게 비판하였다.

원자 폭탄 투하

결국 일본은 원자 폭탄 맞고 항복했지만, 일본이 전쟁 수행 내내 벌였던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보노라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어느 나라나 내부의 파벌 간의 다툼과 암묵적인 갈등, 또는 직간접적인 갈등은 존재하고 당시 미군 역시 육군과 해병대 간의 대립이 빈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쟁 수행에 있어서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거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 같은 경우는 육군과 해군의 빈번한 대립으로 인해 그것이 전쟁 수행에 있어서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작전의 과오와 함께 커다란 전략상 차질을 빚게 하였다.

지금의 일본도 육상 자위대와 해상 자위대의 갈등이 존재하긴 하지만, 아무튼 일본이란 나라는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決定版ドキュメント 太平洋戰爭全史(일본 NHK 방영, 일본인의 눈으로 본 태평양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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