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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C~17C 유럽
올리버 크롬웰(1599~1658)

1. 스튜어트 왕조

올리버 크롬웰을 설명하기 이전에 우선 당시 잉글랜드 상황을 보면,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면서 그 동안 잉글랜드를 지배한 튜더왕조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이에 당시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가 모계혈통인 이유로 잉글랜드이 제임스 1세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제임스 1세는 태생이 스코틀랜드라서 당시 영국 의회정치를 이해하질 못했다.

거기다가 사치가 엄청 심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쌓아 놓은 내탕금을 거의 탕진해 버린다.

거기다가 청교도를 억압하는 정책을 펴게 되면서 종교, 재정, 군사 등 모든 부분에서 의회와 충돌하게 되고, 결국엔 강제로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추후 다시 연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인 찰스 스튜어트가 찰스 1세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찰스 1세
측근 버킹엄 공작

찰스 1세는 아비보다 더 심했는데, 의회와 자주 재정 문제, 종교 문제로 충돌했다.

거기다가 자신이 야심차게 준비한 스페인 전쟁과 30년 전쟁의 덴마크 지원문제가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의 측근인 버킹엄 공작이 암살되면서 엄청난 재정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의회에 권리청원 승인을 조건으로 손을 벌리지만, 결국엔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열지를 않는다.

거기다 청교도 박해를 감행하고 스코틀랜드에도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자 스코틀랜드에서 결국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군비가 모잘랐더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열게되고, 한번 그에게 당했던 경험이 있던 의회는 군비 지원은커녕 찰스 1세에 제동을 걸게 된다.

이에 격분한 찰스 1세는 의원을 감금하려다가 실패하고, 결국엔 의원들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전쟁이 바로 제 1차 영국내전이자 청교도 혁명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2. 올리버 크롬웰 등장

1차 영국 내전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동부 헌팅던의 하급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가 독실한 청교도인만큼 크롬웰 본인도 청교도인이었다.

그리고 1628년 의회에 진출하면서 의원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영국 내전이었다.

올리버 크롬웰과 철기병

 

철기병

올리버 크롬웰은 내전이 시작되자마자 대령에 임명되어 정예 기병인 철기병을 양성했다.

정예인만큼 그 훈련은 엄청 혹독했다고 한다.

1643년까지 잉글랜드 동부 오크셔 지방을 비롯해 아일랜드와 연합한 왕당파군이 우세하였지만, 동부지역은 올리버 크롬웰의 고향이다 보니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44년 중장으로 진급한 올리버 크롬웰은 본인이 직접 철기병대를 이끌고 가서, 마스틴무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마스틴무어 전투
의회군의 승리

그 뒤 잉글랜드 동북부 지역을 상실하게 된 왕당파는 중부로 철수를 하고, 1645년 신형부대를 창설하고 부사령관에 오른 올리버 크롬웰은 중부로 진격한다.

네이즈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세를 확실히 의회파로 돌리는데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랭포드 전투에서 잔당을 물리침으로써 잉글랜드내의 왕당파를 소탕했다.

찰스 1세는 가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도망갔으나 스코틀랜드의 배신으로 의회파에 포로로 넘어가게 되었고, 1차 영국내전은 종결되게 된다.

철기병대
영국 내전 상황(연두색 의회파, 붉은색 왕당파)

내전이 마무리되면서 의회파는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면서 찰스 1세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군부와 정통 의회파 사이에 불화로 약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이를 기회로 여겨 찰스 1세는 탈출을 감행했고 스코틀랜드와 협정을 맺어 군대를 모았다.

이에 의회파는 군부와 일시적으로 화해하고, 올리버 크롬웰과 정예군은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다시 포로로 잡히게 된다.

2차 영국내전도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찰스 1세는 반역자로 처형되고, 잉글랜드는 공화정을 선포하게 된다.

영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었으며,  신하가 왕을 잡아 죽이는 충격적인 상황이라 전 유럽에 충격에 빠졌다.

찰스 1세의 재판

 

3.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찰스 1세 처형 이후 올리버 크롬웰은 3년에 걸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토벌을 시작한다.

우선 초기에 왕당파 주요거점이던 아일랜드에 초토화 작전을 펼쳤으며, 이때 민간인이 엄청 학살을 당했다.

드로이다 대학살

아일랜드를 평정한 후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1세의 아들 찰스2세를 왕으로 섬시는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한 번 무너진 전적이 있던 스코틀랜드는 철기병에게 쉽게 무너지고,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토벌전을 마무리 한 뒤 올리버 크롬웰은 항해조례를 발표하면서 이번엔 네덜란드의 기세를 꺾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는 당시 뛰어난 선박술과 무역기술로 바다의 왕자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올리버 크롬웰은 네덜란드의 중계 무역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제1차 영란 전쟁을 벌였다.

초반에 던지네스 해전에서 대패하여 위기에 빠졌지만, 곧 테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1차 영란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부터 네덜란드는 바다의 지배권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그 외에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자메이카를 획득한다.

호국경에 오르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반란 진압, 스페인, 네덜라드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에 대해 쿠테타를 일으킨다.

당시 의회와 군부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에 선방을 가한 것이다.

쿠테타를 일으키다

쿠테타에 성공한 올리버 크롬웰은 호국경에 올랐고, 이때부터 철권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호국경에 오른 뒤 80가지 이상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대채적인 내용은 교육의 진흥, 통치의 분권화, 종교의 자유 등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한때 왕위를 넘본다는 의심도 받았지만, 그러지 못하고 1658년에 병사한다.

그가 죽은 뒤 잠시 아들인 리처드 2세가 호국경에 있지만, 2년만에 찰스2세가 돌아오면서 왕정이 다시 복고된다.

죽은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2세

찰스 2세는 올리버 크롬웰을 역적 중 역적으로 규정하였고, 부관참시의 명을 내려 목을 잘라 한동안 효수했다.

그 뒤 그의 목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결국 그의 모교에 안장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묘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영국에서 올리버 크롬웰을 두고 영웅인지, 독재자인지 역사학자들의 견해대립이 심하다고 한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의 전성시대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듯 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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