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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의 맹세

지중해의 두 강국 로마와 카르타고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 제국은 분열을 시작했고 지중해의 패권은 당시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한 카르타고에게 넘어갔다.

카르타고는 전형적인 과두정 정치였고, 농업파와 상업파의 분쟁에서 상업파가 승리한 후 코르시카, 샤르데나 섬으로 진출하면서 강력한 해상 왕국을 이룩하였다.

해상 왕국이라서 그런지 당시 카르타고의 해군력은 당대 최강의 힘을 자랑했다.(반면, 육군은 약체였다.)

이렇게 지중해 패권을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을때, BC 227년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에피루스를 축출하고 신흥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

이에 지중해의 두 열강의 충돌은 불가피해졌고, BC 3세기 중반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발단으로 두 강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었다.

초기엔 육전 전투에선 로마가, 해전에선 카르타고의 승리로 크게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온 용병 하밀카르 바르카는 카르타고의 사령관으로서 로마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지속적으로 해군을 성장시킨 로마는 결국 트라파니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침몰시킴으로써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강력한 육군이 카르타고에 상륙하여 결국엔 카르타고 정부로 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
트라파니 해전

카르타고 정부의 무능력함에 하밀카르 바르카는 피눈물을 흘렸다.

정부가 서로 분열하지 않고 자신에 조금만 더 지원을 해줬으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칠리아 섬에서 하밀카르 바르카의 부대는 로마군에게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복수를 다짐했고 자신이 못한다면, 아들이 자신의 유지를 이어주길 바랬다.

이에 그는 7살의 어린 아들을 카르타고 신전에 데리고 가서 복수의 맹세를 시킨다.

이 7살의 어린 아들이 바로 한니발 바르카이다.

한니발, 복수를 맹세하다
한니발, 복수를 맹세하다

 

2. 한니발, 로마로 진군하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코르시카와 샤르데나 섬을 로마에 할양했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이에 1차 전쟁에서 싸운 용병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급료가 나오지 않자 용병들은 반란을 이르켰고, 이 반란은 3년 4개월만에 진압되었다.

한편 하밀카르 바르카는 용병 반란 진압 후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그곳을 개척하며 힘을 길렀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그리고 그곳에 신카르타고를 건설한다.

바르카 가문의 본거지로 삼았으며, BC 219년 하밀카르 바르카의 뒤를 이은 한니발은 26세의 나이로 카르타고 총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그 동안 지속적인 이베리아 반도의 개척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니발은 이베리아 반도 동해안의 사군툼을 침공했다.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

로마는 사쿤툼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다시 세력을 회복한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로마는 다시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이었다.

한니발
카르타고군

BC 218년 5월, 한니발은 드디어 보병 4만, 기병 9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사군툼을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그 유명한 한니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한니발의 진군

설마 카르타고가 육로로 진군 할 줄 몰랐던 로마는 급히 3만의 군대를 지금의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집결시켰다.

그 곳이 로마로 들어오는 입구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니발의 진군에 당황했지만, 육군 최강국인데다가 1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했기에 로마는 자신만만했다.

한니발 갈리아 지방에 들어서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이런 생각을 비웃듯 마르세이유가 아닌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던 갈리아족들과 동맹을 맺고 기병대를 지원받으며, 군대를 보강시켜 나갔다.

그리고 한니발군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군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군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군은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절반이 넘는 군대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3만의 군대는 역대 카르타고군의 정예 중 정예가 되었다.

갑자기 북이탈리에서 카르타고군이 남하해오자 당황한 로마는 타키누스로 진군했지만, 카르타고의 이민족 기병대에 밀려 대패하고 이어 트레비아에서 대격전을 벌였지만, 이 전투에서도 패배하고 말았다.

트레비아 전투

이 전투로 로마는 알프스 남쪽의 갈리아 지방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의 행군로

이후 한니발은 거침없이 로마를 향해 진군했고, BC 217년 4월에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는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했다.

트라시메누스 호수전투(한니발의 매복술이 인상깊은 전투이다.)

이 전투로 로마는 북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상실하고 만다.

승리한 한니발은 수도 로마를 고립시키기위해 곧장 남부 이탈리아로 행군을 계속했다.

3번의 전투로 많은 병력을 잃은 로마는 바로 대규모 병력을 모을 여력이 없었다.

로마의 새로운 집정관에 오른 막시무스는 카르타고군과의 전투를 피하며 병력을 모았고, 결국엔 칸나에에서 두 군대는 마주치게 된다.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의 시작이었다.

칸나에 전투
당시 카르타고군 코끼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거의 죽었기 때문에 큰 효과가 없었다.

칸나에 전투는 후에 많은 전술가들이 필수로 배우게 되는 섬멸전 전술의 모태가 된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원군이 보충되었고,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기병 1만 그리고 쓸모없는 코끼리 몇 마리였고, 총사령관 바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보병 8만 기병 7천의 대군이었다.

거의 2배 정도의 차이었다.

초승달 전술로 유명한 칸나에 전투
초승달 전술로 유명한 칸나에 전투

로마군의 강력한 중무장 보병은 카르타고 보병대를 몰아붙이며 거침없이 돌격했으나, 사령관 바로는 어느세 자신의 군대가 카르타고 기병대에게 포위되었음을 알게되었다.

한니발은 기병대로 하여금 로마군을 에워싸고 포위 섬멸전에 들어갔다.

갑작스런 기병대의 공격에 로마군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대다수의 병력을 잃고 궤멸되고 말았다.

당시 로마군의 피해가 전사자 5만~7만에, 포로가 1만이 넘었으니 거의 전멸했다고 무방했다.

칸나에 전투 후 로마는 큰 혼란에 빠지고, 로마군이 전멸당함으로써 이탈리아에 병력이 없었기에 한니발은 수도 로마 인근을 점령하며 로마 고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리는 그동안 로마에 숨죽여지내던 마케도니아등 반로마 동맹군이 결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섬멸전의 대명사 칸나에 전투

하지만 로마는 강했다.

로마 시민들은 오히려 더 똘똘 뭉쳤고, 파비우스 전술을 채택한다.

한니발군에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으며, 지치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국경에 있는 군대들은 한니발의 동맹인 시칠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공략하며, 오히려 한니발을 역으로 고립시켜나갔다.

카르타고 본국은 파벌싸움만 계속하며 한니발군에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3. 스키피오의 등장과 한니발의 몰락

BC 209년 로마의 26세 젊은 장군, 푸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스피키오는 한니발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 즉 스페인 지역을 점령해 나갔고, 결국엔 한니발을 지원나가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의 군대를 섬멸하면서 히스파이아에서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축출했다.

한니발은 졸지에 본거지가 사라진 것이다. 

로마의 영웅 스피키오

스피키오에게 패배한 하스두르발은 남은 병력을 추스른다.

어떻게든 형인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진입했으나, 대기하던 로마군에 저지당하고 결국 전투에서 전멸당한다.

한니발의 동생도 이 전투로 전사했다.

스피키오의 반격로

히스파니아를 장악한 스피키오는 로마에서 BC 205년 집정관에 선출되고, 그 다음해에 시칠리아에 주둔한 로마군을 이끌고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누미디아 왕국을 점령했다.

누미디아 왕국이 후에 알제리인데, 누미디아 왕국은 카르타고와 동맹을 파기하고 로마에 붙고 만다.

이에 카르타고는 수도가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고, BC 204년 이탈리아의 한니발을 철군시키는 조건으로 로마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카르타고에 귀국하자, 카르타고의 강경파는 로마의 결전을 주장하며 강화협정을 파기하고 노장 한니발과 신인 스피키오는 자마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한니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다.

이때 로마의 병력은 보병 3만에 누미디아 기병포함 기병이 1만3천, 총 4만 3천이었으며,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3천에 기병 3천, 코끼리 80마리였다.

자마 전투
자마 전투
자마 전투

자마 전투에서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한니발군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썼던 초승달 전술을 오히려 스피키오가 쓰면서 결국 한니발군은 자마에서 전멸하게 된다.

스피키오의 초승달 전술
스피키오의 초승달 전술

결국 한니발의 패배로 인해 카르타고는 로마와 다시 굴욕적인 협상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협상으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를 전부 할양하고, 군대도 소규모 병력 말고는 더 이상 징집할 수 없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더 이상 군사강국이 되지 못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의 시리아로 망명해서 재기를 노렸으나, BC 190년 시리아의 안티오고스 3세마저 로마군에 패배하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나발에게 승리한 스피키오는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을 얻게되었고, 스피키오 가문은 로마의 대명문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BC 150년 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결국에는 멸망당한다.

이로써 지중해의 최강자는 로마가 되었으며, 이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제국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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