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전쟁의 역사가 된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제 1장. 민중의 외침, 대혁명의 시작과 영웅 등장
1. 민중의 분노, 대혁명의 시작
18세기 30년 전쟁과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를 거치면서 프랑스는 유럽 최강대국의 지위에 있었지만, 봉건체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체제를 유지하였기에 사회적 모순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구 제도를 '앙시앵 래짐'이라고 부른다.
소수의 왕족과 성직자, 귀족이 모든 권력과 경제권을 독점하였기에 계몽사상의 등장으로 서서히 성장하는 일반계층의 불만은 서서히 쌓여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무리한 정복전쟁과 왕족과 귀족들의 과도한 사치와 향략으로 재정은 이미 붕괴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에 부족한 재정분은 모두 일반계층의 부담이 되었고, 제 3신분의 불만은 결국 폭발 직전까지 이르고 말았다.
유독 흉작과 겨울의 추위가 혹독했던 루이 16세 시대에 프랑스의 재정은 드디어 한계에 다다랐다.
1789년 왕은 175년만에 삼부회를 소집하여 조세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삼부회는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기에 회의에는 진전이 없었다.
특히 500명에 달하는 평민 계층은 이번 기회에 불합리한 제도를 모두 개선하려고 했다.
그리고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해 단체 행동에 나섰으며, 테니스코트 서약을 발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평민들의 삼부회 진입을 막을려고 하였으나, 몇몇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평민들을 옹호하고 나섰기에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게 된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제헌국민의회로 개칭하고, 새로운 프랑스 헌법 개정에 착수를 시작하게 된다.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귀족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탄압하기로 하고 2만의 병력을 소집했다.
거기다가 개혁을 추진하던 재무장관 네케르를 파면해버리자,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보훈병원에서 소총 3만정을 탈취하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1789년, 그 유명한 프랑스 대혁명의 막이 오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루이 16세는 호화 파티를 계속 벌였고,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빵 좀 달라며 궁전에 난입을 시도했고, 잘 놀던 루이 16세는 이들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쫓겨나 튈리르 궁전으로 강제이주 당하고 만다.
그 후 시민군의 감시를 받게 된 루이 16세는 스웨덴 귀족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다가 결국 발각된다.
이에, 프랑스 국민들의 왕에 대한 불신은 결국 극에 달하게 된다.
2. 프랑스 대혁명 전쟁의 시작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퍼져나가자 기존의 왕정국가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2세는 처음에는 자신의 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걱정되어 군사개입을 시도할려고 하였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미루어두고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프리드리히 대왕 조카)와 협정을 맺어 프랑스 사태에 개입할 준비를 했다.
이때 프랑스는 왕당파, 자코뱅파 사이에 혼란에 빠져있었다.
후에 다시 자코뱅파는 급진파인 몽테뉴파와 온건공화피인 지롱드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에 서로 정권 다툼을 계속하던 끝에 결국엔 지롱드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지롱드파는 내부의 불만을 바깥으로 분출시켜 잠재우기 위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전쟁의 막이 올랐다.
1792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프랑스의 선전포고에 7만7천의 대군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자신만만하던 프랑스군은 이에 맞서려고 하였으나 지휘관급인 귀족들의 이탈로 통솔의 부재가 발생하였고, 결국 혁명군은 패배를 거듭하였다.
이에 혁명정부는 뒤무리에,켈레르만을 지휘관으로 삼고 10만 의용군을 모집하여 반격을 시작한다.
혁명군의 패배에 지롱드파는 위기를 맞게 되고, 이에 몽테뉴파는 민중선동을 통해 권력을 잡고 파리 코뮌을 수립하였다.
파리 민중들은 루이 16세 일가를 적국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탱플탑에 감금을 시켜버린다.
한편 전선의 혁명군은 1792년 7월 발미에서 육군 강국 프로이센과 8시간의 사투끝에 물리치는데 성공하게 된다.
사실 프로이센군을 물리쳤다기보단 프로이센군이 작전상 후퇴하였기 때문이지만, 간만에 승리에 혁명군의 사기는 크게오르게 된다.
3.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 정치
발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날, 급진공화파인 몽테뉴파는 재판을 열어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만다.
당시 루이 16세가 적국과 내통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정말 선동이란게 무서운게 없는 죄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왕과 그 일가를 처형한 몽테뉴파는 제 1 프랑스 공화국을 수립하고, 일국의 왕이 처형됐다는 소식에 경악한 전 유럽은 제 1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공화정부는 30만 모병안을 통과시키고, 병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
몽테뉴파의 입김은 강해졌고 발미전투의 영웅 뒤미르에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발각되어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자, 몽테뉴파의 로베스 피에르는 이를 계기로 적대적인 파벌을 축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파벌인 몽테뉴파의 경쟁자들도 몰아내면서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로베스 피에르는 뭐 잘못하기만 하거나 눈에 거슬리면 단두대로 보내버리기로 유명했다.
특히 축출된 지롱드파를 옹호하며 마르세이유와 리옹, 방데 등에서 반란이 일어났었는데 이를 잔인하게 진압해버린다.
특히 방데에서는 대학살을 일으켜버린다.
이렇게 차례로 진압하던 반란은 한 영웅을 탄생시키며 종결했다.
바로 24세의 청년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그는 툴룽 반란을 진압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러한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 정치도 서서히 그와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며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비록 공포 정치를 통해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하고,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내부혼란이 잦아들면서 공포정치에 신물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국민공회의 데브르 의장과 다른 의원들은 로베스 피에르를 탄핵하고. 측근들을 사로잡아 모두 단두대로 보내버린다.
자신이 애용했던 단두대에 로베스 피에르는 결국 파란만장한 생을 맞이하고 만다.
비록 로베스 피에로를 축출하고 종채정부를 수립하였지만 방데미에르에서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중앙 정부는 다시 큰 혼란에 빠졌으나, 전선에 있던 프랑스 혁명군은 제 1차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하고, 네덜란드를 점령하는데 성공을 하게된다.
이어 덩달아 스페인과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화평을 맺고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국경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대학살 이후에도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이던 방데 반란을 청년 장교 나폴레옹이 진압함으로써 외부의 혼란은 종결시킬수 있었다.
그리고 총재 정부는 대프랑스 동맹의 주축 오스트리아의 공략 계획을 세우고, 방데미에르 13의 반란등 여러 전선에서 능력을 보여준 27세의 청년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방면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프랑스 역사에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제 2장. 혁명 프랑스의 영광, 불패의 장군
1. 코르시카섬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년 8월 15일,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섬 코르시카에서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코르시카섬은 제노바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파스콸레 파울리를 필두로 독립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하급이지만 귀족회의 의원인 나폴레옹의 아버지도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르시카섬은 프랑스로 매각되었고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이에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프랑식 이름인 보나파르트로 개명하고 프랑스로 전향을 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되었다.
이후 어린 나폴레옹은 10살때 유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5년 뒤 1784년 정식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비록 등수는 꼴등에 가까웠지만 수학을 엄청 잘했다.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4년 과정을 11개월만에 졸업하고 16세의 나이로 포병 소위로 임명된다.
이후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코르시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만, 독재정치를 추구하려는 파울리로 인해 1793년 마르세이유로 도망을 치게 된다.
이 때 그는 형의 처제이자 첫번째 연인인 데지에를 만나 약혼을 하게되는데, 나폴레옹은 훗날 자서전에서도 여태 가장 미안한 여인으로 데지에를 꼽았다.
이후 그는 1793년 6월 프랑스 혁명군에 복귀한다.
톨룽 탈환 작전에서 준장으로 진급, 방데미오르 13일의 반란 진압에서 소장으로 진급하며 고속 승진을 하게 되고 특히 방데미오르 진압 작전에서는 부하인 조아생 뮈라를 거두게 된다.
1796년 나폴레옹은 약혼녀인 데지에와 파혼하고, 과부이며 6살 연상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을 하게된다.
이후 이 일에 대해 말이 많게 되는데, 조제핀과 결혼 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이때 조제핀의 전 애인인 폴 바라스가 밀어줬다는 의혹을 사게 되지만, 전혀 근거없는 의혹은 아니라고 한다.
2. 제 1차 이탈리아 공략
당시 이탈리아 방면군은 보급, 물자, 사기면에서 최악의 상태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 어려움을 기회로 만들었다.
우선 도적때나 다름없는 4만 3천의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 약탈을 허락한다고 했다.
이에 이탈리아 방면군은 서서히 원래 군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군 시절에 자신과 평생을 다닐 부하 장수들을 얻게 된다.
북이탈리아로 진군한 나폴레옹은 우선 북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주둔군과 샤르데나 사이에 부대를 배치한다.
두 부대를 갈라 놓는데 성공했고, 그리고 소규모 부대로 샤르데나군을 견제하고 남은 병력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샤르데나군을 공격해 피에테몬 지방을 석권하고 공화국을 수립한다.
이에 샤르데나 국왕은 나폴레옹군에 항복하고 피에테몬 지방과 공화국 해체를 조건으로 동맹에 탈퇴하고 나폴레옹군에 종속되었다.
샤르데나 정복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이제 롬바르디아 정복에 나섰다.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군을 막기위해 아다강에 주둔했고, 인근 로디에서 나폴레옹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다리에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한편 기병을 이용해 오스트리아군 측면을 공격해 전투에서 승리를 이뤘다.
로디 전투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롬바르디아 지역의 국가인 밀라노를 점령할 수 있었고, 병사들의 밀린 봉급과 아울러 본국에 엄청난 자금을 보냄으로써 프랑스내의 인지도가 엄청 올라가게 된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프랑스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엄청 의지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만토바를 제외하고 롬바르디아 일대를 장악하자 오스트리아군은 4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보내고 이에 나폴레옹도 최소 수비병력을 제외한 3만의 병력으로 응전한다.
초기의 불리함도 잠시 피에르 오쥬로가 벌어준 귀중한 시간덕에 나폴레옹은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만토바를 제외한 북이탈리아가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라인강 전선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는 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지원을 오게 된다.
나폴레옹은 다시 한 번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후방 보급로를 끊는 전략으로 전세를 역전시켰고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긴 하였지만, 큰 피해가 없었던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한 번 만토바에 구원군을 파견한다.
총사령관은 알빈치로 임명하고 다시 북이탈리아로 진군하는 한편, 다른 동맹국 영국 공격을 세웠던 프랑스 총재 정부는태풍과 영국함대의 방해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고 만다.
이에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에게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추가 병력을 지원을 받고는 다시 4만 3천의 부대를 편성하였고, 리볼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은 탓에 나폴레옹의 포위전술에 그만 큰 피해를 입고 패배를 당하게 된다.
리볼리 전투의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북이탈리아 지배권을 잃어버렸고, 만토바마저 굴복시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진격작전을 세운다.
프랑스 총재정부도 나폴레옹의 승리에 고무되었기에 추가 지원병력을 보내주어 나폴레옹의 부대는 8만에 달하였다.
추가 지원을 받자마자 나폴레옹은 빈을 향해 진군하였고 빈의 지척인 레오벤까지 나폴레옹군이 점령하자 어쩔 수 없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제 1차 대프랑스동맹은 영국을 제외하고 모두 붕괴되었으며 북이탈리아 정벌의 성공으로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무시할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
1797년 나폴레옹의 나이 28살이였다.
3. 이집트 원정의 실패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온 나폴레옹은 군부내에서 경쟁자가 없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막강한 영국함대로 인해 본토 공격계획은 취소하고 좀 더 타격을 줄 수 있는 영국의 식민지 인도 공략을 계획한다.
우선 인도로 직항 항구를 얻기 위해 이집트 공략을 세우고, 나폴레옹의 인기에 부담을 느낀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좀 더 멀어지게 하기 위해 계획안을 승인하게 된다.
우선 중간 기항지인 몰타섬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킨다.
이후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하고 카이로를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시리아 지역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군도 병력을 재편성해서 시리아로 원군을 지원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영국은 함대를 통해 오스만제국에 지원을 하였고, 사막의 날씨 변화와 페스트의 발병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아크레 공략을 포기하고 이집트로 복귀하였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복귀하자 오스만제국군은 영국함대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로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였다.
오스만군은 파죽지세로 프랑스의 방어선을 뚫고 진격하였으나 조아생 뮈라의 기병 돌격으로 사기를 얻은 프랑스군은 다시 공격을 감행하였고 오스만 제국군은 아부키르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아부키르 전투의 승리 후 영국 함대와 포로교환 협정을 준비하던 나폴레옹은 본국으로부터 급박한 소식을 전해듣는다.
오스트리아가 평화조약을 깨고 다시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였으며,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기반인 북이탈리아에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점령했다고 한다.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인 북이탈리아가 다시 오스트리아 영향권으로 들어가버리자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4. 뷔르메르 쿠테타로 1인자가 되다.
1799년 이집트 원정군 지휘권을 클레베르에게 넘기고 장 란, 뮈라등 소수의 측근들과 2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영국함대의 감시를 피해 파리로 무사히 귀환했다.
당시 프랑스의 국민은 제2차 대프랑스동맹의 역습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한 총재정부에 실망하고 있었다.
이럴때 나폴레옹이 귀환하니 그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이때 5명의 총재 중 한명인 시에예스가 쿠테타를 계획했고, 나폴레옹에게 협력을 요청한다.
이에 응한 나폴레옹은 조아생 뮈라의 근위대를 동원하여 500인 의회를 해산시키고, 시에예스 또한 다른 총재들을 유인해 감금시켜 버린다.
이후 시에예스는 자신의 주관으로 헌법을 재작성 하려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헌법을 자신에 맞게 고치고 3인 체제의 통령 정부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군사, 내정, 외교 등 막강한 권한이 있는 제1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바야흐로 나폴레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 1통령 즉위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제 3장. 황제 즉위, 프랑스 제국의 질주
1. 제 2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과 2차 이탈리아 원정
나폴레옹이 통령으로 즉위 한 1799년,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제 2차 대 프랑스동맹이 결성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명장 카를 대공과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의 공세로 라인강 일대와 북부 이탈리아를 상실하였지만, 전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았다.
일시적으로 동맹군이 네덜란드를 수복하였으나, 이내 격퇴하는데 성공하였고 스위스의 위성국가 헬베티아 공화국 전선에서도 수보로프가 철수하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여러 부대의 정예를 착출하여 새로운 예비 군단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듬해 직접 북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북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 후방을 차단할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입하여야했는데, 많은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 단숨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버린다.
단숨에 알프스 산맥을 넘은 나폴레옹은 곧장 밀라노를 점령했다.
당시 북이탈리아에 파견되어있던 마세나가 항복하였던 상태였지만, 그 소식을 몰랐던 나폴레옹은 곧장 만토바로 진격한다.
도착해서야 그 소식을 항복 소식을 알게되었지만, 장 란의 부대가 동서대로를 장악해 오스트리아군이 나뉘었던터라 곧장 전투를 개시해버린다.
몬테벨로 전투의 시작이었다.
몬테벨로에서 장 란은 처음 대포수 부족으로 전투에서 밀렸지만, 장 란 특유의 돌격전술로 결국엔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의 승리로 장란은 몬테벨로 백작에 봉해지게 된다.
나폴레옹의 예상외의 진군에 당황하게 되었고 더 이상 각개격파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군대를 한 곳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집결을 마친 오스트리아군은 곧장 나폴레옹이 주둔해있던 마렝고로 진격을 했고, 그 유명한 마렝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 오스트리아군의 총공세임을 파악하지 못했던 나폴레옹은 뒤 늦게 총공세임을 알아차리고, 주변에 보냈던 부대를 회군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근위대와 직접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벌었다.
이 때 근위대는 엄청나게 활약을 하게되어 후에 나폴레옹 근위대라고 하면 다들 찬사를 보냈다.
근위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패전 위기에 처했지만, 드젠이 이끄는 부대의 도착으로 오스트라아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측으로선 정말 아쉬운 전투였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신의 아끼는 부하 드젠을 잃고 만다.
오스트리아군은 패전으로 충격을, 나폴레옹은 드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는다.
일단 군을 추스리기 위해서 잠시 휴전에 들어간다.
이탈리아가 잠시 휴전에 들어간 사이 라인강 전선에서는 모로의 승전소식이 들려왔다.
호엔린덴 전투에서 대승을 한 모로는 즉시 15일 동안 300km를 주파하여 빈에서 80km 거리까지 도착하였다.
북부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수도인 빈이 위태롭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결국 강화협상을 제안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1차 대프동맹 전쟁의 조약을 이행할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어 오스트리아 측으로선 다행이었다.
거기다가 미국의 독립으로 유럽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영국과 대 프랑스 동맹에 관심없던 러시아도 협졍조약에 승인하면서 제 2차 대 프랑스 동맹 전쟁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2.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제 2차 대프동맹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제를 추진하여 종신 통령에 오르고, 세금 제도와 종교제도 사법제도를 개선했다.
그리고 1804년 민법의 집대성인 나폴레옹 법전도 편찬했다.
이 때 전쟁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모로에게 나폴레옹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접근했고, 곧 반 나폴레옹 정치세력이 탄생했다.
나폴레옹의 권력이 강화될 수록 암살의 위험은 더 커져만 갔다.
우선 왕당파 잔여세력들이 부르봉 왕가의 혈통으로 스웨덴에 망명 중인 앙기엥 공작과 접촉할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 정보를 들은 나폴레옹은 잔여세력들을 소탕했고 앙기엥 공작을 독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웨덴은 프랑스에 적대적이게 된다.
거기다가 모로를 지지하는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로는 미국으로 추방해버렸다.
가만히 있던 모로는 억울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나폴레옹 암살 미수사건과 왕당파 반역사건은 나폴레옹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해주었고,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한 그 해에 미국에서 축하 사절단이 왔다.
그리고 서부지역에 대한 통행권을 요청했다.
미국을 통해 영국을 견제하려했던 나폴레옹은 북미 중부에 자리잡은 프랑스 식민지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미국에 팔아넘기게 된다.
그리고 식민지인 아이티에선 혁명이 일어나서 독립국가로 선포하지만, 나폴레옹은 그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3. 3차 대프랑스 동맹과 신성로마제국의 멸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자 이에 다시 위협을 느낀 영국은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이번엔 영국을 침공하기로 계획하고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 규모 초기에 20만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프랑스의 대육군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하지만 침공 계획을 하며 준비하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우선 오스트리아 침공을 개시한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을 점령하여 프랑스에 대한 방어선은 더욱 견고히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전 유럽이 놀랄정도로 빠르게 오스트리아 영내로 들어온 나폴레옹의 대군에 의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올름에서 운명을 건 대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진격은 파격적이었다.
우선 뮈라의 기병대에 의해 오스트리아 수비군이 몰살당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퇴각로를 막으며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면서 고립 작전에 들어가니, 결국 10만에 달하던 오스트리아군은 2만 4천으로 줄어들었고, 사령관 마크 대공은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다.
오스트리아의 항복에 나폴레옹은 나머지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을 격파하고, 이어 영국을 끝으로 이번 전쟁을 마칠려고 했다.
하지만 육전에서와는 달리 해전에서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영국의 해신이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기 시작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제 4장. 해신의 등장과 대륙을 묶어버리다.
1. 대영제국의 제독, 넬슨
1758년 잉글랜드 북동부에서 태어난 넬슨은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의 추천으로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 후 미국독립전쟁을 거쳐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도 공을 세우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비록 코르시카섬 탈환 작전에서 눈을 잃고 세인트 비센트 해전에선 오른팔을 잃어버렸지만, 그의 능력은 영군 해군에서 최고로 치게 되었다.
1798년 나일강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나일강의 남작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시 코페하겐 해전의 승전으로 자작으로 임명 된 그는 1805년 풀롱항에서 탈출한 프랑스 함대와 격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이 그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이다.
넬슨 제독은 전투가 시작되자 2열 종대로 돌격을 개시했고, 2열 중 1열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넬슨의 나머지 1열도 돌파하는데 성공하면서,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더 이상 저항을 하지 못했고 결국 항복하고 만다.
이 해전으로 프랑스 제독 뵐뇌브가 생포되었으며, 잃은 병력은 1만 4천 전열함의 피해는 33척 중 5척이 침몰하고 17척이 나포되어 버렸다.
이 영국의 함대 27척은 전부 멀쩡했다.
영국의 대승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넬슨 제독은 전투 중 총상을 입어 결국 전사하고 만다.
이 승리로 나폴레옹은 해군이 괴멸되어 영국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2. 제 3차 동맹의 종식과 제 4동맹 전쟁의 시작과 프로이센 정벌
비록 트리팔가르 해전의 패배가 뼈 아팠지만, 나폴레옹은 우선 내륙 전선에서 더 힘쓰기로 결정한다.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항복을 받은 나폴레옹은 프란츠 2세가 도망가면서 비어버린 빈에 입성을 했다.
그 후 보르미아까지 진군한 러시아군을 격퇴하기 위해 진군했으나,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의 제자 쿠투조프의 활약으로 러시아군을 전멸시키진 못했다.
러시아의 명장 쿠투조프는 겨울이 다가옴을 감안하여 나폴레옹군을 끌어틀여 전멸시키자는 전술을 제안했으나, 프란츠 2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반대로 제안이 기각되어 버린다.
이후 쿠투조프로부터 지휘권을 회수한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 16만을 이끌고 모리비아의 아우스터리츠 평원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한다.
대전이라 불리는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하였고, 결국 9천의 피해로 승리를 거둔다.
이와 달리 연합군은 1만 3천의 사상자와 1만 2천의 포로가 발생하는 대패를 겪게 되었다.
이 전투에 3명의 황제가 참가하였기 때문에 3황제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투에서 패배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에게 러시아군이라도 퇴각할 수 있게 간청하는 처지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의 오스트리아군 철수와 전쟁 배상금 4천만 프랑, 바이에른에게 티롱 등의 영토 할양, 대동맹에서 오스트리아의 탈퇴를 조건으로 협약을 맺었다.
이 전쟁으로 800년 전통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사라지고,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만 지칭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동부 독일의 소국들의 규합하여 라인동맹을 결성하였다.
라인동맹은 형식상 주권을 가진 국가연맹이었으나, 사실살 프랑스 제국의 속국이었다.
이에 독일 내의 내정간섭을 이유로 프로이센은 대 프랑스 동맹에 참가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이탈리아 반도로간 마세나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했으며, 네덜란드가 해체되고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홀라드 왕위에 오른다.
프랑스 제국의 최전성기가 시작 되었다.
한편 프로이센 대프동맹에 가담하며 선전포고를 하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제 4차 대프랑스동맹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전투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룩한 육군 강국의 자존심은 무너져있는 상태였다.
군대의 사기나 질적인 측면에서 프랑스에게 떨어졌다.
이에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스터츠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명장 루이 다부의 분전이 돋보였는데, 이 전투로 프로이센군은 단 하루만에 4만의 병력을 잃어 버렸고 나폴레옹은 베를린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이후, 폴란드 - 동프로이센 정벌을 시작한다.
이때 선봉장으로 조아생 뮈라가 큰 활약을 보이는데, 특히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기병돌격은 역사에도 크게 남길 정도로 대단한 돌격 전술로 이름을 남긴다.
이후 포메라니아 지방도 석권한 나폴레옹은 직접 동프로이센으로 진군을 개시한다.
이 때 병력 수가 도합 22만이었다.
러시아-프로이센 동맹군은 프리틀란트에서 패전병 등을 모두 규합한 11만으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안 그래도 전략의 귀재 나폴레옹인데 숫적인면에서 차이가 프랑스가 압도적이라 결국 프리틀란트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프랑스군 사상자는 9천명 프-러 연합군은 2만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이 전투로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저항한 프로이센은 무방비상태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강화협정을 맺었다.
우선 동맹탈퇴는 물론이고 앞으로 영국 압박을 위해 시행하는 대륙 봉쇄령에 가담, 그리고 프로이센의 영토 일부를 할양하고, 폴란드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는 것을 조건을 걸었다.
이 협상으로 프로이센은 영토가 크게 줄었고, 할양한 영토에 세워진 베스트팔렌 왕국 국왕에 나폴레옹의 동생이 왕좌에 오른다.
그리고 폴란드 지방의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의 속국을 자처하며 훗날 지속적인 지원을 하게된다.
3. 대륙 봉쇄령의 발표와 반도 전쟁의 시작
1806년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한 후, 베를린 칙령을 발표한다.
내용은 바로 유럽의 모든 국가들의 영국과 교역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음해 밀라노에서 밀라노 칙령 발표를 절정으로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이 시행되었다.
트리팔가르 해전에서의 패배로 영국 본토에 상륙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경제 압박을 통해 영국을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여, 대륙 봉쇄령 조칙을 따랐으나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적이 없던 스웨덴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영국과 동맹을 맺고 결전을 프랑스와 결전을 준비하려 하였으나 뜬금없이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해오며 핀란드 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 대한 방책이 없었던 스웨덴은 당황하였고, 러시아에 이어 덴마크까지 선전포고하자 결국엔 핀란드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하고, 강제적으로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국은 대륙이 봉쇄되자 오히려 신대륙과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교역을 늘려갔고, 결국엔 대륙봉쇄령은 영국에 별타격없이 유럽 대륙만 묶여버렸다.
한편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새로운 전쟁 기운이 감돌았다.
영국과 전통적인 동맹국인 포르투갈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반발하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애초에 포르투갈은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에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적대했으나 스페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버리자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처음엔 강력한 나폴레옹이 두려워 제대로 반발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나폴레옹은 앙도슈 쥐노에게 3만의 군대를 주어 침공하자 영국과 동맹을 맺고 저항을 하게 된다.
비록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여왕의 섭정인 주앙이 애초에 반격할 생각을 버리고 1만명의 왕실인사들과브라질로 도피해버려 무주공산이 된 포르투갈을 손쉽게 점령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점령한 기회에 비록 동맹이지만 이베리아 반도에 영향력이 상당한 스페인을 복속하기해서 스페인 북부에 군대를 주둔시켜 버린다.
이에 스페인 국왕은 카를로스 4세는 분노하였고, 스페인의 저항이 시작되고 만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도 말만 저항하였고, 몰래 남미로 도피하려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잡히고 만다.
이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강제 퇴위하게 되어 버린다.
한편 스페인 진압을 위해 프랑스에서는 조아생 뮈라가 파견되었다.
조아생 뮈라는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스페인 국왕 일가를 감금해버리고 민중 봉기도 잔혹하게 진압해버린다.
이에 스페인 전체에 반감이 거세지자 나폴레옹은 뮈라를 나폴리 왕위를 주어 이탈리아로 보내버리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국왕 호세 1로 올려버린다.
이에 스페인 국민들의 반감은 더 거세어졌고,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 수복을 위해 영국이 리스본에 군대를 상륙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민중 봉기로 호세 1세는 도망을 가고 포르투갈 파견 프랑스군도 일시적으로 철수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고, 스페인의 봉기를 잠재우는데 성공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첩보에 급히 파리로 귀환했다.
한편 포르투갈로 파견된 프랑스군은 아서 위즐리가 이끄는 영국군과 일진일퇴의 교전을 벌였다.
아서 위즐리는 포르투갈군의 지휘권도 부여받아 반격을 시작하였고, 포르투갈의 항구를 통해 계속적으로 영국군과 물자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방어선이 형성되자 나폴레옹은 앙드레 마세나를 파견하지만, 아서 위즐리의 분전으로 결국 마세나마저 철군을 하고 만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는 격랑에 빠져버리고, 훗날 이 혼란은 프랑스 후방의 안전장치가 제거됨으로써 나폴레옹 몰락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4. 5차 대 프랑스 동맹 전쟁
이베리아가 서서히 혼란에 빠져들어가는 1809년, 나폴레옹에게 당한 후 프란츠 2세는 프랑스에 복수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명장 카를 대공을 국방의장에 임명하여 군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스페인에서 혼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곧장 영국과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가한다.
제 5차 대프랑스동맹 전쟁의 시작이었다.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20만명이 라인강을 건넜다.
이에 이베리아 반도 문제로 스페인에 가있던 나폴레옹은 급히 파리로 귀국하였고, 18만의 부대를 조직하여 반격에 나섰다.
프로이센의 입장을 확인한다고 카를 대공의 부대가 지지부진하는 사이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후 폴란드 지방의 라쉰전투와 라인강변의 에크뮐 전투에서 승전보가 전해오면서, 5월 13일 빈으로 곧장 진군하여 포위한지 일주일만에 빈을 함락시켜 버린다.
나폴레옹이 빈을 함락시키는 동안 잠시 군을 뒤로 물린 카를 대공은 도나우강의 다리를 무너뜨리고 주둔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도나우 강을 도하하였고, 카를 대공군과 나폴레옹은 아스페른과 에슬링에서 대격전을 벌인다.
치열한 격전을 벌였지만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의 용병술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나폴레옹이 직접 선 전투에서의 최초의 패배가 되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장수들 중 자신의 친우이자 폐하라는 호칭 대신 너라는 호칭을 쓰는 장 란이 이번 전투로 그만 전사하고 만다.
나폴레옹에게는 전투의 패배보다도 더 큰 충격이었다.
군을 재정비한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과 바그람에서 다시 한 번 격돌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4만 가량의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나폴레옹측도 승리하긴 하였으나 3만 가량의 병력을 잃고 만다.
바그람 전투 후 오스트리아는 전쟁 의지를 상실하였고, 1809년 10월 14일 평화 협정 조약을 맺는다.
이 협정 조약 이후 나폴레옹은 황후 조제핀과 이혼하고, 18살의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와 정략 결혼을 맺는다.
마리 루이즈는 다음 해에 나폴레옹의 후계자인 나폴레옹 2세를 출산한다.
오스트리아와 협정 이후, 새장가와 태어난 아들을 돌보면서 이베리아 문제와 내정에 치중하던 나폴레옹에게 급보가 날아든다.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탈퇴하고 영국과 재차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다시 대군을 조직해 러시아를 응징하기로 결정하고 러시아 원정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원정이 자신의 몰락의 시초가 되리라곤 출정 당시 나폴레옹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제 5장.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
1.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몰락의 시작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방에 바르샤바 공국을 건국해버리자, 러시아는 이에 불만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예카테리나 대제부터 프로이센과 폴란드를 분할했기 때문이었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급격히 하락하였다.
결국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 봉쇄령을 철회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이에 유럽이 들썩이자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한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루이 다부를 비롯한 자신의 휘하 장수들을 모두 소집하고 프랑스 대육군 30만, 폴란드군 10만 라인동맹군 10만, 이탈리아군 2만, 그리고 위성국의 부대 3만으로 총 56만의 대군을 소집하여 러시아 원정을 나선다.
유럽 역사상 유래없는 대규모 원정대였다.
이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도 유럽최대의 영토와 인구수를 가진만큼 40만에 가까운 병력을 모집한다.
하지만 너무 넓은 영토였던 만큼 막상 소집된 군대는 약 20만 정도였으며, 나폴레옹군의 1/3 정도였다.
러시아 방어군 사령관에 임명된 드 톨리는 나폴레옹과 교전을 철저히 피하며 후퇴를 동쪽으로 계속 후퇴를 한다.
하지만 후퇴를 하면서 지나간 지역에는 곡식, 가옥들을 모두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선택했다.
드 톨리의 후퇴에 나폴레옹군은 손쉽게 리투아니아 지역으로 진군하였으나 속으로는 곪아들어갔다.
우선 대군에 대한 보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현지 보급을 할려고 했지만 도착할때마다 남는게 없으니, 서서히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어갔다.
드 톨리의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도망만 다니는 것처럼 보였기에, 러시아는 수보로프의 제자 쿠투조프를 새롭게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쿠루조프는 드 톨리의 전술이 옳다고 여겼지만 여론의 뭇매에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 외각 보르디노에서 전투를 벌인다.
치열한 공방끝에 탄약을 전부 소지한 쿠투조프는 퇴각하였고, 사상자가 4만이나 난 나폴레옹 추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하지만 이미 쿠투조프가 모스크바 시민들을 모두 데리고 철수했기에 모스크바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평생 처음있는 일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곧 크레믈린 궁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둔했다.
2일 뒤 모스크바에 큰 화재가 발생하는데, 자연 방화설과 러시아군 방화설이 있지만 자세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대 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버리자 나폴레옹군은 모스크바에서 결국 철수를 하게 된다.
60만 대군을 먹일 물자와 식수는 바닥이 났고, 말들마저 굶주려 죽거나 전부 잡아먹게 되고, 알렉산드르 1세는 협정에 관한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철수를 결심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추위때문에 나폴레옹이 철수를 했다고 오해를 하지만, 사실 철수 시점인 10월에 한파가 없었다.
나폴레옹의 철수 요인은 물자의 바닥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철수하자 쿠투조프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나폴레옹군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피말리는 추격전 끝에 러시아는 크라스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때 러시아군의 피해는 5천명이고, 나폴레옹군은 4만 중 1만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60만 원정대는 이 퇴로를 돌파하다가 전부 이탈하거나 전사하는 바람에 60만 원정대가 4만으로 감소했다.
물론 점령지에 주둔 시킨 병력이 엄청 많아서 모스크바에 입성했던 부대는 14만 정도였다.
그래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건 확실하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다시 신병 20만을 징집하여, 부대를 재건하려고 하였지만 기병의 손실은 매꾸지 못했다.
거기에 나폴레옹의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2. 6차 대프랑스 동맹과 라이프치히 전투
나폴레옹의 패전 소식에 영국, 스웨덴, 프로이센, 러시아가 6차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혼인동맹 관계였던 오스트리아도 결국 협정을 철회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였으니, 그는 뤼첸과 바우첸 전투에서 동맹군을 격파함으로써 건재함을 과시했다.
유럽은 나폴레옹의 저력에 다시 두려워했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군 중 프랑스 대육군 30만의 상실은 너무 컸다.
신병 20만의 전투력은 이전 정예 부대에 한참 못 미쳤으며, 나폴레옹은 승리 후 부대의 재편성을 위해 임시 휴전을 맺지만 이건 오히려 동맹군의 위력만 키워주게 된다.
이때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전선은 결국 아서 위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무너지고, 아서가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게 된다.
이에 동맹군도 다시 재결집하여 20만의 러시아군을 위주로 군을 편성하여 다시 프랑스로 진격을 개시한다.
이후, 나폴레옹과 직접 치룬 드라스덴 전투를 모두 제외하고 승리를 거두는데, 나폴레옹군은 19만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탈리아측에서 오는 원군은 나폴리왕으로 있던 조아생 뮈라가 자신이 황제가 될 욕심을 가졌기에 함부로 병력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19만의 군대로 동맹군의 33만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에서 운명의 대격전을 벌인다.
라이프리치 전투는 단일 전투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최대의 전투였다.
양측 병력 수만 50만에 달했다.
3일에 걸친 격돌로 나폴레옹군은 4만의 사상자와 포로 5만, 동맹군은 5만 5천의 사상자가 났다.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라인강 동편 전부를 잃어버리고, 본토인 프랑스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거기다가 중요한건 자신의 무적신화가 결국 깨져버린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남은 군대는 8만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라인동맹이 해체되고 연방소국들이 전부 반프 동맹에 가담해버린다.
1813년 12월 동맹군은 네덜란드 지역을 포함해 프랑스 본토로 진입하였고, 결국에는 수도 파리가 함락되버린다.
100년 전쟁이 있던 1450년대 이후 350년만에 수도를 내어주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 프랑스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게 되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섭정에는 황비 마리 루이즈가 맡는다는 조건과 정복전쟁 이전의 영토로 모두 돌리는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는다.
1814년 4월 나폴레옹은 권좌에서 물러나 엘바섬으로 유배를 가고, 프랑스의 제위는 그의 아들에게 돌아가는듯 했으나 동맹군의 반대로 결국에는 영국에 망명 중인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돌아오면서 부르봉 왕조가 복권되었다.
3. 빈 체제의 유럽과 황제의 귀환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후,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네트리히의 주도 아래 동맹국이 빈에서 회의를 개최했고 일명 빈체제에 의해 유럽이 다시 재편되었다.
다시 재기를 노리던 나폴레옹은 1815년 영국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에 엘바섬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프로방스에서 산길을 이용해 파리로 이동했다.
이에 놀란 루이 18세는 병력을 파견해 사살명령을 내리나,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와 그를 존경하던 시민과 군대가 오히려 그에게 충성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진군하자 루이 18세 및 왕족들과 귀족들은 파리를 버리고 도망을 가고, 파리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내부 안정을 위해 나폴레옹은 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하지만, 나폴레옹의 두려움을 잘 알던 동맹국은 그의 부활을 반대했고 7차 대프 동맹을 결성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새롭게 군을 편성했고, 그의 휘하에 12만 대군이 집결했다.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한다.
이에 영국의 사령관 웰링턴은 요새를 강화하며 나폴레옹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 월털루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월털루 전쟁 당시 심각한 인재난을 겪는데, 자신 휘하의 용장들 중 믿을 만한건 루이 다부 뿐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건강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결국 대전투는 시작되었다.
월털루 전투는 초반에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밀어부치며 승기를 다 잡은 상태였다.
물론 긴 시간의 전쟁끝에 서로 크게 지쳐있었지만, 나폴레옹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멍청한 장군 그루시가 프로이센군 추격에만 몰두하여, 프로이센 기병대를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이 멍청한 한 명의 장군의 실수로 나폴레옹의 운명은 끝나게 된다.
나폴레옹의 자랑 제국 근위대가 전멸을 각오한 끝에, 그를 구출하는데 성공했으나 나폴레옹의 부대는 괴멸되었고 재기의 발판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의 자랑인 장수들도, 근위대도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파리로 쓸쓸히 돌아온 그는 재기에 성공한 루이 18세의 왕당파에게 위협받게 되었고, 국민의 지지도 잃어버렸다.
결국 미국 망명도 실패한 그는 쓸쓸히 제위를 반납하고, 다시 유배를 가게 된다.
영국은 두 번 다시 그가 재기 하지 못하도록 서아프리카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된 나폴레옹은 결국 1821년 5월 5일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현재 그의 체내에서 다량의 수은과 중금속 발견이 되어 독살설이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후 유럽은 다시 오스트리아 재상 메네트리히 주도에 빈체제, 즉 메네트리히 체제로 불리는 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는 두 번 다시 나폴레옹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다.
비록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그가 남긴 제도, 법률, 업적으로 그나마 지금의 프랑스가 있게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를 프랑스에서는 별 취급을 안하며, 오히려 외국에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프랑스가 한 대륙을 석권한 것은 나폴레옹 시대 말고는 없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한 영웅의 파란만장하고 웅장했던 일대기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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