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조선 중기 희대의 간신, 김자점
1588년(선조 21년)에 김함이라는 자가 한 아이를 얻는다.
그리곤 이름을 김자점(金自點혹은紫點)이라고 지었는데 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함이 말단 관료일때 어느 고을에 사또를 부임하면 하루도 못 넘기고 죽기에 함이 자원해서 그곳으로 가게된다.
함은 명주실을 문에 걸고 밤새도록 담배를 피웠는데 어떤 큰 물체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다가 담배연기에 달아났다.
그런데 날이 밝기까지 계속 그 상황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명주실을 따라가니 큰 지네가 있었는데, 그 지네를 패고 끓여서 죽여버렸다.
그 걸 지켜보던 함은 눈에 빨간 점이 생겼고, 부인과 합방한 후에야 점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날 밤부터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점이 있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설과 달리 김함은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고 죽었다.
김자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그는 안동 김씨였다.
김자점은 고려의 명장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이면서, 김질의 5대손이었다.
김질은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었지만 마음을 바꾸어 세조에게 고변했던 인물이었다.
김자점 때문인지 구 안동 김씨는 김자점 이후 몰락하고 만다.
자점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에 능했다고 하며, 또한 어릴 때부터 묵암(默庵)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성혼은 김종직, 조광조의 학맥을 계승한 사림파 성리학자였다.)
또 성혼의 문하에서 글재주로 이름을 날렸고 정철, 조헌 등과 동문수학했다.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김자점은 문과를 거치지 않고 음서로 병조좌랑이되지만, 광해군때 인목대비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다가 대북파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난다.
당시 광해군은 영창대군, 능창군 등을 죽게 하면서 능양군(훗날 인조)의 원한을 사게되었는데, 이는 곧 반정의 화두로 작용했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영창대군이 의문사하면서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거사 준비를 도모했고, 능양군의 외삼촌이었던 구굉이 이서와 구인후, 신경진, 최명길 등과 행하려 했지만, 장만이 위험하다 여겨 구굉의 의견을 듣지 않고 수포가 된다.
구굉과 이서가 주도했지만 실질적으로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이 반정공신에 오른다.
김자점은 1등공신이 되었는데 사실 큰 일을 한건 아니다.
그럼에도 1등공신이 된 이유는 광해군 때 실세였던 김개시라는 상궁에게 뇌물을 많이 줘서 광해군의 총기를 흐린 덕이었다고 한다.
김상궁과 김자점의 연결고리는 자점의 사돈인 이귀의 딸이 김상궁의 총애를 받는 무수리였다는 것에서 기인하고, 만약 뇌물이 없었다면 광해군의 대처는 늦지 않았을 것이고 반정은 실패로 끝날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반정은 성공했고, 인조의 시대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괄의난 이후 세자빈으로 윤의립의 딸이 간택되자 서인들은 국혼물실의 당론에 따라 반대했다.
이때 김자점은 특진관 자격으로 윤의립의 딸이 난에 가담한 윤인발의 사촌 누이라는 이유로 역적의 친적이라 주장하며 반대했다.
인조는 비빈 간택에 공신들이 끼어드는 것을 불쾌히 여겨 삭탈관직과 문외출송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사간원의 건의와 우의정 신흠의 변호, 정묘호란으로 인해 군사 적임자가 필요하여 김자점을 다시 등용한다.
정묘호란때 자점은 순검사겸 임진수어사에 임명된다.
그리고 왕을 호종한 공으로 도원수의 자리에 올라 서북방의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이렇게 자점은 삭탈관직의 위기도 운으로 극복해낸다.
하지만 그의 무능함은 병자호란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청군의 남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또 정보력이 너무나도 허접했고, 도성 근처에 모인 수만명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배후를 치자고 주장했지만, 병력이 적다며 거부했다.
이는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기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도원수로써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벼슬을 빼앗기고 문외출송 당했으나 인조는 친청과 반청의 정쟁에 피로를 느끼고 위리안치된 김자점을 중용해서 그것을 잠재우려했다.
자점은 서용되어 강화부유수가 되고 손자 김세룡이 인조의 서녀이자 귀인 조씨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 세력을 키우며 또한 권력을 확장하게 된다.
김류와도 결탁하고 승록대부로 승진, 병조판서가 되며, 우의정, 어영청도제조 등을 지냈다.
한번의 유배를 겪고 엄청난 권력을 얻게된 김자점은 완전한 권력의 정점을 찍어간다.
심기원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최명길, 심기원 등을 도태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동시에 청나라를 다녀오고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신, 역관들과 자주 만나면서 정치 세력을 만들고, 청의 후원을 얻고 권력의 기반으로 삼는다.
권력이 매우 거대해진 김자점은 사돈인 숙원 조씨가 소현세자, 세자빈 민회빈 강씨 등과 갈등하던 차에 숙원조씨와 결탁하고, 인조의 의구심을 받던 소현세자의 제거에 가담한다.
또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를 죽이려는 내심을 눈치채고 인조의 수라상에 고의로 독을 넣고 혐의를 강씨에게 넘겨 혐의를 씌운다.
결국 소현세자빈은 사사되고,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게 했다.
또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임경업을 청관리를 시켜 죽게 했다.
그 이유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을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임경업이 이를 발설할까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죽게 한다.
그리고 좌의정이 되었다가 영의정이 된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김자점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효종이 즉위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친청을 하며 빌붙어 권력을 누렸지만, 다들 잘 알다시피 효종은 북벌론을 주장했다.
인조가 죽은지 6일만에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효종이 자점이 아바마마가 승하하실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며 충성심의 부족이라며, 광양으로 귀양을 보내려 하자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 모의와 인조의 능지문에 명의 연호를 썼다는 사실을 청에 몰래 알렸다.
이로 인해 청은 조선쪽으로 군대를 배치하고 조선을 추궁했다. 다행히, 영의정 이경석이 문제를 해결하여 침공을 면하였다.
김자점은 청이 침공한 틈을 타 효종과 정적을 제거하고 귀인 조씨의 장자인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틀어지고, 의빈인 김세룡을 옹립하려 했다.
효종이 자점의 아들 김식을 친국하여 공모자들을 밝혀내 여러 무장들이 희생되었다.
소용 조씨가 장렬왕후와 장렬왕후의 조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들통남과, 자점의 아들 김익이 군사를 동원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한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과 사형에 처해진다.
야사에 의하면, 김자점의 시신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갈갈이 찢어서 항아리에 나눠 담아 조선팔도에 항아리를 하나씩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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