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스웨덴 기자 시선의 구한말 조선
도쿄에서 신문기자를 하고 있는 아손 그렙스트는 러일전쟁에 관심을 갖고 조선으로 가려고 했으나, 기자 신분으로 입국이 거절당하자 양말 상인으로 신분을 위장해서 부산항으로 들어갔다. 일기는 부산항에서 입국하면서 서울로 올라가서 생활할때까지 내용을 기록했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본 만큼,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 조상들의 슬픈 역사가 담긴 것을 외국인의 눈에서 보아 다소 희화화 된 점도 있으니 양해 부탁하며, 당시 외국인의 눈에는 구한말 조상들이 어떠했는지 보도록 합시다.
코레아인의 인상
전형적인 몽고인 상의 그들은 온화하고 무관심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코레아 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있었다.
일본인의 특징인 비굴함과 지나친 예의 차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산에서 코레아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거리는 좁고 불결했으며 가옥은 낮고 볼품이 없었다. 일본에서처럼 상점이나 눈길을 끄는 절도 오래된 절도 없었다. 사방에서 악취가 진동하였으며 문밖에는 집에서 버린 쓰레기가 쌓여있고 개들 또한 먹을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하수도가 있는데 끈적끈적한 바닥에서 온갖 종류의 오물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는 머리가 지저분한 애들이 노는데 어제 그저께 세수한 얼굴이 결코 아니었다.
코레아 사람들은 낙천적인 민족이지만 이들은 일하는 것을 증오한다.
따라서 코레아 풍부한 어장이 있는것과 코레아인의 생선 수요가 높은것에 덕을 보는 것은 부지런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다.
코레아인들은 기차를 구경나오러 온 흰색 일색(두루마기옷)이었다.
기관부는 일장기로 치장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처음 역에 나왔고 따라서 기관차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기관차의 역학에 대해 조금도 아는게 없어서 대단히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들 중 가장 용기 있는 사나이가 큰 바퀴중 하나에 손가락을 대다 주위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그 용기 있는 사나이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기관사가 장난 삼아 환기통을 연기를 뿜어내자 도망가느라고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 무리들은 한뗴의 우둔한 양들을 연상케 했다.
객식 창가에 서서 이 소동을 지켜보았다. 가장 웃음이 나오는 것은 키가 난쟁이처럼 조그만한 일본인 역원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코레아의 아이들을 다루는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본인만 보면 두려워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갔다.
키작은 섬사람들은 손에 회초리를 쥐고 기회만 있으면 맛을 보여주었다. 그 짓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멍청하고 둔할 때 때려주는것만큼 속 후련한일이 또 어디 있을까?
부산 역의 북새통에서 마지막 본 장면은, 그 무리에서 가장 키작은 일본인이 키크고 떡 벌어진 한 코레아 사람의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면서 내동이치자 , 자빠진 그 큰 덩치의 코레아 사람이 땅에 누워 얻어맞은 아이처럼 징징 우는 모습이었다.
코리아의 시골 모습, 그리고 다리
출발한지 한 시간쯤 지나자 창밖의 경치가 변하였다.
동네 어귀에는 여인들이 강가에 꾸부리고 앉아 빨래를 했다.
기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달려가자, 그들은 하던일을 멈추고 아비규환으로 도망가며 숨을곳을 향해 뛰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들 뒤를 따랐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달려가자 강가에 있던 한무리의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다리를 건너기 위해 서둘렀다.
그 북새통에 20여명이 물속을 빠져버렸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코리아의 시골에서는 다리를 튼튼하게 짓지 않는다.
좁은데다 형편없었다. 이 다리들은 보통 통나무 위에 막대와 지푸라기 나뭇가지를 깔고 진흙으로 덮는다. 보수공사라 보잘것 없어서 비만 쏟아져도 무너지기 일쑤다.
일본군 대위가 말하는 코레아
기차에서 일본인 대위가 식사에 초대했다.
그와 재밌게 대화를 하면서 이 나라 민족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망국에 운명에 처한 민족입니다.”
그는 대답했다.
“장래성이 없고 중국인보다 더 엉망인 민족입니다. 1천년전 잠든 바로 그자리에 아직도 머물러 있습니다. 더 나쁜건 잠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다리로 일어나기를 원치 않으며 독립을 바라지 않습니다. 될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기를 바라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 걱정없이 평화롭게 사는것이지요."
"그들은 일 슬픔 기쁨은 나눠가지려 하면서 수입은 독차지 하려고 하지요. 코레아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는 생존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코앞에 닥쳐야만 일을 합니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자체를 서럽게 생각하며 아무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야할 시간에 일을 해야하는 것을 시간적인 손실로 여깁니다. “
조선의 양반, 체면 유교 문화
코레아의 선비는 어떤 까다로운 사람의 눈에 노동으로 보일만한 모든 일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옷을 입어도 안되며 담뱃불도 스스로 켜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 없이는 말 안장에 제 힘으로 절대 오르지 않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면 누가 와서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는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합니다.
선비는 사사로운 일에 장사에 관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장사가 노동이고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코레아의 유교 예절은 의식적으로 속이려 들지는 않지만 허무맹랑한 이론으로 결론을 맺는 논법은 사람을 놀라게 할만합니다.
공직자들은 체면을 차리느라 가마를 타고 다닙니다. 그 가마속에서 방석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하루에 10시간을 거뜬히 견딥니다.
나라의 고위층 관리들은 체통을 드높이기 위해 네명의 가마꾼을 둡니다.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선비들은 자기들이 가난해보이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허를 보여서는 안되며 반드시 격식을 가추어야 합니다.
조선의 가정 문화
코레아 양반의 예의 철칙중 하나가 부녀자에게 무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내를 부를땐 적당한 호칭이 없고 이름대신 “거시기”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코레아인에게는 모두 소원이 있는데 자신이 죽은후 제사지낼 아들을 두는것입니다.
죽은 부모나 조상의 귀신에게 제사는 코레아 아들들이 받아들여야할 가장 심각한 의무입니다.
백인만 보면 신기해하는 코레아인
코레아에서 백인은 날마다 볼수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철저하게 관찰되었고 어디를 가든지 많은 무리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은 내가 불쑥 한걸음을 내디디면 그들은 두발짝 물러났고 못된짓을 저지르고 매를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개에게서나 볼 수 있는 표정을 읽을수 있었다.
조선 살림집
밤에 길에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개들만이 외롭게 먹을것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코레아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개들이 청소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코레아 사람들은 개를 좋아한다. 개를 키우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이고 개들이 자유롭게 통행할수 있도록 대문에는 개구멍이 항상 마련되어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창호지 바른 문 뒤로 키가 작고 마마 자국이 있는 흰수염의 할아버지와 대화를 한 후 그는 문을 열어 길을 터주었다.
방안은 숨이 막힐정도로 더웠고 오물과 마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방을 베게 삼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뒤에 눈을 감았으니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오물과 마늘 냄새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으며 옆방 코고는 소리는 두배로 많아진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진흙 방바닥은 딱딱하고 뜨겁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코레아의 모든 주택은 이런식의 난방 구조를 가지고 있다. 코레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었다.
땔감으로는 나뭇가지, 나뭇잎, 가축의 배설물이 이용되고 연료가 부족한 탓에 도시의 경우 4분의 1 이 연료비로 소비되는게 보통이었다.
환기를 시켰으나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안에 아주 배어있었다.
심해질때가 있어 그럴때는 속이 뒤집히려 했다.
대구 인상
대구 서민 생활은 별로 활기가 없었다. 주로 남자 어른과 아이들이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나온 여인들은 아주 못생겨 차라리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명에 두 명꼴로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 것 같았다. 코레아에는 이 병이 흔해서 해마다 대규모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조선인들의 일하는 태도
길을 걷다가 톱으로 통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톱질을 하는데 5분 정도 일을 하더니 충분히 힘을 썻다고 생각했는지 15분동안 휴식을 취했다.
일이 다 끝나려면 두시간 정도가 걸릴 것 같았다.
코레아인들은 작업시간을 충분히 책정한다는 것과 아무리 일을 천천히 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은 너무 무리한다고 생각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와 미신
내가 공주 시내로 들어가자 군중들은 거리를 두고 나를 따랐고 사진기에 겁먹은 눈초리를 던졌다.
내가 사진기의 초점을 그들에게 맞출 적마다 비명을 지르는등 두려워하는 몸짓으로 줄행랑을 쳤다.
아마도 미신적인 생각에 이 까만 상자속에 악귀가 들어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지게꾼
코레아의 지게꾼들은 짐이 115킬로그램을 넘지 않을 경우 아무 도움도 필요없다.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량의 짐을 장거리 운반하는 능력과 교통수단의 부재, 그리고 엉망인 도로 사정은 코레아가 수백년동안 대부대의 행상을 가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비록 예전보다 장사하기가 여렵지만 지금도 행상이 존재하고 있다. 일본 침입자들은 현대적인 공급기술을 들여왔다. 품질좋은 코레아의 수공업품들은 일본이나 미국 , 유럽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된 쓰레기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경쟁이 심해지면 약삭빠른자가 유리하다.
코레아인들이 눈을떠서 시대에 적응할때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릴것이고 그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되는가를 인식하기전에 구제될길 없이 낙오자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일본을 향한 코레안의 원한
일본인이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로는 토지 강점 뿐만 아니라 일본 당국이 실시한 이민 정책의 실수다. 일본 군대가 엄격한 규율과 사전에 계획된 조심성으로 코레아 사람들의 신뢰를 살수 있었지만 군대 뒤를 따라온 수많은 개척민들은 군대와는 딴판 이었다.
그들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정도의 호전성을 가지고 뻔뻔스럽게 행동했다.(일본 개척민의 불량함은 유명해서 독일 공사관도 언급한다.)
일본 군대 문화
기차가 수원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 사병들이 승차하여 곧바로 일본군 대위와 사병들간에 인사가 오갔는데 사병들은 차례 기립하여 대위 앞으로 와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대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답례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명함이 짐속 깊이 들어있는지라 이를 건넬수 없음에 유감을 표시했다.
인사가 끝난뒤 일행은 모두가 바닥에 앉아 극진하게 예의를 갖춘 대화를 시작하였다.
대화 분위기는 매우 좋았으며 이러한 모습은 일본 군대에서 장교와 사병간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어떤 다른 나라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볼수 있겠는가?
의문의 수프
여관은 앞이 트인곳에 위치하였다. 조그만 처녀가 문 열어줘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6시경에 여관집 식구들이 기상하였다. 30분후에 아침식사가 나왔다. 몇 조각의 고기가 들어가 있는 달콤한 수프와 채소가 아침식사의 전부였다.
내가 대위에게 어떤 고기로 수프를 끓였는지 묻자 대위는 처녀에게 물었다.
처녀는 “네코”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나는 거리로 뛰쳐나가 조선 여관과 일본 여관 철로 엄동의 겨울 심지어 세상에 대해서까지도 마구 험담을 했다.
그러나 방금 먹은 수프에대한 응분의 대가가 될 만한 욕지거리를 찾지 못하였다.
그 대신, 수프는 들어갔던 나의 신체기관을 역순해서 자연으로 회귀하였다.
코레아의 산업
코레아에는 산업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여러 종류의 무명과 삼은 주로 농촌의 볼품없는 베틀에서 제작되며, 이 외에 저질의 비단이 생산될뿐이다. 염색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행해진다.
낙천적인 풍조와 노동을 중시하지 않는 태도는 필수 불가결한 것외의 물품을 생산하는데 전혀 정력을 쏟지 않는다.
코레아의 종교
윤산갈(조선인 중 영어 잘하는 조수)은 나를 선교 학당에 데려가 책임자인 피에르에게 나를 소개했다.
인쇄소를 하나 경영하고 있는데 영어 월간지도 발행하고 성경 번역판은 벌써 10만부가 나갔다고 한다.
“기독교는 코레아 사람에게 잘 맞는 종교입니다.”
그가 말했다
“두뇌가 명석한 민족이고 이들이 빠져든 무기력 상태(조선, 유교)에서 깨어날 수만 있다면 원래 타고난 탐구심에 다시 불이 붙을 겁니다."
코레아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에, 사고를 할때는 불교에 속하며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귀신숭배자가 된다고 한다.
불교는 코레아사람들에게 공식상의 종교 구실밖에 할수 없고 유교는 한갓 정치 도구가 되버렸다.
그러나 이 두 종교는 코레아에서 내려오는 귀신 숭배사상과 융합되어 하느님을 절대자로 모시는 새로운 신앙으로 탈바꿈하였다.
서울에 대한 인상
서울이 코레아에서 최상의 거주지로 간주되는 이유 중 하나는 최고로 꼽히는 묏자리가 서울 근처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나라에서 이런 사실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을 목격한 이방인에게 서울이 주는 인상은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의 작은 도시와 비교해보아도 서울에서 볼수 있는 구경거리는 별로 없고 보잘것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울 거리거 산보할 때 볼만한 건축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부자 노인과 대화
부자로 소문난 사람(윤산갈의 친척) 집에 초대 받았다. 하지만 이 방문은 나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바깥 대문을 통해 아담한 뜰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악취를 풍기는 하수로가 길밖을 향해 나있었다.
부자로 소문난 노인과 대화는 윤산갈의 통역에 의하여 이어졌다.
“잘 오셨습니다 .손님께서는 얼음이 녹지 않는 나라에 오셨다는게 정말입니까?”
나는 스웨덴의 겨울과 여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곳은 겨울내내 눈한번오지않고 얼음도 얼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인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다.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스웨덴)이 귀신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서 귀신들이 특별히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입니까?"
그는 궁금해 하며 그런 혜택을 위해 귀신들은 어떤 종류의 제물 요구하는지 알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통역이 대답하자 어떻게 대답을 했냐고 윤산갈(통역)에게 물었다.
“당신 나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요. 그리고 예수교인들은 귀신을 섬기지 않고 만사를 뜻대로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스웨덴에서 호랑이에 대해 어떤 조처를 취하고 코레아처럼 호랑이가 큰 피해를 주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무슨 수로 내가 마마에 걸리지 않았는지 알고자 했다. 그의 식구 모두 마마를 앓은적이 있었다.
코레아의 떡장수
시장 한구석에는 자그마한 난로 주위에 몇사람이 둘러 앉아 떡을 찧고, 밤을 굽고 있었다. 농부나 구걸로 몇 푼 모은 아이들이 주 고객이었다.
떡은 양념이 되서 매웠으며 무척 질겨 입안에 달라붙어 떨어질줄 몰랐다. 간혹 떡장수들이 한 눈 팔면 견공들이 달려들어 떡을 물고 달아났다.
그러면 그때마다 대소동이 일어나곤했다. 떡장수들은 소리지르며 야단법석을 떨며 귀머거리의 혼까지 빼놓을 정도로 소란을 피웠다.
서울의 거지들
서울에서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거지 아이들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은 다 떨어진 옷에다 천조각을 덕지덕지 기워 몸에 두르고 있어서 마치 하나의 넝마자루 같았다. 이들은 하루종일 거리를 헤매면서 동냥을 한다.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며 얼굴에는 해묵은 때가 끼어 더럽기 짝이 없다.
귓바퀴속에는 진흙이 가득하고, 콧구멍에서는 두 줄기의 콧물이 흘러내리며, 헝클어진 머리털은 마치 칙칙하고 보기 흉한 끈적끈적한 말갈기처럼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거지 아이들은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내며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임자를 만났다 싶으면 한줌의 동냥을 얻어내기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는데 목적이 달성되면 그들의 흐느낌은 갑자기 즐거운 비명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한 푼이라도 더 차지할 욕심으로 동전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들의 몸은 서로 엉켜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었다.
그들은 숨을 쌕쌕거리며 서로 머리카락를 잡아당기며 승냥이처럼 물고 할퀴며 녹초가 되어 아무도 싸울 마음이 없게되자 서로 합의를 보고 동전들을 똑같이 나눈 다음 다시 먹이를 찾아 사냥길에 나섰다.
이 거지들은 다리 밑에서 쓰레기와 함께 잠을 잔다.
주인 잃은 개처럼 이 쓰레기 더미에서 저 쓰레기 더미로 먹을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다니며 떼를 지어 견공들과 함께 먹이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달구지 싸움
골목들은 서로 비슷하여 분간 할 수 없었다. 사방이 담과 하수도였고, 곳곳에 개와 지게꾼이 있었으며, 연기와 악취뿐이었다.
어떤곳은 좁기가 이루다 말할 수 없어 달구지를 만나거나 가마가 지나칠때면 몸을 담에 찰싹 붙여야만 했다.
한번은 한 무리의 소달구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도 소달구지가 내 꽁무니를 따르고 있었다. 두 무리들이 서로 지나칠수 있는 틈이 없었다.
달구지 주인들은 오랫동안 누가 양보할것인지에 대해 말다툼을 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고, 이제는 아주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뱃대를 꺼내물고 느긋이 협상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시간이 한동안 지체되었고, 골목길이 트이고 다시 통행이 풀린 것은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콜레라와 유행병
물통을 나르는 사람들은 양쪽에 물통이 매달려있다. 식수는 근처의 우물에서 가정으로 운반이 되는데 이 우물들은 위생적인 면에서 볼 때 최상급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여인네들은 우물 바로 주위에서 빨래를 하고 채소나 생선도 다듬었다.
이때 나온 찌꺼기들이 다시 우물로 흘러 내려가 우물물을 더럽혔다.
식수에 대한 부주의와 무관심이 바로 서울에 그렇게 자주 만연되는 콜레라와 기타 유행병의 원인이라 한다.
한의학의 미개함
독일인 분쉬 박사는 진찰실과 수술실을 차려 코레아인들을 상대로 의료사업을 하고 있었다.
처음 2년동안에는 겨우 43명의 환자가 그의 의술을 믿고 찾아왔다. 대부분 피부병에 시달렸는데 이 독일인 의사를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마지못해 그의 처방약을 보용하였다. 병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면 약복용을 중단하고 진찰 받으러 오지 않았다.
“이 불쌍한 사람들이 받는 괴로움이 어떠한것인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의 무지와 미신은 끝이 없습니다. 무당이나 도술사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지요. 이들은 돌팔이 의사들보다 더 형편없는 의술(한의학)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처방하는 약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것들이라 말로 표현할수 없습니다”.
분쉬 박사는 내게 그 책 <의사들을 위한 지침>을 건네주었고 나는 영국인 선교사가 번역한 그책에 몰두하였다.
가장 괴이한 치료법으로는 쇠똥을 바른다는가, 해바라기 씨를 달여먹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어떤병은 환자가 복숭아 씨를 이등분하여 한쪽에는 ‘해’라는 달을 쓰고 다른 한쪽에는 ‘달’이라고 써서 꿀을 발라 다시 붙여 단숨에 삼키면 바로 낫는다고 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치료법으로 작은 개구리 세마리를 산채로 삼키면 모든 종류의 복통에 즉효가 있다는 처방이다.
만약 병세가 극도로 심할 때 삶은 까치 한 마리나 네 개의 구운 개발을 먹으면 좋다했다.
일반적으로 기운이 없는 애들은 마흔 살된 여자의 머리카락을 넣고 충분히 끓인 뜨거운 물을 마셔야 된다고 했다.
책에 의하면 코레아에 만연되어있는 매독 또한 간단하게 치료할수 있다.
세마리의 메뚜기를 잡아 그 날개에 꿀을 바른다음 말려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3등분한후 술에 섞어 매일 아침 공복에 복용한다.
이런 것이 소위 코레아의 의술이었다. 1천 년전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코레아인들은 자기 나라의 의술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분쉬 박사가 말했다.
“자주 있는 일로 코레아인들은 내 처방을 따르는 동시에 자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치료법을 실시합니다. 만약 병이 나으면 내 처방이 효험을 본 것이라고 절대 믿지 않고 한방의 치료법에 그 명예를 돌립니다.”.
가슴을 드러낸 코레아 여자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가슴까지 드러내놓고 있었다.
극동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코레아 의 여성들은 바깥 세계와 격리된채 살아간다. 즉 차단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차단의 심도는 여성의 가정이 사회 어느 계층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귀족층 여성들은 그 차단이 절대적이고 중산층도 엄격하게 지켜지지만, 귀족층보다는 부드러운 편이며, 비천한 여성들은 차단의 구속을 전혀 받지 않는다.
터키의 할렘이라 할지라도 코레아의 여성이 기거하는 안채보다 더 완전하게 보호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코레아의 양반 부인이 친구를 찾아가려면 남편에게 방문장소, 시간, 목적 등을 상세하기 알려야 한다.
이 모든 절차를 밟은후 완전하게 가릴수있는 가마에 올라 방문길에 나선다.
체통이 있는 집의 아녀자라면 절대로 걷는법이 없다. 가마는 부귀의 상징인 것이다.
인터넷에서 조선시대 여자가 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 스웨덴 기자가 100년전 직접보고 체험한 증언과 매우 다르다.
실제 책을 읽으면 기자 아손이 직접 찍은 수많은 조선의 사진이 나온다.
코레아 눈병과 무당
나라 전역에 만연된 트라코마(눈의 결막질환)의 영향으로 장님이 엄청나게 많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직업은 무당이다.
이 무당만큼 수입이 좋은 직업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들 무당의 할일은 병자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악귀를 몰아내는 일인데 병이 심하지 않는 경우 무당은 성공한다.
재수만 좋으면 병세가 심하지 않는 환자받으면 그 무당은 나라 방방곡곡 유명하게 된다.
환자의 병세가 심하고 심상치 않다고 여겨지면 무당은 적당한 기회에 그럴듯한 트집을 잡아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살린다.
코레아의 풍수지리꾼
풍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거주하는 지방의 풍수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남자들이다.
이 직업이라는 게 타인의 무지와 미신을 밑천으로 삼는 고리대금 업자와 그 유형이 흡사하다.
왜냐하면 코레아인들은 그들의 선조를 명당에 모시지 않을 경우 온갖 불행이 자신들을 덮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손님이 풍수쟁이를 찾아와서 작고한 자신의 친척을 위해 명당을 하나 찾아 달라고 요청하면 그 풍수쟁이는 일단 손님의 집으로 가서 음식을 대접받는다. 그러면서 손님의 생활 정도를 눈여겨본 뒤에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장사 지낼 장사가 대충 물색되고 다음 작업으로 주위 지세를 조사한다. 어떤 산 하나가 홀로 우뚝 서서 주위의 지세를 내려다보는 꼴을 하고 있으면 작고한 사람의 자손이 도적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풍수쟁이는 자신의 방위표를 참조하여 무덤의 위치를 결정한다.
이 모든 것이 충분히 탐사된 뒤에야 비로소 무덤을 파고 풍수쟁이는 자신의 보수를 받게 된다.
고종과 태자
장례 행렬을 전송하고 나서 외교 사절단은 황제폐하와 배알하였다. 외교 사절단이 조의를 표하는 동안 나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볼수가 있었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편이었다. 조그만 눈은 상냥스러워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의 시선은 한곳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노상 허공을 헤매었다.
성긴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지만 노란색 옷차림에 서양의 나이트캡과 비슷한 높은 모자를 쓴 모습이 마치 상냥한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외교관들이 조의를 표할때마다 황제는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굽히곤 했는데, 내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황제에 대한 이미지와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한많은 황제에게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황제의 옆에 서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입술은 두꺼워 육감적이었고, 코는 납작했으며, 넓은 눈썹 사이로 주름살이 움푹 파여있었다. 노란 두 눈을 신경질적으로 연방 깜빡거리면서 한시도 쉴새 없이 이곳저곳에 시선을 돌려대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드디어 내가 배알할 차례가 되었다. 통역관이 나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장군(한 외교관의 도움을 받아 신분을 위장함)의 신분으로서 코레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했다.
대답하기가 꽤 난처한 질문이었다. 불현듯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게 아니라는 옛말이 생각나서 코레아 군대의 질서 정연함 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이 외교적인 답변이 황제의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고 태자도 이를 따랐다.
아손은 조선의 기생에 대해 관찰하고 싶어서 독일 공사에게 조선 기생들을 초청해달라고 부탁한다. 독일 공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평양 기생과 어떤 젊은이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코레아 기생과 데스보르데스 젊은이
“우리 젊은 외교관들 중에는 기생에게 반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불상사가 한번 일어났는데, 데스보르데스란 젊은이가 평안에서 온 기생과 결혼을 한 것으로부터 일이 비롯되었지요. 그 젊은이가 기생에게 빠져버려 저희들이 간곡히 만류해보았으니 구제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개종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 부부는 사이공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젊은 부인은 마카오에서 온 포르투갈 출신의 다이아몬드 상인과 눈이 맞아 도망을 해버렸고, 젊은 데스보르데스는 이마에 총을 쏘아 자살했습니다. 불행한 사건이었으나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 다행스럽니다.”
(아손은 조선의 사형집행과 처벌에 관심이 많아서 감옥을 방문했다.)
코레아 간수장을 만나다.
간수장은 스웨덴이란 나라 이름을 생전 들어본적이 없으며, 스웨덴으로부터 어떤 대신이 서울을 방문해 머물다가 간 사실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지도를 대강 그리고, 윤산갈(통역)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이란 나라는 유럽에 있는 강대국 중 하나며 코레아와 같은 소국에는 대신들을 파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간수는 똑바로 이해하지 못한게 확실했다. 내 등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보고 이마부분에 와서는 오랫동안 관찰을 하였다.
한동안 말이없어 벙어리가 된 줄 알았던 윤산갈이 말했다.
“간수장께서 궁금해 하시는 점은 스웨덴이란 나라가 이마에 눈이 하나만 달린 족속들이 사는 그 나라가 아닌가 하는것입니다.”
윤산갈은 통역을 했고 간수장의 말을 전했다.
“간수장께서는 스웨덴 사람들이 등에 뿔을 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간수장은 스웨덴에서는 중죄인에게 형벌을 줄 때 몸을 네조각 내는지, 아니면 수레를 사지 위로 지나가게 해서 사지를 못쓰게 만들어 해놓는지 궁금해했다.
산적 두목의 처형식
40대쯤 되어보이는 그는 턱에 수염이 텁수룩하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정도로 말랐다.
여윈몸을 넢은 누더기가 다 된 옷은 그가 그동안 살았던 감옥이 얼마나 더럽고 불겼했는지를 나타내주었다.
그는 산적 우두머리로 그의 손에 2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당시 밤에 한성 밖에만 나가도 조선에는 사람 죽이는 산적들이 들끓었다고 아손이 기록함.)
죄수를 묶는데 사용되었던 피 묻은 밧줄을 그의 다리 여러곳에 동여 맸다. 양팔을 옆구리에 묶어 한치도 움직일수 없게 하였다.
집행인은 그의 몸을 밀어 땅바닥에 고꾸라지게 하였다. 사형집행인들은 굵은 막대기를 각자 손에 들었다.
윤산갈은 새파란 얼굴이 되어 붙잡을 틈도 없이 달음박질해 사라졌다. 그 뒤 나는 사형 집행의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그 자리를 피한 윤산갈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대막대기의 용도는 주리를 트는데 있었다. 죄수 안다리에 막대를 집어넣어 집행인들은 자신들의 온몸의 무게를 막대 끝에 넞었다. 죄수가 연달아 토해내는 비명은 듣기에 처절했다. 다리뼈가 부러져 으꺠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사형수의 처절한 비명도 멎었다.
얼굴은 죽은자의 그 것처럼 핏기가 싹 가셨고 두눈은 흰쟈위만 남았고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져내렸다.
사형집행인들이 막대를 빼내고 다리뼈가 완전하게 부러졌는지 확인해도 그는 느끼지 못하는 양 죽은듯이 누워 있었다.
기절한 죄수는 한참후 의식을 회복해 신음소리를 토했다. 집행인들은 죄수의 팔뼈와 갈비뼈 사이에 대막대기를 집어넣어 이 뼈들을 차례차례로 부러뜨린 다음, 마지막으로 비단 끈을 사용하여 죄수의 목을 졸라 죽여 시체를 질질 끌고 나갔다.
외국인이 평가한 코레아의 미래
서울의 거리들을 오랜 시간 산보 한 후 피에르 형제는 호텔까지 나를 동행했다. 우리는 엠버얼리씨와 어울려 유쾌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이 두사람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지금 다시 반복하는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코레아인들과 일본인들의 국민성에 대한 자신들의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많은예측을 하였다. 그 예측들은 내가 코레아를 떠난 후 역사가 되었다. 그들이 펼쳐보인 코레아의 미래는 밝은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정체해 있는 한 민족을 기다리고 있는것이 암담한 미래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5분 재미있는 역사 상식 > 5분 재미있는 한국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조선 중기 희대의 간신, 김자점 (0) | 2019.08.13 |
---|---|
[조선시대]조선 말기, 백성들을 괴롭게 한 만동묘 (0) | 2019.08.12 |
[한국사]대한민국 도시들의 옛 이름 (0) | 2019.08.08 |
[조선시대]조선시대의 재미있는 이야기 5선 (0) | 2019.08.08 |
[조선시대]프랑스 외교관이 본 조선 노비 (0) | 2019.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