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역사]동방 불멸의 제국, 오스만 제국
▶ 오스만 제국의 탄생과 성장
1. 투르크 족, 서아시아에 자리잡다
오스만 제국을 알아보기 전 투르크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데, 투르크족은 중국의 천산 즉 알타이 산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알타이, 매우 익숙한데 국사시간 우리 민족이 알타이 어족이라고 배워서 알 것이다.
투르크는 한자로 하면 돌궐(突厥)이다.(돌궐족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땔 수 없는 관계였다.)
어쨌든 이 천산인근에 거주하던 투르크족이 서서히 중동과 유럽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토테미즘을 믿던 투르크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스스로를 술탄이라 칭했다.
술탄은 통치자, 권위의 아랍말로, 쉽게 말해 왕이나 황제로 보면 된다.
이동을 시작한 투르크족들은 중앙아시아에 수 많은 나라를 세웠고 멸망시켜 나갔다.
그 일족 중 셀주크가 이끄는 부족이 강성해져서 서아시아로 대대적인 진출을 시작하면서 투르크의 강력한 제국인 셀주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셀주크 제국이 서아시아로 진출하면서 필연적으로 동방의 맹주인 비잔틴 제국과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바실리우스 2세 이후 급격히 국력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동방의 맹주를 자처하는 제국으로서 셀주크의 확장에 크게 경계하였고 결국 두 강국은 충돌하기에 이른다.
1071년 8월 셀주크의 술탄 아르슬란과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2세는아르메니아 지역의 만지케르트에서 격돌했다.
비잔틴 제국은 7만 병력을 보유하며 3만 가량의 셀주크군보다 압도적이었지만 막강한 셀주크 기병대의 공격에 주력군 전부가 괴멸하고 로마누스 2세는 포로가 된다.
이 전투로 비잔틴 제국은 급격히 쇠락하고 동방의 강자는 셀주크 제국이 차지하게 된다.
이후 셀주크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1092년 술탄의 자녀간에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1096년에 시작 된 십자군 전쟁까지 벌어지자 셀주크 제군은 수 개의 나라로 분열이 되어버린다.
그 분열 된 나라 중 아나톨리아 반도에 롬셀주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일명 롬 술탄국은 지정학적 위치때문에 끝없이 십자군과 충돌했다.
거기다가 동쪽에서는 몽골족 전사들이 몰려오고, 결국엔 몽골족이 세운 일한국의 속국이 되고 만다.
속국이 되는 치욕에도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지만 결국엔 1308년 마지막 술탄이 급사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 오스만 왕조의 건국
한편 롬술탄국이 무너지는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족 중 오스만이 이끄만 카이민족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후 롬술탄국 서쪽에 자리잡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 때 그가 이끌던 병력은 기병 400기가 전부였다.
서쪽에 자리잡은 오스만은 1299년 자신의 이름을 따 오스만국을 건국했다.
오스만 제국의 본래 명칭은 '오스만 가문의 숭고한 국가' 이지만, 서양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라고 불러서 우리에게도 오스만 제국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건국에 성공한 오스만 1세는 그가 죽는 1326년까지 대대적인 영토확장을 시작한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요새 부르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하던 중 결국 점령을 못보고 눈을 감는다.
이후 그의 유지는 아들 오르한 1세에게 돌아가고, 오르한 1세는 흩어진 투르크 족을 규합하는 한편 풍족해진 재정으로 대대적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확장정책을 펼쳐나간다.
1345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공국들을 합병한 오르한 1세는 비잔틴 제국의 내분을 틈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134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일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후 수도를 부르사로 천도하고 화폐제도 개혁, 이슬람 사원 건축등 국내를 정비하는 등의 노력으로 오스만국은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한다.
3. 오스만 왕조, 발칸반도에 진출하다.
1360년 오르한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무라드가 술탄의 지위에 오르면서 무라드 1세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업적을 바탕으로 재상의 수를 늘리고 수장에 대(大)와자르라는 직책을 만든다.
그리고 군사체제도 대대적으로 개선하여 보병대인 예니체리와 중갑기병인 시파히 부대를 창설한다.
보병대 예니체리는 발칸 반도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집의 아이들을 노예로 데려와서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군사훈련을 시킨다.
이 아이들 중 일부는 근위기병대로 나머지는 예니체리 부대로 편성하게 된다.
예니체리로 편성된 이들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 결혼은 금지되었으며 엄격한 금욕생활에 병영에서 숙식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과 달리 갑옷도 입지 않았지만 그들은 칼, 창, 활, 도끼 후에는 총까지 능슥하게 다루며 높은 봉급과 명예로 당시 오스만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했다.
훗날 군기 문란으로 해체되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군제개혁을 바탕으로 무라드 1세는 비잔틴 제국의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명칭을 에드리네로 바꾸어 새로운 수도로 삼는다.
그리고 1366년 발칸반도로 대대적인 진군을 시작한다.
당시 세르비아는 왕조가 단절되고 여러개의 공국을 나뉘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무라드 1세의 침공이 시작되자 가장 강한 세력인 라자르를 중심으로 병력을 집결하여 오스만에 대항했다.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서서히 발칸 반도를 잠식하던 무라드 1세의 오스만군은 마차라강 전투의 승리로 불가리아 일대의 영유권을 확고히 했으며, 이후 1380년 세르비아를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라자르는 2만 5천의 병력으로 코소보에 진을 쳤고, 4만에 달하는 오스만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명 1차 코소보 전투의 시작이다.
세르비아는 중기병으로 처음에 우세한 전투를 벌였지만, 오스만군의 숫자에 점점 밀리기 시작한다.
이 때 오스만 제국에 큰 일이 발생하는데, 세르비아측에서 탈영병으로 위장한 밀로스 오블리크라는 장수가 무라드 1세를 독칼로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오스만 내부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지만, 무라드 1세의 장남인 바지예드는 그의 경쟁자인 동생 야코브를 살해하고, 군권을 장악하여 재빨리 군을 정비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다.
이에 다시 세르비아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궤멸해버리고, 이 전투로 라자르를 비롯한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해버린다.
비록 오스만 제국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무라드 1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고, 세르비아를 속국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로 철수한다.
본국으로 귀환한 바지예드는 국가를 정비하고, 1394년 다시 발칸 반도 원정을 시작한다.
발칸의 여러 나라들을 굴복시킨 바지예드 1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교황 보니사피오 9세는 십자군을 파견한다.
프랑스를 주축으로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헝가리등 서유럽의 십자군의 수는 12만에 달했으며, 파죽지세로 발칸반도로 진입한다.
이에 바지예드 1세는 군을 한 곳에 모았고, 니코폴리스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각국의 군이 모였던터라 지휘 계통에 문제가 있었던 십자군은 바지예드 1세의 지휘에 신속하게 움직이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중장기병 격돌에서 패하면서 병력이 궤멸되어 버린다.
오스만 제국의 대승이었으며, 전투가 종료되자 바지예드 1세는 프랑스 기사들이 전쟁 시작전 오스만 정찰병 포로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1만명에 달하는 십자군 포로를 모두 처형하였다.
발칸 반도를 평정하고 곧이어 아나톨리아 반도의 공국들을 평정한 바지예드 1세를 정식으로 이슬람권 국가들이 술탄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바지예드 1세의 영광은 계속되는 듯 하였으나, 동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위험이 다가왔다.
▶ 오스만 제국의 위기와 극복
1. 절름발이 정복자 티무르와 오스만의 위기
티무르는 차카타이 한국의 몰락한 명문가의 후예였다.
젊은 시절의 티무르는 하인들과 도적질을 일삼는 무뢰뱅에 불가했으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서서히 드러나서 차카타이 한국의 차세대 후계자로 지목이 되었다.
하지만 동 차카타이 한국이 침입해오자 발빠르게 그 지도자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수 없이 전장을 누빈다. 이 때 그는 다리를 심하게 다치게되어 절름발이가 되어버렸는데 이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불렀다.
세력을 키운 티무르는 자신을 받아준 동차카타이 한국을 배신하고 사마르칸트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이 도시를 기점을 세력을 확장한 그는 징키스칸의 후손인 황금일족이 아니라 칸에 임명되지 못하고 한 단계 낮은 아미르에 올라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티무르의 세력은 중앙아시아에서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티무르는 서아시아 진출을 원했고, 최근 강국으로 올라선 오스만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티무르의 침공에 당시 한창 상승로를 타던 바예지드 1세는 중기병 2만을 포함한 총 12만의 대군으로 맞선다.
하지만 코끼리 부대를 포함한 20만 대군을 이끈 티무르와 앙카라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되고 퇴각하던 중 낙마를 해서 결국 티무르의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후 티무르는 오스만의 수도 부르사를 약탈하고 대도시들을 초토화시킨다.
그리고 약탈할 때마다 바예지드 1세를 끌고가서 그 장면을 보여주었으며, 절정은 바예지드의 첩들을 그 앞에서 농락해버리기도 한다.
오스만 휘하의 그리도교 도시들과 종속국이 티무르 제국의 종주권까지 인정해버리자 1403년 바예지드 1세는 뇌졸증으로 사망해버린다.
나름대로 정중히 대해준 바예지드 1세가 사망하자, 티무르는 오스만 왕조에 복속된 투르크 공국들을 부활시키고 나머지 영토는 바예지드의 세 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준다.
이로써 오스만은 분열되고 1413년까지 10년간 술탄의 자리가 공석이되는 대공위 시대가 이어진다.
2. 오스만의 부활과 제 2차 발칸 반도 전쟁
바예지드 1세의 차남인 메메드 1세는 1402년 부터 10년간 자신의 형제들과 다툼끝에 분열된 오스만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발칸반도에 있는 도시인 에디르네로 천도하고 다시 발칸반도의 영역확장을 시작한다.
이후 1421년 메메드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라드가 6대 술탄에 오르며 무라드 2세가 되었다.
초기에 아버지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무스타파의 반란에 위기를 겪지만 곧 무스타파를 격퇴하고 그를 지원한 비잔틴 제국에게서 종주권을 인정받음으로써 발칸 반도의 통치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발칸반도 북부인 헝가리를 공략하기로 하여, 헝가리에선 무라드 2세의 침공에 명장 아노슈 후냐디를 사령관으로 삼아 대항을 시작한다.
야노슈 후냐디는 신흥귀족 출신으로 1442년에서 1443년에 있던 오스만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서유럽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후 후냐디는 오히려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해 일명 '후냐디의 긴 원정'이 시작되었다.
1443년 10월 후냐디의 원정대는 도냐우 강을 건너 세르비아를 수복하고, 곧이어 불가리아와 소피아 일대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겨울이 시작되고 물자가 부족해 퇴각을 하지만,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연이어 오스만군을 물리치면서 후냐디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다.
후냐디의 원정으로 큰 피해를 입은 무라드 2세는 어쩔수 없이 10년간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자신의 어린 아들 메메드에게 양위하고 은거에 들어간다.
강화조약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국가들은 십자군을 편성하여, 오스만 왕조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아직 12살에 불과했던 어린 메메드는 아버지인 무라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무라드 2세는 복귀하여 군을 지휘한다.
양군은 1444년 11월 바르나에서 격돌했다.
처음엔 야노슈 후나디의 전술로 십자군은 전투에서 우세했지만, 갑자기 헝가리 국왕 부아디스와프 3세가 500명의 폴란드 기병을 이끌고 무라드 2세에게 돌진을 감행한다.
목표는 무라드 2세의 목이었으나 오히려 근위대와 예니체리 부대에 포위되어 폴란드 기병들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헝가리 왕의 죽음으로 십자군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11만의 사상자를 내채 후퇴했다.
무라드 2세는 추격을 할려했지만 오스만군의 피해도 커서 결국 추격을 포기하게 된다.
바르나 전투의 패배에 후나디는 1448년 다시 한번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이미 무라드 2세의 오스만군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양측 군대는 코소보에서 격돌했고, 후냐디는 이번에도 우측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
오스만 진영을 무너뜨려 갔으나 예니체리의 저항과 오스만군의 원군으로 결국 헝가리 부대는 괴멸하고 후냐디는 포로로 붙잡혀 버린다.
이후 후냐디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으나, 더이상 오스만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무라드 2세는 2차 코소보 전투로 발칸 반도의 종주권을 다시 재확립했으며, 비잔틴 제국과는 다시 화평 조약을 맺었다.
이 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3. 정복왕 메메드 2세의 등장과 천년제국의 멸망.
1451년 무라드 2세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메메드가 19살의 나이에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메메드 2세는 무라드 2세와 달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을 멸망시키고, 오스만을 명실상부 제국으로 인정받길 원했다.
비잔틴 제국의 국력은 형편 없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이 성은 내부동조 없이는 함락된 적이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가 바다를 끼고 있었기에 수륙 합동 공격을 해야했다.
이에 메메드 2세는 2년간 초대형 대포를 준비하는 등 콘스탄티노플 공략 준비를 한다.
확실히 준비한 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인근 지역부터 점령하고 대대적인 진군을 계시했다.
육군만 8만에 추가적 용병등 인근 속국의 부대 7만 등 총 15만 전선만 100척이상이 동원되었다.
비잔틴 제국에게는 운명의 1453년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비록 무너진 제국이였으나 그는 선정을 배푸는 동시에 비잔틴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엄청 노력하였다.
이러던차에 메메드 2세가 진군하자 황제는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결사항전의 준비를 한다.
오스만의 진군 소식에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불안해했는데, 당시 민간에 예언이 떠돌았는데 그 내용이 "제국의 건국 황제와 이름이 같은 황제 시대에 멸망한다." 였다.
이런 불안감이 퍼져나가자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직접 갑옷을 입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정리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비록 민심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비잔틴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한 때 100만에 달하던 인구는 남녀 포함 2만도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싸울 장병 4,900명 용병 2,000명으로 총 7,00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황제를 포함한 주민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1453년 4월 3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메메드 2세는 대대적인 공격명령을 내렸으며, 역사상 유명한 57일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메메드는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단단한 3중 성벽을 뚫기 위해 포 길이만 8M가 넘는 우르반 대포를 적극 사용하였지만, 정확도도 낮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사격에 포신이 터져버렸고 장전시간이 무척 길어서 장전하는 동안 수비군이 목책으로 막아버렸다.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1세와 그의 7,000명 가량의 병사들은 압도적인 오스만군에 잘 맞서 싸웠다.
우선 황제가 직접 성벽에 있었기에 사기가 진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막아내면 서유럽에서 원군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군은 오지 않았고, 메메드 2세는 공성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배에 기름칠을 해서 쇠사슬로 막혀진 콘스탄티노플 내해인 금각만에 진입했다.
도착하지 않는 서유럽 원군에 비잔틴 수비대는 지쳐갔고, 다시 수도 안에는 예언이 떠돌며 불안에 빠졌다.
금각만을 점령한 메메드 2세는 다시 총공격을 명령을 내린다.
땅굴, 포격 , 인해전술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고, 성벽에 오스만의 깃발이 올라가자 비잔틴 수비대는 급격히 무너져버렸다.
성벽이 무너지는 그 시각, 성소피아 성당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1세 주관으로 도시 주민들과 마지막 미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황제는 주민들의 손을 일일 잡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 때, 주민들과 황제는 쓰라린 눈물을 흘린다.
미사가 끝난 후 황제는 자신의 장신구를 모두 때어내고 남아 있는 근위대와 성문으로 나갔다.
성문에는 오스만의 정예인 예니체리가 난입하고 있었으며, 황제는 "정녕 내 심장에 창을 박을 기독교는 없단 말인가!"라고 외치고는 백마를 타고 적진에 돌격했다
마지막 황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죽음으로 1453년 5월 29일 제국은 멸망했고, 메메드 2세는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에 입성을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 3일간의 약탈을 명했으며, 이 약탈에 수천명의 주민들이 죽어갔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이어진 비잔틴 제국은 천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멸망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메메드 2세는 오스만이 로마 제국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서유럽은 충격을 받았다.
이로써 메메드 2세는 오스만을 정식 제국으로 선포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동방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질주가 시작된다.
▶ 오스만 제국의 전성시대
1. 메메드 2세의 발칸 반도 전쟁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서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비록 여러 외침에 국력은 약해졌지만, 로마의 후예인 비잔틴 제국이 설마 멸망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비잔틴의 멸망과 함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국가들이 있었는데, 우선 동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왈라키아 공국, 그리고 헝가리 왕국이었다.
1455년 메메드 2세는 발칸반도의 종주권을 확인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오스만 제국이 승계한다는 명목으로 세르비아 왕국 점령을 시작으로 발칸 반도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1456년 헝가리의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군을 시작한다.
한편 코소보 전투 이후 명성을 잃긴 하였지만, 헝가리엔 아직 명장 야노슈 후냐디가 있었다.
후냐디는 메메드 2세의 진군 소식에 사재를 털어 용병들을 대거 모집하기 시작하고, 식량과 무기를 모아 메메드 2세의 공격에 맞서려고 했다.
당시 헝가리군은 정규병과 용병 1만, 그리고 무기 한 번 잡아본적 없는 농민 4만으로 총 5만 군세였다.
메메드 2세는 총 10만의 병력으로 베오그라드를 포위하였고 대포를 통해 성벽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한편, 후냐디는 도나우강을 건너 오스만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배후에서 포위하는 전술을 썼다.
이에 베오그라드에 서서히 진입을 시도하던 오스만군은 후방에서 돌격해오는 헝가리군에 당황하였고, 곧이어 성 내부의 헝가리군까지 총공격해오자 그만 부대가 전부 무너지고 만다.
메메드 2세는 간신히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7만 5천 가량의 오스만군 사상자가 나는 참패를 당한다.
베오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후냐디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곧 전염병으로 죽고 만다.
하지만 이후 후냐디는 헝가리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70년간 오스만 제국의 침범에서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은 훗날 헝가리의 국왕이 된다.
베오그라드 전투의 대패로 메메드 2세는 음독자살도 생각하지만 곧이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정복전쟁을 재개한다.
1460~1461년 동안 비잔틴 제국의 잔재를 청산하고, 현재 루마니아 지역에 있는 왈라키아 공국으로 진군한다.
이때 왈리키아 공국의 지도자는 유명한 블라드 체페슈 대공이었다.
블라드 체페슈 공작은 어린 시절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있으면서 메메드 2세와 친하게 지내고 오스만 문화를 관심있게 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왈라키아 공작 위에 오르자 친 오스만 정책을 버리고 곧바로 반 오스만 정책을 펼쳤으며, 그는 공작위에 오르자마자 주위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죽은 사람이 엄청나다고 한다.
당시 왈라키아 전체 인구가 40만가량이었는데, 10만가량을 죽였으니 엄청 잔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왈라키아의 힘을 한 곳에 모을 수 있었고 14년에 달하는 대 오스만 항전을 할 수 있었다.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군체계에 박식한 블라드 공작의 저항으로 4만 가량의 병력을 잃어 버렸다.
거기다가 블라드 공작이 오스만군 포로를 모두 처형하여 장대에 걸어 장식하자 오스만군은 블라드 체페슈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이에 메메드 2세는 블라드 체페슈의 남동생을 이용하여 블라드 공작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왈라키아 공국을 속국으로 삼을 수 있었다.
1476년 블라드 체페슈는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저항을 시작하지만 그만 전사하고 만다.
이 블라드 체페슈 공작이 후에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된다.
그가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오스만에 맞서 싸운점보다 중앙집권을 위해 행한 학살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힘들었지만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를 어느 정도 정리한 메메드 2세는 동방의 아크 코윤루에 대한 원정과 크림 한국과의 전쟁을 통해 크림 한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도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지만, 아쉽게도 베네치아 해군에게 막혀 실패한다.
이 외에도 정복왕의 명칭과는 달리 메메드 2세는 각국의 문화와 관습에 관대하였고, 그리스, 라틴, 이슬람 학자들을 불러 도서관을 설립하고 토론회도 개최하는 등 내부적인 통합에도 힘을 썼다.
당시에 이슬람의 신학 뿐만 아니라, 그리스교의 문화까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여러 업적을 쌓은 메메드 2세는 1481년, 제 2차 이탈리아 원정 준비 중 그만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2. 오스만 제국 팽창의 시작
메메드 2세 사후 오스만 8대 술탄에 장자 바예디드 2세가 오른다.
그는 원래 아버지인 메메드 2세와 사이가 안 좋았으나, 궁정관리들의 강력한 지지로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과 일전을 벌여 모레아 지방과 아드리안 해안 지역 점령에 성공한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패권을 확립하고 크림 한국에 대한 지배권도 공공히 했다.
그리고 남부의 지배자 맘루크 왕조와 일전을 준비하는데, 이때 동부에 시파위 왕조의 등장으로 다시 전운이 감돈다.
시파위 왕조는 티무르 제국이 분열 된 후 이스마일 1세가 아크 코윤루와 전쟁을 통해 건국한 나라였다.
거기다가 이슬람 시아파의 수장을 선언함으로써,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과 불편한 관계로 발전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시아파들이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뿐 아니라 바예지드 2세의 장자인 셀림이 반란을 일으킨다.
바예지드 2세는 자신의 아버지인 메메드 2세와 닮은 셀림을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자신의 술탄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 것을 염려해 반란을 일으키고만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동부 사파위 왕조의 지원을 받은 또다른 아메드마저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이에 바예지드 2세는 셀림을 불러들이고, 셀림은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9대 술탄 자리에 오른다.
바예지드 2세는 유폐되었고 며칠 후 독살로 죽고만다.
술탄의 자리에 오른 셀림은 시파위 왕조의 페르시아에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한다.
시파위 왕조도 오스만 제국에 맞서긴 하였으나 강력한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제국군에 무너졌고, 수도마저 함락되어 버린다.
비록 보급선이 길어진데다가 국내가 불안정한 이유로 철수하여 멸망은 면하지만, 향후 100년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시파위 왕조 원정을 마친 셀림은 다음 원정으로 맘루크 왕조로 향한다.
맘루크 왕조는 현재 이집트 지역의 국가로 베네치아와 동방의 중계 무역으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나, 포르투갈, 스페인이 신항로를 개척해버리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내부혼란으로 인해 나라 상태가 엉망이었다.
1516년 대대적인 맘루크 침공을 감행한 셀림 1세는 팔레스타인 일대를 점령함과 동시에, 파죽지세로 군세를 몰아 수도 카이로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250년간 이집트를 지배한 맘루크 왕조는 멸망했다.
그 후, 셀림 1세는 술탄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인 칼리프 지위에 까지 올라 이후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술탄-칼리프의 지위를 이어나간다.
이후 유럽과 로도스 원정을 준비한 셀림 1세는 1520년 재위 8년만에 급사하고 황제의 자리는 아들 쉴레이만에게 돌아간다.
술레이만 대제의 등장이었다.
3. 쉴레이만 대제의 등장과 제국의 전성기
아버지인 셀림 1세가 친척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덕분에 쉴레이만 1세는 술탄의 지위에 오르는데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았다.
1521년 쉴레이만 1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베오그라드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고, 야노슈 후냐디가 없는 헝가리는 저항 한번 못하고 베오그라드를 빼앗기게 된다.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쉴레이만은 곧이어 로도스 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로도스섬은 십자군 침공의 거점인 섬으로써 성 요한 기사단이 1309년부터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로도스 기사단으로 불리며 동지중해의 이슬람 선박등을 해적질 했는데, 쉴레이만으로서는 재해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1521년 엄청난 수의 대포로 로도스섬 공략에 나섰지만, 애초에 요새로 건설된 로도스 섬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1년의 공방끝에 현 기사단장인 필리프 드 릴라당이 제시한 주민의 이주와 신앙의 자유를 조건으로 긴 전쟁에 지친 로도스를 넘겨 받을 수 있었다.
로도스 섬을 평정한 쉴레이만은 곧이어 1526년 헝가리를 점령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헝가리 국왕 로요수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기나긴 오스트리아- 투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선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궤멸시키는데 성공한 쉴레이만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로 진군했으나 보급 문제로 일시 철수하고,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헝가리를 점령하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헝가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긴 전쟁을 시작한다.
신속한 기동력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육박하지만, 겨울의 추위와 보급문제로 결국 퇴각하고 만다.
이후 이 전쟁은 쉴레이만 대제가 죽고나서도 이어지게 된다.
이후 쉴레이만은 해군력을 신장시켰다.
본래 기마민족인 투르크족은 해군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그리스인 해양 기술자들을 고용하면서 선박을 제조하고 항해술을 전수하게 했다.
그리고 그의 해군에 대한 자부심은 프레베자 해전으로 증명되었다.
해적 출신 제독인 하이르 앗 딘이 프레베자에서 카를 5세가 이끄는 신성동맹군을 격파하면서 동 지중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프레베자 해전으로 동 지중해를 장악한 쉴레이만은 곧이어 시파이 왕조를 공격하여 이라크 일대를 점령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쉴레이만 법전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했으며, 행정관리제도와 교육제도 정비, 그리고 궁중 예법등을 정비하기도 했으며, 특히 술탄의 하렘에 대해선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위 그림들은 거의 조작된 그림들인데, 실제 하렘은 우리나라로 치면 후궁들이 모여살던 장소라고 보면 된다.
저곳은 술탄을 제외한 어떠한 남자도 출입할 수 없으며, 실제로 관리자가 황후인지라 황후의 허락없이는 술탄도 함부로 드나들수 없었다.
저곳에는 실제로 유럽계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 황인등 다양한 인종의 노예들이 있었으며, 실제 계급은 노예였지만 후궁 취급을 받았음으로 궁중 어떠한 계급보다 상위에 있었다.
이 사치에 술레이만은 노예 출신 황후와 궁중예법을 정리하여, 후대 술탄들이 국정을 멀리하고 이곳만 드나들수 없게 하였다.(나중에 무용지물이 된다.)
훗날 술탄의 초대를 받고 들어간 서양인들 중 한 명이 이곳을 구경하고 소문이 잘못퍼져서 음란한 곳으로 변질된 것이며, 실제로 아랍에서 이 말을 하면 한 대 맞을 각오는 해야할 것이다.
이 외에도 쉴레이만 모스크를 건설하는 등 문예부흥에도 힘쓴 쉴레이만 1세를 대제라는 호칭이 붙었고, 정식 역사에도 쉴레이만 대제로 불린다.
쉴레이만 대제의 말년은 상당히 어수선했는데, 여러 아들들의 다툼으로 국정은 혼란스러웠으며 몰타섬 함락에도 실패했다.
그 후 쉴레이만 대제는 헝가리로 원정을 하는 도중 1566년 그만 급사하고 만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막강하였지만 레판토 해전, 크림 반도 전쟁, 예니체리 반란 등을 겪는 등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분열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현재의 터키로 이어지게 된다.
'5분 재미있는 역사 상식 > 5분 재미있는 세계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사]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몰도바 (0) | 2019.08.16 |
---|---|
[미국전쟁사]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 소말리아 모가디슈 전투 (0) | 2019.08.13 |
[유럽사]유럽 각 국의 국가명 유래 (0) | 2019.08.11 |
[중세유럽]중세시대 유명한 전설 및 신화 속 기사와 무기 (1) | 2019.08.11 |
[미해군사]미해군 구축함의 결사항전으로 이뤄낸 승리, 사마르 해전 (0) | 2019.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