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일본의 주인이 결정된 '세키가하라 전투'
미천한 아시가루(병졸) 출신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풍운아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8년 후시미 성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6살로, 일본을 이끌기엔 나이가 너무 어려, 전국시대가 이제 막 끝난 일본에 다시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생전에, 자신의 휘하 2인자들 5명을 5대로(五大老)에 임명하여, 몇번이고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를 위해 충성을 바치겠노라 혈서를 쓰게한다.
1. 관동 8주의 주인이지 에도막부의 창시자인 도쿠카와 이에야스(250만석 다이묘)
2. 히데요시의 오랜 친구이자 가가의 대영주 마에다 토시이에(100만석 다이묘)
3. 우에스기 겐신의 후계자이며 에치고의 대영주 였던 우에스기 카게카츠(120만석 다이묘)
4.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전국시대가 낳은 희대의 모략가 나오이에의 아들인 우키다 히데이에(50만석 다이묘)
5. 서국의 대영주이며, 당시 이에야스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던 모리 테루모토(112만석 다이묘)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그 혈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행정,경제,병참,군사,종교 등 수많은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이시마 미츠나리, 우키다 히데이에를 필두로 한 이료파(吏僚派)와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가문의 안녕을 위해 어렸을 적부터 전략적으로 키워낸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키요마사를 필두로 한 무단파(武斷派) 의 갈등이 심하되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관동의 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 무단파를 자신의 세력에 흡수하여 천하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금지된 다이묘 간의 결혼과 영토 분배를 통해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실질적으로 자신을 견제했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죽음으로 이는 가속화 되고 있었다.
그리고 도화선에 불이 붙은 사건이 벌어진다.
마에다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가가 이에야스의 암살사건 주모자로 지목되어 졌다.
도시나가는 자신의 친어머니 호슈인을 인질로 내놓으면서 복종 의사를 표명했고, 이시다 미츠나리 세력은 칩거, 본인은 실각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우에스기 카게가츠는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게 되었고, 미츠나리는 모리 테루모토를 대장으로 추대, 서군을 조직한다.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거병하려 하였는데, 이때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였던 가라샤(아케치 미츠히데의 딸)는 이시다 측의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신의 창에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도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위해 거병한 문신 출신의 이시다 미츠나리.
50여년 동안 포로, 인질, 자신의 본처와 장남까지 죽여야 했으며, 이제야 천하를 얻을 기회를 포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제 두 세력간의 전투는 피할 길이 없었다.
양군은 1600년 10월21일 세키가하라(현재 일본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 정)에 대치하였다.
서군 82,000여명, 동군 104,000여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하라의 분지에 집결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군사고문으로 일본을 찾았던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세키가하라의 양군 포진을 접하고, 서군의 승리를 장담하였다고 한다.
<서군>
사사오산 진영
이시다 미츠나리, 시마 사콘. 6,000명 / 19.4만석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사. 1,500명 / 56만석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 4,000명 / 20만석 다이묘
오오타니 요시츠구. 4,100명 / 5만석 다이묘
우기타 히데이에. 17,000명 / 57만석 다이묘
난구산 진영(30,000명)
나츠카 마사이에
모리 테루모토. 120.5만석 다이묘
안코쿠지 에케이. 6만석 다이묘
초쇼카베 모리치카. 22만석 다이묘
킷카와 히로이에. 14.2만석 다이묘
마츠오산 진영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15,000명 / 35.7만석 다이묘
<동군>
제1군 진영
후쿠시마 마사노리. 6,000명 / 20만석 다이묘
토도 타카토라. 2,500명 / 8만석 다이묘
츠츠이 사마츠구. 2,100명
다나카 요시마사. 3,000명
쿄고쿠 타카토코. 3,000명
제 2군 진영
쿠로다 나가마사. 5,400명 / 18만석 다이묘
호소카와 타다오키. 5,000명 / 18만석 다이묘
카토 요시아키. 3,000명 / 10만석 다이묘
제3군 모모쿠바리산 진영(20,000명)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오다 우라쿠
이이 나오마사. 12만석 다이묘.
혼다 타다가츠. 10만석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255만석 다이묘.
제4군 진영
야마우치 카즈토요. 2,000명 / 6.9만석
일본판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로 유명하며, 공명의 갈림길 주인공인 야마우치 카즈토요.
전투 당시, 후방을 맡았으며 전공은 그다지 없었으나, 전투 후에 토사 20만석을 하사 받는다.
(세키기하라전투 직전 다이묘들이 모인 앞에서 처음으로 이에야스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겠다고 말하여 통합을 이루어낸 공로)
참고로 토사는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이기도 하다.
양군은 짙은 안개 속에서 2시간 동안 대치하였고, 서서히 안개가 걷힐 때쯤, 8시경에 서군-우키다 히데이에 동군-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격돌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의 초반 정세는 서군이 유리하였다.
하지만 리더쉽이 부족한 모리 테루모토, 융통성이 부족하여 적을 많이 둔 이시다 미츠나리로 인해 서군의 결속력이 약하단걸 파악 했던 이에야스.
그리고 킷카와 히로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배신을 약속 받았기에 이에야스는 병력을 뒤로 물리지 않고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오가 지나자, 이에야스는 배반을 약속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부대가 움직이지 않자 초조해 한다.
결국 마츠오산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의 편에 서게 된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이끈 15,000명의 병력은 그대로 오오타니 요시츠구 군을 향해 진격한다.
당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눈치챈 요시츠구는 따로 500여명의 병사를 두어 방어하였고, 몇 차례에 걸쳐 진격을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군은 궤멸되었고 자신은 할복을 함으로서 일생을 마친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되었다.
모리 가문은 중신 킷카와 히로이에로 인해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채 관망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큐슈의 절대강자 시마즈 요시히사는 이 혼란을 틈타, 1,500명의 군대를 끌고 동군의 포위망을 뚫어, 전장을 떠난다.
선봉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전사하였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장을 이탈하여, 자신의 본거지 사와야마 성을 향해 패주한다.
18만명의 군세가 싸운 전투는 결국 한나절 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난다.
당시 세키가하라 이외에도 각 진영을 지지하던 다이묘 사이에서도 교전이 이루어졌는데, 동군의 진영으로 서서히 흡수되어 갔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결국 포로로 잡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참형에 처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3년 후에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이 되어 막부를 개설한다.
1611년 교토의 니죠어성에서 히데요리를 접견한 이에야스는 훌륭하게 성장한 그의 모습을 보고, 도요툐미 정권을 궤멸시키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였다.
3년 뒤인 1614년 오사카 겨울의진 전투, 1615년 오사카 여름의진 전투를 통해,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되었고, 진정한 의미의 천하통일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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