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영국이 자랑하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영웅, '말버러 공작'
1. 태양왕의 등장과 스페인의 전운
루이 14세의 지휘하에 프랑스는 9년동안 대동맹전쟁을 치루었지만 대부분의 점령지를 반납하고 재정도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에는 카를로스2세가 후계없이 죽음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가 단절된다.
1700년 결국 스페인 왕실이 후계가 불분명한 채로 루이 14세의 외손자 앙주공이 펠리페 5세가 되어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다.
신대륙에서 경쟁관계 였던 영국은 프랑스-스페인 연합이 못마땅했고, 이에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도 가세하면서 3국 동맹이 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1701년 3국 동맹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시작 되었다.
2. 말버러 공작 존 처칠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젠트리 귀족 출신으로 제임스 2세의 시동으로 있으면서 국왕파에 가담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나서는 윌리엄 3세로부터 백작위를 받았다.
잠시 제임스 2세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지만 새롭게 잉글랜드 여왕이 된 앤 여왕으로부터 다시 관직을 하사 받게된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터지자 말버러 공작은 영국파병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전쟁터로 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명장 말버러 공작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는 전쟁영웅 외젠 공에게 북이탈리아 전선을 맡기고 말버러 공작은 북 네덜란드 일대 전선을 맡게 된다.
한편 네덜란드 일대 전선을 맡게 된 말버러 공작은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
네덜란드의 정치가들은 네덜란드 군이 북 네덜란드 지역을 벗어나는 것을 반대했고, 설상가상으로 본국에 요청한 지원도 의회에서 거절해버려 병력,물자가 부족한 상황에 처했다.
이와달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자리잡은 프랑스 측은 신속한 기병대와 충분한 보급 물자로 전선에 당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전 유럽이 경악한 대행군을 시작한다.
우선 말버러 공작은 조금이나마 네덜란드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라인강변에서 프랑스군이 빈으로 못가게 방어함과 동시에 네덜란드도 함께 방어하겠다고 했다.
이에 네덜란드 수뇌부는 미심쩍으면서도 물자를 충분히 지원해 주었다.
물자를 지원받는대로 말버러 공작은 라인강변으로 이동했고, 네덜란드 지역에서 대치중이던 프랑스군도 말버러 공작을 따라 라인강변으로 이동했다.
라인강변에서 결전을 보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버러 공작은 라인강변에 잠시 대기만하고 곧장 네카르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한다.
네덜란드의 정치가도 라인강변 라덴부르크에서 결전 준비를 하던 프랑스군도 경악했는데, 설마 네카르강을 건너 남하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네카르 강을 건넌 말버러 공작은 즉시 요충지인 셀레부르크 강습작전을 펼쳤다.
프랑스 군이 대처할 시간도 없이 급히 셀렌부르크에 진지를 구축한 말버러 공작은 곧장 블렌하임 공략에 나섰다.
그 유명한 블렌하임 전투의 시작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포로 1만 2천을 포함해 4만의 병력을 잃었고, 대포도 60문이 파괴되어 버렸다.
루이 14세는 이 전투 결과에 분노해 북이탈리아 지역에 총공격을 내리게 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을 궤멸시켜 버린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상황 반전을 마련하기 위해 6만 2천 대군을 끌고 루뱅 지역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당시 루벵지역에는 프랑스의 명장인 발레루아 공작이 맡고 있었는데, 루이 14세는 말버러 공작군을 궤멸시키라고 독촉을 시작했다.
서둘러 온 말버러 공작은 라미예에서 공격준비를 대기하던 발레루아 공작과 대격전을 벌이게 되며, 라미예 전투가 시작되었다.
말버러 공작의 기병대 측면 공격으로 프랑스 보병대는 분열하고 결국 1만 2천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고 말았다.
말버러 공작군의 피해상황은 사상자 1500명 정도였으니 대승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말버러 공작은 무의미한 전쟁을 빨리 종료하고자 평화 협정을 건의하였지만, 동맹군의 분열로 지지부진 하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는 전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1708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를 전선인 오우데나르데로 파견하게 되고, 이에 맞서 말버러 공작도 오우데나르데로 진군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릴요새라고 프랑스에서 공을 무지하게 들인 요새가 있는데, 부르고뉴 공작 루이는 자신의 부관들과 불화를 일으키다가 결국 대패하고 만다.
이 패배는 프랑스로서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파리까지 위협받게 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졌다.
하지만 위기 속에 희망도 있다고, 프랑스의 명장 빌라르 공작이 말크바르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군을 막아내면서 한숨을 돌리게 된다.
이 말크바르 전투는 겉으로 보면 말버러 공작군의 승리였지만, 그 피해가 프랑스군보 많아서 사실상 패배로 봐야했다.
병력 6만 중 사상자만 2만 5천이니 피해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3. 말버러 공작의 실각과 말년
비록 말크라르 전투에서 실패했지만, 말버러 공작은 1711년 캉브레의 부냉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다시 한 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버러 공작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본국에서 공금횡령과 부정축재의 혐의로 탄핵했고, 전쟁의 장기화도 말버러 공작의 책임으로 전가시켰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본국으로 소환되고 영국군은 그의 경쟁자인 오먼드 공작이 지휘하게 된다.
말버러 공작의 실각 소식에 프랑스의 빌라그 공작은 드냉 지역에 총공격을 감행했고, 무능한 지휘로 인해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드냉도 뺏기고 군대도 궤멸되고 말았다.
이에 전쟁 수행 능력을 잃어버린 영국과 네덜란드는 평화 협정을 제의하고, 위트레흐트 조약이 1713년에 체결되고 스페인은 펠리페 5세가 공식 국왕으로 인정 받았다.
비록 인정은 받았지만, 스페인은 2류 국가로 전락하고 프랑스도 유럽 패권을 잠시 내려 놓아야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했다.
다행히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잃은 거 없이 오히려 식민지를 넘겨 받으며 그나마 이득을 본 상황이 되었다.
한편 본국에 소환 된 말버러 공작은 탄핵이 중단되었지만 쫓겨나다시피 유럽대륙으로 떠났다.
다행히 앤 여왕이 죽고 조지 1세가 즉위하면서 영국 총사령관 지휘와 귀족 직위가 복권 되었지만, 그의 병세가 너무 깊어 결국 명예직으로만 수여받고 은퇴하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가족들 품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참고로, 말버러 공작의 7대 후손이 바로
7대 말버러 공작 윈스턴 처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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