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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南袞) - 1471(성종 2)∼1527(중종 22)

기묘사화때 조광조를 모함하였다 하여 심정과 더불어 훈구파 간신배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흔히들 남곤이 훈구파라고 오해들 하는데, 남곤은 정말로 억울한 간신배일까?

남곤은 의령 남씨로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남재는 이색의 문인 중 한명이었는데 이색은 정몽주, 길재와 더불어 삼은이라 일컬어 지는 신진사대부 유학자였다.

이는 남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무려 당대 '사림파의 대부' 격인 김종직의 직계 제자로 들어간다.

김종직 예하 김일손, 그리고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 동문이었다.

이런고로 남곤은 정치판에서 선배들과 함께 훈구파들을 저격하면서 활약을 하게 된다.

남곤(예문관검열) : 전하, 영의정 윤필상의 비리를 엄벌해 주시옵소서! 

훈구파 : 이제 막 급제한 종 9품 주제에 외척을...   

성종 말년에 이목 등과 함께 영의정 윤필상을 저격하지만 훈구대신들 역공을 받아 결국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남곤(사간원 정언) : 전하, 노사신 등 훈구권신들이 권력을 앞세워서 인사비리를 저지르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음서제도를 폐지하시옵소서!"

연산군 : 히히히히힛!

다시 복직, 사간원 정언 및 홍문관 수찬 등 본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훈구대신들을 저격하였으나, 당대의 폭군 연산군에게 그의 간언이 통할리 만무하였다. 

그리고 남곤은 웃기게도 연산군의 대표 간신배 임사홍과 고종사촌 지간이었는데,(임사홍은 남곤 고모 아들이었다.) 남곤은 뛰어난 혜안으로 의도적으로 임사홍을 멀리한다. 

당대 잘나가던 사촌형제를 멀리했다는 것이다.

이런고로 남곤은 김일손의 사초가 원인이 된 무오사화에서 사림파들과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남곤 또한 갑자사화때 폐비윤씨 복위에 반대하여 연산군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연타석으로 사림파 동문들이 학살당하고 자신은 유배지게 가게되자 남곤의 정치성격은 점차 신중적으로 변해버린다.

동문들의 피바람을 더이상 보고싶지 않은 그의 바람이 그의 정치관을 온건적으로 변모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윽고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당시 남곤에게도 공신훈록이 내려졌는데 그는 공신책봉을 거절한다. 

유순정(반정 1등공신) : 비록 전에 나와 성희안 저격했지만 남곤 자네가 반정 지지했으니까 넘어가겠으니, 앞으로는 잘 지내보세.

남곤 : 반정공신훈록 필요 없습니다.

이 밖에도 남곤은 시와 문장에 능해서 당대 알아주는 문학가로 손꼽히기도 했다.

연산군 퇴출에 의심하던 명나라에게 반정의 정당성을 대변한 문장 솜씨를 발휘한다.

현재 청와대 뒤 북악산에 있는 대은암동도 남곤이 집을 짓고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살면서 그 이름이 유래됬다고 한다.

이렇듯 남곤은 당대 문학을 중시하던 사장파 사림파의 대표주자였다.

어느날 그의 앞에 까마득한 후배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그 유명한 조광조였다. 

이때까진 둘은 사림계열 선후배 사이로 서로 아주 돈독했다.

남곤(당시 이조판서) : 뛰어난 후배로다.

조광조의 비상함을 눈여겨본 남곤은 조광조를 적극 밀어주기 시작한다.

“조광조는 이학에 뛰어나고 실천이 독실하기 때문에, 전날 생원으로서 바로 6품직에 임명되었으며, 동료들에게 추복을 받아온 지 오랩니다. 이 사람은 자급을 헤아릴 것 없이 결원이 있으면 4품에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종 28권, 12년(1517 7월 29일) 5번째기사-
이조 판서 남곤이 조광조는 자급을 헤아리지 말고 4품에 의망하도록 아뢰다.

남곤은 조광조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다고 6품직도 부족하다고 4품직으로 올리자고 건의까지 했다.

조광조 : 선배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광조와의 잘못된 만남이 남곤에게 만고의 간신이라는 오점을 달게 해줄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다.

이후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 성장했는데, 세력이 커진 조광조는 아이러니하게도 남곤과 시시각각 마찰을 빚게 된다.

조광조 : 선비가 어찌 문학이나 시 같은 쓸모없는 것에 빠질 수 있습니까! 유교 경전을 한 자라도 더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곤 : 김종직 스승님도 시와 문장 다 즐기고 활까지 쏘고 다니셨는데...

조광조 : ㅉㅉㅉ

이런가하면, 조광조의 현량과 시행 문제로 둘 간의 마찰이 있었다.

조광조 : 기존의 과거제도는 썩었다. 현량과에 의한 천거제를 시행합시다!

남곤 : 천거제의 문제점으로 과거제가 생겨났는데 과거제를 무시하고 천거로 인재를 등용한다니!? 차라리 천거제와 과거제를 같이 병행하는게 어떨까?

조광조 : 소인배같기는... 그래가지고 개혁이 되겠습니까?

정광필 : 버릇없는 놈...

이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조광조 일파는 중종에게 남곤은 소인배라고 참언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신도 또한 듣건대, 의의 상소 속에 남곤은 형편없는 소인으로서, 전일의 유자광의 상소는 남곤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공론이 조정에 달렸는데, (중략) 후일에 조정을 요란하게할 사람이 바로 남곤입니다. "

-중종 36권, 14년(1519  8월 15일) 1번째기사-

남곤 : 뭐라! 소인배!

이 상소문 이후로 이 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훈구파들이 조광조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주초위왕)

  심정 : 홍경주와 이 심정이 조광조 일파놈들 싹다 쓸어버리겠소.

남곤 : 내가 알게뭐요! 난 그런놈 모르니,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심정 : 이제 주상도 조광조를 견제하기 시작했소. 조광조는 이제 다 잡은 고기요.

남곤은 이런 훈구파들을 눈감아 주고 은근히 협력했는데, 결국 훈구대신들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훈구파 : 역모를 일으키다니, 토설할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남곤 : 잠깐, 이건 아닌데...

사태가 뭔가 잘못 돌아가는걸 인지했으나, 이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당시 훈구대신들에 의해 자기 동문들이 쓸려나간 아픈 기억이 있는 그였다.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훈구파와 더불어 조광조에게 질린 중종은 이때다 싶어 조광조를 죽일려고 했다.

이에 남곤은 조광조의 죽음만은 막고자 자신의 관직까지 내던지며 조광조 사형 만은 막고자 했다.

남곤 : 전하! 인덕을 베푸시어 부디 사형만은 면해주시옵소서!

  중종 : 아니되오!

남곤 : 그럼 신이 어찌 인사권을 바로잡겠습니까. 저는 이조판서직을 사임하겠나이다.

-중종 37권, 14년(1519 11월 19일(기유) 1번째기사-
이조 판서 남곤이 사직을 청하다

중종 : 그건 아니되오! 그래도 조광조는 사형이오!

남곤 : 그럼 차라리 죽이지는 말고 유배형으로 마무리지어 주시옵소서!

“미물일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사람의 생사는 중대하니 살펴서 해야 합니다.”

-중종 37권, 14년(1519 12월 16일(병자) 1번째기사-

그러나 중종은 기여코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고야 말았다.

남곤 : 아... 나는 이제 나에게 누가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평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조광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남곤은 슬퍼하며 자신의 실수를 크게 후회했다.

기묘사화에 참여, 협력한 신하들에게 공신과 원종공신 서훈를 내릴 때 자신에게 내려진 공신책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남곤은  '같은 사림파를 죽이는데 잠정적으로 가담했다'는 이유와 더불어 '구제하지 못한 죄'로 동문들에게 질타를 받게 되었으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남곤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중 한 사람이라는 오명과 함께 이후 평생에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살았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의 잘못을 한탄하며 유언을 남긴다.

남곤 : 내가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

"내 묘에 묘비도 세우지 말라 내가 쓴 글을 모두 태워라, 나는 후대에 글을 남길 자격이 없다."

1527년 (중종 22년) 3월 10일 병으로 사망하니, 그의 나이 향년 57세였다.

하지만 그는 1558년(명종 13년) 관작과 시호가 삭탈되었고 심정, 홍경주와 함께 기묘삼흉이라 불렸으며, 선조 즉위 이후 조광조 계열 사림파들이 집권하면서 조선 역사의 만고의 역적으로 남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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