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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5년, 성종의 부인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녀는 한명회의 딸로 얌전하고 인자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성종과 공혜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얼른 새 왕비를 맞아야 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으로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세조의 부인)와 안순왕후(예종의 부인) 그리고 그 유명한 인수대비가 있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갑옷을 준비해 세조에게 입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당찬 여자였고 세조는 왕이 된 후 후궁도 들이지 않고 언제나 정희왕후를 정중하게 대했다.

 

그 괴팍한 성격의 세조를 꽉 잡은데다 성종 초반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별 탈 없이 국정을 잘 운영해 나간 걸 보면 가히 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대단한 여자였다.

 

 

안순왕후는 세조의 둘째며느리인데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가 사망해버려서 엉겁결에 남편이 왕위에 올라 국모가 되었다가 남편마저 13개월만에 사망해버려서  24살에 청상과부가 된 여자였다.

 

자식은 2남2녀 중 1남1녀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아들이 다음 왕위에 올라야했지만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결탁으로 죽은 의경세자와 인수대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질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렸고 이때문에 한을 품어 성종 즉위 초반에 인수대비와 궐내 넘버2의 자리를 놓고 갈등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패배해 뒷방으로 물러나 지내던 여자였다.

 

그리고 인수대비는 정말 유명한 여자인 거 알지?

 

인수대비는 세조의 첫째 며느리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세자가 된 남편은 장차 왕이될 것이므로

그녀 역시 일찌감치 여자로서 오를 수 있는 최상의 지위인 국모의 자리가 예정된 거다. 이 때 나이가 18살이었다.

 

헌데 이 기쁨을 미처 다 만끽하기도 전에 불행이 들이닥쳐 버렸는데, 세자빈에 책봉된 다음해인 145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녀의 아버지 한확이 돌아오는 길에 병사해버리더니 그 다음 해엔 남편인 의경세자마저 죽게 된다.

이때 그녀는 둘째아들(성종)을 막 출산한 후였으며, 그녀의 나이 불과 20살때였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도련님인 예종이 세자가 되자 인수대비는 이제 고작 4살 2살 5개월밖에 안된 어린자식들을 데리고 궐밖으로 나가서 살아야했는데 당시 그녀에겐 돌아갈 친정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6년 전에 이미 사망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미모가 어느정도였냐면 당시 명나라 황제의 후궁을 뽑기 위해 파견된 감독관들이 직접 양갓집 규수들을 심사해서 재색을 겸비한 여인을 최종 선발해 데려갔는데 여기에 두 자매가 연달아 뽑힐 정도였다.

 

그 것도 일이등으로 한 번에 뽑힌 게 아니라 첫 번째 후궁선출때는 큰 언니가 가고 몇 년 후 다시 열린 두 번째 후궁선출때 이 번에는 여동생이 뽑힌 거였다. 서로 다른 감독관이 와서 벌인 두 번의 심사에서 두 자매가 차례로 뽑혔다는 건 둘 다 독보적인 조선 최고의 미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가 세조의 며느리가 된 건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라 세조가 며느리감으로 굳이 못생긴 여자를 뽑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었지.(조선에서 세자빈이 되려면 일단 첫째 조건이 못생겨야 한다.)

 

암튼 이제 남편도 없고 돌아갈 친정도 없게 된 21살의 미녀 인수대비는 신세한탄을 하며 여생을 낭비하는 대신 자신의 인생을 '자녀'에게 걸기로 했다.

 

그녀는 정말 엄격하게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심했는지 세조와 정희왕후가 손주들을 걱정하며 그녀를 '폭빈(난폭한 며느리)'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과할 정도로 자녀들에게 열정을 쏟아부은 건 자신의 기구한 팔자에서 오는 비애감을 애써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그녀가 궐 밖으로 나와 산 지 10년정도 지나 아이들이 혼사를 치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세조와 정희왕후가 혼사를 서둘러 1년만에 자녀 셋이 모두 시집장가를 가 버리게 됐는데 혼사를 다 치르자마자 그동안 삶을 지탱해주던 긴장의 끈이 한꺼번에 풀린 듯 인수대비가 곧바로 쓰러져 크게 앓기 시작했다.

 

한때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병세가 심각해 세조와 정희왕후가 문병을 올 정도였다는 걸 보면 지난 10여년 간 그녀가 어떤 정신력과 각오로 버텨왔는 지를 알 수 있다.

 

아무튼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 누가 되든 그녀는 이 사연 많고 한도 많은 세 여인을 시어머니로 모시고 살아야 했다.

 

이제 폐비 윤씨에 대해 언급토록 하겠다. 

 

성종 7년, 공혜왕비가 죽고 무려 2년이나 심사를 한 끝에 드디어 정희왕후가 대신들을 모아 차기 왕비를 공표했다.


새로운 국모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여자는 숙의 윤씨로 3년 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와있던 여자였지.

 

 

정희왕후는 숙의 윤씨를 간택한 이유로,

 

"윤씨는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매사에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고 자신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말을 듣자 "저는 본디 덕이 없고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녀를 현숙하게 여긴다.(성종실록 7년7월11일)" 라고 했고 숙의 윤씨가 정말로 마음에 쏙 들었는지 발표를 끝내자마자 즉석에서 대신들과 축하연 열 정도였다.

 

사실 숙의 윤씨는 이 때 이미 임신중이었고 이 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다. 세조의 큰아들과 둘째아들의 때이른 죽음(둘 다 20살때 사망.)으로 왕위가 여기저기 옮겨지고 그 과정에서 두 여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명암이 엇갈리는 걸 경험했기에 하루라도 빨리 성종의 아이를 얻어 후계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지어 버리는 게 급선무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일이 잘되려고 그랬는지 숙의 윤씨는 11월에 아들까지 낳았다.(이 아이가 연산군이다.)

숙의 윤씨는 어떤 여자일까?

 

사실 그녀의 집안은 그녀의 할아버지 이전까진 기록도 없을 만큼 한미한 가문이다. 다만, 그녀의 할아버지 윤응이 태종의 총신이었던 장윤화의 처남으로 나오고 그녀 집안의 본관이 경남 함안인 걸로 봤을 때 그녀의 집안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성장한 지방사족중 하나로 지방에서 세를 키워 마침내 중앙귀족중의 한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는데 성공해 한양으로 입성한 케이스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확실히 중앙귀족의 바운더리로 진입하려면 탁월한 실력이 있어야 되는데 다행히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은 굉장한 수재였다. 그는 생원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들어가 세종 14년 문과에 급제했고 이 중에서도 최상위권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집현전 관료가 되었다.

 

이 후 단종 때는 대신이 될 수 있는 엘리트 코스인 사헌부 관원이 되었고 줄도 잘 서서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땐 원종 2등 공신으로 책봉된다. (원종 2등 공신은 공신중 최하 수준.)

 

이렇게 탄탄대로를 달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중앙귀족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려는 바로 그 순간 이 집안에 불행이 닥쳐버린다. 원종 2등 공신에 책봉되자마자 얼마 후 윤기견이 급사해버린 거다. 이 때 그의 나이는 겨우 30대후반~40대초반으로 남자의 일생에서 막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할 나이였는데 말이다.

 

윤기견의 미망인 신씨(연산군의 외할머니)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서울생활을 계속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는데 원래 그렇게 부유한 편이 아니던집안은 그가 죽은 후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숙의 윤씨도 어린 시절에 직접 포를 짜서 파는 일을 해야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영영 앞이 안보일 것 같던 이 집안의 앞날에 서서히 한줄기 빛이 찾아들기 시작했는데 어린 딸이 날이 갈수록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하게 된 거다.

 

게다가 아버지를 닮았는지 그녀는 영민하기까지 했고 그 덕에 쟁쟁한 집안의 경쟁자들을 뚫고 성종4년 후궁으로 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의 고생이 보상받기 시작하기라도 하는 건지 후궁이 되자마자 운도 트이기 시작했다.


입궁 1년만에 성종의 부인이자 한명회의 딸이었던 공혜왕후가 사망해 중전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세 대비들이 새 중전을 양갓집 규수들 중에서가 아니라 성종의 후궁들 사이에서 간택하기로 한 거다.

 

윤 숙의에게는 파평윤씨집안의 또다른 윤 숙의라는 경쟁자가 있었으나 어쨌든 확률은 5:5 였다.


그리고 그녀는 시작부터 세 대비들의 점수를 따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직접 포를 짜야할 정도로 곤궁했던 어린시절의 경험이 이번에는 도움이 되었다. 검소한데다 집안일도 알아서 잘 하고 어려서부터 과부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덕분인지 세 과부의 비위도 잘 맞추었다.

 

사실 조선시대에 세자빈이나 후궁, 왕비가 된 여자들은 워낙 좋은 집안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성격이 드세고 당돌해서 사고를 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15세전 후의 어린 나이로 엄격한 궐생활을 견뎌야했기 때문에 자기절제 능력같은 게 모자란 모습을

많이 보였다.(세종대왕도 며느리를 두 번이나 갈아치울 정도였다.)


아무튼 귀한집안 딸로 떠받들리며 자란 소녀들은 그녀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다. 허나 그녀가 시어머니로 모시게 될 세 대비들도 보통 여자들은 아니었기에 그녀들은 무려 2년간이나 두 후보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며 저울질을 했는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윤숙의가 임신을 하게 된 거다.

 

이리하여 성종7년 숙의 윤씨는 서울 빈민가의 과부집 딸에서 조선의 국모자리에 오르게 됐다.

 

그야말로 조선판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같은 쟁쟁한 여장부들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그녀들은 새 왕비에 대해 큰 기대를 했다.

 

왕비를 결정한 후 반포한 글에,


"돌아보건대 숙의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도 깊고 고와서 효성은 세 대비를 움직이고 공손하고 검소한 몸가짐은 왕을 보필하는 자리에 진실로 으뜸으로서 마땅하다고 여겼다." 라고 입이 마르게 그녀를 칭찬하고 있었다.


윤숙의의 기쁨은 결혼 석달 후 아들을 낳은 순간 절정에 달했다. 이제 그녀는 원자의 생모이자 장차 임금의 어미로 이제 중전의 자리는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어린시절의 고생과 2년여간 무시무시한 세 과부의 비위를 맞춰가며 숨죽여살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그녀는 아들을 낳은 후부터 눈에 띄게 자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성종이 아침조회에 나갔다 올 때까지 혼자 자고있을 정도로 게을러졌고 왕과 세 대비에게 더이상 공손하게 굴지도 않았다.


깊고 고와보이던 성품도 온데간데 없어져 후궁들에 대한 심한 투기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처첩간의 갈등과 고부갈등을 동시에 일으키기 시작한거다. 당시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겪고 있던 성종은 집안문제에까지 시달리게 됐다.

 

대비와 성종은 당황했다.

 

정희왕후는 나중에 대신들에게 "우리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라고 공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기까지 했는데 이건 한마디로 속았다는 말로 정희왕후씩이나 되는 인물이 대신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순간 그녀가 느꼈을 수치심과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숙의 윤씨의 파멸은 그녀의 성공만큼이나 급속도로 찾아오게 된다.

 

원자가 태어난 지 겨우 100일정도 지난 성종8년 3월 불과 결혼7개월만에 정희왕후는 원로들과 대신들을 소집해 중궁을 폐한다는 안건을 내놓은 거다.

 

대신들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고 한동안 감히 뭐라 말을 꺼내질 못했다고 한다.

 

이윽고 계산을 마친 대신들과 원로들은 모두 폐비 선언에 반대를 했지만 정희왕후와 성종의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세 대비와 성종이 폐비를 결심하게 된 건 3월20일에 일어났던 투서사건 때문이다.


20일날 늦은 밤 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던 권숙의의 집에 보자기 하나가 던져졌는데 권숙의는 후궁들 중의 최고선임으로 선왕의 후궁들과 성종의 후궁들을 총괄해서 다스리고 있었다.

 

아무튼 보자기에 싸여있던 작은 상자를 열어보니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소용이 윤씨와 원자를 상해하려 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독약), 사람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주술이 적힌 책의 일부분이 나왔어.

권숙의는 깜짝놀라 곧바로 정희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종과 정희왕후 인수대비가 이런 수작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윽고 역추적을 시작한 끝에 용의자는 도리어 중전인 윤씨로 좁혀졌고 성종은 평소 중전이 자기가 보여달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던 작은 상자가 있었던 걸 떠올리게 된다. 성종은 윤씨가 세수를 하는 틈을 타 몰래 그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아니나다를까 비상과 비상을 바른 곶감 두 개가 나온 거다.


이윽고 왕의 침전 쥐구멍에서 보자기에 있던 책의 나머지 일부도 찾게 된다.

허나 윤씨는 끝끝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했고 당시 중전을 모시던 삼월이라는 여종의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한다.

 

삼월달이 생일이었던 거 같은 이 불쌍한 여종은 혼자 죄를 모조리 뒤집어 써야 했다.

 

원로와 대신들도 주술책과 비상은 그냥 중전이 악취미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고  그걸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는 시도는 없었으니 폐비는 절대 안된다며 여전히 폐비문제에 강력히 반대를 했고 성종에게 여자가 투기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오히려 그게 정상이라는 식으로 살살 달랜다.


중전이긴 해도 이제 고작 스무살언저리인 윤씨가 투기를 할 법도 하다는 게 대신들의 주장이었다.

 

원래 신하들과는 척을 지지 않는 걸 일생의 원칙으로 삼았던 성종인지라 차츰 양보해서 폐비 대신 후궁으로 강등시키는 선으로 물러섰다가 기선을 잡은 대신들의 밀어부치기에 결국 이 것도 유야무야된다.

 

부부는 재결합을 했고 윤씨는 아들을 또 낳게 된다.

 

허나 한 여자에게만 마음을 주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던 성종이 한 번 정떨어진 여자에게 다시 마음을 줄 이유는 없었고 윤씨 역시 원자를 낳은 이상 절대로 자신을 어쩌진 못할 거라는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부부는 전혀 화합하지 못한 채 결국 파탄을 맞게 된다.

 

2년 후인 성종 10년 6월, 성종은 정승과 승지들을 소집했다. 아예 사관들까지 다 불러들였다.

 

중전을 폐하겠다고 다시 선언한 성종은 신하들에게 끝내 속시원한 이유를 대진 않고 그저 며칠 전 성종이 어떤 몸종의 방에 들어갔더니 중전이 화를 내며 그 방으로 쳐들어왔다, 칠거지악 중 말이 많고 순종하지 않고 질투가 많은 여자이니 폐비시켜야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종은 이건 누군가의 모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깊고 깊게 생각한 후 내린 결론이고 차마 말을 못할 못된 소행이 많으니 다들 두말하지 말고 내 결정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이번에도 강력히 반대했지만 2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성종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오랜 싸움 끝에 신하들은 그럼 폐비를 하더라도 궁안에 별궁을 만들어 기거하게 하자는 타협안까지 냈고

왕의 비서들인 승지들도 대비와 다시 한 번만 상의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성종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막판에는 극도로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서 왕의 측근이면서 자신의 뜻에 반대한 승지들을 모조리 경질시켜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


대신들은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성종의 뜻을 굽히진 못했고 신하들이 물러나자마자 윤씨는 작은 가마에 실려 궁에서 쫓겨난다. 중전의 자리는 과거 폐비윤씨와 경쟁 했던 파평윤씨가 계승했다.

 

관료들은 그 후에도 계속 찾아와 이번 조치는 잘못됐다고 했다. 폐비의 아들이 둘이나 되는데다 첫째아들은 원자이니까 원자가 장성한 훗날 이 사건으로 궐내가 시끄러워질 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6월5일.

 

그날도 폐비 윤씨 일을 재고해달라고 찾아온 대신들에게 성종은 글 하나를 내어놓았다. 중궁을 폐해야 하는 이유를 정희왕후가 대신들에게 상세히 적어 보낸 언문편지(한글편지)였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중궁은 주상을 받들지 않았고, 내가 수렴청정하는 걸 보고는 자기도 어린 임금을 끼고 조정을 다스릴 뜻으로 옛날에 권력을 휘두른 후비들의 고사를 좋아하고 자주 이야기했다. 주상이 혹 때로 편치 않아도 전혀 개의치않고 꽃 핀 뜰에서 놀고 새를 잡아 희롱하였고 만약 제 몸이 편치 않으면 갑자기 기도하여 이르기를 "내가 살아서 꼭 보고 싶은 일이 있으니 지금 죽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평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 혹시 주상이편치 않을 때면 수라상에 독을 넣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비를 하면서 중궁이 지나가는 곳에 왕에게 올릴 반찬을 두지 않도록 금하였다. 우리들은 비록 이름을 국모라고 하나 본래는 평인인 것이요, 한 나라에서 높임을 받을 분은 주상뿐이다. 그런데도 주상을 경멸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다."(성종실록 10년 6월5일)

 

성종의 말에 따르면 폐비 윤씨는 성종을 향해 "나중에 발자취를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라고도 했고 초상 때 친 휘장을 가리키며 "저것이 네 집이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뭐 왕이랑 왕비라고 해도 아직 이십대 초반의 나이이고 부부지간이니 서로 부부싸움 할 때 심한 말이 오갔을 수도 있지만 왕에게 대놓고 저런 소리를 했다는 건 폐비 윤씨의 성격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성종은 왕이었다.

 

과거 남편을 독살하고 어린 아들을 즉위시킨 후 권력을 휘두른 여자들의 고사도 있기 때문에 설령 윤씨가 극도의 흥분속에 생각없이 내뱉은 말일지라도 성종 입장에선 그냥 흘려들을 수는 없었던 거다. 성종은 윤씨를 내쫓은 뒤에도 한동안 꿈에서 윤씨를 만나는 가위에 눌리곤 할 정도로 윤씨를 두려워했어.

궁에서 쫓겨난 윤씨는 모친의 집으로 돌아갔다.

 

성종은 형제들도 그 집에 방문할 수 없다고 했으나 훗날 왕의 어머니가 될 폐비를 어떡해서든 감싸려는 대신들의 청원으로 형제들의 방문만은 겨우 허용했다. 허나 음식이나 의복도 전혀 공급하지 않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완전한 일반인으로 돌려보낸 거다.

 

신데렐라가 된 지 고작 3년도 안돼 폐비가 돼버린 윤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녀는 성종 앞에서 단 한 번도 곤궁했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부집 딸로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지난 시절들의 고생이 그녀를 중전의 자리로 올려줬지만 그녀에게 그 기억들은 평생 비밀로 하고 싶었던 잊고 싶은 과거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마치 덧없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결국 그녀는 다시 그 때로 돌아와 버린 거다.

 

이윽고 궁에서 쫓겨난 지 열흘만에 궁에 있던 젖먹이 둘째 아들이 죽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그녀는 누구를 가장 원망했을까?

 

그 해 10월 폐비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나마 있던 윤씨의 물건들까지 모조리 훔쳐가 버렸다.

한때 국모의 자리에 있었건만 이젠 좀도둑에 시달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린 거다.

 

신하들은 인근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하고 담을 높이 쌓자고 했지만 성종은,

"자기가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둑을 맞았는데 어찌 이웃주민들을 괴롭히겠는가?"
"도둑을 맞았다고 담을 쌓아 주자면 서울에서 도둑맞은
집은 다 나라에서 담을 쌓아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3년이 지난 성종 13년 8월 이정도면 성종도 어느정도 누그러드렀겠거니 생각한대사헌 채수와 권경우가 다시 폐비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한 때 중전이었고 다음 국왕의 모친인데 하다못해 자택 경비를 강화해주고 지금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니 최소한 국가에서 거처를 마련해주고 의식도 제공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미리 계획한 대로 한명회를 위시로 한 대신들도 다같이 동정론을 펴기 시작한다.

 

허나 성종의 분노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은 상태였다.

성종은 진노하며 당장 채수를 국문장으로 끌어냈고 대신들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원자가 이제 겨우 세살인데 벌써 이 모양이니 나중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대신들이 폐비 윤씨가 이뻐서 그녀를 도우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아들이 지금 무럭무럭 자라고 있기 때문에 훗날 원자가 왕이 되면 분명 윤씨를 다시 모셔올 거고 윤씨가 폐비가 됐던 걸 들춰내며 책임운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저희들은 한사코 말렸는데도 죽은 성종이 막무가내로 우겨서 어쩔 수 없었던 거다."라고 말했다간 당장 선왕 능멸죄로 참수당할 게 뻔하였다.

 

지금까지 신하들은 "왕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 신하들이 목숨을 던져서라도 간언하고 막아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언로를 개방하고 왕도 절대 건들지 못해야 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사사건건 왕에게 간섭하고 비난을 일삼아왔었다.

 

그렇기에 훗날 폐비의 아들이 왕이 되면 자기 어머니가 폐비가 된 건 잘못된 일이고 그건 성종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건데 그 동안 너희들은 뭘했냐? 라고 물어봐도 할 말이 없어지는 거다.

 

이처럼 이건 새 왕이 신하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건수였던 거지. 바로 이런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성종의 진노를 무릅쓰면서까지 폐비를 복위시키려고 했던 거다.

 

물론 성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라는 게 으레 그렇듯 본심은 감추고 그럴듯한 명분만 내세우기 마련인지라 지금까지는 이런 룰을 깨진 않았던 거다.

 

헌데 마침내 성종이 이 선을 넘은 거다.

임금인 자신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도 벌써부터 원자와 폐비윤씨에게 줄서기나 하고 있느냐는 말을 듣고도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 걸 시인하는 거나 다름 없고 이는 한마음으로 두 임금을 생각하는 불충죄에 해당했다. 과거 태종 이방원이 처남들 넷을 모조리 죽인 명분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대신들의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성종이 일갈을 던진 바로 그 다음 날, 고작 하루만에 대신들의 주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정창손과 한명회 심회 윤필상등의 조정원로대신들은 폐비가 나중에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있으니 미리 예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무제가 부인의 죄가 없는데도 죽인 것은 만세를 위한 큰 계책이었다, 대의로써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아뢰었고 그들이 나열한 예방, 계책, 결단이 무엇인지 그 선택은 성종이 할 것이었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성종은 마지막 절차로 좌우 대신들에게 "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승지, 대간들까지 모두 "지당하십니다."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대신들의 목적은 폐비의 구원이 아니라 폐비문제의 '해결'이었고 비록 지금까지는 훗날을 위해 온건책으로 해결을 보려했으나 성종이 워낙 강경한데다 이제 직접 총대를 메갰다고 나선 거였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더 온건책을 고집했다가는 불충죄로 자신들이 엮어들어가게 생긴 마당에 더이상 동정론을 펼 여지가 없었던 거다. 대신들 입장에서도 강경책은 후유증이 남겠지만 어쨌든 자신들은 할만큼 했고 총대는 성종이 맸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윤씨가 궐밖으로 쫓겨났을 때 원자(연산군)는 겨우 두 돌이 막 지났을 때였고 원래 원자는 친어미가 아니라 유모가 키우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지금 원자에겐 친어머니의 기억이 없어서 그 존재를 숨기는 게 불가능 한 것도 아니었다. 이왕 죽일 거라면 지체하지 말고 빨리 죽이는 게 좋았다고 판단이 선 것이었다.


성종은 좌승지 이세좌에게 이 폐비의 처형을 맡겼다. 하필 이세좌가 뽑힌 이유는 그가 그 시점에 좌승지 직책에

있었기 때문인데 좌승지가 형조담당 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30대 중후반의 유난히 크고 뚱뚱한 체격이었던 이세좌는

이 게 훗날 자신은 물론 자신의 집안 전체를 몰살시키는 처참한 결과로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다.

이세좌는 폐비 윤씨의 얼굴도 몰랐기 때문에 얼굴을 아는 내관 한 명을 대동했고 잠시후 육중한 체격의 남자가 인솔하는 대열이 궐을 빠져나갔다.


그의 손에는 사약이 들려 있었다.

 

윤씨의 최후가 어떤 모습이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어쩌면 얼마전 대사헌이 자신의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소문을 듣고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고 멀리서 오는 거대한 몸집의 관원을 보고 얼굴에 희색이 돌았는 지도 모른다.

 

당시 사약은 비소라는 독극물로 조제를 했는데 이게 체질에 따라 약효가 달라서 어떤 사람은 곧바로 피를 토하고 온 몸을 꼬며 괴로워하다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몇 사발을 마셨는데도 끄떡 없어서 결국 목에 줄을 걸고 양쪽에서 잡아당겨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실제로 드라마 속 연출처럼 사약을 몇 번이나 내동댕이쳐서 이세좌가 강제로 입을 벌려 사약을 들이부었을까?

아무튼 그녀의 죽음은 한가지 문제의 끝이자 또다른 문제의 시작이었다.

 

윤씨에 대한 성종의 미움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윤씨가 죽은 다음날 윤씨의 모친과 윤씨 형제들도 모조리 다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장흥, 거제, 진도로 다 뿔뿔히 흩어놨다. 이와중에도 성종은 유배지를 검토하더니 진도로 간 한 명은 아예 제주도로 바꿔서 더 멀리 보내버렸다.

 

원래 유배를 가면 의식주는 본인이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그나마 본인의 연고지나 농장이 있는 곳 근처로 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본가에서 노비를 시켜 계속 의식을 대줘야 했다.

 

교통도 불편한 시대라 웬만큼 부유한 집이 아니면 이것만으로도 적잖은 부담이었는데 원래 잘사는 집도 아니었던 윤씨의 집안 식구들을 모조리 유배시키면서 아무런 연고도 없고 왕래하기도 불편한 섬으로 내쳤다는 건 한마디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1년 후 성희안이 이건 좀 심하다고 건의했으나 성종은 "그대들은 모르지만 그럴 만한 죄가 있다,"라고 일축할 뿐이었다.

 

폐비윤씨가 죽고 곧바로 가족들도 다 유배지로 끌려가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노비들도 모조리 도망가버렸다. 최소한 윤씨의 장례라도 치러주자는 건의조차 거부한 성종은 지금 노비들도 모조리 도망쳐버려서 그녀의 관을 나를 사람조차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사역꾼 10명을 내준다.

 

이처럼 폐비 윤씨에 대한 성종의 분노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성종의 이런 비정상적인 분노와 그 후 연산군대에 일어난 비극때문에 폐비윤씨 사건은 그 후로도 내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야사를 형성하게 된다.


허나 궐 내에서의 일을 알리가 없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생긴 추측과 소문들이었기에 정희왕후 인수대비 등이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느니 폐비 윤씨가 성종의 뺨을 후려쳐서 이렇게 됐다느니하는 그럴듯한, 그러면서도 폐비 윤씨가 사실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널리 퍼졌지만 정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종 스스로 한 두가지 일 때문에 폐비를 결정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후궁의 참소에 걸릴만큼 어리석지도 않다고 누누히

강조했고 폐비 윤씨가 죽은 이유는 정희왕후의 편지내용처럼 폐비가 어린 아들을 끼고 국정을 농락하려 했던 게 이유인 거다.

사실 이상하게 느꼈겠지만, 한미한 가문의 과부집 딸이 어느날 갑자기 중전이 된다는 건 정말 파격적인 일이다.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당시 세조가 키워놓은 정난공신들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했고 세조에 이어 예종마저 급사하는 바람에 다음 왕이 누구든 자칫하다간 그들에게 잡아 먹혀버리기 십상이었다. 이 때문에 정희왕후는 정난공신들의 수장인 한명회와 적당히 거래를 하여 성종을 왕으로 삼은 거지.

사실 성종이 왕으로 채택된 건 정말 뜬금 없는 일이었다.

 

성종보다 서열이 높은 왕자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 한 명은 죽은 예종의아들 제안대군, 그리고 또 한명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이다.

 

즉, 성종이 이 두 후보자를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딱 하나 그의 장인이 한명회였기 때문이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의 사위를 왕으로 삼아주는 대신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자신을 도와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의 장인으로서 성종이 장성하는 동안 그를 잘 보좌해주기로 한 거다.

 

이는 당시 연이은 왕들의 죽음으로 수세에 몰린 왕실의 입장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한명회의 딸이 중전이 된 이상 그녀가 원자를 낳으면, 한명회 집안은 외척까지 되는 거지.


그녀가 과연 자기 친정보다 시댁인 왕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이런 끝없는 불안함이 세 대비의 얼굴에 무거운 그늘을 드리운 와중에 한명회의 딸이 죽어 드디어 왕실에 기회가 온 거였다.

 

세 대비가 새 왕비를 양갓집 규수들이 아닌 후궁중에서 간택하겠다고 한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당시 후보는 폐비 윤씨와 파평윤씨 둘 뿐이었으니까.

 

사실 정희왕후도 파평윤씨였기 때문에 대신들은 정희왕후가 자기 집안 여자를 중전으로 삼으려고 그러나보다라고 생각했을 거다. 허나 결과는 전혀 다르게도 폐비 윤씨가 간택되었다.

이는 또다른 강력한 가문의 딸이 왕비가 되는 걸 원천차단하는 의도였던 거다. 정희왕후는 자기 친정쪽 보다도 자신과 남편 세조가 일군 왕실을 지키는 걸 택한 거다. 폐비 윤씨가 보여준 사치를 모르는 검소함도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이처럼 그녀의 집안이 한미하다는 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요인이었던 거다.

 

장차 중전의 집안으로서 그녀의 형제들이 얻을 권력의 원천은 오직 왕실과의 사돈관계에만 있으니 안심하고 왕의수족으로 쓸 수 있을테니까.

새 중전 간택에 2년이나 걸린 것도 이런 치밀한 계산과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헌데 막상 중전으로 간택하고 보니 그녀는 순한 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호랑이였음이 드러난다.

윤씨의 야심이 어마어마했던 거다.(흥선대원군이 민비에게 당한 것과 비슷했다.)

 

훗날 성종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중전이 되자 사적으로 수집한 정보를 동원해 배겟머리에서 성종에게 사대부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종이 그녀의 죄악 중 "말이 많다."고 한 건 이를 두고 한 말이었지. 이제 고작 스무살언저리의 아녀자가 벌써부터 배겟머리 송사를 하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이런 모습에 성종과 세 대비들은 경악했다.

 

폐비 윤씨는 윤씨대로 자신의 폐비문제가 거론되자 지난 시절의 끔찍했던 가난에 대한 공포로 이성이 마비되어, 성종에게 "내 아들이 왕이 되면 네 놈의 자취를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는 식으로 폭언을 일삼으며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최초 폐비문제를 꺼낸 성종과 세 대비가 대신들의 반대로 물러선 걸 보고 폐비윤씨가 그 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대신 자신이 기선을 확실히 잡았다고 착각해버린 것도 그녀의 파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폐비 윤씨는 그야말로 야심덩어리일 뿐만 아니라 야망으로 인해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드러내버렸다.

 

그녀가 성종을 독살하지 않더라도 만약 성종이 먼저 죽고 지금의 원자가 왕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위태롭게 만들 게 뻔하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어린 왕을 내세워 권세를 휘두른 여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지기수로 많다.)

 

이 때문에 성종은 윤씨를 기어코 죽인거다.

 

정말로 야사에서 전하는 대로 단순한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부사이의 불화가 문제였다면 성종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

 

죽을 때 까지도 폐비 윤씨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성종이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인간사가 그렇듯 모든 일이 계획대로 뜻대로 진행되진 않는 것이라는 몰랐던 것일까?

 

그가 간과한 것은 바로 바로 갑자사화로 대표되는 연산군의 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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