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대한제국의 우리땅 간도 진격과 청나라 군대 공격 사건
조선왕조실록 1901년(대한 광무 5년)
원수부에서 진위대의 승급을 아뢰다.
(원수부(元帥府): 1899년 대한 제국에 설치된 제국군 사령부 겸 군 통수 기관.)
1901년의 교전에서 대한 제국 보병은 개틀링건과 야포 등을 이용해 청나라 비적을 격파했고, 제국 창기병이 간도로 넘어가 퇴각하는 청나라 비적을 추격 섬멸했다.
대한 제국 정부 원수부에서 황제께 아뢰기를,
"진위 5연대 제2 대대장의 보고를 보니, 소대장 조기설 · 김상열 ·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여 명을 격파하였고, (중략) 진위 5연대 제3 대대장의 보고를 보니, 소대장 나영훈이 청나라 비적 150명을 맞아 격파하였습니다.
적을 소탕하는 것이 군인의 직분상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위험한 실전에서 명령을 받들어 군대의 위엄을 멀리 떨쳤으니, 마땅히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
제국 원수부에서는 대대장의 승전 보고문을 아뢰었고, 내용인 즉 변방의 소대장이 청나라 비적떼를 격파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북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한 제국과 청나라 비적의 교전이 있었던 것일까?
1884년(조선 개국 493년).
서쪽 변방에서 출발한 전령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성으로 다급히 들어왔다.
(서쪽 변방: 조선 시대에 평안도[關西] 지방을 일컫던 명칭.)
변방의 전령은 곧 통리기무아문 군국사무아문에 상황을 보고하였고,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이 내용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통리기무아문 군국사무아문: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정부가 1880년에 설치한 개화 전담 기구, 군국사무아문은 통리기무아문 중 국방 담당 기구.)
통리기무아문 군국사문아문의 고위 관료들이 아뢰기를,
"서북 경략사 어윤중의 장계를 보니, 서쪽 변방에 청나라인이 침범하여 노략질함이 심하다고 합니다. 그 규모가 수천에 달한 모양인데, 이 비적들을 당장 소탕해야 되겠습니다."
혼란스러운 중국의 정세와 함께 중국 내지와 요동 지방의 청나라인은 조선의 국경에 넘어오기 일쑤였다.
특히 '해동의 관문'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서북방의 요충지였던 의주에 청나라인이 농토를 개간하고 둔전을 일구는 등 아예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통리기무아문은 즉각 평안도에 주둔한 평양의 정예군을 출동시킴과 동시에 세종 때 개척한 6진의 정예 기병 1천여 명을 차출해 의주로 이동시켰다.
서북 경략사 어윤중은 혜산진 첨사 신홍균과 인차외권관 이봉재를 파견하여 1천여 명의 정예 기병으로 무려 6~7천 명이나 되는 청나라 비적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고, 1,115명의 조선인을 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의주 지방에 있었던 중국인의 농토를 다 불사르고, 건장한 병사들을 보내 도끼로 중국인의 집을 모두 철거시켰다.
당시 조선 내부에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있었던 상황.
하지만 서양 열강에 유린당하고 있던 청의 모습을 보고, 조선도 나름대로 군사권을 발동한 모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는 조선은 청을 의식하고 있었다.
1895년(대한 개국 505년) 2월 2일.
사헌부에서 근무하던 선비 유학자이자 정3품 고위 공무원이었던 집의 김우용이 부국강병과 개화 정책을 언급하며 청에 대항할 자강책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사헌부: 조선 시대 관리의 감찰 등을 담당하던 언론 기구)
당시 양반 유학자이자 사헌부 정3품 고위 공무원 김우용이 아뢰기를,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우리나라 변방의 중요 지대로서 청나라와 인접하여 늘 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병자년(1636) 난리로부터 명분이 거꾸로 되어 할 수 없이 섬기다가 갑오년(1894)에 다행히도 우리 자주 독립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병자년 난리: 1636년(인조 14) 청나라의 침략으로 발생한 병자호란, 갑오년(1894): 갑오 1차 개혁의 추진으로 청의 내정 간섭을 철폐하고, '개국 기원' 사용.)
이어 아뢰기를,
"아! 효종 대왕께서 10년 간 이루지 못한 북벌의 뜻을 오늘에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조선의 계책으로는 인재를 등용하여 성심으로 개화하고,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방(東方)의 기울어진 운명을 새롭게 할 수 있는데, 청나라가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적국으로 되는 만큼 방어를 잘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변경을 든든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효종 대왕: 조선국 제17대 임금, 인조의 둘째 아들.)
양반 성리학자였던 김우용은 인재 등용과 개화 정책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수입해 부국강병의 자강 개혁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의 내침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사실상 1890년대에 들어서 조선은 청나라를 '가상 적국'으로 규정했다.
1897년(광무 원년)에 조선은 '대한(大韓) 제국'을 선포했다.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하고 구본신참에 의거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 시기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면서 서양 연합군에게 패배한 청나라 패잔병과 비적떼가 대한 제국 국경에 출몰하면서 대한 제국은 1900년 무렵에 제국 정부 예산의 40% 가량을 군사비에 투자하였다.
당시 대한 제국은 서양 연합군에게 군수품과 인삼을 판매하여 나름 청나라의 내전을 틈타 국부가 쌓이게 되었다.
대한 제국 성립 직전에 조선의 국가 예산은 6,316,831원이며, 이중 국방비는 1,028,401원으로 전체 예산의 16.28%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제국 선포 이후로 청나라 비적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1901년에 41.02% 가량을 국방비에 투자하였다.
(군수품: 당시 대한 제국은 서양 연합군에게 군량과 어류 등을 판매하며 이득을 보았다, 인삼: 조선의 인삼은 서양 연합군에게 인기가 많아 고가로 팔렸는데, 인삼으로 연 200~300만 원의 이득을 올렸다.)
조선왕조실록 1900년(대한 광무 4년) 각 도의 관찰사를 소견하다
1900년에 고종은 전국의 관찰사(종2품 고위 공무원)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이 기사는 당시 대한 제국에게 있어서 청나라 비적떼의 존재감을 뚜렷이 보여주는 좋은 기사라 발췌하였다.
또한 제국 선포 이후 황제가 지방의 관찰사들을 처음 접견하는 자리라 더욱 의미가 깊다.
황제가 이르기를,
"신식(新式)으로 개화한 이후 지방의 관찰사들을 불러다 만나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신식 개화로 1900년에 문관의 양복 착용이 법규화되면서, 당시 지방의 관찰사들은 양복을 입고 조정 회의에 참여했다.
전라남도 관찰사 조종필, 평안북도 관찰사 이도재, 충청북도 관찰사 윤용식, 평안남도 관찰사 윤상연, 황해도 관찰사 윤길구, 강원도 관찰사 주석면 등이 소견받았다.
각 도 관찰사들이 아뢰기를,
"대조선이 대한(大韓)으로 개칭한 이래 폐하(고종)께서 태조 대왕이 개창한 해동(海東) 땅을 새로 일구어 문명 개화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조선[대한]의 억만 년 대계가 장구히 이어지소서!"
평안남도 관찰사 윤상연이 아뢰기를, "평안북도뿐만 아니라 평안남도에도 청나라 비적의 소동이 있습니다."
(태조 대왕: 조선국 제1대 임금, 조선을 건국한 군인 출신 이성계를 지칭함.)
황제가 이르기를, "청나라 비적들이 저러하니 서쪽 지방의 근심이 크다. 군사를 모집하고 준비를 갖추는 일에 대해서 특별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황해도 관찰사 윤길구가 아뢰기를, "청나라의 비적이나 피난민은 비단 육지로 나오는 것만 염려되는 것이 아닙니다. 황해도 바닷가의 여러 고을에도 뱃길로 오는 자들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것도 미리 참작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길구의 말에 의하면, 청나라 패잔병이나 비적떼, 군인 무리는 육로로만 오는 게 아니라, 해로를 통해 서해안 곳곳을 해적질하고 있었다.
실록에서도 청나라 어선의 불법 조업 활동이 자주 눈에 띄는데, 대한 제국 해군과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대한 제국 해군: 대한 제국 해군은 육군에 비해 그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았고 열악했다. 고종은 해군의 근대화를 위해 양무호 등을 샀지만, 군함으로서 함량 미달이라 돈 낭비만 하였다.)
대한 제국과 청나라군의 전투 일촉즉발 간도의 상황
당시 간도에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고, 대한 제국은 간도에 대한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기 위해 변계 경무서를 설치했다.
또한 이범윤은 간도 관리사가 되어 간도에 파견되었고, 사포대를 조직해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침투시키고 있었다.
(사포대: 이범윤이 조직한 간도의 사병 포병대)
당시 간도에는 대한 제국 관리 5명이 파견되어 일부 지역에 행정권을 구사했었고, 대한 제국은 간도의 27,400호(약 10만여 명)에 대해 1,150문의 세금을 거두고 있었다.
간도에 주둔한 대한 제국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이범윤 본인이 거느린 포수 1,370명과 별포병 5,480명, 또한 이범윤 직할 1개 대대 500명과 민병 2,700명, 대한 제국 변계 경무서 소속 순검 200명과 종성 진위대 700명이었다.
청나라는 대한 제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 반발했다.
청나라는 즉각 북간도의 군사와 행정 역량을 강화하였고, 길림과 무산, 요동과 뤼순 등에 5개 영 2,500명의 군사와 14,000~15,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다.
게다가 만주의 철도 이권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는 대한 제국에 솔깃한 제안을 했다. 청의 공격에 대응하여 대한 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것인데, 협상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
러시아 측이 대한 제국에 제안한 내용
- 첫째,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간도 및 그 부근 3마일 이내의 지역에 주(州)를 설치하여 관리한다.
- 넷째, 간도에 소란이 생겨 주장(州長)의 권한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협동하여 적절한 방어책을 강구한다.
변방의 대한 제국군은 아예 간도로 넘어가 청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국 병사가 강을 건너 곡식 100여 석을 빼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가는 집마다 식량과 돈을 가져가고 제멋대로 집회를 가지는 등의 행동을 했다."
- 1902년 5월 기록 -
"한국 병사가 무리를 이끌고 도문강을 건너와 우리 군대(청나라)를 공격하고 우리 백성의 점포를 불태웠다. 또한 강 너머에 참호를 파고서는 우리 병사가 왕래하면 총을 쏘며 공격해왔다."
- 1903년 9월 기록 -
당시 대한 제국은 간도에 대한 과도한 민족주의와 맞물려 이상한 제국주의적 행보까지 보이기 시작하는데, 강력한 군사력을 양성해 간도 지방을 탈취할 것까지 신문에 게재되었다.
사실 독립 협회가 해산되기 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대한 제국 개화론자, 서재필
"부국강병하기 위한 학문과 풍속에 힘쓴다면 조선인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선도 청국을 공격해서 요동과 만주를 정복하고 배상금 8억 엔을 받을 것이다. 바라건대 조선인은 뜻을 크게 갖고 10년 후에는 요동과 만주를 점유하고 또한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되찾을 생각을 해주었으면 한다."
제국 신문은 아예 간도의 철광과 석탄 등 풍부한 경제적 이점을 언급하며 간도에 대한 무력 정복과 식민 통치까지 하자는 내용을 게재하였다.
당시 대한 제국에서도 내셔널리즘과 과도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모습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 제국 군인
1903년 12월 무렵에는 대한 제국은 간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전개했다. 1천여 명의 병사를 배에 태워 압록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이때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대한 제국 경찰대 병력까지 총가세해 봉천성과 지린성의 청나라 병영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병영 군사 시설 2개와 211호, 19,546냥의 재산 손실이 발생하였고, 청나라군 500여 명이 사살되기도 하는 등 곳곳에서 일진일퇴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한 제국군은 요동 일대에 참호와 지뢰를 매설하여 요새를 건설하였고, 각 보루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청군과 중국 민간인을 공격하는 등 살해 행위도 전개하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 [후일 일본 제국 만주 괴뢰국 황제로 즉위]
"지금 조선[대한 제국]이 함부로 요동 경계로 침입하여 우리(청나라) 군인과 민간인을 사살하고, 병영에 불을 지르고 농토를 불사르고 가축을 빼앗는 등 만행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를 제지하지 않으면 만주가 한순간에 조선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즉시 4개 영을 추가로 파견해 대응할 것을 촉구합니다."
<만주 봉천부의 청 중앙 정부 지원 촉구문>
당시 대한 제국의 군사권 행사는 러시아의 비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러시아의 암묵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과연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1904년에 들어서면서 사정은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대한 제국은 대외 중립화 선언을 주장했고, 한반도와 만주 땅에서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대한 제국은 사실상 일본 제국의 보호국화되면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달하게 되었다.
1907년 대한 제국 군대 해산령 발표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 해산령까지 발표되었다.
당시 대한 제국은 3만 남짓한 근대식 근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일본 제국에 맞서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징병제 논의까지 있었지만, 국가 재정의 문제와 여러 요인이 겹쳐 실행되지 못했다.
대한 제국 시위대 제1 연대 제1 대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시작으로 대한 제국 장교의 자결로써 군대 해산에 격분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간도의 한인 사회로 넘어가 조선인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일본 제국에 의해서 해산된 함경도 종성 - 북청 진위대 병력만 4천 명으로 보았을 때, 구한말의 민병 조직까지 합치면 당시 간도 지역에서 대한 제국이 동원한 규모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처럼 구한말에는 교과서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 제국과 청나라군의 충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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