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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외로이 떠 있는 섬,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도는 모두가 알것이라고 본다.

 

근데 옛날에는 한때 경상남도 울릉도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울릉도 거주 관련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의 기록이다.

 

옥저인들 사이에서 동쪽 바다에 섬이 하나있는데, 그 섬 사람들은 말이 안통한다는 내용을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자가 서술한다.

 

울릉도는 개발이 더뎌 발견된 유적도 적지만, 지표조사로 청동기시대 중, 후기 무문토기와 고인돌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청동기 시대에는 울릉도에는 거주민이 존재했다고 알 수 있다.

 

 

6세기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부터는 사진의 적석총들이 제작된다.

타 고분과 대조되게 돌로 제작한 이유는 섬인 울릉도 특성상 대형 무덤을 만들 흙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적석무덤은 고구려 적석총이 유명하지만 의외로 한반도 전역에서 관찰되는데, 가장 유명한게 임진강, 북한강 유역의 적석총들이며,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 적석총도 있지. 여러 요인으로 이런 무덤이 탄생했다고 본다.

 

 

그렇게 우산국은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고, 반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한채 고려시대에는 고려에 신속(臣屬), 즉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 된다.

 

제주도인 탐라국도 백제의 은솔(2품) 이었다가 백제 멸망 후 신라에 조공을 바치고 고려시대까지 자치국으로 남아있던거랑 비슷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위의 여진 해적들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섬 사람들은 죽게되고 고려는 남은 울릉도 사람들을 강원도로 옮겨 살게 했다.

 

 

 

그런데 고려 후기가되면 왜구가 준동을 한다.

 

이 왜구는 고려만 터는게 아니라 원래 울릉도를 털어댔던 연해주 여진족도 괴롭히고, 본진인 일본은 물론 원나라 명나라는 물론 동남아까지 약탈하던 전문 해적집단이었는데 이 왜구 때문에 고려는 몇차례나 멸망 위기까지 몰렸었다.

 

울릉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간 섬에 몰래 들어가 다시 마을을 구성했던 고려인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쳐 나오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고려말-조선초의 전쟁이 잦고 왕조가 바뀌던 혼란기 속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울릉도로 숨어들어가 살았다.

 

 

그러자 새왕조 조선의 왕 태종은 왜구 방어를 위해 해안가에 성을 정비하고 수군도 재정비했는데, 그와 동시에 방위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방어가 어려운 섬 지방의 백성들은 모두 쇄환하기로 한다.

 

이 작업은 그가 상왕으로 물러선 세종초까지도 계속 지속되었고 이때 수백인의 우산도 및 무릉도등처안무사가 숨어들었던 백성들을 수백명을 쇄환한다. (이때 무릉도는 독도를 말한다. 파견때는 우산 및 무릉도등처안무사라고 되어 있는데, 쇄환 보고 기사에는 '무릉등처안무사'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일본측은 무릉도(독도)에 어떻게 수백명이 살 수 있을까? 무릉도는 바로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다. 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파견기사 보면 우산및무릉등처 안무사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수백명 쇄환하는게 전혀 문제가 안된다.

 

그렇게 수천년간 유인도였던 울릉도는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고려때와는 달리 조선의 행정력은 대단하여 몰래 숨어든 백성들은 간간히 쇄환되고 처벌받았다.

 

 

그렇게 무인도가 되버린 울릉도는 동해안에서 먼 바다이므로 잊혀져간다.

 

또 수백년간 사람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아 빽빽하게 들어선 온대삼림과 풀 덕분에 사람이 접근하더라도 상륙하기가 곤란해서 더더욱 버림받게 된다.

 

이 울릉도에 주목한 것은 바로 한국의 맞은편에 있던 일본 시네마현, 돗토리현의 어민들이었다.

이 어민들은 동해상에 빈 섬이 있다는걸 알았고, 장기간 바다에 머물 캠프를 독도와 울릉도에 차리다가 아예 눌러 앉아 마을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때 울릉도까지 와서 고기잡이 하던 사람들은 주로 울산, 부산의 경남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쫒겨나기도 하며 분해하다가 결국 안용복이 조선의 관료를 사칭하고 건너가서 왜인들을 모두 몰아내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1669년).

 

이렇게 다시 울릉도는 다시 우리손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시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수백년간 자란 삼림으로 인해, 당시 민둥산 천지였던 조선과는 다르게 울릉도는 섬 전체가 빽백한 보기 힘든 온대삼림지대가 되었다.

 

그렇게 19세기 초까지 거의 500년간에 걸쳐서 나무가 뺵빽히 자란 울릉도는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굉장히 기괴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 등으로 홍경래의 난 등이 발생하게 되고 백성들은 힘들어지게 된다.

 

또 이양선의 등장과 통상압박 등 바깥 세계의 위협과 정보도 조선으로 많이 유입된다.

 

이때 조선에도 시장경제가 어느정도 들어서는데, 남해안에는 거문도 사람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거문도의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대한해협의 요충이면서 제주와 남해안의 뱃길에 가운데 있다.

 

이 거문도 사람들은 자신의 섬이 대단히 협소하기 때문에, 전라도와 경남, 그리고 제주를 왔다갔다하면서 수산물을 팔고 곡물을 받아오는 등의 일종의 유통업을 하였으며, 해상에서 대마도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밀수입을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항해술도 좋았고, 울산, 동해안까지 항해하면서 물건을 교환하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 거문도 사람들은 동쪽으로는 동래, 울산, 마산, 서쪽으로는 목포, 남쪽으로는 제주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간간히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충청도 강진까지 들어가기도 했고 동해안으로는 포항, 영덕을 지나 강릉까지도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항해하다보면 당연히 중간 기착지가 필요한데 파도로 인해 배가 파손될 수도 있고, 물을 보급해야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 주목한 것이 바로 울릉도였다.

 

울릉도는 거대한 무인도인데다가 500년간 자란 온대삼림이 빽빽히 들어차있어서 배를 수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울릉도 해변에는 수만, 어쩌면 수십만마리에 이르는 강치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문도 사람들은 물을 얻고 배를 수리하기 위해 기착하다가 주변에 있는 강치들을 잡아서 고기로 먹기도 하고, 가죽은 가공해서 팔기도 하였다.

 

이 강치 가죽은 일본인들이 굉장히 좋아하였기 때문에 거문도 사람들은 강치를 밀수출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거문도 사람들은 아예 이 곳의 풍부한 나무로 배를 만들러 가기도 하였다.

 

배를 한 척 만드는 것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울릉도에는 수백년 자란 나무가 빽빽하니, 배 만들 목재가 천지에 깔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문도 사람들이 이렇게 울릉도에 머무는 기간과 사람 숫자가 많아지면서 점점 정착 마을이 생겨나게 된다.

 

가장 먼저 생겨난 곳이 바로 태하다.

 

울릉도의 서북쪽에 있는 해변이다.

 

지금 울릉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저동과 도동은 울릉도의 동쪽인데 이 마을은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면서 생긴 마을들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정착하고 거문도 사람을 따라서 전라도와 제주도, 그리고 경남 남해안까지 뱃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동해바다의 신세계에 대한, 즉 관료도 없고, 강치는 수만마리가 노다지로 널려있고 무엇보다 수백년된 원시 삼림이 빽빽해서 땔깜 걱정도 없고 배도 노다지로 만들 수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널리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당시 행정력의 악화와 민란의 발생 등의 사회혼란 등으로 많은 전라도, 경상도의 해안가 마을 사람들이 이 신세계를 개척하게 된다.

 

사람들은 주로 배를 대기 쉽고 민물을 구하기 쉬운 해변가에 모여 살게된다.

 

지도만 보면 나리분지가 살기 가장 좋을것 같지만 당시 사람들도 빽빽한 삼림으로 인해 접근이 매우 곤란했던 데다가

칼데라 분지여서 물도 금방금방 빠져나가기 때문에 당시엔 살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한편 일본인들은 익히 울릉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도 조선의 행정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일본쪽에서 접근하기 쉬운 울릉도의 동쪽, 도동과 저동에서 수백년된 울릉도의 나무들을 몰래 벌채해간다.

 

그런데 울릉도는 이미 유인도가 되었으므로 이 사실은 금방 탄로나게 되는데 덕분에 조선 조정에서는 1881년 이규원을 보내서 울룽도를 시찰하게 한다.

 

이때 울릉도 시찰사는 도동과 저동이 아닌, 서북쪽의 태하로 들어온다.

이곳에 조선인 마을이 가장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이규원은 울릉도를 시찰하면서 여러 기록을 남기고, 지도도 작성하여 고종에게 바친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도 개항한 시대 신문물과 정보가 쏟아지듯이 들어오고 동북아의 요충지인 조선을 향한 열강들의 압력이 점점 거세지던 시기이다.

 

고종과 조선조정은 이 울릉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고 이곳을 개척하기로 한다.

 

 

최초의 이규원은 울릉도의 지리와 지도, 풍속 등을 조사하고 울릉도 태하에 각석을 남겨 조선땅임을 분명히한다.

 

그 후 1883년에는 그 유명한 김옥균이 개척사로 이곳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은 울릉도의 전략적 위치와 섬의 크기, 그리고 삼림 자원과 강치와 주변 어장등에 주목한 것이었지만 아관파천으로 인해 울릉도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삼림 채벌권은 러시아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대한제국이 되면서 1899년에 울릉군으로 승격하게되고 1900년에 강원도에 소속시켰다가 1906년에는 경상남도로 편입시킨다.

 

사실 그럴법도 한게 최초 울릉도가 개척된 경위를 알면 편하다.

 

거문도에서 동래를 거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울릉도를 개척했기 때문에 울릉도 주민들은 대부분 남해안 출신이었다. 그래서 모든 뱃길이 경남으로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상남도에 편입된 것이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면서 1914년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북도로 편입이 되게 된다.

 

이후 일본인들은 도동과 저동에 모여 살면서 울릉도 삼림을 채벌해갔고 강치를 직접 잡아 고기와 가죽을 조달하였다.

 

조선인들은 반대편인 서쪽 해안가에 모여살게되고 점차 일본인들이 중심인 도동과 저동이 발달하게 되면서 조선사람들도 섞여 살게된다.

 

이때는 경상북도나 강원도의 어민들도 많이 건너와 살았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은 모두 철수했고 일제때 중심지인 도동과 저동을 중심으로 울릉도는 계속 인구가 유입되게 되어 지금의 울릉도가 되었다.

 

이후 울릉도 일주도로가 완성되고 상수도나 치수기술의 발달로 중앙의 나리분지도 개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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